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5편 (5/59)
마침내 미인의 얼굴이 나타나자 처녀는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황약사는 지붕 위의 기왓장을 들어내고 서까래를 뜯어낸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방안에 살짝 내려섰다. 뚱보와 그의 딸은 느닷없이 나타난 황약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댁은 누구시오?" 뚱보가 버럭 화를 내자 활약사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좀 긴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남의 집에 함부로 뛰어드는 법이 어디 있소?" "당신은 이 서울 장안에서도 유명한 상인이 아니시오? 물건을 거래할 일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왔소." 뚱보는 울그락푸르락 화를 내던 얼굴에 함빡 웃음을 담으면서 한 걸음 다가섰다. "도대체 무슨 물건인데?" "지금 따님께서 들고 있는 물건입니다." "뭐요?" 뚱보는 불에 덴 사람처럼 한걸음 물러섰다. "미안하지만 그 아형을 저한테 넘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황약사가 실실 웃으며 청을 하자뚱보는 기가 막힌 듯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딸이 바락 성깔을 부리며 소리쳤다. "아니, 별 염치 없는 사람을 다 보겠네? 아버지가 겨우 사온 것이고 내일 시집갈 때 쓸 것인데 어떻게 팔아 넘기라는 거예요? 당치도 않은 소리 마세요!" 황약사는 거두절미하고 품속에서 싯누런 금덩이 세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뚱보는 금덩이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나 그의 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전히 악을 썼다. "그 따위 금덩이는 썩 가져가요. 어쨌든 팔지 않을 거니까요." 황약사는 잠자코 있다가 품속에서 묵직한 금덩이 하나를 더 꺼내 놓았다. 모두 합하면 7백 냥은 실히 될 것 같았다. 뚱보는 뜻하지 않은 횡재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는 딸을 향해 말했다. "얘야, 이 금덩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살 수 있단다. 내 아형보다 더 좋은 걸 사줄 테니까 그 아형을 이분께 파는 게 어떻겠니……?" "더 좋은 거 뭘 사줄 건데요? 약속을 꼭 지키시는 거죠?" 딸도 싯누런 금덩이를 보자 은근히 욕심이 나서 짐짓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녀는 두말없이 황약사의 손에 아형을 넘겨주었다. 황약사는 아형을 받아 들기가 무섭게 청지기가 하던 대로 꽃잎을 한 잎 두 잎 펼쳐 놓았다. 그러자 역시 절세미인의 얼굴이 뚜렷이 나타났다. 여인은 두 손에 책을 펼쳐 들고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듯싶었다. 한 송이 꽃과도 같이 아름답고 갸름한 얼굴에 매끄럽고 쏙 빠진 몸매가 천상 선녀 같았다. 여인의 밑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서시 (西施)는 사수에서 미역을 감고 옥환(玉環)은 궁궐에서 연지 곤지 찍네 왕장(王薔)의 아경 소리 애간장 태우는데 소군(昭君)이 떠나가네, 고국 산천 등지고서. 황약사가 보기에 그림도 좋지만 시 또한 멋들어 졌다. 짧디짧은 시구에 세상의 경탄을 자아냈던 네 명의 전세 가인, 그 여인들의 삶의 과정을 얼마나 절묘하게 표현했는가! 황약사는 시를 지은 이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필치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황약사는 말없이 홱 돌아서더니 터벅터벅 층계를 내려가 객점으로 향했다.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나갔다. 보름날 황약사는 품속에 아형을 감추고 일찌감치 골동품 가게로 찾아갔다. 한참이나 기다려서야 문이 열렸다. 황약사가 들어서자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뭘 사시려는지요?" 황약사는 건성으로 눈인사를 하고는 진열대들을 둘러보았다. 역시 동쪽에 놓인 진열대가 비어 있었다. 약삭빠른 가게 주인은 얼른 눈치를 채고 살살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아형을 찾으시나 보군요?" 황약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가게 주인이 말했다. "너무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좀 있으면 웬 계집애가 물건을 가지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약사는 알겠다는 듯 빙긋이 웃어 보였다. 한참 기다리고 있노라니 주인 말대로 여남은 살 죄어 보이는 소녀 하나가 들어왔다. 큼직한 두 눈이 여간 또렷해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자기를 지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게 주인 앞으로 조심조심 다가가더니 진열대 위에 통통한 손을 올려 놓았다. 가게 주인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깜찍한 것 같으니. 