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4편 (44/64)
그는 숙연해져서 입을 열었다. "단황께서 좀더 상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단지흥이 말했다. "당신 손에 《구음진경》이 놓이게 된 것은 하늘이 사람을 빌어 당신 손에 놓이게 한 것입니다. 공로니 과실이니, 옳으니 틀리니 하는 것은 모두 인심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그것을 얻은 것도 하늘의 뜻이요 그것을 잃는 것도 하늘의 뜻이지요. 하늘의 뜻이라면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구음진경》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데 그야말로 넘 치는 생각이지요." 왕중양은 크게 깨닫고 단지흥에게 예를 올렸다. 그의 한마디에 경서를 얻은 후 가졌던 모든 번뇌가 연무(烟霧)로 화하여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황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내가 쓸데없는 근심을 하고 있었구나.' 단지흥이 말을 이었다. "인생은 고달프고 짧은 것이므로 저도 기실 중양 진인과 다툴 필요가 업습니다. 하지만 저도 세속의 기분을 초탈하지 못한지라 호승심이 없지 않습니다. 중양 진인, 해 봅시다." 왕중양도 정색을 하였다. 그는 단지흥의 무공이 천하에서 일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리 단씨의 무공은 그 가학(家學)이 해박하고 과인하여 그것에 맞설 경우 대체로 패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그것과 맞서는 판이니 아주 신중해야 했다. 단지흥이 담백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진짜 신기(神技)를 보여주지 않는다 해도 그의 무공은 여전히 대단할 것이었다. 단지흥이 왕중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양 진인, 어서 손을 쓰시오." 왕중양은 천천히 나아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것은 그의 선천공(先天公)의 출수식(出手式)으로서 '명심향불(明心向佛)'이었다. 이 선천공은 일종의 기공으로서 손을 내미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이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느낄 때 손을 내밀 따름이다. 선천공의 화식(化式)은 상대방이 술법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면 그 변화 과정을 보아 그에 따라 법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지흥은 일양지공을 써서 왕중양과 맞섰다. 그는 우선 일양지공으로 육맥신검 가운데 소충검(少凉創)을 펼쳐 냈다. 이 검법은 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할 뿐이지만 손가락 뒤에는 팔이 있고 팔 뒤에서는 몸이 받쳐 주므로 극히 무서운 것이었다. 왕중양은 비록 선천신공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단지흥이 내력으로 내포는 법수의 위력에 몸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다 왕중양은 그 일양지신공에 몸이 찔려 '퍽퍽!' 하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그것들은 모두 요해처가 아니었고 혈도를 겨냥한 게 아니었다. 왕중양은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선천공으로 전신을 충만시켜 온몸을 바람 받은 돛폭처럼 부풀려 내력으로 가득 차게 했다. 단지흥이 일발지로 그의 몸을 찔렀으나 의복만 뚫고 들어갔을 뿐 몸은 상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전진검법을 썼는데 왼손을 검처럼 쓰면서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전진검법은 일양지공과 대치되어 두 사람의 무공은 점점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졌다. 싸움을 구경하는 동안 구양봉은 아주 놀랍고 신기함에 가슴이 다 설레었다. 그는 과거와는 달라서 단지흥이 손을 내미는 것만 보고도 그의 일양지공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만일 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더라면 난 아마도 피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봉황력 경공을 쓰기만 하면 그것을 쉽사리 피할 수가 있어. 만일 그가 손가락을 내밀기만 하면 난 합마공으로 대적하여 겨루어 낼 수 있지. 하지만 저 사람과 맞붙을 때 저 귀신같은 손가락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만일 저 손가락에 찔리기만 하면 견디기가 여간 어렵지 않겠어.' 왕중양의 전진검법을 보니 실로 대가다운 기백이며 명가의 풍도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검을 쓸 때는 대체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군자의 검을 쓰는 법도이다. 