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6편 (46/64)
구양봉은 자리에 앉아서 대청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대청 안에는 열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가장 복판에 앉은 이가 바로 홍칠이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마치 늙은 중이 좌선을 하듯이 입을 꾹 봉하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몸집이 유달리 우람하고 나이가 젊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홍칠을 재촉했다. "칠공께서는 생각을 다 하셨소? 다 하셨다면 빨리 예를 올려야 하잖겠소?" 그러자 홍칠이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이미 여러분한테 말을 했지 않나? 그 노릇을 하는 게 맘이 편치 않다고. 난 언제나 하늘에서 마음대로 떠도는 구름처럼, 들판에서 제멋대로 노니는 학처럼 살아왔네. 그런 내가 어찌 방주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이러는 거 난 정말 달갑지 않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노유각, 자넨 개방에서 제일 젊은 장로네. 자네는 어딘지 생각이 모자라는 것 같아. 칠공께서 마다하시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시는 게 아니겠나?"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이번에는 홍칠을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칠공에게 묻고 싶소. 칠공이 보기엔 누가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해야 합당하겠소?" 이 질문에 홍칠은 대답을 못 했다. 그는 좌우를 두루 살펴보았다. 한참 말없이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는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는 적임자가 하나도 없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장로가 입을 열었다. "이 팽충(彭沖)의 생각으로는 칠공이 중임을 짊어져야 하오. 소 방주님께서 떠나가셨고 우리 개방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소. 칠공이 마다하면 우린 어떻게 하겠소? 소 방주님께서 임종시에 칠공한테 누가 우리 개방의 발주 노릇을 해야 할지 물었지요? 그때 칠공은 대답을 못하지 않았소?" 소씨 거렁뱅이의 말이 나오자 홍칠은 당장 침울해지며 비애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소. 사부님이 물으시는데 속에 없는 빈말을 할 수는 없었소." 팽충이 즉시 덧붙였다. "소 방주님께서는 칠공더러 꼭 방주 자리를 이어받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요. 그분은 그저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 개 쫓는 타구봉을 넘겨주셨을 따름이오. 내 말이 틀리오?" "틀림이 없소." "그럼 됐지 않소! 칠공이 타구봉을 받아 쥐자 소 방주님께선 비로소 숨을 거두셨소. 내 말이 틀리오?" "틀림이 없소." 팽 장로와 다른 장로들이 일제히 떠들어댔다. "칠공은 타구봉을 넘겨받고도 왜 방주 자리는 넘겨받으시려 하지 않는 거요?" "칠공은 소 방주님 앞에서는 대답을 해 놓고 왜 싫다는 거요? 화산에서 벌어질 무예 시합이 겁나서입니까? 왕중양이 무서워 그렇소? 황약사와 단지흥이 무서워 그렇소?" 여러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한꺼번에 떠들어댔다. 홍칠은 어이없는 듯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소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그들을 무서워한다고? 5년 후 화산에서 그들과 싸우는 걸 보시오.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소. 강룡십팔장에는 일부 허점이 있다고 말이오. 나더러 그 허점을 보완하라고 신신당부하셨소. 난 5년 동안 조용히 몸을 숨기고 무예를 연마할 작정이오.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법을 몸에 잘 익히기만 하면 그 어떤 적수라도 거꾸러뜨릴 수 있소. 난 천하 무림의 일인자가 되어 화산 꼭대기에서 우리 개방의 위풍을 떨칠 작정이오." 장로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렸다. 홍칠에게 이처럼 높은 뜻이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팽 장로가 입을 열었다. "칠공이 천하 무림의 일인자가 된다면 우리 개방의 더 없는 행운입니다. 하지만 방주 자리를 맡아도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지장이 없을 줄 아오. 방의 사무는 우리 형제들이 어련히 다 맡아 할 테니까 칠공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십시오. 절대 방의 시시껄렁한 일로 시끄럽게 굴지 않을 테니까요. 이래도 안 되겠소?" 홍칠도 더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좋소, 그럼 내가 방주 노릇을 하겠소. 하지만 여러분들이 문하의 제자들한테 알리시오. 나를 시끄럽게 쫓아다니지들 말라고 말이오." 장로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구 난 여러분들의 금의파니 오의파니 하는 시비 장단엔 절대 춤을 추지 않겠소. 비단옷을 입든 넝마를 주워 입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거요. 그래도 괜찮겠소?" 홍칠이 어떤 조건을 내놓든 장로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다들 홍칠이 방주 노릇을 하겠다고 승낙한 것만도 고마운데 이런 것쯤이야 양보를 못 하겠느냐는 식의 태도였다. 한쪽에 앉아 장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구양봉은 뜻밖에 낯익은 얼굴을 둘이나 발견했다. 이 둘은 형제 간으로 모두 구양봉의 사형들이었다. 그들은 제갈정, 속문성, 석초수와 함께 구양봉을 변경에서 북국으로 끌고 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얘기해본 적이 없어 그들의 성과 이름은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이 시각 이 두 형제가 홍칠과 마찬가지로 개방 장로의 신분으로 대청에 앉 아 있는 것을 발견한 구양봉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은 이 형제가 언제 개방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개방에 가입한 지 오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방에 가입한 지 오래지 않다면 어찌 개방의 열두 장로 속에 끼일 수 있겠는가. '좋다, 네 놈들이 몽땅 여기에 있구나. 오늘은 네 놈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네 놈들을 잡아죽여 사부님의 원수를 갚겠다!' 