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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6편 (6/59)

2026-09-24 21:27:20 조회 23
"하하, 사람을 잘못 보셨군! 이 황약사는 금전 따위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오! 아무튼 아가씨가 남의 물건을 못쓰게 만들었으니 곱게 돌려보낼 수는 없겠소." 여인은 잠시 잠자코 서 있었다. 그녀의 탐스러운 긴 머리칼이 미풍에 나부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내음이 살랑살랑 전해왔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름다운 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는 난초나 사향보다도 그윽하다더니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황약사는 여인의 향기에 취해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여인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초가집 주인은 뭣 땜에 찾아오셨죠? 아예 만나 보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면 제 말을 믿어 주세요." 황약사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여인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약사의 가슴은 허전하고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천하의 아름답다는 여인들을 두루 만나 보았지만 방금의 저 여인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었다.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선녀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뒷모습만 보아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황약사는 순간 일속 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일속 스님이 말씀하신 여자가 바로 저 여자가 아닐까?' 하지만 황약사는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동해 도화도의 당당한 방주로서 잠시 스치듯 만난 여자에게 반해서 오금을 쓰지 못하다니 될 말인가! 그는 밤도 깊고 하니 한잠자고 내일 아침에나 주인을 만나 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황약사는 들뜬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나무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말뚝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느덧 뿌옇게 날이 밝아 왔다. 황약사는 세수를 하기 위해 호숫가로 나갔다. 그가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아 물 한 움큼을 떠서 얼굴을 적시려는 참이었다. 맞은편 갈대숲 너머로 7, 5척쯤 되는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져 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배들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뱃머리에 나와 섰던 한 사내가 이쪽에 대고 고함을 쳤다. "섬사람들은 잘 듣거라. 우리 주인 어른께서 아형을 만나 보려 하시니 얼른 아형한테 알려 주길 바라노라!" 선두에 선 배는 자그마한 .거룻배인데 갈대숲 언저리에 잠깐 멈춰서더니 웬 사나이가 뱃머리에 올라섰다. 얼굴은 온통 구레나룻으로 덮이고 입은 귀밑까지 째졌는데 축 늘어진 매부리코만 보아도 호색한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매부리코가 제법 점잖게 두 손을 맞잡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호룡왕(湖龍王) 필소해(畢帶海)가 찾아와 만나 뵙기를 청하오!" 황약사는 점점 더 호기심이 동했다. 이 호수에서 호룡왕으로 자처하는 자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아형의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황약사가 다시 바라보니 화려하게 꾸민 꽃배 한 척이 배들 속에서 빠져 나와 앞으로 나섰다. 뱃머리에는 무려 열여섯명의 예쁘장한 소녀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봉긋하게 트레머리를 하고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선실에서 귀엽게 생긴 공자가 걸어 나왔다. 공자는 뱃머리에 나와 서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치음(痴吟) 공자가 만나 뵙고저 찾아왔으니 아형은 나와서 〈호가십팔박(胡茄十八拍)〉을 들어 보시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초가집 삽짝문은 굳게 닫혀 있을 뿐 아형이 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섬사람들도 몰려 나와 황약사 옆에 서서 구경들을 하고 있었다. 갈대숲 언저리에서 치음 공자네 꽃배를 제치고 커다란 배 한 척이 또 들어섰다. 