오늘도 아형을 갖고 왔겠지?" 그러자 소녀는 손을 펴든 채 수줍게 웃어 보일 뿐 대답이 없었다. "좋아, 그럼 먼저 값을 치러 주지." 가게 주인은 너털웃음을 치면서 계집애의 통통한 손바닥에 계란만한 은덩이를 슬쩍 놓았다. "자, 이젠 아형을 보여 줘야지?" 황약사는 한쪽에 비켜서서 슬며시 건너다보고 있었다. 계집애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조심조심 꺼냈다. 가게 주인은 이 소녀가 번번이 희한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므로 두 눈을 크게 Em고 지켜 보았다. 소녀가 보따리를 풀어놓자 그 안에서 네모 반듯한 물건이 나왔다.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데 복판에 파랗고 노란 줄이 두어 줄 있었다. 찬찬히 보니 가장자리는 새하얀 은테를 둘렀고 그 속은 수정과 마노, 진주 등속으로 풍경화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 수정으로 만든 골동품은 네 면이 각각 다른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고 슬쩍 들었다 놓으면 번번이 풍경이 변하곤 했다. 실로 만화경 같은 진귀한 세공품이었다. 가게 주인이 입이 함박만해서 손뼉을 쳤다. "과연 멋진 물건이군! 한데 이걸 뭐라구 하지?" 소녀가 방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주인님 말씀에 의하면 산수백도(山水百圖)라고 해요." 소녀와 주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게 안에는 어느새 대여섯 명의 손님이 더 들어섰다. 그 속에는 유 뚱보와 꺽다리 늙은이도 끼여 있었다. 모두들 산수백포를 보려고 야단이더니 마침내 흥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 뚱보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파시오. 은 백 장을 내놓겠소!" "난 1백50냥을 내겠소!" 늙은이가 소리쳤다. 그러자 어느새 끼여든 청지기가 값을 올렸다. "난 2백 냥이오!" 값은 3백에서 3백50냥, 4백 냥까지 올라가더니 그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황약사는 옆에 서서 조용히 웃고 있는 계집애를 보고 넌지시 물었다. "얘야, 저렇게 자그마한 노리개를 어떻게 4백 냥이나 받는다는 게냐?" 계집애는 살짝 눈을 치뜨며 대꾸했다. "저희 주인님은 7백 냥을 받지 못하면 천천히 팔아도 좋으니 가게에 맡겨 두라고 분부했어요." 원래 이 아형이라고 하는 희한한 물건들은 동쪽 진열대에 있는 흰 소반 위에 놓고 팔게 되어 있었는데 이 놈의 물건이 워낙 진귀한 세공품이다 보니 진열해 놓기 바쁘게 팔리곤 했다. 매달 보름께면 숱한 장사치들이 몰려와 기다리다가는 티격태격 경매를 붙이고 부리나케 들고 가는 판이었으니 동쪽 진열대가 늘 비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젠 값을 더 부르는 사람이 없으니 산수백도는 자연 4백 냥을 부른 사람이 가져가게 될 판이었다. 그는 바로 지난달에 비단꽃을 사갔던 뚱보였다. 아무리 진귀한 보석으로 만든 세공품이라 해도 4백 냥이나 주고 사 간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이 계집애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얘야, 이 산수백도를 은 4백 냥에 팔겠느냐?" 계집애가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 주인님께선요, 7백 냥 밑으로는 팔 수가 없으니까 이 집에 맡겨 천천히 팔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뚱보는 산수백도를 두 손에 쥔 채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산수백도와 둘러선 사람들을 번갈아 보더니 펄쩍 뛰면서 화를 냈다. "7백 냥을 낼 만한 양반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서 보시오!" 좌중이 잠자코 있자 뚱보는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소! 내가 7백 냥을 내고 사 가겠소!" 뚱보는 묵직한 은덩이를 진열대 위에 내놓고 산수백도를 옆구리에 끼고 나가려고 했다. 황약사가 비로소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황약사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가게 주인과 손님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아니, 이처럼 진귀한 보물을 7백 냥에 파신다니 혹시 농담이 아니신지요?" 좌중의 시선이 황약사에게로 몰렸다. 누군가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물었다. "그렇다면 이 산수백도가 얼마에 팔릴 수 있다는 말씀이오?" "적어도 천 냥은 갈 것이_2_!" 좌중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산수백도를 재치 있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천 냥이나 값을 매긴단 말인가. 좌중은 기가 막히다는 듯 황약사를 곁눈질하며 수군거렸다. 뚱보는 느닷없는 황약사의 출현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황약사와 감히 경쟁할 엄두조차 못 내고 속으로 욕만 퍼부어 댔다. 황약사가 소녀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천 냥이면 어떻겠느냐?" 