무제무사(無詭無邪)하고 불편불격 (不偏不激)한 것이, 중양 진인처럼 검을 쓰는 사람은 실로 천하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참 열전을 벌이다가 왕중양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단황께 이 중양은 할말이 없습니다. 단황께서 《구음진경》을 보시려거든 보십시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절묘하기 그지없어 이 중양이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입니다." 단지흥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중양 진인, 저는 자그마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변경 해관의 작은 관리가 우연히 하늘의 인연을 얻어 일국의 임금이 된 것으로서 심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대리는 재난이 많은 고장으로 저는 그것만 돌보기도 벅찬데 어느 겨를에 《구음진경》을 읽고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대리에서 제왕 노릇을 하느라고 강호의 일에 간섭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로군. 행동거지는 물론 사람됨을 봐도 자기의 제왕실가(帶王室家)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거든. 이런 사람은 《구음진경》을 얻는다고 해도 화가 되진 않을 거야. 저 사람이 《구음진경》을 요구하지 않는 데는 아마도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 황약사가 볼 때 왕중양과 단지흥 사이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손이 나가는 대로 대처하는 것 같았다. 몇십 합을 싸우는데 법수는 아주 교묘해도 그다지 위험한 장면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속으로 은근히 냉소하면서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일양지공이라는 게 겨우 이 정도이며 왕중양은 고작 전진검법이니 전진파장법(全眞派掌法)밖에 갖고 있지 못한가 하고 생각했다. 단지흥이 입을 열었다. "제가 중양 진인과 시합을 해 보니 이 《구음진경》은 오로지 중양 진인의 손에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늘이 《구음진경》을 내려보냄에 사람을 바로 골랐다고 여겨집니다. 중양 진인께서 이 경서를 가지고 천하의 무림에 복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단지흥은 말을 마치고 몸을 훌쩍 날려 뒤로 물러서더니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쯤에서 단지흥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단황께서는 중양 진인과 더는 시합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단지흥이 대답했다. "난 이미 중양 진인과 시합을 했습니다. 중양 진인이 이렇듯 늠름할 수 있는 것은 《구음진경》이 있고 없고와 무관한 것인 줄 압니다." 한쪽에서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소씨 거렁뱅이가 드디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왕중양, 당신이 중원 무림의 대단한 고수라는 걸 난 알고 있소. 나 소씨 거렁뱅이가 혹시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소. 하지만 나한테는 거지 무리의 두 가지 신기가 있어 당신과 엇비슷이 맞설 수는 있을 거요. 난 당신한테 먼저 나의 타구봉법을 맛보이고 그 다음에는 강룡십팔장을 맛보이겠소." 왕중양도 개방파의 이 두 가지 절기를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선배님께서 손을 써 보십시오." 소씨 거렁뱅이가 손에 곤봉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죄를 짓게 되었소. 거지들의 몽둥이란 워낙 개를 때림으로써 자기를 보호하는 것인데, 오늘 중양 진인을 적으로 삼았으니 이 타구봉법이 이로 인해 빛을 내게 되는가 보오." 왕중양은 속으로 쓴웃음을 웃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가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쓴 인간임은 알고 있었지만 입만 벌리면 타구봉 타령을 하는 데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래, 네가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을 한 마리의 미친개로밖에 여기지 않는대서야 말이나 되는 일이냐?' 왕중양이 아무리 품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어찌 참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조용히 서서 두 손을 들어 자세를 갖추며 말했다. "소 선배님, 어서 시작해 보시지요!" 소씨 거렁뱅이도 손을 씀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였다. 그는 손을 쓸 때마다 타구봉법 중의 '점(粘)'자에 집착하여 '봉조나견(棒조(兆)癩犬)'법으로 왕중양을 밀어붙이려 했다. 왕중양은 몸을 훌쩍 날리면서 그의 곤봉을 피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반격을 가했는데 그 손바닥의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팍!'