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7편 (47/64)

2026-09-24 21:22:51 조회 25
그는 몸을 훌쩍 날려 현빙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는 두 손으로 얼음을 어루만지면서 다시금 백면라살을 불러 보았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백면라살이 자기를 버리고 얼음 동굴을 떠나 타향으로 가 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쓰라린 마음으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중얼거렸다. "사부님, 어딜 가셨습니까? 왜 떠나시면서 알리지도 않으셨습니까?" 그가 절망한 나머지 두 손을 맥없이 늘어뜨리는 순간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았다. 그것은 사부의 옷자락이었다. 그 옷자락으로부터 더듬어 나가니 이번엔 사람의 몸이 만져졌다. 구양적은 다급히 백면라살을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자세히 더듬어 보니 그녀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는 백면라살의 머리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 통곡을 하노라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 차디찬 얼음덩이 위에 10여 년이나 앉아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숨을 거둔 까닭은 무엇인가? '사부님께선 절대 이렇게 돌아가실 리가 없어…….' 구양적은 얼른 맥을 짚어 보았다. 역시 뛰지 않았다. 급히 가슴을 만져 보니 다행히 가슴은 그다지 차지 않았다. 그는 부랴부랴 그녀의 옷을 벗겨 던지고는 알몸을 끌어안고 현빙에서 뛰어내렸다.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으스러지게 부둥켜안았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의 알몸이 꼭 밀착되었다. 구양적은 그녀를 자기의 무릎 위에 앉힌 후 두 손을 마주잡고 수소음심경맥(手少陰心經脈)으로부터 천천히 그녀의 몸에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향을 세 대쯤 태울 시간이 지나자 가느다란 신음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구양적이 다시 내력을 주입하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소스라쳐 놀라면서 몸을 떨었다. 구양적이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며 기운 없이 물었다. "적아, 이게 꿈이냐 생시냐?" "사부님, 어찌 된 영문입니까?" 구양적이 흐느끼면서 반문했다. 그녀는 구양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만한 삶을 누린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품에 안고 더는 물으려 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새삼 백면라살의 몸매에 강렬한 매혹을 느꼈다. 그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물었다. "사부님, 지금은 좀 어떠십니까?" 백면라살은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칼을 한줌 쥐어 구양적의 얼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적아, 네 얼굴이 몹시 야위었구나, 장가 든 지 얼마 안 되니 벌써 부부싸움을 한 건 아닐 테고……." 구양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스승을 품에 안고 있는 이상 그의 마음속에는 모용쟁의 존재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적아, 너희들이 첫날밤에 누울 자리를 펼 때 내 가슴속에서는 피가 흘렀다. 내가 노래를 할 테니 들어 보아라. 내 목청이 얼마나 고운지 들어 보아라." 첫날밤의 이야기를 꺼내자 구양적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밤의 한스러운 심정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백면라살은 그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그의 품에 안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양춘가절 춘삼월에 보름달 교교한데 화촉동방 신랑신부 원앙금침 베었구나 새색시의 고운 얼굴 도화같이 탐스럽고 새신랑의 장한 얼굴 대추같이 붉었구나 개미허리 잔뜩 안고 두 얼굴을 서로 대고 엎치락뒤치락 한창 장난하노라니 삼단 같은 색시 머리 침대가에 드리웠네 ……. 구양적은 슬며시 손을 뻗쳐 스승의 입을 막았다. 백면라살은 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며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적아, 난 어렸을 때 남의 신방을 엿보러 다니길 상당히 좋아했다. 때로는 신랑 신부의 침대 밑에 기어 들어가 엿들을 정도였지. 첫날밤의 신랑 신부들이란 성급한 법이라 침대 밑을 자세히 살펴볼 경황들이 없거든. 그런데 난 나이가 너무 어려서 신랑 신부가 신방에 들어 서기도 전에 잠들어 버리곤 했지. 신랑신부가 정사를 하느라고 엎치락뒤치락, 침대가 삐걱삐걱 요란스레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서는 무서워 울음보를 터뜨리곤 했어. 