계집애는 황약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씽긋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 주인님은 이번에 천 냥이나 낼 양반이 나설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황약사는 히죽이 웃으면서 은표(銀票) 두 장을 내놓은 뒤 산수백도를 쥐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못박인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소녀도 가게를 나왔다. 묵직한 은덩이를 품속에 감춘 소녀는 얼굴 가득 함빡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황약사가 조용히 소녀의 앞을 막아 서며 말했다. "얘야, 너희 주인님을 좀 만나 봬야 하겠는데 날 좀 데려다 주겠니?" 소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종알거렸다. "안 돼요. 저희 주인님은 만나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한 번만 말씀드려 주거라. 황약사라는 사람이 만나 뵙자고 한다구 말이야." 황약사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점잖게 부탁하자 소녀는 입을 싸 쥐고 키득거렸다. "황약사라, 이름만 들어 봐도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의원님 같네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은 아무 병도 없는 걸요, 뭐." 소녀는 쌀쌀맞게 대꾸한뒤 황약사를 남겨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 소녀는 큰길에 들어서자 가마를 불렀다. 소녀가 탄 가마는 나는 듯이 달려 임안성 남대문에서 멈춰 섰다. 가마에서 내린 소녀는 값을 치른 뒤 다시 마차로 바꾸어 타고 성밖으로 질풍같이 달려갔다. 황약사는 널따란 소맷자락을 휘휘 날리며 마차의 뒤를 쫓아갔다. 마차는 호숫가에 있는 호전한 나루터에 와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소녀는 나루터에 가서 뱃사공을 불렀다. 그녀는 배를 타고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갔다. 황약사도 배를 타고 뒤를 쫓았다. 두 배가 연달아 호수 가운데에 있는 섬에 닿았다. 섬에 오른 황약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소녀의 뒤를 밟았다. 버드나무숲을 지나 대숲을 돌아가 보니 울타리를 알뜰하게 둘러친 아담한 초가 한 채가 나타났다. 황약사는 삽짝 밖에 서서 점잖게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동해 도화도의 황약사가 만나 뵙고저 찾아왔소이다!" 연신 세 번이나 소리친 뒤에야 아까 보았던 소녀가 집에서 나오면서 눈을 흘겼다. "아니, 끝내 뒤쫓아왔네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데 여기까지 찾아올 건 뭐예요!" "미안하다. 아형을 만든 걸 보니 하도 솜씨가 좋은 분인 것 같아 꼭 만나 보고 싶구나." "아무렴요, 솜씨가 좋구말구요. 주인님의 귀신 같은 솜씨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깐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은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데 어떡하겠어요?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소녀는 쌀쌀맞게 대꾸한 뒤 삽짝문을 걸어 닫고 되돌아 들어갔다. 황약사는 조그만 계집애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어정어정 호숫가의 버드나무 밑에 가서 무료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온종일 밥 한술 뜨지 못한 터라 나무창 열 개를 만들었다. "열 마리면 족해. 그 이상은 먹을 수가 없으니까." 황약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나무창 하나를 쏜살같이 호수에 던졌다. 나무창이 물 속에 박히는 순간 수면 위로 팔뚝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떠올라왔다. 황약사의 손이 연달아 움직일 때마다 수면 위로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불현듯 누군가가 손뼉을 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멋져라! 손님처럼 고기를 잡으면 그물도 필요 없겠네요. 저한테도 좀 가르쳐 주세요, 네?" 황약사가 돌아다보니 바로 눈이 큰 계집애였다. 소녀는 손뼉을 치다 말고 새침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고기들을 무슨 수로 건져 내겠어요? 아유, 아까워라……." 황약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꾸했다 "왜 방법이 없겠나?"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삭은 나뭇가지를 주워 호수에 던지고는 가볍게 몸을 날려 나뭇가지 위에 올라탔다. 그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로 날렵하게 물 위에 뜬 고기를 낚아 올렸다. 