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7편 (7/59)
가만히 들어 보니 역시 음률에 밝은 사람이 가락이 맞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사람은 궁상(宮商)조로 삽짝문을 두드리면서 제법 소리까지 먹였다. 망망한 태호에 용선 (龍船)은 떠다니고 사나이 일성호가에 태호도 벌벌 떠네. 문득 소리가 멎더니 내력이 넘치는 쩌렁쩌렁한 음성이 들려 왔다. "태호 호룡왕 필소해가 아형 소저를 찾아왔소이다!" 그 소리에 황약사는 치음과 미화가 나타나기 전에 보았던 그 배의 주인임을 알았다. 지금껏 어디서 지켜 보다가 직접 찾아 들어온 모양이었다. 계집애가 볼이 부어 투덜대며 아형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 참, 남은 곁눈으로도 보지 않는데 자꾸만 찾아와 성가시게 구네요……." 아형은 황약사에게 민망한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황 공자님, 죄송하지만 내실에 들어가셔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 호룡왕을 돌려보낸 뒤에 다시 공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뭐." 안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새하얀 이불이 깔끔하게 개어져 있었다. 침대 위에 반쯤 걷혀 있는 휘장도 역시 하얀 색깔이었다. 아름다운 처녀의 것치고는 침구들이 너무나 수수해 보였다. 황약사는 침대 옆에 놓인 두툼한 고서들을 발견하고 그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무심히 보풀이 인 고서를 펼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육서(六書) 중의 하나인 《(상서(脚書)》였다. 황약사는 《상서》와 같이 내용이 깊은 고서를 태호 기슭에 사는 젊은 여인의 침실에서 보게 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객실에 들어온 호룡왕 필소해가 아형에게 작듯이 인사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은 아형 소저에게 특별히 인사를 하러 온 거요. 일전에 세 번이나 아형 소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었소. 이 호룡왕도 목석이 아닌 이상 그 은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소? 그런즉 오늘은 아형 소저를 나의 용군부인(龍君夫人)으로 삼을까 하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얘들아!" 그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기다리던 네 사내가 저마다 묵직한 예물함을 들고 들어와 탁자에 나란히 놓고 물러섰다. "자, 함을 열거라!" 필소해가 큰소리로 호기롭게 분부하자 한 사내가 성큼 나서서 예물함 뚜껑을 열어젖혔다. 순간 오색찬연한 기운이 온 방안에 넘쳐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함 속에는 반짝이는 진주가 가득했다. 필소해는 진주와 아형을 번갈아 보면서 히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고로 아름다운 여자는 진귀한 구슬을 선물로 주고 맞아 온다 하여 인마를 풀어 이 태호 바닥을 석 달이나 뒤져서야 이만큼 모을 수가 있었소. 이 열 말 되는 진주를 이 호룡왕의 성의로 알고 기쁘게 받아 주면 좋겠소."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두 번째 예물함을 열게 했다. 그 속에는 족자 세 폭이 들어 있었는데, 필소해는 부하들에게 족자를 펼쳐 들게 하고는 느릿한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그림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백룡도(百龍圖)〉라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백룡도〉가 오도자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오. 또 이 〈백룡도〉말로 이 호룡왕 필소해를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백 마리의 용이 너울너울 창공을 나는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오! 그런데 이 용들을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눈이 없소. 그 까닭은 용을 그리는 데 있어서 눈까 지 그리면 영영 하늘로 올라가 버리므로 용의 눈은 그리지 않는다고 하오, 아무튼 이 〈백룡도〉는 천하의 진품임에 틀림이 없소. 만약 소저가 쾌히 나의 용군부인이 돼주기만 한다면 이 귀중한 〈백룡도〉를 그대에게 드리려는 바요. 허허……." 아형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필소해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나머지 두 예물함마저 열 것을 분부했다. 예물함을 열어젖히자 한쪽에는 가는 금줄로 정교하게 틀어 만든 초롱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뿔이 돋힌 작은 용이 금봉황새를 칭칭 감고 있는 모양의 노리개였다. 금봉황새가 제아무리 퍼덕거린들 용의 억센 발톱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다른 한쪽 예물함에는 고서 두 권이 담겨져 있었다. 