꽃배와는 달리 배 전체가 한 송이의 커다란 꽃을 방불케 했는데 그 향기가 호숫가에까지 진동했다. 아마도 선실에 천하의 이름난 화초들을 싣고 온 모양이었다. 뱃머리에는 역시 미목이 수려한 공자가 서 있었다. "어허, 미화(迷花) 공자로군!" 구경하던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혀를 찼다. 황약사는 어느 정도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두 배에 나누어 탄 두 공자는 다시 말해 하나는 음률에 미친 치음 공자요 하나는 화초에 미친 미화 공자인 것이다. '한데 저 두 놈이 뱃머리를 맞대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황약사가 이런 생각을 굴리며 건너다보니 치음 공자 쪽에서 미화공자 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게 미화 공자, 오늘 열엿샛날이 아닌가? 열닷샛날에는 달이 둥글어지고 열엿샛날부터는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이거늘 하필이면 하루 늦게 올 건 뭔가?" 미화 공자가 넉살좋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보게 치음이, 달이 둥글면 소리가 맑아지고 달이 이지러지면 음도 흐려지는 법이거늘, 자넨 음률에 밝다는 사람이 왜 오늘 왔는가?" "미화, 미화라……. 말 그대로 화초에 미친 양반이겠는데 왜 천하의 기화이초에는 관심이 없고 아형만을 찾아오는 건가?" 치음 공자가 실실 웃으며 빈정거리자 미화 공자도 슬쩍 웃으며 받아넘겼다. "여보게 치음이, 요즘엔 한나라의 명인 채문희(蒙文姬)가 지은 〈호가십팔박〉을 익히느라고 꼬박 두 달 동안이나 집안에 붙박여 있었다지? 하지만 참새가 황새 걸음하면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야!" 그 말에 치음 공자가 입귀를 일그러뜨리며 성을 냈다.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인가?" "천만에, 어찌 임자를 허투루 볼 수가 있겠나?" 미화 공자가 너스레를 떨자 치음 공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겨보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듣자니 천하에 다시없는 진귀한 화초를 구해 왔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꽃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상히 생각해서 하늘이 한 떨기 꽃송이를 내려 보낸 것 같네. 아마 자네도 보면 찬탄을 금치 못할걸?" 치음 공자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화 공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도박쟁이가 웬일로 오지 않지?" 치음 공자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대꾸했다. "오늘은 아마도 자네와 나의 겨룸이 되겠군." 두 사람이 한창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초가집에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골동품 가게에서 만난 그 소녀였다. 그녀는 시원스러운 눈동자에 활기를 띠고 섬사람들 앞으로 냉큼 나서면서 꽃배 쪽에 대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지난번에 오셨을 땐 저희 주인님에게 〈대아(大雅)〉라는 곡을 들려주셨지요? 그런데 그 곡은 너무 길고 지루해서 막 졸음이 올 지경이더군요. 오늘은 좀 짧은 것으로 들려주세요!" 치음 공자는 픽 쓴웃음을 지었다. '흥, 너 같은 종년이 어찌 〈대아〉의 우아함을 알 수가 있겠느냐? 이제 〈호가십팔박〉을 연주해도 네 년한테는 역시 소 귀에 경 읽기가 될거다. 하지만 아형이 들으라고 연주하는 것이니까 네깐 년은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소녀는 이번에는 미화 공자 쪽에 대고 소리쳤다. "미화 공자님, 지난번에 가져온 '십팔수재(十八秀才)'라는 꽃이 기억나세요? 한데 저희 주인님이 보시더니 별로 희한한 꽃이 아니래요. 오늘 갖고 온 꽃은 어떤 꽃이지요?" 미화 공자는 뱃전에 나서며 대꾸했다. "약속대로 천하에 다시 볼 수 없는 기화이초를 가져왔으니 이제 곧 주인님께 보여 드릴 수 있을 게다." "알겠어요. 그런데 두 분 공자님은 오셨는데 내기를 좋아하는 공자님은 보이지 않네요?" "아마도 임안성 투전놀이에서 본전마저 뜯기고 나니 이리로 올 흥이 안 났던 게지." 미화 공자가 빈정대듯 말하자 치음 공자도 맞장구를 쳤다. "암, 그렇고말고. 설사 여기에 온들 제깐 놈이 우리를 당할 수가 있을라구? 자칫하면 아형에게 쫓겨나기가 십상이지!" 두 공자는 동시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계집애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두 공자님께서 먼 길을 오셔서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신 만큼 그냥 돌아가게 할 수는 없군요." 그러자 두 공자가 히죽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암, 그렇고말고." "그럼 어느 공자의 것을 먼저 볼까요?" 소녀의 물음에 두 공자는 자기의 것을 먼저 보이겠노라고 옥신각신했다. 두 사내는 조금도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한참이나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더니 각자의 뱃머리에 마주서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두 사내는 성난 수탉처럼 화닥닥 튀어올라 허공에서 맞붙었다. 