한 번은 신랑 신부가 어찌나 마음이 고운지 나를 침대 밑에서 끄집어내서는 자기들 사이에 눕히는 게 아니겠니? 난 그날 밤 신방에서 신랑 신부 사이에 누워 달콤하게 잠을 잤지. 지금 생각해 보니 내 팔자가 그런 것 같다. 남의 신혼이나 방해하고 일생 동안 고독하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외로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부님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으시다면 저도 함께 죽겠습니다!" 구양적이 괴로운 나머지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건 안 돼. 적아 너한텐 집과 아내가 있지 않느냐? 네 아내를 버린다는 게 말이 되니? 그리고 넌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몸이 아니냐? " 구양적은 갑자기 스승을 품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부님, 왜 나를 멀리하려 하십니까?" 백면라살은 담담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적아, 난 남을 속여도 보았고 남을 죽여도 보았지만 너를 멀리 한 적은 없다……." "아닙니다. 사부님께선 절 멀리하셨습니다! 모용쟁에게 장가 들면 구양씨 가문에 후대가 생기게 될 거라고 하시면서 장가를 들라고 권한 사람이 사부님이 아니고 누굽니까? 내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처집니까? 사부님께선 분명히 저를 기만했습니다. 왜 나를 속였습니까?" 구양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모용쟁과 결혼은 했으나 말 못할 고충이 있었다. 그 일을 어떻게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백면라살과 .함께 이 천년 묵은 차디찬 얼음바위에 앉아 무예를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는 점차 음(陰)이 성하여 여인과의 교합이 불가능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완전히 불구가 된 줄은 생각지 못했다. 백면라살도 그가 모용 낭자와 결혼만 하면 구양 씨 가문에는 후대가 생길 수 있고 모용 낭자도 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혼한 후 그와 모용쟁은 둘 다 끝없는 고통의 심연 속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는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니 구양적은 화가 났다. 그가 갑자기 백면라살의 어깨를 잡아 쥐고 힘껏 흔들어 댔다. "사부님은 절 속였습니다! 모용쟁과 결혼시켜 사부님을 잊게 하려고 절 속인 거예요! 전 죽어 버리겠습니다. 사부님께선 한공(寒功)을 지니고 계셔서 얼음 위에서도 절대 탈이 없다는 걸 전 압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스스로 경혈을 막아 목숨을 끊으려 하셨지요? 전 사부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는 걸 그냥 지켜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백면라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난 죽어야만 해. 명전과 함께 죽지도 못하고 너와 함께 살지도 못할 바엔 내가 무슨 낙으로 살겠니? 적아, 난 너를 속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용 낭자와 성혼하여 너희들이 재미나게 산다면 아이가 없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일이냐? 난 그저 너와 모용낭자를 일단 성혼시킨 다음 기회를 보다가 투량환주지계(愉梁換柱之計)를 써서 구양씨 가문에 아들이 생기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 던 것뿐이다. 적아, 구양씨 가문에 후대가 없게 만든 건 내 죄다, 내 죄야!" 구양적은 정이 많은 사람이라 백면라살에게 정을 준 후로는 완전히 그녀에게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어려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그녀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아 온 그에게 백면라살은 생명과도 같았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자살을 하시면 저도 함께 죽겠습니다! 이제 우리 구양씨 가문에 후대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저의 아우 구양봉이 북국에서 돌아왔으니까요." 이 말에 백면라살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냐? 날 속이는 건 아니겠지?" 구양적은 구양봉이 북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대충 백면라살에게 들려주었다. "적아, 그렇다면 일이 쉽게 풀릴 듯하구나. 그럼 넌 먼저 돌아가거라. 내일 내가 찾아가서 네 아우를 만나 보겠다." 백면라살의 말에 구양적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자살하려고 한 것은 다름아니라 내가 결혼한 후 혼자서 얼음 동굴 속에서 고독에 시달렸기 때문이야.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부님과 함께 지낼 테다.' 구양적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자 백면라살은 더없이 기뻐했다. 