필소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반용희봉(蟠龍戱鳳)〉이란 작품은 임안성에 있는 유명한 옥공인 최호가 정성들여 만든 것이라오. 그 옥공은 전문 황가의 장식품을 만드는 사람이지. 이제 아형 소저가 내게로 시집오면 용과 봉이 손을 잡고 우리 태호방〈太湖 〉을 거느리는 격이 되지 않겠소? 그래서 특별히 최호라는 옥장이를 찾아가 부탁한 것이오. 그리고 이 두 권의 고서는 해동의 주 부자〈夫子〉네 것이오……." 그가 흥이 나서 지껄이는데 돌연 아형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반짝 치켜 들며 되물었다. "아니, 주 부자네는 이 책들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던데 어떻게 손에 넣었나요?" 필소해가 흉물스럽게 웃으면서 큰소리를 쳤다. "그 양반이 열 길 땅 밑에 감춰 뒀다 해도 나는 얼마든지 그걸 빼내 올 수 있거든!"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귀중한 고서를 얻게 됐지요?" 아형이 사뭇 심각하게 묻자 필소해는 한결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방법이야 간단하지요. 슬쩍 그 영감태기의 손자 놈을 잡아다가 우리 태호방 배 안에다 사흘간 처박아 두었지요. 그랬더니 그 고약한 영감태기가 고서는 가져오지 않고 사람을 띄워 금붙이며 음식 따위들을 잔뜩 보내 오더군. 그래서 이따위 금붙이는 욕심나지 않으니까 당장 그 고서 두 권만 가져오면 손자 놈을 돌려보내겠다고 했지요. 한데 이 놈의 지독한 영감태기가 고서만은 죽어도 내놓 지 못하겠다고 뻗대는 게 아니겠소? 하는 수 없이 그 영감태기의 두 아들 녀석과 그 여편네들까지 몽땅 잡아왔지. 결국 그 영감태기는 이튿날로 책을 보내 올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던 거요." 내실에 숨어 있던 황약사는 당장 뛰쳐나가 한 주먹에 필소해를 때려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썼다가 필소해를 놓치는 날에는 오히려 태호 일대의 백성들이 애꿎게 화를 입기 쉽상이었다. 황약사는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놈의 자식, 조만간에 네 놈을 요절내고야 말 테다.' 객실에서 아형이 조용히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필 방주님, 악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제가 늘 말하지 않았던가요? 제가 세 번이나 도와드렸건만 방주님은 되레 착한 일은 하지 않고 무고한 태호의 백성들만 해치고 있군요. 정말 유감 천만이에요.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착하신 주 부자 어른을 욕보인단 말씀에요?" "글쎄 그 영감태기가 한사코 고서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는 걸 낸들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우격다짐으로라도 빼앗아 와야지. 흐흐……." 아형은 한마디 매섭게 쏘아 주고 싶었지만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러자 필소해가 치근덕거리며 다가들었다 "아형 소저, 이젠 날 따라가기로 작심했겠지? 저 호숫가에는 꽃배들이 하얗게 덮여 대기하고 있소. 이제 소저만 배에 오르면 이 필소해가 친히 키를 잡고 태호방으로 모셔 갈 것이오!" "필 방주님, 시집을 가든 안 가든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요?" 아형이 냉정하게 말했다. 필소해는 가슴이 철렁했다. '매정한 계집 같으니라구! 그러니까 네 년은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 거 아니냐? 저 년을 억지로 잡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자니 필경 태호방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고, 이를 어쩐다?' 필소해가 난색을 짓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아형이 다시 따지고 들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필소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씩씩거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형을 잡아가고 싶었으나 아녀자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무섭거니와,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태호 바닥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는 필소해가, 그래 일개 아녀자 하나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단 말인가? ' 필소해는 스스로 자신을 꾸짖으면서 아형에게는 제법 점잖게 말했다. "아형 소저, 소저의 일생이 걸린 문제니 소저 맘대로 하구려. 아형이 미소를 떠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니 정말 고맙군요. 이 예물함 네 개는 이렇게 하지요. 우선 이 진주 열 말은 도로 가져가세요. 