번개 같은 장이 몇 번 오가더니 두 사람은 각자의 뱃머리로 돌아갔다. 같은 장면이 한 차례 더 반복됐다. 황약사는 두 사람의 무공에 은근히 탄복했다. 후닥닥후닥닥 두번 솟구쳐 올라 맞붙어 도합 여섯 장이 오갔는데 장력으로 말하면 미화 쪽이 드센 편이요, 장법으로 말하면 치음 쪽이 날쌘 편이었다. 미화 공자가 읍을 하며 정중히 말했다. "임자의 장법이 귀신 같구려." "임자는 내력이 장사 같구려." 치음 공자 역시 빙긋이 웃으며 답례했다. 두 공자의 행동거지를 지켜 보고 있던 계집애가 재촉했다. "아니, 무슨 의논이 그리 길어요? 아무 쪽에서나 빨리 하란 말예요. 나 원, 명 짧은 사람은 숨 끊어지겠네!" 두 공자는 서로 순서를 양보하더니 결국엔 미화 공자 쪽에서 먼저 꽃을 가져다가 아형에게 보이기로 했다. 미화 공자는 마치 큰일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사뭇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판의 널빤지 하나를 밀어내더니 그 밑에서 화분 하나를 꺼내서 받쳐들었다. "참 희귀한 꽃이로군!" 호숫가에서 구경하던 섬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질렀다. 꽃은 가지나 잎사귀가 좀 성글어 보이긴 했으나 이를 데 없이 소담하고 청초했다. 꽃송이들은 운치가 있고 가지는 정이 있으며 줄기는 기세가 있고 뿌리는 든든했다. 말 그대로 운(韻), 정(情), 세(勢), 근(根)을 다 갖추었으니 실로 진귀한 꽃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이 꽃은 향기 또한 신비로웠다.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데, 아무튼 콧구멍으로 들이 마시면 정신이 상쾌 해졌고 입으로 들이 마시면 삼복염천에 심산벽곡의 약수 한 사발을 들이킨 것처럼 온몸이 시원해졌다. 꽃가지는 더더욱 아름답고 싱싱했다. 꽃 빛깔은 연한 자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졌는데 얼핏 보면 목련꽃이나 월계화, 장미꽃 같기도 하였으나 찬찬히 보면 셋 중의 어느 꽃과도 달랐다. 미화 공자는 화분을 받쳐든 채 배 위에서 살짝 뛰어내렸다. 그는 계집애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화분을 넘겨주었다. "미안하지만 이 화분을 아형에게 가져다 보여 주렴." 소녀는 화분을 받아 안으면서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자님, 이건 '오십수재(五十秀才)'라는 꽃이 아닌가요?" 소녀의 물음에 미화 공자는 눈을 치떴다. "오십수재? 네가 어떻게 오십수재를 알지?" "가만 세어 보니 크고 작은 꽃송이가 도합 오십 송이더군요. 그러니 오십수재일 수밖에 없지요, 뭐." "정말 딱하구나! 이 귀한 꽃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미화 공자는 한심하다는 눈길로 소녀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소녀가 바짝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그럼 무슨 꽃이에요?" "이것은 '삼신(三信) '이란 꽃이다." "이렇게 이쁜 꽃을 삼신이라고 이름짓다니요? 삼신이라, 세 사람이 믿는다는 뜻인가요? 세상에, 무슨 이런 꽃이름이 다 있담?" 미화 공자는 그만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잔말 말구 어서 가져다 보이기나 해! 아무튼 천하에서 제일 가는 꽃이니까." 한식경쯤 지났을까. 집으로 들어갔던 소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미화 공자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화분을 들고 총총히 호숫가로 내려왔다. 소녀는 화분을 내려놓더니 두 손으로 호숫물을 떠서 꽃잎과 줄기들을 씻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화 공자에게 꽃을 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타부타 말이 없이 호숫물을 떠서 꽃을 씻기만 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처녀애의 거동을 지켜 보았다. 황약사도 소녀의 하는 양을 지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형은 미화 공자가 가져온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미화 공자의 얼굴은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훌쩍 몸을 솟구쳐 호숫가에 내려서더니 화분을 낚아채어 가지고 다시 껑충 몸을 솟구쳐 배에 올라섰다. "돌아가자!" 미화 공자는 몹시 화가 나서 부하들을 다그쳐 급히 그곳을 떠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치음 공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녀를 보고 점잖게 읍을 하며 부탁했다. "아가씨, 수고스럽지만 아가씨의 주인님께 한마디 전해 주시오. 이 치음이 〈호가십팔박〉을 연주할 터이니 들어 보시라고요." 소녀는 다시 피식 웃음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삽짝문과 방문이 꽁꽁 닫혀 있는 초가집은 따스한 햇빛에 조는 듯이 보였다. 치음 공자는 껑충 배 위에 뛰어올라 죽 늘어선 열 여섯 명의 아가씨들 사이를 나는 듯이 오가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기도 하고 악기를 바로잡아 주는 등 순식간에 준비를 끝냈다. 