두 사람은 모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끝없이 정담을 나누었다. 구양봉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그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저예요." 모용쟁이었다. 구양봉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또 왔을까?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형수님, 볼일이 있으시면 내일 뵙지요." 그러자 처량한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한참 후에 침묵을 깨며 모용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혹시 형님께서 이 방에 안 계신지요?" 구양봉은 의아했다. "형님께서 왜 여기 계시겠습니까? 벌써 안방으로 건너갔는데요." "안방에 건너오시긴 했어요.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어디론가 빠져 나갔어요. ……아마도 그 얼음 동굴에 있는 사부님을 찾아간 모양이군요." 모용쟁의 말에 구양봉은 할말이 없었다. 워낙 눈치가 빠른 그는 형과 형의 사부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쟁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도련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저와 함께 그 얼음 동굴에 가 봐 주실 수 없으세요?" 구양봉은 실로 난처했다. "형수님, 무서우시면 제가 옷을 입는 동안 가시를 깨우세요. 곧 나갈 테니 그때 얘기해 보죠." 구양봉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는 방을 나섰다. 가시까지 세 사람이 대청에 마주앉았다. 가시는 잠이 덜 깬 듯 두 눈을 부비고 있었다. 야밤에 사람을 깨워 촛불을 밝히고 대청에 나와 앉으라고 하니 이상한 눈치였다. 구양봉은 근심스런 눈으로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형과 백면라살 사이를 알고 있을지 염려되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다른 데로 돌리면서 모용쟁이 두 사람 얘기를 끄집어내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만일 모용쟁이 두 사람에 관하여 물어 온다면 대답하기가 무척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괴상야릇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엄연히 무학의 대가인 구양봉은 벌써부터 문밖에서 나는 버스럭거리는 소리에 잔뜩 귀를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대뜸 백타산장의 난쟁이 임일천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난쟁이가 창문에 달린 동그란 창문 고리를 쥐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는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히죽거렸다. "모용 낭자, 그새 안녕하셨소? 듣자니 낭자께선 대사막 무림의 제일인자인 구양적과 결혼했다더군. 재미가 어떠시오? 시집가기 전엔 그야말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백옥과도 같았지. 하지만 시집을 갔으니 한물갔어. 깨끗한 백옥이 더럽혀졌지 뭐야. 너무나도 아쉬워, 아쉽다구." 난쟁이는 정말 아쉬워했다. 그는 모용쟁이 결혼한 데 대해 몹시 가슴 아파 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모용 낭자는 총명하고, 얼굴은 왕색(王嗇)이나 서시(西施)와 비길 수 있고, 재주는 설도(薛濤)와 어깨를 겨를 수 있어. 그런데 왜 사내 놈팽이한테 시집은 가? 사내 놈들이란 심보가 제대로 박힌 놈은 약에 쓰려야 쓸 놈이 없어. 죄다 망나니들이지. 사내 놈한테 시집을 가 보니 뭐가 좋은가? 깨끗한 백옥에 티끌이 묻었어. 정말 아까운 일이라니까." 순간 모용쟁은 백타산장에 억류당해 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양봉은 불끈 화가 솟구쳤다. 그는 이제 시구나 읊조리고 책장이나 뒤적이던 과거의 구양봉이 아니었다.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말이야. 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날 탓하지는 말아라.' 그는 짐짓 생각을 숨기고 차가운 눈길로 난쟁이가 노는 꼬락서니를 지켜 했다. 모용쟁이 참다못해 쏘아붙였다. "임일천, 이 놈아, 난 이미 결혼한 몸이다. 계속해서 함부로 떠들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난쟁이가 넉살좋게 말을 받았다. "모용 낭자님, 난 요새 새 궤짝을 얻었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월등한 걸로 말이야. 이전 궤짝도 크게 나무랄 데는 없지만 저절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흠이었지. 밤중에 일어나 계집 구경을 하려면 나귀가 연자방아 돌리듯 내가 빙빙 돌아야만 했으니 마음이 심란해서 자세히 구경할 수 없었지. 이 새 궤짝을 구해 놓고 난 부랴부랴 낭자를 찾아왔어. 날 따라가서 궤짝 안에 들어가 봐. 낭자 맘에 쏙 들 거야." 모용 낭자를 건너다보는 난쟁이의 눈에는 음욕이 흘러 넘쳐 마치 모용 낭자를 통째로 삼킬 듯했다. 모용쟁은 더럭 겁이 났다. 그의 태도로 보아 무서운 흉계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던 것이다. 