곧 기슭에 올라온 황약사는 물고기를 주섬주섬 가려 놓으면서 계집애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봐라, 물고기를 건져 오는 수가 얼마든지 있지!" 계집애가 또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제발 저한테도 가르쳐 줘요. 저희 주인님이 생선국을 잡숫고 싶어할 때마다 이런 방법으로 잡으면 얼마나 재밌겠어요?" 황약사는 빙그레 웃어 보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너무나 허기가 져서 계집애와 시시덕거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황약사는 불을 지피려고 삭정이를 긁어 모았다. 그러자 계집애가 손을 홰홰 저으며 막아섰다. "안 돼요, 불을 지펴서는 안 돼요!" 황약사가 어이가 없어 까닭을 묻자 계집애가 말했다. "저희 주인님은 연기를 쏘이면 대나무들이 죽는다고 함부로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해요. 참 깔끔한 분이거든요!" 황약사는 기가 막혔다. 불을 지필 수가 없다면 날생선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심술궂은 계집애는 재미있다는 듯 키들키들 웃어댔다. 그제야 황약사는 계집애의 고약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흥, 요 놈의 쬐끄만 계집애가 이 어른을 곯려 줄 셈이로구나. 그래 불이 없다고 이 황약사가 날생선을 먹을까?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 황약사는 물고기들을 하나하나 꼬챙이에 째어 휘청하니 처진 나뭇가지에 달아매고 마주앉았다. 그는 두 손을 쫙 펴서 물고기에 갖다 대었다. 계집애는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뿌지직뿌지직 소리가 나면서 두 마리의 물고기가 노랗게 구워졌고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계집애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황약사는 노랗게 구워 낸 물고기를 게걸스럽게 발라 먹고 나서 같은 방법으로 연달아 다섯 마리나 구워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그는 입을 닦아 내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계집애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황약사는 피식 웃고는 해묵은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내공을 가다듬은 뒤 어느덧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늘어지게 잤을까? 문득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듯한 여인의 음성에 번쩍 눈을 떴다. "공자님은 무슨 연고로 여기에 오셨고 또 누구를 찾고 계시는지요?" 황약사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한 여인이 서 있었는데 낮에 만난 계집은 분명 아니었다. 황약사는 혹시 낮에 찾아갔던 초가집 주인의 따님이 아닐까 하여 바삐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점잖게 읍을 했다. "소저를 놀라게 했다면 용서하시오. 저는 저 초가집 주인님을 만나 뵙고저 찾아온 도화도의 황약사란 사람이올시다. 아무쪼록 만나 뵙잔다구 전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여인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더니 조용히 물었다. "아니, 초가집 주인을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저에게 알려 줄 수는 없사온지요?" "말씀을 드리지요. 저 임안성에 골동품 가게가 한 집 있는데 제가 그 집에서 두 가지 신기한 물건을 샀답니다. 가게 주인은 물론이고, 모두들 그 물건을 일컬어 아형이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아형은 저 초가집 주인 어른이 만들어 낸 것 같은데, 그토록 절묘한 아형을 만들어 낸 분과 금기서화(琴棋書畵)며 천하의 기묘한 손재간에 대해 담론하고 싶어서입니다." 여인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지껏 공자님은 누가 아형인 줄을 모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황약사는 비로소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크게 놀랐다. 일찍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달걀빛 같이 희고 반듯한 이마에 반달형의 눈썹,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눈, 붉고 야무진 입매, 가늘고 긴 목을 타고 흐르는 듯한 아담한 어깨, 실버들같이 가녀린 몸매……. 달빛에 부드럽게 싸여 있는 그녀의 자태는 황약사의 혼백을 빼앗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제4장 색에 반한 사내들 황약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호젓한 호숫가에서 절세의 가인을 만날 줄이야! 그러나 황약사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부탁했다. "어서 댁에 돌아가서 주인님을 만나 뵙잔다구 한마디 여쭈어 주시오, " "대관절 무슨 일인데요?" 여인이 미소를 떠올리며 묻자 황약사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여인 앞에 불쑥 내밀었다. 