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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2편 (42/64)

2026-09-24 21:22:51 조회 24
"조영, 몸이 불편한 모양인데 난 돌아가겠소. 후에 다시 와서 무예에 대해 의논하기로 합시다." 임조영은 얼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의 호의에 대해선 알 만해요. 오늘 당신에게 나의 '옥녀심경'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전 당신한테 진짜로 져보고 싶어요." 워낙 전번의 시합도 임조영이 주장해 벌인 것이었다. 그녀가 암석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기자 왕중양이 선뜻 패배를 인정했던 진짜 이유는 그가 임조영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지게 되면 그녀는 약속대로 당장 자결해 버릴 게 분명했던 것이다. 그가 어찌 임조영이 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신선이 왔다 하더라도 무쇠같이 단단한 암석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길 수는 없을 것이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임조영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지금 날 우습게 보고 있구나. 좋다. 네가 정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지금부터 또 한 가지 무예를 연마하여 너를 정식으로 격패시키고야 말 테다. 그때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보기로 하자.' 이리하여 그녀는 왕중양의 활사인 묘를 차지하고 앉아 새로운 검법을 생각해 냈던 것인데 오늘에야 그것을 겨뤄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검법으로 전진교의 검법에 대항하여 왕중양을 꺾어 볼 심산이었다. 왕중양은 그녀의 이런 심사를 모르는 채 임조영에게 말했다. "조영, 당신한테 그런 검법이 있다고 하니 나의 전진교의 검술을 가히 격파할 수 있겠소. 시합을 해 보지 않았으니 장담할 순 없겠지만 말이오." 임조영이 대답했다. "좋아요. 겨뤄 보지요." 이들을 지켜 보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사부님한테서 무예를 배우고 합마공과 봉황력을 체득한 후로는 천하 무림들의 무예를 실로 어린애들 장난으로 여겨 왔다. 이 왕중양의 무예가 천하에 일품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는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그리고 저 여자 역시 겁없이 왕중양한테 덤벼드는 걸 보면 무공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야.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잘 보아야지, 도대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그의 마음은 한편으론 흥분이 되고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일신에 기공을 갖게 되긴 하였지만 왕중양과 임조영 같은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남산에 온 목적까지 깡그리 잊은 채 정신없이 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왕중양이 땅에서 나뭇가지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임조영과 마주서더니 말했다. "조영, 덤비시오." 임조영도 내심 매우 흥분되었다. 그녀는 몇 년을 고심한 끝에 '옥녀심경'을 새롭게 심화시켰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검법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수법들은 모두 전진교 검술의 특징에 대처하여 고안한 것인데,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는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조영도 손에 검을 뽑아 들고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전진교의 검법이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고 봐요. 내가 꼭 당신의 전진교 검법을 물리치고 말 테니까요."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언짢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전진교 검법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검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개 아녀자가 내 전진교 검법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을걸? 내가 당신과의 오랜 정을 생각해서, 아니 당신에 대한 이 마음 때문에 당신이 너무 형편없이 참패당하지 않게 해 주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요.'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조영, 어서 칼을 뽑으시오." 임조영은 움직치지 않고 되레 왕중양에게 말했다. "당신이 출검해야 해요. 당신께 알려 드린다는 걸 깜빡했군요. 나의 검법은 전진교에 대처하는 것으로서 뒤에 손을 써서 제압하는 것이에요. 당신이 먼저 출검해야 나도 출검할 수 있어요. 당신 검법의 위력이 클수록 나의 검이 더욱 무섭고 강해지죠." 두 사람은 곁에서 구양봉이 지켜 보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채 싸움을 시작했다. 곧 두 개의 칼날이 정신없이 왔다갔다 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구양봉은 그것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깝짝 놀랐다. 보아하니 이 두 사람의 무예는 자기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왕중양의 무예는 추호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임조영은 이상하게도 칼을 뽑은 후로 줄곧 막기만 할뿐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손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조영, 내 보기에 당신은 싸우려는 투지가 조금도 없구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소." 임조영이 대꾸했다. "왕중양, 저도 당신을 난처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내가 말씀드렸지요? 당신의 전진교 검법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요. 