남녀간에 서로 뜻이 맞고 안 맞고가 중요하지 이건 금전으로 여자의 몸을 사려는 것밖에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형의 말에 필소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장 진주함을 밖으로 내가게 했다. 부하가 예물함 하나를 부랴부랴 들고 나갔다. 아형이 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오도자가 그린 〈백룡도〉는 정말 멋진 작품이군요. 백 마리의 용이 창공을 나는 장면이니까 태호 용왕이신 필 방주님의 소장품으로는 실로 안성맞춤이네요. 이 〈백룡도〉는 모름지기 필 방주님을 보우하사 태호방을 번창하게 할 터인즉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는 보물인가 합니다." 시중을 듣던 부하가 썩 나서며 말참견을 하려고 하는데 필소해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부하는 찍소리도 못하고 예물함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반용희봉〉이라, 용이 봉황과 어울려 노닌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방주님을 용에 비길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같은 촌여자를 봉황에 비김은 당치도 않은 말씀이지요. 이 아형은 그저 태호에 조용히 숨어 사는 민녀(民女)에 불과하니까요." 급기야 필소해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이 선물도 받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도로 가져가 주세요. 하필이면 저 같은 무식한 촌여자에게 이러실 건 뭡니까?" "그럼 이 고서 두 권도 싫다는 말인가?" 필소해는 입귀를 실룩거리며 재차 물었다. 아형은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필소해는 펄쩍 뛰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럼 이 필소해가 정성들여 가져온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고 물리칠 셈인가?" "그래요." 아형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필소해는 급기야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알겠어, 그러니까 이 호룡왕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로구나!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잡아가야겠어. 내가 못 그럴 것 같은가?" "아무렴요. 이 태호 바닥에서야 필 방주님의 호령 한마디면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는데 저 같은 촌여자야 힘이 있나요?" "얘들아, 이 년을 당장 끌어내라!" 필소해가 격노하여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지르자 범 같은 사내 넷이 아형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필소해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떠벌렸다. "이 어른이 곱게 모셔 가려 할 때 순순히 따랐으면 좋았을 걸 왜 돼먹지 못하게 앙탈을 부리는 거냐? 이 태호 바닥엔 이 어른에게 시집오고 싶어서 몸살을 앓는 미녀들이 쌔고 쌨어. 그런데 네 년이 굴러오는 복덩이를 걷어차 버리겠다는 거냐?" 필소해가 휙 손짓을 하자 부하들은 아형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였다. 삽짝문 밖에서 흥겨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흠칫 놀라는데 아형이 담담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끝내 또 왔구나." 그 말에 대답이나 하듯이 밖에서 웬 사내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정체 모를 사내는 잠시 웃음을 멈추더니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아형, 아형이, 정말 미안해. 워낙 그 두 미친 녀석들과 여기서 만나기로 약조했었는데 그만 임안성에서 뜻밖의 일에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이제야 왔소……." 아형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찰랑거렸다. 마치 장난이 심한 아이들을 보고 있는 듯한 너그럽고 아량 깊은 표정이었다. 정체 모를 사내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형, 아형, 내 정든 사람아, 왜 얄밉게 웃기만 하는 거냐? 네가 뭇사내들 애간장이 타게 웃을 때마다 옛사람이 지은 노래가 떠오른다." 그는 이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 웃으면 집안이 기울고 두 번 웃으면 서울 장안의 사내들 오금을 못쓰고 세 번 웃으면 황제도 오줌을 싸네. 필소해네 패들은 일제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얼떨떨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데 유독 아형만은 양볼에 살짝 볼우물을 만들면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아마도 밖에 있는 사내와는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누군가 문밖에서 집안을 힐끔 훔쳐보고 지나가는 듯한 기척이 껴졌다. 