그녀는 북국에 다녀온 구양봉의 무예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양적이 없는 지금 자기와 구양봉의 힘과 무예만으로는 난쟁이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때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드는 듯한 버스럭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오자 난쟁이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 들었다. 피리는 새까맣고 아주 작았는데 돌로 만든 것 같았다. 난쟁이가 피리를 입에 대자 삘리리삘리리 괴상한 가락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가 울리자 방문과 창문들이 와락와락 열렸다. 놀랍게도 네 개의 창문에 모두 사람이 지켜 서 있는데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는 두 손으로 창문들을 거칠게 잡아채서 사정없이 부수어 버렸다. 문짝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나서 땅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렸다. 다른 한 창문에는 쌍환 기노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백면라살한테 크게 다친 그는 구양 형제한 테 복수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가 쌍환을 휘둘러 창을 부수자 그 서슬에 벽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세 번째 창에는 만도 마혁이 서 있었는데 그는 만월도를 휘둘러 창문을 짓부숴 놓았다. 마지막 창에는 쌍검 옥문이 서서 왼손에는 장검을 잡고 오른손에는 단검을 잡은 채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 사람은 살기등등하여 난쟁이가 명령만 내리면 구양봉과 모용쟁에게 덮칠 기세였다. 난쟁이는 피리만 불 뿐 두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름 끼치는 피리 소리가 점점 드높아졌다. 피리 소리에 맞추어 부서진 창문으로 수많은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기어들기 시작했다. 대가리를 빳빳이 쳐든 독사들은 스르륵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에게 접근해 왔다. 구양봉은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손에 단검을 잡고 대기하고 있는 그녀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구양봉은 냉큼 모용쟁에게 뛰어가 그녀를 옆구리에 끼고는 자기 침대로 날아왔다. 그는 침대 복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런 자세로 앉으면 앞뒤의 독사들을 막을 수 있 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대청 안은 독사들로 우글거렸다. 피리의 가락이 빨라지자 수백 마리의 독사들이 춤을 추면서 구양봉의 침대로 바싹 몰려들었다. 독사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두 사람을 물어 죽이려고 기회를 노렸다. 다급해진 구양봉은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용쟁을 바짝 끌어당겼다. 두 손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독사들을 향해 두 손을 천천히 펼쳐 들었다. 구양봉은 난쟁이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임일천! 이 따위 독사들을 풀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느냐?" 구양봉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품속에 안긴 모용쟁은 백타산장의 난쟁이와 독사 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구양봉의 거동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 난쟁이 쪽에서 반응이 없자 구양봉은 위협조로 말했다. "임일천, 네 놈이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순순히 타이를 때 이 독사 떼를 거두어 당장 떠나거라." 임일천은 웃음을 터뜨렸다. "구양봉, 내가 알기로는 그 계집은 네 형수인데, 예끼 이 놈아, 시동생이 형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다니, 그게 할 짓이냐? 그리고 모용 낭자도 너무하시는구만. 사내를 몇 놈이나 호려 내야 성이 차겠소? 구양적한테 시집간 것은 옥에도 티가 있겠거니 하면서 눈감아 주려고 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네 년한텐 서방이 한둘이 아니구나. 예끼 더러운 년!" 그는 말을 마치더니 피리를 더욱 급하게 불어 댔다. 잦은가락에 맞추어 구양봉 주위에 모여든 독사들은 일제히 대가리들을 치켜 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모용쟁은 난쟁이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켜 구양봉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모용쟁이 품에서 빠져 나가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구양봉은 다급히 모용쟁의 견정(肩井), 환도(環跳) 두 혈을 찔렀다. 