구양봉의 가슴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의 핏속에는 사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의 뛰어난 무예는 사부가 가르쳐 준 것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사부를 은인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두 사형이란 자가 점잖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사부가 임종시에 이 두 놈을 저주하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네 놈들을 꼭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개방의 장로회의는 더는 길게 끌 것 같지 않았다. 한 장로가 일어나더니 거지 무리를 향해 홍칠이 새 방주가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열두 장로가 다 모였는지라 곧장 방주 취임식에 대한 논의로 들어갔다. 거지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홍칠은 다른 장로들에 비해 무예가 월등했을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도 솔직했기 때문에 평소에 거지무리의 환심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악인들을 죽일 때는 가차없이 죽였고 개방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거지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홍칠이 새 방주가 되자 모두들 흡족해 했다. 그 자리에서 개방 방주의 등위대전(登位大典)이 거행되었다. 홍칠이 한복판에 나가 앉았다. 그는 엄숙한 낯으로 똑바로 앉아서 거지들을 내려다보았다. 홍칠을 중심으로 열한 명의 장로가 차례로 앉았다. 모두 정돈하여 앉자 집법장로인 팽 장로가 사회를 보았다. "개방의 새 방주이신 홍칠공께서 취임하셨습니다. 방내의 제자들이 나와서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팽 장로의 말이 떨어지자 방내의 제자들이 줄줄이 앞으로 나가더니 홍칠의 몸에다 침을 뱉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한 번씩 뱉었지만 삽시에 홍칠의 온몸은 침투성이가 되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구양봉은 기가 막혔다. '보아하니 거지방 방주 노릇 하기도 쉽지가 않구나. 남들이 참아 내지 못하는 것을 참아 내야 하고, 남들이 견뎌 내지 못하는 고초를 견뎌 내야 하는구나. 저렇듯 침을 뱉는 것은 수천 수만의 침벼락을 무릅쓰고 나서야 비로소 방주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인 모양이다.' 이때 방금 자기를 알선하여 앞자리에 앉혀 주었던 거지가 말을 건넸다. "여보게, 자네도 방주님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나가서 침을 뱉으라구." 거지는 다짜고짜 구양봉을 잡아 끌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당황했으나 자기도 개방의 제자인 것처럼 가장한다면 홍칠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주에 자세히 뜯어보아도 누군지 잘 모를 텐데 황차 밤인데야.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고 앞에 나서서 문안을 올렸다. "방주님, 개방의 제자 구양평이 방주님께서 만사 여의하시길 바라옵나이다!" 홍칠은 다른 제자들의 문안을 받을 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구양봉이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서 물러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게 섰거라!" 홍칠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 왔다. 구양봉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가슴은 마치 쌍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홍칠이 날 알아본 게로구나. 내 모습이 많이 변했을 텐데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 만일 내가 개방의 제자가 아니라는 게 발각되면 홍칠의 한마디 영에 거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텐데 큰일이구나!' 그는 여러모로 생각을 굴렸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선 채 홍칠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넌 누구냐?" "소인은 본방의 제자올시다. 이 고장에 살고 있습니다." 구양봉이 대답하니 홍칠은 다시 묻지 않았지만 한편에 서 있던 집법장로가 구양봉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넌 누가 데려온 자냐 ? 누굴 따라왔느냐?" 구양봉은 누구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형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소인은 이 두 분을 따라왔습니다." 홍칠은 구양봉을 바라볼 뿐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다가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구양봉이오."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두 사람의 귀에는 마치 천둥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혀가 굳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 중의 하나가 홍칠을 향해 말했다. "방주님, 이 사람은 우리 개방의 제자가 맞습니다. 저희들 두 형제가 데려왔습니다. 방내의 예법을 잘 모르고 있으니 이후에 저희들이 잘 가르치겠습니다." 이 두 형제는 구양봉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이 석초수를 죽여 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구양봉이 자기들도 죽일까 봐 겁이 나서 그를 비호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칠은 거지떼를 둘러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본방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소. 기실 이 고장은 무슨 요충지도 아니니까 문제가 일어날 것도 없겠지만. 다들 푹 쉬었다가 각자 일을 보도록 하시오." 그가 말을 마치자 거지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하고는 허리 굽혀 인사를 한 뒤 흩어지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구양봉을 흘낏거리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석초수마저 죽여 버린 무서운 인물이 아니던가. 