필소해가 멍하니 서 있다가 흠칫 놀라 고함을 쳤다. "이 놈! 네눈박이 고양이 사안묘(四眼猫)로구나! 이리로 썩 나서지 못할까?" 밖에 있는 사내는 집안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끌끌 혀를 차더니 빈정거렸다. "이 태호 바닥에는 꼴보기 사나운 놈들이 셋이 있지. 한 녀석은 겨릅대같이 빼빼 여윈 주제에 밤낮 노랫가락만 흥얼거리고 있는가 하면, 또 한 놈은 치마 두른 계집년들처럼 꽃송이만 안고 돌아다니고, 세 번째 놈은 더욱 역겨운 게 미꾸라지같이 뺀질거리며 스스로 호룡왕이라고 자칭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세상 사람들을 웃기는 일인가!" "아니, 저 방자한 자식을 잡아들이지 못할까?" 필소해가 흥분해서 펄펄 뛰자 밖에 있던 사내가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 있나? 내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소."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는 안하무인격으로 필소해네 패거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형 앞으로 다가가며 거리낌없이 말했다. "아형, 오늘도 그 두 미친 자식들이 왔었겠지?" 아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벙긋 웃으며 또 물었다. "아마도 아형이 쫓아냈겠지?" 아형이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얼굴에는 분명 반가워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사내는 집안이 들썩하게 웃어젖히더니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러구 있나? 아예 저 미꾸라지마저 쫓아내 버리잖구." 황약사는 문틈으로 슬며시 내다보고 은근히 놀랐다. 방금 들어 온 사내는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듬직하게 일어선 콧마루, 너부죽하게 큰 입, 떡 벌어진 어깨, 어느 한 구석 흠잡을 데 없는 호남아였다. 그는 마냥 사람 좋게 껄껄 웃어대고 있었는데 필소해나 치음 공자, 미화 공자와는 판판 달라 보였다. 그가 들어서자 필소해는 주눅이 들어서 중얼거렸다. "병묘, 이 사람아, 왜 남의 좋은 일에 뛰어들어 방해만 놓는 건가?" 병묘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서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필소해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면서 곯려주었다. "요 미꾸라지 같은 사람아, 사내가 왜 이렇게 좀스럽게 생겨 먹었나? 애호박같이 작은 머리통에 뱁새눈이라, 실로 태호방엔 사람이 없나 보군. 임자 같은 못난이를 방주로 추대한 걸 보면 말야." 필소해는 화가 상투 밑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병묘와 맞붙었다가는 오히려 욕을 보기가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필소해는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다가 병묘를 향해 한마디 씹어뱉었다. "이거 경우 없이 이럴 게 아니라 내기나 해보는 게 어떤가?" "내기? 아니, 이 미꾸라지가 오늘 어떻게 된 거 아냐? 감히 이 어른하고 내기를 다 하겠다니? 거 참, 소 웃다 뱃고래 터질 노릇이군!" 병묘는 기가 막힌 듯 필소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집안이 떠나가도록 웃어댔다. 그가 웃음을 멈추자 필소해가 제법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세 번에 걸쳐서 내기를 하는데, 만약 내가 지면 내 쪽에서 이 자리를 피해 줄 것이고 자네가 지면 자네 쪽에서 냉큼 이 자리를 떠나는 걸세." "좋았어! 좋도록 하지." 병묘는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정식으로 달려들었다. 마침내 두 사나이는 길다란 탁자를 앞에 놓고 마주앉았다. 둘 다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각기 두 팔을 탁자 위에 점잖게 올려 놓았다. 필소해가 자못 심각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이 태호에서 나는 농어 한 마리를 놓고 알아맞히기를 하자구." 어느새 그의 부하가 팔뚝만한 농어 한 마리를 가져다 탁자 위에 놓았다. 물고기가 여전히 꼬리를 치며 펄떡거리자 부하가 손가락으로 아가미 부위를 톡 튕겼다. 물고기는 금세 얌전하게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필소해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안묘, 첫번째 내기는 이 농어를 놓고 알아맞히기를 하는 걸세……." "아니, 이 태호에서 나는 농어를 가지고 무슨 알아맞히기를 한단 말인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 농어는 길다란 가시들이 양쪽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데 양쪽의 가시들이 단수(單數)인가 쌍수( 數)인가를 알아맞혀 보라는 걸세." 