그는 뱃머리에 우뚝 서서 마음을 가다듬는 듯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손가락 툭 튕겼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배 위가 쥐죽은듯 잠잠해지더니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닌게아니라 절통하고 비장한 〈호가십팔박〉이었다. 곡조는 점점 처량해졌고 그 곡조에 도취된 섬사람들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철썩 치며 한탄하기도 하고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황약사도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과연 〈호가십팔박〉은 부드러우면서도 애상적인 강남의 곡조와는 판판 달랐다. 천군만마가 내닫고 창과 칼이 어우러지는 소리, 천지를 진동하는 함성, 〈호가십팔박〉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막한 사막에 서 있는 듯싶었다.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소녀가 다시 나왔다. 그녀는 사립문을 열고 한들한들 꽃배 앞으로 걸어왔다. 치음 공자는 촉촉히 젖은 두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소녀가 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 "공자님께서 그렇게까지 상심할 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채문희란 여자는 평생에 세 번 시집을 갔지요. 첫 남편 위중도(衛仲道)와는 부부간에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러다가 흉노들에게 잡혀가 흉노인의 아내가 된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흉노인들 속에서 날마다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살았다는 건 다 꾸며 낸 얘기지요, 뭐. 그렇게 싫었으면 어떻게 아들을 둘이나 낳아 줬겠어요? 사실은 그쪽에 가서 호강을 한 셈이지요. 후에 누군가 채문희를 흉노 부락에서 빼내 온 다음에 조조가 나서서 동사(臺視)라는 벼슬아치에게 시집보냈다고 하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래요. 동사가 흉노 부락에 사신으로 갔다가 채문희를 보고 서로 눈이 맞아 남모르게 탈출한 것이지요. 그러니 채문희란 여자가 평생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앉으면서 호강을 한 것 외에 뭐가 더 있어요? 아무튼 저희 주인님 말씀은요, 공연히 채문회의 아비 되는 채염을 대신해서 통곡할 까닭은 없다는 거예요. 호호……." 치음 공자는 소녀 앞에서 민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하기는 그 말이 옳군. 채염도 평생 자손을 많이 두고 희희낙락하며 살았거늘 내가 공연히 채문희를 위해 눈물 콧물 흘리며 애간장을 태울 까닭은 없지. 아가씨네 주인장의 말씀을 들어 보니 〈호가십팔박〉이란 것도 다 쓸개 빠진 연놈들이 하릴없이 뚱땅거리는 곡조에 지나지 않구만." 치음 공자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잡시 후 왈칵 피를 토하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놀란 하인들이 좌우에서 황망히 그를 부축해 세웠다. 치음 공자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옛날,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한 백아(伯牙)도 그 소리를 잘 알아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지음(知音)이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하는데, 나 치음 공자도 지음이 없는 이 세상에서 구태여 호가든 공후든 탈 재미가 없구나! 이젠 돌아가서 주색으로 세월을 보내리라!" 그는 다시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옆에 늘어선 아가씨들의 손에서 악기들을 빼앗아 닥치는 대로 줄을 끊고 짓밟아 뭉개서 호수에 처넣었다. 그리고 나서 초가집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하고, 이 계집 저 계집 얼싸안고 희희낙락거리며 뱃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섬사람들도 삼삼오오 흩어져 돌아가자 황약사는 초가집 울타리로 가서 삽짝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다 말고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려 보았다. 이것은 분명 예삿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삽짝문의 참대 가지들을 일일이 튕겨 보았다. 맑고 둥글고 부드러운 소리가 차례로 울려 나왔는데 그 소리들은 다름아닌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였다. 황약사는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돌아간 치음 공자의 〈호가십팔박〉도 이 삽짝문이 내는 소리에 비하면 헌 수레 굴러가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황약사는 바짝 호기심이 동해서 삽짝문을 거문고 삼아 다루어 보았다. 그는 〈시경 (詩經) · 정풍(鄭鳳) · 풍우(風雨)〉라는 곡조를 튕겼다. 