한편 그들은 자기들이 유운장의 노독물 문하에 있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까 봐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이 일이 폭로되면 그들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구양봉이 재촉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날 따라오게." 두 사람은 말없이 구양봉을 따라 오관묘를 빠져 나와 널따란 공지에 이르렀다. 구양봉은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네 놈들을 만나게 되다니 여간 반갑지 않구나. 사부님께서 임종하실 때 난 굳게 맹세했지. 네 놈들을 몽땅 잡아죽이겠다고. 오늘에야 비로소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구나." 두 형제는 말없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갑자기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동시에 구양봉을 덮쳤다. 그들의 무예는 석초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선수를 쓰기는 했지만 아주 조심스러웠다. 둘 중 하나는 공격 하고 하나는 방어하면서 진퇴를 묘하게 조절했다. 구양봉은 오랫동안 허점을 노렸으나 그들의 일공일수(一功一守), 일진일퇴(一進一退)는 극히 규칙적이고 주도면밀했다. 구양봉은 두 사람과 20합이나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구양봉은 몹시 화가 났다. '사부님의 60년 공력을 몸에 익힌데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합마공을 가진 난데 네 놈들 따위한테 질 성싶으냐?' 그는 갑자기 몸을 낮추어 두꺼비처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꾸르륵꾸르륵 괴상야릇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두 노독물 문하의 제자인지라 이 소리를 듣고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들은 요행을 바랐었다. 이 싸움에서 자기들이 이기면 구양봉을 죽여 심복지환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요, 진다 해도 이곳 개방의 세력이 크고 사람들이 많으니 구양봉에게 맞아죽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이 합마공을 쓸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 그들은 당황하여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틈을 주지 않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을 향해 양손바닥을 동시에 내밀었다. 두 사람은 저항 한번 못해 보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구양봉이 내려다보니 두 형제는 이미 숨이 끊어져 늘어져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중구법(重手法)으로 두 녀석의 머리를 한 번씩 내리쳤다. 삽시에 두 녀석의 두개골이 으깨지고 칠규(七窺)에선 시뻘건 피가 콸콸 흘러 나왔다. 구양봉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결전에 임하자 구양봉 자신도 긴장했었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자기의 타격 한 번에 두 녀석이 당장 쓰러져 숨을 거두자 그는 너무나도 놀랍고 기뻤다. 그는 예전과는 달리 사람을 죽인 데 대한 자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두 시체를 태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막 자리를 뜨려는데 두런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까 그 낮선 자식이 괴상한 술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 자식이 부르니까 두 형제가 즉시 따라 나섰어.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 두 형제의 하인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아. 방주님께선 아마 이상한 기미를 느끼신 것 같아. 안 그러면 왜 우리더러 나가서 찾아보라고 하셨겠어 ?"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자 구양봉은 급히 몸을 감추었다. 두 사람은 공지에서 시체 둘을 발견하자 놀라서 소리를 질러 댔다. 한참 소리를 질러 대던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더니 허겁지겁 그들의 방주에게로 달려갔다. 개방의 두 장로가 비명횡사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26장 돌아온 구양봉 구양봉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 대 사막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마치 새 주인이 신접살림을 꾸리느라고 깨끗하게 가꿔 놓은 것 같았다. 제일 눈을 끄는 것은 대청이었다. 꽃병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꽂혀 있고 한쪽 구석엔 자그마한 책장을 새로 놓았는데 책장 안에는 책들이 적지 않게 꽂혀 있었다. 다가서서 살펴보니 당대의 사람들이 남긴 글과 시들을 묶은 책들 여러 권과 불경들이었다. 책들이 가지 런히 꽂혀 있지 않고 들쭉날쭉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늘 뽑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청 안을 둘러보니 특별히 더 달라지진 않았으나 전에 없이 정갈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구양봉이 대청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안방에서 계집애 하나가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첫눈에 가시를 알아보았다. 가시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손님은 누구세요? 우리 집 도련님을 찾아오셨나요?" 구양봉이 큰소리로 말했다. "가시야, 날 못 알아보겠니 ? 난 이 집의 둘째 도련님이다. 둘째 도련님이란 말이야." 가시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양봉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비록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수염이 텁수룩했지만 정기 도는 두 눈에서 그의 옛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나오세요, 빨리요. 둘째 도련님…… 둘째 도련님이 오셨어요!" 잠시 후 몇 사람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다름아닌 형 구양적과 모용쟁, 그리고 구씨 할멈이었다. 