괜히 큰소리치는 게 아니에요. 믿기지 않거든 보세요……." 임조영은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술 동작은 구양봉이 볼 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유운장에서 내공심법과 사문기공만을 배웠을 뿐으로 검도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검법이오? 우리 전진교 검법을 격파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한 것 같구려." 임조영이 가볍게 웃으며 쌀쌀하게 말했다. "왕중양, 당신의 전진교 검법도 일반적인 것에 불과해요. 나의 '옥녀심경'은 바로 당신의 전진교 검법을 격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당신에게 72식의 검법이 있고 나한테는 '옥녀심경'이 있지요. 결국 당신의 모든 검법이 다 나한테 격파되었어요. 당신은 전진교 검법을 대단하다고 여길 테지만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임조영이 갑자기 손을 치켜 들어 검을 휘둘러 댔다. 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마치 장하대천(長河大川)처럼 도도하였다. 왕중양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조영의 검법은 그 일초일식(一招一式)이 하나같이 중양검법을 격파하기 위한 것으로, 손을 쓸 때마다 전진교의 검법 동작을 철저히 막아내고 또 그것을 깡그리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임조영은 연이어 예닐곱 가지 동작을 보여 주었는데, 갈수록 그 동작이 더욱 절묘하여 그것을 보는 왕중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다 막혔다. 그는 임조영의 몇 가지 검법을 보고 나서 말했다. "조영, 이것이 당신이 새로 만든 '옥녀심경'이란 무술이오?" "맞아요. 당신 보기에 중양궁의 검법으로 나의 '옥녀심경'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나요?" 임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조영, 조영……, 당신은 왜 이토록 정력을 낭비하는 거요? 나도 당신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하필 전진교를 적으로 삼을 게 뭐요? 전진교는 하나의 큰 교파로서 그것은 결코 무림에서 무예를 겨루자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지 않소. 중요하게는 강포한 자를 제거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며 강산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오. 당신은 온통 전진교를 대처하는 데만 마음을 쏟고 있는데, 이게 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그가 자기의 무예를 보고 내심 두려워하는 줄로 착각하고 득의양양해졌다. 그녀가 '옥녀심경'을 연마한 기본 목적이 왕중양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탄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태도를 보자 여간 통쾌하지 않았다. "중양, 당신이 보기에도 나의 '옥녀심경'은 만만치 않지요? 당신의 전진교 사람들 모두에게 이 무예를 보여 주고 싶군요. 내가 앞으로 제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애도 우의도관(羽衣道冠)을 걸친 당신의 제자들보다 더 무서울 거예요." 그녀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함빡 웃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기가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자기의 무예가 왕중양을 진심으로 감복시켰으며 이 세상에 자기한테 감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임조영은 기쁨에 젖어 계속해서 말했다. "중양, 한 가지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중양, 오늘은 당신한테 꼭 말해야겠어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해야겠어요. 만일 오늘도 말하지 못한다면 난 다시는 당신한테 이런 말들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중양,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은가요? 당신은 한 여인이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하게 해야 하나요? 그래도 당신이 사낸데 이런 말은 당신 쪽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문득 화가 치밀어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중양, 나와 당신이…… 내가 아까 당신과 무예를 겨룬 건 다만 장난이었을 뿐이에요. 난 당신에게……."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교교한 달빛 아래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중양은 가 버렸다. 말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가 버린 것이다. 임조영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들고 있던 검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구양봉은 물론 왕중양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남모르는 사연이 있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모용 낭자만 천하에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중양의 저 여자도 마찬가지로군. 세상 여자들이란 다 저 모양인가? 이러니 사내들이 여자들한테 무슨 기대를 가질 수 있겠어?' 교교한 달빛과 싸늘한 대기 속에서 구양봉은 왕중양이 천천히 산꼭대기로 걸어가 큰 바위 곁에 앉는 것을 보았다. 구양봉은 그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 앉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거기에는 바람이 불고 있고 풍세도 대단하다는 것뿐이었다.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구양봉은 몸이 떨려 왔다. 왕중양은 저곳에 앉아 무엇을 하는 걸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 가? 왕중양은 지난날 자기와 임조영 간에 있었던 한 차례의 도박적인 시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도박에서 패배한 왕중양이 임조영에게 활사인 묘를 내준 것이다.