바로 한 송이 비단꽃이었다. "이 꽃을 좀 보시오. 얼마나 절묘하게 만들었소? 이 비단꽃을 만든 댁의 주인님을 꼭 만나 보고 싶소." 여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살짝 비단꽃을 집어 코끝에 가져다 대더니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향기가 없네요." 황약사는 속으로 개탄했다. '참 용모가 아깝구나. 하늘의 선녀같이 아리따운 여자가 왜 저리도 무식할까? 이처럼 기묘한 비단꽃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딴 소리인가? ' 여인은 황약사의 눈치를 알아차린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꽃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는 우아해야 하는데 어떤 꽃은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찾을 길이 없으나 어떤 꽃은 길가에 피어 있어도 오히려 꺾어 가지 않는답니다. 그러므로 우아한 것을 최고로 친답니다. 둘째로는 믿음이 있는 꽃이어야 합니다. 우담화(雲花)처럼 한밤중에 갑자기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더라도 님에 대한 일편단심을 고이고이 지키는 열녀처럼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꽃은 아무데서나 사철 피는 것이 있는데 그 줏대 없는 천박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지요. 셋째로 꽃이란 향기로워야 합니다. 좋은 꽃의 향기는 맑고 부드러운 법이라 그 향이 너무 자극적이어도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지요. 그런데 이 꽃은 우아한 멋은 있으나 믿음이 부족하고 더욱이 향기가 전혀 없습니다." 여인은 말을 마치자 호수를 향해 들고 있던 꽃을 힘껏 던져 버렸다. 황약사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소리쳤다. "아니, 남이 엄청난 값을 치르고 산 꽃을 함부로 버리다니! 저 꽃은 천하없이 진귀한 꽃이오! 저 꽃 속엔 그림도 있고 시도 있는데 모두 다 걸작들이지. 어디서 다시 저런 보배를 구경이나 하겠다고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시오!" 그의 말에 여인은 가벼운 미소로 되물었다. "저것을 얼마에 사셨는데요? 아마도 이만한 은전이면 본전이 되고도 남을 거예요." 그녀는 묵직한 주머니를 황약사의 발치에 던졌다. 황약사는 그만 울컥 화가 치밀었다.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지? 겉보기와는 영 다른 여자로구나. 남의 값진 물건을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호수에 처넣고도 오히려 제 쪽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나 원, 살다보니 별일을 다 당하는구나.' 그러나 여인은 그의 기분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면서 실실 약올리듯 말했다. "공자님에게 또 뭐가 있나요? 어디 구경 좀 해요." 황약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홧김에 품속에 있던 산수백도마저 꺼내 보였다. "천하의 산이나 물은 본디 움직이는 법이오. 산이 돌고 물이 흐느끼는 고로 우리가 비로소 천지의 영기를 느낄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이 산수백도야말로 신령스럽고 영묘한 자연의 조화를 절묘하게 보여 준다고 하겠소. 실로 댁의 주인 어른은 재기가 뛰어난 양반이오!" "얼마나 훌륭한가 한번 좀 보죠." 여인은 여전히 미소 떤 얼굴로 하얀 손을 부드럽게 내밀었다. 황약사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어수룩하게도 여인의 손에 산수백도마저 넘겨주고 말았다. 여인은 산수백도를 대강 훑어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황 공자님, 이게 무슨 산수백도입니까?" 그녀는 거리낌없이 은으로 된 테를 뜯어 버리고 양면의 수정을 들어 보였다. "보세요, 절묘하긴 뭐가 절묘하죠? 꽃가지며 모래알 따위를 넣고 얼렁뚱땅 눈속임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잖아요." 여인은 말을 마치자 수정을 기울여 수정 틈에 넣은 꽃가지며 모래알 등을 주르르 쏟아 버렸다. 황약사는 기가 막혀 멍하니 쳐다볼 뿐 말이 안 나왔다. 세상에 저렇듯 제멋대로인 여자가 다 있다니! 여인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참 딱하시군요. 아까운 돈을 퍼주고 이따위 물건을 사오다니요? 아무튼 눈이 멀어도 이만저만 멀지 않았군요. 제가 드린 이 돈을 가져다 쓰시고 다시는 남한테 속지 마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홱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황약사가 급히 막아 섰다. "이런 경우 없는 짓이 어딨소? 남의 귀중한 물건들을 함부로 망가뜨려 놓고 어디로 가는 거요?" 여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대신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 드리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