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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1편 (41/64)

2026-09-24 21:22:51 조회 26
만일 동생이 죽지 않았다면 동생과 혼인시켰을 텐데. 동생이 이 여자와 혼인하면 우리 구양 가문도 빛낼 수 있고 나도 사부님과 생사를 같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모용쟁은 그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자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끄러워져서 조심스럽게 신을 벗고 옷을 벗은 다음 이불을 들추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몸을 벽 쪽으로 향하고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그녀는 내심 걱정을 했었다. 옷을 벗을 때까지만 해도 구양적이 다가와 거칠게 굴까봐 두려웠는데 다행히도 그는 그녀가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어둠을 지켜 볼 뿐이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당신…… 이렇게 돼도 괜찮겠소?" 모용쟁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으나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구양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당신은…… 마음이 내켜서 이러는 게 아니지?" 모용쟁은 역시 대답하지 않고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저이는 서역 대사막의 으뜸가는 고수 구양적이다. 저이는 거친 사나이이기는 하지만 백타산군 임일천과 같은 소인배는 아니구나. 저이는 여자를 생각해 줄 줄 아는 사내야……." 밤이 깊어 하늘에서는 반달이 숨박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름다운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다시 얼굴을 내밀곤 했다. 달빛 아래 한 여인이 나무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인 듯 서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머리를 숙여 자기의 그림자를 굽어보더니 중얼거린다. "수라아, 수라아. 넌 알고 있느냐? 네가 지금 어디에 백면라살다운 점이 남아 있단 말이냐? 다만 너의 그림자만이 저렇듯 매끈하고 사람 꼴을 하고 있구나! 그것말고 너에게서 뭐 볼 게 남았느냐, 뭐가 남았어?"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만나지 않으려고 몸 움직여 장삿길에 나섰다네 오늘 저녁은 어떤 저녁이기에 화촉등광이 이리 밝으뇨. 젊고 건강한 시절 얼마나 오래 가랴 귀밑머리 이젠 백발이 되었구나 반생을 귀신으로 살던 옛일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구나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12년 만에 또다시 님을 만나게 될 줄을 님을 석별한 한이 가시기도 전에 아들딸 졸지에 성례를 치르는구나 태연히 사부의 위엄 갖추어야지 아들딸 술판을 벌이누나 밤비에 봄부추 잘라다가 새로 부엌에서 요리를 하노라 주인이 열 잔이나 잔을 비웠네 열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 감정이 지나치게 부풀어오른 탓일까 내일이면 산악에 가로막혀 세상일 두 쪽으로 갈라지리라. 장시를 한 번 읊노라니 무예를 연마할 때보다 힘이 배로 드는 듯 했다. 그녀는 두보(杜甫)와는 달리, 벗들이 서로 만난 뒤 후일이 망망한 데 대한 감상으로 이 시를 읊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잊기로 했다. 이제 과거는 일속을 따라 묻혀 버렸고 구양적과 모용쟁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 그녀에겐 이제 껍질만이 남았을 뿐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23장 무림 고수들의 만남 구양봉은 형님을 찾기 위해 중원으로 향했다. 형님을 찾으면 자연히 모용쟁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고 밤늦게 유숙하면서 드디어 임안에 도착했다. 그는 임안에 도착한 후 형님이 있을 만한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그러나 객점이란 객점은 거의 훑다시피 하고 몇몇 무술관까지 살펴보았으나 형님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형님이 임안에 있지 않고 종남산에 가서 그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과 무예를 겨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구음진경》을 얻기 전에는 대 사막으로 돌아갈 리가 없으므로 형님을 찾으려 면 먼저 왕중양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종남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가다가 그는 짬짬이 자신의 합마공을 점검해 보곤 했다. 다행히도 그는 신독행이 60년이나 닦은 내공을 흡수한 터라 그것을 익히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과거와 달랐으며 어제의 구양봉이 아니었다. 오늘의 구양봉은 노독물의 제자로서 이 세상의 모든 원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악인인 것이다. 그는 사부 앞에서 자기의 사형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지만 거친 사나이 석초수 하나를 죽였을 뿐 제갈정, 속문성 그리고 그 과묵한 두 사형과 음험하고 지독한 사숙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사부에게 그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든 눈에 띄기만 하면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으리라고 구양봉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종남산에 당도한 구양봉은 산 아래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생각을 더듬었다. '사부님께서는 임종하실 때 《구음진경》은 확실한 기서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형님 역시 그것을 찾고 있는데 내가 어찌 형님과 쟁탈전을 벌일 수 있으랴. 