하는 큰소리와 함께 소씨 거렁뱅이의 몸뚱이가 한쪽으로 밀려 탔다. 그 바람에 소씨 거 렁뱅이는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날리 강호의 세속 먼지 속을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사람인지라 명성 따위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조심하게!" 그는 몽둥이를 들고 왕중양을 향해 재도전을 했다. 몽둥이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가볍게 솟아오르는가 싶으면 급작스레 내리꽂히고, 또 어느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화를 부렸다. 그 봉법이 하도 괴이하고 놀라워 사람들은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왕중양은 소씨 거렁뱅이를 따라 이동하기만 하면서 주먹 한 번 제대로 내밀지 못하는 태도였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의 주변을 왔다갔다할 뿐 어떻게 손을 쓰는지조차 볼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타구봉법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평소에 다른 사람과 맞붙었더라면 벌써 백 명의 호한이라도 때려눕혔을 것이고 한 무리의 미친 개라도 몽땅 쓰러 눕혔으련만 왕중양에 관한 한 사정이 달랐다. 소씨 거렁뱅이가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 내게 강룡십팔장이라는 절기가 있네. 자네 한번 시험해 보려나? 나의 이 장법에 견뎌 낼 수 있겠는가 말이야." 왕중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대답했다. "선배님의 절기를 배우도록 하지요." 소씨 거렁뱅이가 소리쳤다. "왕중양, 너무 겸손 떨지 말게. 만일 자네가 나의 강룡십팔장을 이겨 낸다면 내가 자넬 선배로 모시지. 그리고 더는 자네와 그 《구음진경 》을 다투지 않겠네." 소씨 거렁뱅이는 타구봉을 팽개치듯 내던졌다. 곤봉은 공중에서 휙 소리를 내며 곧장 아래로 내려와 홍칠의 손에 떨어졌다. 홍칠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손에 받아 쥐었다. 곤봉을 받아 쥐는 흥칠의 재주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제야 이 홍칠의 무공이 소씨 거렁뱅이 못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왕중양과 겨루는 바람에 그가 재주를 보여 줄 수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지 무리의 법도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의 강룡십팔장은 대단한 무공으로서 힘이 아주 좋아야 그걸 쓸 수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한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아 근 60년에 달하는 동자공(童子功)을 몸에 지닌 탓으로 그가 이 강룡십팔장을 사용할라치면 여간 무시무시한 게 아니었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어 '견룡재전'을 밀어붙이자 '팍!' 하는 큰소리와 함께 중양의 몸 뒤에 있던 돌이 밀려 넘어지며 그대로 박살이 났다. 왕중양은 가볍게 날아서 몸을 옮겼다. 그는 선천신공을 써서 소씨 거렁뱅이의 손바닥을 피했는데 털끝만큼도 상한 곳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당황한 나머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거지 무리라고 해도 천하에서 가장 큰 거지 무리가 아닌가? 만일 이 소씨 거렁뱅이가 왕중양과 일전을 벌여 우리 거지 무리의 두 가지 신기를 다 쓰고서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소씨 거렁뱅이를 무능하다고 비옷을 것이다. 이 일을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되겠다.' 예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또다시 '항룡유회'란 술법을 썼다. 손을 수평으로 내미는 술법으로 그가 머리를 돌렸다가 다시 몸을 돌이키면서 손을 내밀자 용맹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이 소리는 아까의 소리보다 더 둔탁했다. '쿵!' 하는 소리가 나자 왕중양도 두어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왕중양이 여전히 행약무사(行若無事)한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렇게 패하고야 마는 것인가? 이 왕중양이란 물건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가? 두 번이나 손바닥으로 가격했는데도 여전히 끄떡없으니, 그래 신선이라도 된단 말인가?' 소씨 거렁뱅이가 어찌 알겠는가. 왕중양은 워낙 그보다 무공이 높았지만 《구음진경》을 본 후로는 그 무공이 자기도 모르게 한 차원 높아진 상태였다. 그는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의 정지(精旨)를 깨달았으므로 무학의 도에 관한 한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방금 자기의 신장(神掌)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강맹장법(剛猛拳法)에 대처하려다가 갑자기 《구음진경 》에 있는 한 단락의 말을 기억해 냈다. 