형은 구양봉을 보자 텁석 두 손을 잡았다. "네가 살아 있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난 줄곧 네가 죽은 줄로만 ……." 구양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죽다니요, 내가 왜 죽어요?" 구양적은 여전히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눈길로 구양봉을 보고 또 보았다. "살아 있으니 됐다. 살아 있으니 됐어!" 구양적은 이윽고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당신도 인사를 해야지!" 형의 등뒤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모용 낭자였다. 모용쟁과 눈길이 마주치자 구양봉은 그제야 자기가 부랴부랴 대사막에 돌아온 까닭을 상기했다. 모용쟁의 모습은 변해 있었다. 전보다 더욱 아름답고 얌전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는 구양봉을 보고 가볍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말이 없었다. 구양적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두서없이 떠들어댔 다. "돌아왔으니 잘됐다. 난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난 사부님과 함께 북국에 가서 너를 애타게 찾았지. 유운장은 폐허가 됐더라구. 그래서 수소문을 해 보니, 모두들 유운장에는 살아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들 하지 않겠니? 아무리 찾아도 종적이 묘연해서 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실로 하늘이 보살폈구나. 우리 구 양 가문의 행운이랄밖에……." 그는 상봉의 기쁨에 들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날 밤, 구양봉은 홀로 방안에 누워 이 몇 년 동안의 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전벽해라더니,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와 모용쟁이 대사막에서 서로 아이들처럼 다투던 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지금은 모용쟁이 형수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런 무예도 익히지 못해 일개 아녀자한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던 그가 절세의 신공인 합마공을 배워 무 림의 둘도 없는 고수가 되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기척 소리가 들려 왔다. "도련님, 주무세요?" 모용쟁의 목소리였다. 그는 당황했다. 이 깊은 밤에 왜 왔을까? "형수님이시군요. 아직 자지 않고 있습니다." 모용쟁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더니 탁자에 마주앉았다. 그녀는 마치 심심해서 놀러 오기나 한 것처럼 책을 뒤적이다가는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한참 후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유운장에서 대관절 무얼 했어요?" 구양봉이 점쟁이에게 이끌려 유운장에 간 후 보고, 듣고, 겪은 갖가지 일들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구양봉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가슴속에 쌓아 둔 채 누구한테도 들려준 적이 없었다. 모용쟁의 질문에 구양봉은 그간의 일들을 낱낱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봉아, 잠이 들었느냐?" 순간 두 사람은 말을 뚝 끊고 낯빛이 굳어졌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구양봉은 몹시 당황했고, 모용쟁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시동생과 형수가 야밤 삼경까지 호젓한 방안에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들 의심하지 않으랴. 구양봉은 급히 대답했다. "형님, 전 아직 자지 않고 있습니다. 형수님과 한창 한담을 하고 있는 중인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구양적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모용쟁을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낮에 네가 겪은 일들을 자세히 들을 짬이 없어서 밤에 이렇게 찾아왔다." 구양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네며 의자에 앉았다. 모용쟁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형제분끼리 얘기 나누세요. 전 졸려서 가 봐야겠어요." 그녀는 두 형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쟁이 자리를 뜨자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그 동안 자기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방금 모용쟁을 앞에 두고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은 터라 다시 되풀이할 흥이 나지 않았다. 그는 떠듬떠듬 몇 마디를 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구양적은 자기와 모용쟁의 혼사를 대강 이야기했다. 하지만 스승과 자기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역시 자기의 속은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몇 마 디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형제는 서로 생사를 모르다가 기쁘게 상봉을 했지만 정작 무릎을 대고 마주 앉으니 할말이 없었다. 형제간의 사이가 전과는 달리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밤은 깊어 칠흑같이 캄캄했다. 구양적은 모용쟁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슬그머니 집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나는 듯이 산꼭대기의 거인석을 향해 달려갔다. 바위 앞에 이르자 그는 두 손으로 바위틈을 더듬어 몸을 날려 얼음 동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횃불도 켜지 않고 눈어림으로 동굴 안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런데 전과는 달리 얼음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가슴이 후둑후 둑 뛰었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 그러나 그의 외침은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여 천년 묵은 현빙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