하지만 남이 그 책을 얻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더구나 왕중양이 남에게 《구음진경》을 빼앗겼을 정도라면 그만큼 무예가 신통치 못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 두려울 게 뭐겠는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그들도 하나같이 《구음진경》을 얻기 위해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을 고쳤다. '보아하니 왕중양의 《구음진경》은 빼앗긴 게 아니야. 만일 그가 그 책을 빼앗겼다면 종남산이 이처럼 북적거릴 리가 없어.' 구양봉은 왕중양이 천하의기(天下義旗)의 수령이며, 이렇듯 무림 인물들이 오가는 까닭이 결코 《구음진경》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금과 결전을 벌여 대송강산(大宋江山)을 되찾을지 왕중양과 상론하기 위해서 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은 산 아래에서 이틀쯤 묵으며 동정을 살피다가 밤을 틈타 산에 뛰어들었다. 그는 나는 듯이 산을 올라 한 시간도 채 안 걸려서 중양궁 밖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암석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과거의 그 서생이 아니라 봉황력과 합마공이라는 신비한 기술을 가진데다 외공과 내공에 있어서도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암석 위에 앉아 중양궁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궁 안에 들어가 왕중양을 탐지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몸을 날 려 중양궁으로 들어갔다. 중양궁을 지키던 몇몇 사람들은 날아가는 구양봉의 그림자가 어찌나 빠른지 누구 하나 제대로 보아 내지 못했다. 그들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는 듯하자 떠들어대기 시작하더니 더는 아무런 기척이 없자 이내 조용해졌다. 중양궁 안에 들어온 구양봉은 큰 도관(道館)이 바로 왕중양의 거처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곳저곳 뒤지다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별채로 다가갔다. 그는 손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집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 앉은 사람이 의심할 바 없이 왕중양인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그 앞에서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왕중양의 제자인 마옥과 구처기였다. 왕중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옥아, 금의 군대가 강을 건넌 후에 계속 밀고 내려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마옥이 대답했다. "사부님, 금군의 세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고 조정의 관원들이라곤 모두 제 잇속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금군이 공격해 올 때 누가 앞에 나서려 하겠습니까? 그자들은 금인(金印)을 옷소매에 넣고 도망가지 않으면 금인을 걸어 둔 채 종적을 감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탐관 허화정(許華亭)이란 놈은 금인을 옷소매에 넣고 달아났는데 변경에서 이 금인이 팔렸다고 합니다. 개자식이 어 찌나 제멋대로 노는지 나와 사제 두 사람은 그 놈을 죽일 생각을 다 했을 정돕니다." 옆에 앉아 있던 성미 급한 구처기가 큰소리로 덧붙였다. "사부님, 사형께서 절 말리지 않았다면 그 놈은 벌써 귀신이 됐을 겁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대송강산이 피폐해지고 인심이 흩어지게 된 건 전적으로 그런 개 같은 놈들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그 놈을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그런 자들이 생겨나게 될 텐데 왜 그 놈을 죽여 버리지 못했느냐?" 구처기가 대답했다. "사부님, 제가 그 놈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죽여 버리면 되옵니다." "처기야, 네가 가서 그 놈을 죽이고 그 놈의 머리를 금인과 함께 깃대에 매달아 대송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이런 탐관들이 종국에는 어찌 되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 왕중양의 명령에 구처기는 얼른 내일이라도 당장 이 일을 처리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이들의 대화를 듣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나의 사부님을 노독물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고 악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왕중양도 사람을 죽이기는 마찬가지구나. 도사의 손에서 피비린내가 나니……. 세상이 이러한데 천하의 선인과 악인을 어찌 똑똑히 가려 볼 수 있겠는가? 대송강산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대송의 강산은 그 우매한 군주의 것이다. 그 놈이 기개를 잃어버렸는 데 사람을 시켜 그 놈을 돕게 하다니. 왕은 날마다 주색에 빠져 나라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고 신하라는 것들은 모두 제 잇속만 챙기려 드니 이처럼 썩을 수밖에. 그런데 그걸 어쩌겠다는 말인가?' 왕중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들으니 일부 금의 군대들이 종남산에 오려고 했다더구나. 그들은 대부분이 무림 사람들이야. 너희들은 행여라도 금나라 사람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이미 문하의 제자들에게 다 말해 놓아 모두들 조심하고 있으니 그런 불상사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마옥이 대답했다. "그럼 됐다. 너희들도 지쳤을 텐데 가서 쉬도록 해라." 왕중양의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조용히 물러났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은근히 기뻤다. 이제 왕중양이 혼자 남았으니 《구음진경》을 손에 넣기가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그는 당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행동을 멈추었다.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는 왕중양의 행동을 좀더 지켜 보기로 했다. 