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왕중양의 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가 갖은 애를 다 쓴 항금대사(抗金大事)는 성공하지 못했고 자기와 임조영 간의 일도 엉망이 되었다. 그는 손으로 바위를 쓸어만지다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에 만져지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임조영이 한 획 한 획 손가락으로 새긴 글자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결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임조영은 글자를 써냈으며 왕중양은 그녀가 바위에 써 놓은 여덟 구절의 시를 분명히 보았었다. 왕중양은 그것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자방은 진을 멸할 뜻을 품었건만 한때는 다리 밑으로 기어 나가야 했고 한이 이 세상에 일어선 후에야 하늘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네. 왕중양은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임조영은 자기를 한조(漢朝)를 흥하게 한 개국 공신 장량(張良)에 비유했던 것이다. 장량은 유방(劉邦)을 보좌하여 5백 청사에 길이 남을 공로를 세웠으며, 그 도형서(圖形書)가 능연각(凌烟閣)에 그려져 실로 천하의 일대 미담으로 남아 있다. 임조영이 자기를 장자방에 비유한 것은 칭찬을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왕중양은 탄식했다. '내가 어디 장자방 같은 사람인가? 나는 다만 패군지장이며 하나의 활사인일 따름이다. 격노한 임조영에 의해 옛 무덤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묘 속에 갇혀 있는 신세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한을 일으킨 공신 장량에 비할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왕중양이 암석을 만지면서 깊은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지레짐작했다. '《구음진경》을 저 암석 밑에 숨겨 둔 게로구나. 왕중양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군. 《구음진경》을 저런 곳에다 감추다니.' 이때 맑은 피리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피리 소리는 어떤 고사(故事)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앞에 고요히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닷물은 어찌나 맑은지 그 속의 것들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다. 헤엄치는 물고기들, 춤추는 해초들, 그 밖에도 수많은 조용하고 한가로운 것들이 다 들여다보인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대해에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커다란 파도가 일더니 그 물결을 타고 바닷속에 잠겼던 시해(尸骸)들이 떠올라온다. 그 피리 소리는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점점 비통하게 만들어 물고기처럼 바닷속에 뛰어들고 싶게 했다. 왕중양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 몹시 괴로운 눈치였다. 그는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신을 모아 그 피리 소리에 대항하는 듯했다. 피리 소리는 여전히 멎지 않고 들려 왔다. 그 곡절 많고 가락의 변화가 잦은 피리 소리는 마치 왕중양과 싸워 그를 거꾸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싶었다. 구양봉도 음악에는 조예가 깊고 특히 아쟁에 솜씨가 있는지라 피리 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내 손에 아쟁만 있다면 저 피리 소리와 맞춰 볼 수 있을 텐데. 저 피리 소리가 강한 선율을 표현할 때면 나는 부드러운 화음으로 맞추어 주고 저 피리 소리가 유연해질 때면 나는 강한 음을 내어 주고……." 그런데 그 피리 소리는 구양봉에게도 이롭지는 않았다. 구양봉은 번뇌와 함께 가슴속의 혈기가 끓어오르는 듯하여 일시 혼란에 빠졌다. 그는 급급히 정신을 집중하고 내공을 모아 피리 소리를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중양과 구양봉이 정신을 집중하여 전력으로 피리 소리에 대항하고 있을 때 피리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대여(大呂)의 큰 종소리 같았다. "불설(佛說)에 초(初)에도 무난(無難)이요 후(後)에도 무난이라고 했은즉, 인생이 시초부터 힘 다하다가 한결같이 끝나는 것은 구구)(九九 ; 9월 9일로 중양절이라는 명절)가 돌아와야 진심으로 뉘우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니라. 색을 보고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을 보아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탐하지 않고 역정 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극락으로 사는 것을 불가의……." 이 염불 소리는 교묘하게도 피리 소리가 끊어질 듯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곤 하는 사이에 나곤 했는데 구구절절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 염불을 외우면 사람의 마음이 밝게 열리고 푸근해지며 모든 번뇌가 없어질 것 같았다. 왕중양이 갑자기 왼쪽 신발을 벗어 들고는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에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이 피리 소리에 미친 거 아냐? 갑자기 뭣 땜에 신발을 들여다보는 거지?' 왕중양은 그 신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오른쪽 발에서 나머지 신발마저 벗겨 내어 두 신발을 손에 든 채 달빛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해상의 파도는 이제 집채같이 사납게 일어나 모든 생령들을 통째로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염불을 외우는 사람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져 간곡하게 인생과 예의, 불법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구절구절마다 더욱 가슴 갚이 파고들었다. 마음이 동한 구양봉은 앉은 채로 아쟁을 타기라도 하듯이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의 아쟁 연주곡인 대사막풍사진(大沙漠風沙塵) 을 끊임없이 연주해 댔다. 