〈혹시 몸이 근질거리거나, 혹시 몸이 물건에 눌린 듯이 무겁거나, 혹시 몸이 가벼워 날 것 같거나, 혹시 묶인 것 같거나, 혹시 추위로 열이 나거나, 혹시 조급하게 움직이거나, 혹시 약물과 서로 접촉하면, 몸의 털이 놀라서 곤두서고 때로는 기뻐서 혼절하게 된다. 무릇 이런 갖가지는 반드시 아래의 술법으로써 신통(神通)에 도입하여야 한다.〉 이 말은 《구음진경》의 총칙에 있는 말이다. 왕중양이 처음 《구음진경》을 읽었을 당시에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와 시합을 하노라니 갑자기 그 뜻이 명확히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그는 기를 이끌어 입원(入元)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법으로써 일류의 고수를 대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날리는 나뭇잎을 부수뜨리려고 한다면 아무리 큰 힘을 쓴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오로지 그것을 맞춰서 날려 버리든지 맞춰서 물리치든지 해야지 그것을 부수자고 천 근의 힘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소씨 거렁뱅이가 힘을 쓰면 왕중양은 날리는 나뭇잎처럼 몸을 움직이니 소씨 거렁뱅이가 아무리 힘을 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졌다. 왕중양이 자기의 기력을 조금도 받지 않자 소씨 거렁뱅이는 조급해서 점점 드세게 십팔장까지 가격하여 최후의 수단인 '용전어야'까지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상중양의 어느 한곳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자 얼른 손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네가 속임수를 쓰면 이겨도 무림인답지 못해." 왕중양이 되물었다. "선배님, 제가 어쨌단 말씀입니까?" "내 보기에 임자의 피하는 재간이 보통이 아닌데 그 무공을 무엇이라고 부르나?" "선천공이라 부릅니다." 소씨 거렁뱅이가 다시 물었다. "그건 《구음진경》에 기재된 무공인가?" 왕중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선천공은 예전에 내가 익힌 것이긴 하나 《구음진경》을 본 후에야 비로소 그 대단한 힘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왕중양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 무공은 비록 제가 만든 것이지만 그것을 확실히 깨달은 건 《구음진경》을 읽고 나서의 일입니다." 소씨 거렁뱅이와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구음진경》을 보고 이런 기묘한 술법을 만들어 내는 걸 보니 이 책의 위력은 과연 대단하구나.' 단지흥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구음진경》에 대한 욕심이 더욱 굴뚝같아졌다. 소씨 거렁뱅이가 입을 열었다. "왕중양, 이건 부당해. 이건 부당하단 말이야/" 왕중양이 대답했다. "무엇이 부당하단 말씀입니까? 똑똑히 말씀해 보십시오. 만일 선배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선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소씨 거렁뱅이는 생각했다. '이 늙은 거지는 지금까지 남한테 억지를 써 본 일이 없다만 이번만큼은 한 번 억지를 써 봐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거지 무리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고 이 소씨도 면목이 서지 않게 된다.' 예까지 생각하고 난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열었다. "왕중양, 자넨 그저 기서 한 부를 얻었을 따름이야. 사부님한테서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도 아닌데 남이 쓴 기서를 얻어 가지고 그걸 통해 남을 이긴다면 천하의 영웅들이 어찌 자네한테 탄복하겠나?" "그렇다면 선배님 생각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만일 제가 저 자신만의 무예로 선배님을 이긴다면 선배님께서는 진심으로 승복하실 수 있습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생각했다. "자네한테 그런 재주가 있다면야 이 소씨 거렁뱅이가 자넬 이겨낼 수 없지. 하지만 자네는 경신공(輕身功)이 뛰어날 따름이야. 자네한테 이것 말고 무슨 훌륭한 재주가 있나? 나의 내력은 자네보다 훨씬 나아.'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열었다. "왕중양, 우리 단 한 가지, 내력을 겨루어 보는 게 어떤가? 자네도 이 《구음진경》을 얻은 지 몇 달밖에 안 되었다고 했으니 그것을 제대로 보았을 리 만무하지. 그러니 내력을 겨뤄 누구의 내력이 더 강한가를 보잔 말야. 그것으로 승부를 정하자구. 어떤가?" 왕중양은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속으로 탄식했다. '강호의 인간들은 모두 이러한가! 