이 곡조는 그리던 님과 상봉하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황약사의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너무나 알맞은 곡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조금 전의 그 소녀조차 나와 주지 않았다. 황약사는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주인이 전혀 상대를 해주지 않는데 무턱대고 뛰어들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문득 집안에서 거문고 소리가 느닷없이 들려 왔다. 마치 정다운 님과 속삭이는 듯한 부드럽고 달콤한 소리, 그것은 분명 〈학명(鶴嗚)〉이라는 곡조였다. 그 거문고 소리는 창공을 유유히 나는 학의 울음 소리마냥 속세를 벗어난 청고하고도 부드러운 소리였다. 누가 이렇듯 거문고를 타는 것일까? 황약사가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거문고 소리가 가뭇없이 끊겼다. 황약사는 문밖에서 잠시 머뭇대다가 크게 소리쳤다. "동해 도화도에서 온 황약사가 주인장을 만나 뵙고저 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이 삐걱 열렸다. 소녀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생글생글 웃더니 쪼르르 달려 나와 삽짝문을 열며 비켜섰다. 방긋 웃어 보이는 품이 들어와도 좋다는 눈치였다. "주인님께서 공자님의 지성에 감복하셨는지 저더러 모셔 들이라는 분부십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황약사는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열어젖힌 방문 안쪽에는 꽃비단과 색실로 만든 봉황새가 매달려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향긋한 분내가 감돌았고 거문고 한 틀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계집애의 침실인 것 같았다. 황약사가 방 안을 두루 살펴보는데 어느새 따라 들어온 계집애가 안방으로 통하는 문에 드리운 오색 휘장을 슬쩍 젖히면서 재촉했다. "공자님, 저희 주인 아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자, 드시지요." 황약사가 점잖게 안방에 들어서니 웬 아리따운 여인이 조용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바로 어젯밤 호숫가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멀리서 찾아오신 공자님을 어젯밤 소홀히 대했군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여인이 미소 띤 얼굴로 상냥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 쪽에서……." 황약사는 얼른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이 여인의 아버님을 꼭 만나 보아야겠는데…….' 황약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주인장은 어디 계시는지요? 미안하지만 이 집 주인장을 좀 만나 뵙게 해주시오." 그의 말에 여인이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자 소녀도 입을 싸쥐고 키득거렸다. 황약사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여인이 오른손으로 곱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이 집 주인이고 이름은 아형이라 합니다." 황약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 소저가 바로 아형이고 아형이란 바로 이 눈앞에 있는 절세의 미인이란 말인가?' 황약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한편 멀지 않아 아름다운 처녀와 연분을 맺게 될 것이라던 일속 대사의 말이 떠올라 새삼스럽게 아형을 건너다보았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아형이 빙긋이 웃으며 등의자를 내주었다. 황약사가 앉자 그녀가 물었다. "공자님은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임안성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서 낭자가 만든 두 가지 물건을 본 바가 있소. 하도 정교하게 만들었는지라 낭자의 뛰어난 솜씨에 탄복하여 체면불구하고 찾아오게 된 것이오." 아형은 살짝 볼우물을 만들며 웃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실은 저희는 아녀자로서 밭갈이나 고기를 잡는 일은 하기가 어려우니 하잘것없는 노리개나 만들어 품팔이나 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아형이 이렇듯 겸손하게 나오자 아무리 말주변이 좋은 황약사라도 무어라 말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형이 소녀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오게 하였다. 차를 가져오자 방안 가득 맑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황약사가 기분이 상쾌해져서 앉아 있는데 아형이 조용히 차를 권했다. "이 태호에서 나는 연꽃차랍니다. 드셔 보시지요." 황약사는 한 모금 마시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