병묘는 황당한 표정으로 멍청하니 필소해를 쳐다보았다. 도박꾼인 그는 그동안 세상의 별의별 내기를 다 해보았지만 오늘 같은 엉뚱한 내기는 처음이었다. '빌어먹을 놈팽이 같으니라구. 물고기의 가시가 단수로 박혔는지 쌍수로 박혔는지 귀신이나 알 노릇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병묘가 난색을 짓고 앉아 있자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아형이 조용히 귀띔을 해 주었다. "쌍수라고 해요." 병묘는 영리하고 총명한 아형이 귀띔해 주는지라 덮어놓고 소리쳤다. "쌍수!" 필소해가 히죽이 웃더니 소리쳤다. "여봐라!" 그러자 한 사내가 시퍼런 비수를 꼬나들고 다가와 잽싸게 물고기의 배를 확 갈라 놓았다. 두어 차례 번뜩번뜩 칼이 오가니 금세 앙상한 뼈만 두 줄 가지런히 남았다. 사내는 새하얀 가시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고는 공손히 아뢰었다. "한쪽은 쉰다섯 가치이구 한쪽은 쉰여섯 가치 이옵니다." 아형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새까만 눈을 반짝이며 성큼 나섰다. 아니, 그 많은 가시들을 대강 훑어보고 쌍수인지 단수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판가름은 제삼자가 해야지요." 병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게 좋겠어." 아형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탁자에서 붉은 색 실을 고른 다음 왼손에는 물고기 뼈를 들고 오른손에는 실을 들었다. 그녀는 실끝을 어깨에 감은 다음 입에 물고는 길게 잡아 늘였다. 실은 빠른 속도로 물고기 대가리로부터 시작하여 한 쌍씩의 가시들 사이를 째고 지나갔는데 그 빨간 실 사이에 물고기 가시가 한 개라도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자세히 살 펴보니 빨간선 위에 놓인 가시가 한 개도 없었으며, 물고기 가시는 모두 쌍으로 되어 있었다. 두 개의 물고기 자시를 한데 놓고 세어 보니 꼭 짝이 맞는 것이었다. 필소해는 이 도박에서 졌음을 인정하고 탄식했다. 병묘는 몹시 기뻤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필가, 이 미꾸라지야. 나하고 내기할 때마다 번번이 지는데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어때?" "사안묘, 너무 성급하게 굴 것 없잖아? 아직은 누가 이겼다고 말하긴 어려워." 필소해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각자의 발가락이 몇 개인지를 서로가 알아맞히기로 했다. 태호 사람들은 모두 뱃사람들이라 발바닥이 넓었다. 그래서 세찬 풍파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데 호룡왕 필소해는 신을 신고 왔으니 발가락을 볼 수가 없었다. 병묘가 잠시 생각하다가 소리쳤다. "네 발가락은 아홉 개다. 아니, 열 개, 열한 개다!" 그가 필소해의 낯색을 살펴 가며 연거푸 세 번을 짚어 말하자, 필소해는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일어나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자 병묘는 물론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소해의 발가락은 아홉 개도 아니고 열 개도 아니었으며 열한 개는커녕 워낙 발가락이 없었던 것이다. 병묘가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너 이 놈, 발에 왜 발가락이 없느냐?" 병묘는 믿기지 않는 듯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잠자기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필소해는 다섯 발가락이 한데 붙어 있었는데 발가락 뼈는 그대로 있었다. 다만 발가락 사이를 벌릴 수 없을 뿐이었던 것이다. "필 미꾸라지, 난 네가 미꾸라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 마리의 오리였구나!" 병묘는 계속해서 웃어대며 간신히 말했다. 그러나 필소해는 웃지도 않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난 어머니 뱃속에서 나을 때부터 발가락이 없었어. 사안묘, 자넨 이 내기에서 진 거네!" 그러자 병묘는 즉시 웃음을 거두며 대꾸했다. "내가 졌다구? 천만에!"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필 미꾸라지, 옳지, 이제부턴 필 오리라고 불러야겠군. 어디 말해 보게. 나의 발가락은 모두 몇 개라고 생각하나?" 필소해는 병묘의 발을 태연히 들여다보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자네의 왼쪽 발가락과 오른쪽 발가락을 모두 합하면 열 개가 되겠군." "똑똑히 보았나?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왜 후회해?" 병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왼발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발을 필소해의 코앞에 바짝 들이대고 손가락으로 발가락사이에 낀 진흙을 후벼 냈다. "봐라, 이게 어디 다섯 발가락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