그는 분명 《구음진경》을 깊이 감추어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 뛰어들었다간 그것을 손에 넣기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양봉은 마음을 신중히 하고 왕중양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왕중양이 창문을 열고 교교한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이 오래 살기를 원하노니, 천리 길을 그대와 같이하며 월색을 감상하리……." 구양봉은 그가 읊은 것이 당대의 대문인 소식(蘇軾)의 시구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네 놈도 수사전진(修士全眞 ; 도사)이거늘 어찌 욕심이 그리 많단 말이냐?' 이때 왕중양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급히 밖으로 나갔다. 구양봉은 그가 《구음진경》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되어 내심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여럿이면 소란스러운 일이 많은 법이라 《구음진경》을 집에 두지 않고 어느 비밀 동굴에 숨겨 둔 채 거기서 무예를 연마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만일 그렇다면 너 왕중양은 오늘 내 손에 죽게 된 거다.' 구양봉은 왕중양의 뒤를 쫓아 뒷산에 이르렀다. 왕중양은 커다란 묘 앞에 멈춰 섰다. 뒤에 숨어 서서 묘지의 비문을 본 구앙봉은 생각했다. '그래, 이 놈은 이곳에서 《구음진경》의 무예를 배우는 게 틀림없어. 무예를 연마하는데 공동 묘지만큼 조용한 장소는 없지.' 그런데 갑자기 왕중양이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구양봉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왕중양의 무예가 놀랍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리지르는 걸 들으니 실로 용이 큰 연못에서 울부짖고 봉이 구천(九天)에서 날갯짓 하는 소리 같구나.' 그 소리는 실로 대단하여 계곡 사이를 메아리치면서 오랫동안 사라질 줄을 몰랐다. 구양봉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왕중양이 무예나 익힐 일이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묘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그제야 깨달았다. 왕중양은 묘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르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자기가 들어가 무예를 연마하겠으니 문을 열라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온 사람을 보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25, 6세쯤 되는 젊은 여인이 제집 뜨락에서 산보라도 하듯이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왕중양 앞으로 다가와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왕중양……, 당신이군요?" 왕중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또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왕중양, 당신은 명도 그다지 길지 못하면서 어찌 이다지도 몸을 돌보지 않나요? 그래, 천하 대사가 당신을 이토록 노심초사하게 만든단 말인가요?" 왕중양이 그 말에는 대꾸를 않고 안부부터 물었다. "조영, 잘 있었소?" 여인이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조영이라, 당신이 날 그렇게 불러요? 참 듣기 좋은데요. 전에 는 날 어떻게 불렀죠? 임 시주라고 부르지 않았나요?" 왕중양은 그녀가 중양궁 앞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일속과 구양적, 두 사람과 무례를 겨루고 있을 때 임조영이 나타나자 그가 그녀에게 매우 공손히 임 시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왕중양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임조영이 그 일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조영, 당신에게 할말이 있어 왔소. 이 묘지에서 떠나는 게 좋겠소. 이곳은 내가 있던 곳이지만 그땐 내가 홧김에 그리 했던 것이고 또 혈기가 넘쳐 바보짓을 한 게 아니겠소? 다른 곳으로 가시오. 내가 당신이 거처할 장소를 마련해 주겠소. 고분은 습기가 많아 당신한테 좋은 점이 없을 거요." 임조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중양 진인의 성의만은 알 만해요. 하지만 중양 진인이 건망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이 묘지는 당신 것이었지만 당신이 무예를 겨루어 나한테 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내 것이 된 거예요. 난 이곳에서 살겠어요. 내가 살기 싫으면 그때 떠나면 되는 거지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는 보아하니 왕중양과 관계가 아주 깊은 사람 같군. 난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 대는 여자는 세상에 모용쟁 한 사람뿐인줄 알았더니 여기에 모용쟁 같은 한심한 여자가 또 한 사람 있었구만. 여자가 왕중양 앞에서 저렇듯 기고만장한 것은 정말 자기에게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일까?' 이때 임조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왕중양, 내가 당신을 오라고 한 건 당신과 이런 한담이나 하자는 게 아니에요."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왕중양, 당신의 이 묘는 아주 좋은 곳이에요. 난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우선 여기서 살다가 죽게 되면 사람을 불러 이곳에 내 시체를 매장하게 하는 거예요. 난 이 묘에 관을 두 개 갖다 놓겠어요. 내가 죽게 되면 제자를 시켜 나를 관에 넣게 할 거예요. 좋은 생각 같지 않아요?" 왕중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임조영이 이렇게 말하니 그는 할말이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왕중양은 착잡한 심정으로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자기만 아니었어도 오늘날 그녀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때 왕중양은 인마를 이끌고 강호를 넘나들었었다. 그것은 금의 군대가 중원에 쳐들어와 마을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살육하므로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금군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첫 싸움은 그의 승리로 끝났고 중원의 의병들은 모두 왕중양을 높이 추대하였다. 