모용쟁은 꼼짝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구양봉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임일천, 네가 사람을 죽이려 드는구나. 하지만 네 대가리를 조심해라! 옛 성인들의 말이 있다. 예절이 아무리 엄해도 사정에 따 라야 한다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건져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 " 이때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빈정거렸다. "구양봉, 네 놈이 어디 손만 잡았느냐? 형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지 않느냐? 백주에 남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 지랄인데 남의 눈이 없는 데서는 무슨 짓거린들 안 했겠냐? 이 사람 가죽만 쓴 짐승 같은 놈아!" 쌍검 옥문은 모용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양씨 가문의 가풍이 원래 저렇게 더러운데 어찌 도덕 군자가 있을 수 있겠어? 더구나 모용쟁 같은 화냥년이 꼬리를 치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나?" 모용쟁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날 이때까지 그녀는 깨끗하게 몸을 지키려 했지만 이르는 곳마다 수모를 당하고 유린을 당해야 했다. 구양씨네 두 형제조차 그녀에게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주었다. 게다가 이러쿵저러쿵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보니 여린 여자의 마음으로 차마 감당하기 마려웠다. 독사들은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구양봉의 주위는 이미 독사들로 가득했다. 구양봉은 재빨리 손을 뻗쳐 독사 대가리를 잡더니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독사 대가리가 부러졌다. 독사는 대가리를 들지 못하고 몸뚱이만 움직여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 수많은 뱀을 어떻게 손가락만 가지고 막아낼 수 있겠는가. 곰곰이 궁리하던 구양봉은 종남산에서 왕 중양이 신을 벗어 들고 신바닥으로 단황의 불호(佛號)와 황약사의 옥소를 막아내던 광경을 떠올렸다. '옳지, 지금 이 장면이 그날 종남산에서 벌어졌던 광경과 뭣이 다른가?' 구양봉은 모용쟁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휘익 던졌다. 단검이 둥그런 원을 그으면서 한바퀴 날자 독사 대가리들이 이리저리 잘려 나가고 몸뚱이들이 맥없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대가리가 잘린 독사는 2, 30마리밖에 안 되었다. 갑자기 구양봉은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매가 울고 학이 끼룩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밤하늘에 멀리 울려 퍼졌다. 세상 만물은 모두 상생상극(相生相克)하는 법이다. 난쟁이의 피리 소리를 듣고는 구양봉과 모용쟁을 물어 죽일 듯 설쳐 대던 독사들이 구양봉의 휘파람 소리에 저마다 대가리를 땅에 처박고는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난쟁이는 소스라쳐 놀랐다. 원래 그는 구양적과 싸우려 했었다. 구양적을 생포하여 그를 인질로 삼아 백면라살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구양적은 없고 구양봉과 모용쟁만 집을 지키고 있자 더욱 쾌재를 올렸다. 구양적이 없는 데서 구양봉과 모용쟁을 생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에게 이런 대단한 술법이 있을 줄이야! 난쟁이는 내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타산장의 주인이며 서역 대사막의 간웅으로 불리는 임일천이 만만하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는 방안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저 연놈을 죽여라!" 영이 떨어지자 창 밖에 있던 네 사람이 뛰어들었다. 다름아닌 대사막의 4걸이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이 우리 산군을 노엽게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어거풍은 매 발톱처럼 두 손가락을 세워 마구 할퀴려 들었다. 쌍검 옥문도 앙칼진 소리를 지르며 구양봉의 눈언저리를 향해 장검을 내찔렀다. 만도 마혁은 구양봉의 등뒤에서 휙휙 바람을 일으키며 만월도를 사납게 휘둘렀다. 쌍환 기노는 구양봉을 박살내려는 듯 금환으로는 머리를 겨냥하고 은환으로는 앞가슴을 겨냥하며 쌍환을 휘둘렀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모용쟁은 구양봉의 품에 안겨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구양봉과의 지난 일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지금 돌이켜보니 구양봉한테는 남다른 점들이 많은 것 같았다. 비록 무예는 닦지 못했지만 사람됨이 소탈했다. 사막에서 자기가 여러모로 놀려대고 괴롭혔지만 시종일관 기품을 잃지 않은 구양봉이었다. 모용정은 얼음누에의 독에 중독되어 하는 수 없이 구양적과 결혼한 뒤 차츰 자기들이 결혼하게 된 내막을 알게 되면서 구양적을 미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