한편 왕중양은 손을 움직여 두 신발 바닥을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두 신발 바닥을 마주치다가는 한쪽 신 바닥으로 철썩 무릎을 갈기고 다른 한쪽 신 바닥으로는 큰 청석(靑石)을 철썩 내리갈겼다. 이어서 그는 또 두 신발 바닥으로 청석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신발 바닥에서 생생한 음률이 튀어나오는 것 이 아닌가? 그의 신발 바닥 두들기는 소리는 때로는 염불 소 리와 한데 어울리고 때로는 피리 소리와 한데 어울렸으며 때로는 다른 것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울리곤 했다. 세 사람은 이렇게 한바탕 법석을 떨다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소란을 멈췄다. 왕중양은 여전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는데 미소를 띄우고 있는 품이 제정신을 잃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손님은 동해 도화도의 도주 황약사가 아니시오? 참으로 무서운 곡입니다. 대해마저 뒤집어질 지경이니까요." 그의 질문에 누군가 한바탕 웃더니 대답했다. "중양 진인께서는 귀가 밝으시군요. 이건 제가 만든 신곡 벽해조생곡(碧海潮生曲) 이온데 도화도에서는 너무나도 무료하여 파도가 치는 듯한 이 곡을 즐겨 듣소이다. 일부러 진인을 괴롭혔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은 운남 대리의 단씨 나으리가 아니십니까? 인간들에게 진심으로 뉘우칠 것을 권하시면서 남과 다투더라도 부처의 인자한 마음을 체득해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댁은 틀림없는 대리의 단씨 나으리인 것 같소이다." 가지가 울창한 한 노목 아래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그가 입은 연한 자주색 두루마기가 달빛을 받아 짙게 물들어 보였다. 손에는 긴 피리를 들었는데 보아하니 옥소(玉簫) 같았다. 나무 밑에 앉아 배를 탄 듯 몸을 좌우로 흔들던 그가 왕중양에게 읍하며 말했다. "중양궁에서 묵다가 한밤중에 피리 소리를 들었소이다. 군(君)이 선도(禪道)를 아시는지라 감격하여 백현경(白玄經)을 함께 이야기한 셈이지요." 그는 황약사의 모습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어느 틈엔지 바위 곁에도 사람 하나가 와서 서 있었다. 그는 몸에 담황색 두루마기를 걸쳤고 오른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스물네 알 염주를 한 알씩 세면서 세월을 보냈을 사람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읍하면서 말했다. "객이 중양궁에 당도하니 때마침 보름이고 사람들은 모두 묘체(妙諦 ; 인생을 깨달은 자)들이라 경서를 말하고 가을바람을 이야기하게 되었소이다." 왕중양은 즉시 태도가 숙연해지더니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인은 중양궁에서 살고 중양은 제 이름이올시다. 구구(九九)는 중양일(重陽日 )이온데 누구와 기경(奇經)을 담론하리까?"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구양봉은 내심으로 무척 기뻤다. '내가 대사막에서 갑자기 미침증이 들어 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음풍영월을 하다가 모용쟁한테 조롱을 당했지. 그녀는 나를 글에 미친 멍청이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보니 무림의 고수라고 하는 이자들도 모두 어줍잖은 시 몇 줄쯤은 읊을 줄 알잖아?' 그는 마음속으로 기쁘기도 하고 가소로운 생각도 들어 숨어 있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소리 내어 웃어댈 뻔했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모두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 인물들인데 시를 읊은 재주는 썩 신통치가 않구나. 내가 읊어 볼 테니 어디 들어 보거라. 아마 너희들보다 못하진 않을 게다.' 하지만 그가 미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유, 더럽구나, 더러워. 홍칠아,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게 어떤 놈들인지 어디 말해 봐라."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더러운 놈이란 아마도 변소 치우는 사람이겠지요?" 사부라는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놈은 왕중양, 단지흥, 그리고 황약사야." 홍칠이 대답했다一 "사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 만합니다. 천하에서 가장 맛좋은 요리를 저는 가려 볼 줄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강산이개'가 맛이 좋다 하시지만 그래도 묘수주자가 만든 '원앙오진회'가 더 맛좋지 않소이까?" 사부라는 사람이 거만하게 소리쳤다. "부아를 돋우어 날 죽일 셈이냐? 남들은 모두 팔이 안으로 굽는다던데, 너는 사부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그 묘수주자 놈의 개떡 같은 원앙오진회를 맛있다고 하니 부아를 돋우어 날 죽일 셈이구나?" 두 사람은 이렇게 주고받으면서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대뜸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경성 홍안루의 요사 소씨 거렁뱅이였고 또 한 사람은 자기와 함께 황궁에 들어가 어선방의 음식을 훔쳐먹던 홍칠이었던 것이다. ―제3권에 계속― 제24장 종남산의 결투 구양봉이 본 이 다섯 사람은 당대의 5대 고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운남 대리국의 황제 단지흥, 전진교 교주 왕중양,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 이밖에 경성에서 이름난 거지 무리의 두 고수인 방주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었다. 이 다섯 사람이 이곳에 모이게 된 것은 실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구음진경》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형님뿐이 아니로군. 이들도 대부분 그 《구음진경》때문에 왔을 거야. 이 사람들이 동시에 종남산에 모여들었으니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걸. 형님은 저 소씨 거렁뱅이 하나도 대적해 내기 어려울 텐데, 천하의 으뜸가는 고수들이 다 모였으니 보통 일이 아냐. 형님이 틈을 보아 손을 써야지 경솔하게 행동했다가는 큰코다치겠어. 하 지만 다른 사람들이 드러나 있는 데 비해 형님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 유리한 점일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