네가 날 따져 보고 차가 널 따져 보면서 이렇게 왔다갔다하다가 세월을 낭비하고 인심을 저버리고 사람들의 우선(友善)마저 없어지고, 다만 간사하고 교활한 것밖에 남지 않게 되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천도(天道)가 이러할진대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는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와 같이 이름 높은 자, 대리 단지흥과 같이 위명이 대단한 자, 황약사와 같은 기재(奇才), 이들의 손에 죽는다면 억울할 것도 없으며 조무래기들 손에 죽기보다는 백 배 나을 것이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배들의 의견도 들어 보도록 하지요." 옆에 서 있던 단지흥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좋소, 중양 진인. 보아하니 내가 정말 당신을 잘못 보지 않았군." 단지흥은 이렇게 말하곤 덧붙여 부처의 이야기를 읊었는데, 바로 불조께서 구구 팔십일 회를 도는 수난의 이야기였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왕중양은 새삼 용기가 솟구쳤다. '보아하니 내가 이렇게 죽는다 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구나. 이 대리의 단지흥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저분이 나의 심사를 이해하는 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왕중양은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소씨 거렁뱅이의 손과 맞붙이고 내력을 겨루기 시작했다. 사실 왕중양과 소씨 거렁뱅이 같은 고수들은 모두 극히 고명한 술법을 쓰고 있으므로 여간해서 내력을 겨루는 일이 없었다. 일단 내력을 겨루면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위험이 따르게 되는데, 둘 다 패하거나 크게 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흥은 이 일의 위험성을 알았지만 그냥 지켜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둘 다 무림의 기재로, 남의 권고를 쉽사리 들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의 이 수작은 그야말로 억지에 불과하구나. 저 사람 곁엔 지금 홍칠이가 있다. 이 홍칠이는 무공이 소씨 거렁뱅이보다 약하지 않고 지혜에 있어서는 소씨 거렁뱅이보다 썩 나은 것 같다. 그러니 자기가 왕중양과의 시합에서 패하게 된들 흥칠이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말이다.' 이때 멀리 사람들의 소리와 함께 횃불들이 움직여 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옥과 구처기가 중양궁 사람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오자마자 즉시 진을 벌여 바위 아래를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그들은 땅바닥에 앉아 중양 진인과 소씨 거렁뱅이의 겨룸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내력은 절정에 달하여 왕중양의 손이 덜던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를 눈여겨보다가 그의 내공이 자기보다 못한 것을 알고 천천히 말했다. "소 선배님, 제가 보건대 이 시합은 비긴 것 같습니다." 소씨 거렁뱅이는 큰소리로 웃었다. 한편으로 그는 왕중양의 내공이 순전히 정파인 데다가 내공으로 겨루고 있으면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소씨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다만 웃음으로 시합을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시했다. 왕중양은 내심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 소씨 거렁뱅이는 천하의 기인이다. 소씨 거렁뱅이와 같은 세속 사람이 만일 왕중양한테 패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천하 영웅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왕중양이 모르고 있는 점도 있었다. 전진파의 내공심법은 천하 정종(正宗)의 심법으로서 내공이 샘솟듯 했다. 때문에 소씨 거렁뱅이는 왕중양과 겨루는 것이 아주 힘들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머리는 점점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이 열기가 계속 상승하자 두 사람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수시로 변했다. 가장 중요한 고비에 들여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승패 여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제25장 5년 후의 약속 왕중양과 소씨 거렁뱅이의 싸움을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은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대항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얼굴마저 시뻘개졌다. 두 사람은 모두 기진맥진했지만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