그는 의병들을 거느리고 금의 군대와 수차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금의 병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의군은 점차 열세에 몰 리기 시작했고,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한 탓에 연거푸 패전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왕중양은 모함을 받아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됐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보니 의군은 뿔뿔이 흩어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크게 자책과 회의를 느껴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이 옛 무덤에 틀어박혀 묘지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으려 했으며 스스로 '살아 있는 죽은 사람[활사인(活死人) ]'이라 칭하였다. 어느 날 임조영이 찾아와 그에게 무예를 겨루자고 청했다. 임조영은 만일 자신이 지게 되면 자결하고 왕중양이 지게 되면 이 활사인 묘를 자기가 차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예 시합을 앞두고 임조영은 산 위에 있는 큰 바위에 여덟 구절로 된 시를 새겼다. 자방은 진을 멸할 뜻을 품었건만 한때는 다리 밑으로 기어 나가야 했고 한이 이 세상에 일어선 후에야 하늘 떠받치는 기둥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네 적송(赤松)을 동무하여 빈들거리고 무예를 배우고는 뿌리치고 가 버렸지만 뛰어난 사람과 뛰어난 책을 조물주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더라. 이 여덟 구절의 시는 왕중양을 두고 쓴 것이었다. 시합에서 임조영은 왕중양에게 두 사람이 각자 바위를 골라 글자를 새기자고 했다. 임조영은 손가락 하나로 이 큰 돌에다 여덟 구절이나 되는 시를 새겼는데,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석공이 정으로 쪼은 것처럼 정교했다. 이를 본 왕중양은 깜짝 놀라 당장에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했다. 활사인 묘가 임조영에게 넘어오게 된 경위는 바로 이 러했다. "조영, 내가 당신을 찾은 건 당신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오. 내 보기에 이 묘는 습기가 너무 많은 것 같소. 고집은 그만 부리고 여기서 나왔으면 하오." 임조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양 진인, 당신은 워낙 이곳에서 잘 지내지 않았어요? 나는 이제야 이곳이 좋은 줄 알게 되었단 말이에요. 난 이곳에 있는 게 아주 좋아요. 당신은 내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왕중양은 할말이 없어졌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그는 임조영이 줄곧 자기를 연모해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임조영을 좋아했지만 그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에서 겪을 풍파와 위험을 생각하니 임조영을 데려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을 천하의 큰 영웅이 되려는 생각만 하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조영, 내가 당신을 찾았소, 아니면 당신이 날 오라고 한 거요?" 왕중양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매사에 분명한 걸 좋아했다. 이번 일 역시 그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임조영은 그의 물음에 발칵 화를 내며 쌀쌀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오라고 했지요. 내가 '옥녀심경'이란 무예를 새로 닦았는데 당신과 한 번 겨뤄 보고 싶어서예요." 왕중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영, 난 정말로 《구음진경》이란 책을 얻었소. 이 책은 기서인 데 난 그 책에 기재된 무예를 다 닦았소. 그건 모두 기묘하기 이를 데 없소……." 왕중양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기재된 무예는 진정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오." 임조영이 여전히 쌀쌀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왕중양, 당신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 그 《구음진경》이란 책은 누가 썼다던가요? 책을 써내는 사람들이 신선이야 아니겠지요?" "신선은 아니지만 그분은 확실히 기인이지요. 그분은 대송조의 도종 황제 때 사람으로 황상이라 부르오. 그분은……." 임조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꼬리를 낚아챘다. "됐어요, 됐다구요. 당신은 또 그가 《만수도장》인지 뭔지를 수정하던 일을 끄집어내려는 게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그 일을 입이 닳도록 말했어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들한테는 이야기해 주지 않고 이 야밤 삼경에 쓸데없이 날 붙들고 이러는 건가요?" 왕중양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난 당신과 말다툼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당신이 '옥녀심경'을 다 익혔다고 하기에 한 수 배우러 온 것뿐이오." "그런가요?" 임조영은 가만히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왕중양, 난 당신을 겸손한 군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신도 호남아였군요. 난 당신이 마음속으로라도 날 이해하고 정분도 좀 있는 줄 알았어요. 이 깊은 밤에 이렇게 와 주신 것도 날 생각하는 마음에서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당신은 소위 그 대사라는 것을 다 치른 다음에야 와서, 결국 한다는 말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거군요. 보아하니 내가 공연히 속을 태운 것이로군요. 당신 같은 사람 을 두고 괜한 속을 태운 거예요.' 그녀는 생각할 수록 설움에 겨워 눈물을 홀리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미처 그녀의 심증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