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0편 (40/64)

2026-09-24 21:22:51 조회 23
낭자가 살아나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한 가지는 대리 단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양지공을 배우는 것이지. 일양지공은 천하양강(天下陽剛)의 기 로서 이 공력을 닦으면 몸에 있는 독을 천천히 없앨 수 있어. 다른 한 가지는 적이와 가까이 하여 부부의 정을 맺는 것이야. 이렇게 하면 적이가 기혈로써 낭자를 도와 천천히 독을 제거해 줄 수 있지. 나는 여자니까 자연히 낭자와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이고, 적이는 사내니까 낭자와 인연을 맺어 낭자를 구할 수 있단 말야. 그 애는 인정도 있고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 분명 낭자를 도와줄 거야."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한테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우리 적이한테 시집오는 게 좋아. 내가 방금 말한 운남 대리의 단씨들이 배우는 일양지공을 임잔 배울 수 없을 거야, 단씨들이 일양지공을 자기들 가족들에게만 전수하고 외전(外傳)하지 않기 때문이지. 뿐만 아니라 일양지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사내들이야. 여인은 음에 속하는 탓에 그런 격렬한 무예를 배우기란 거의 불가능하거든." 모용쟁은 백면라살의 말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이렇게 죽고 만단 말인가? 옛날에 집에서 글을 읽고 시를 읊을 때는 시구가 그리는 아름다운 정경이 그림 같아 인간이 시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 강변에 쪽배 한 척이 떠 있고 그 위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지. 갓 성년이 된 듯 소년 티를 채 벗지 못한 모습으로 그는 배 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정기가 번뜩이는 두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어. 시 속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바로 나였거든.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가 꿈꿔 왔던 그런 청년을 만나 보지도 못한 채 어찌 죽을 수 있겠어?' 백면라살 수라아가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따져 보니 일속 스님이 잘못된 그 시각에 낭자도 독에 중독된 셈이니 반달 후면 발작이 일어나게 돼 있어. 일단 발작이 시작되면 10일 후에 다시 발작하는데, 그 다음엔 닷새 만에, 그 다음엔 3일 만에, 종국에는 하루에 세 번씩 발작하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끝에 숨이 끊어지게 되지." 들을수록 소름이 끼치는 얘기였다. 모용쟁은 몹시 놀라면서 한 편으론 반신반의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백면라살의 말은 사실이 아닐 거야. 자기의 제자를 위해 꾸며낸 말이 틀림없어. 나를 구양적에게 시집가게 하려고 저렇듯 무서운 말들을 꾸며 대는 거야.' 백면라살은 모용쟁의 마음을 읽은 듯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낭자 손의 소음심경맥(少陰心經脈)으로 시험해 봐. 내력이 소충(少衝), 신문(神門), 통리(通里), 삼혈로부터 심계로 흐르는데 기가 잘 통하는지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은 모용쟁을 더더욱 긴장시켰다. 모용쟁은 급히 백면라살이 하라는 대로 내력을 운행시켜 보았다. 처음에는 이상한 감각이 없었는데 청령(靑靈), 극전(極全)에 이르러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전신의 내력이 당장에 흩어져 다시 모이지 않았다. 모용쟁의 얼굴은 즉각 잿빛으로 변했다. 백면라살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모용쟁은 말문이 막혀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구양적과 결혼하여 서역의 대사막에서 구양적의 무시무시한 사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죽기보다 싫었다. 모용쟁은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녀는 체념한 듯 말했다. "만일 구양 오라버니께서 원하신다면 전 선배님의 말씀대로 하겠어요." 구양적은 사부가 모용쟁과 무슨 말을 하는지 속으로 몹시 궁금했다. 지금껏 모든 일을 자기와 함께 처리해 오던 사부가 오늘은 어쩐 일로 모용쟁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부가 모용쟁에게 사제간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용쟁에게 떠날 것을 권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구양적으로 하여금 직접 모용쟁과 작별하게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사부는 필경 매우 중요한 일을 놓고 모용쟁과 의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윽고 백면라살이 함빡 웃음을 머금고 구양적에게로 왔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구양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어제만 같은데 이렇듯 자라서 어른이 된 것이 꿈만 같았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구양적이 대견했다. "적아, 내가 이미 모용 낭자와 의논했다. 네가 원한다면 모용 낭자와 인연을 맺는 게 좋겠다. 네가 모용 낭자와 혼인하면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고 제단의 향불도 꺼지지 않게 될 게 아니냐?" 구양적은 비로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됐다. 그는 비록 사부를 존경하고는 있었으나 버럭 화가 났다. "제가 언제 장가들고 싶다고 했습니까? 제가 모용 낭자한테 장가들고 싶다고 했냐구요!" 백면라살은 유난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적아, 너의 쓰린 마음을 난 누구보다 잘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문이 번성하고 대가 끊기지 않기를 바라지. 넌 구양씨 가문의 장자인데 너의 동생마저 죽지 않았느냐? 만일 네가 장가를 가지 않는다면 구양씨 가문의 선조들에게 죄스러운 일이 아니냐?" 구양적은 백면라살 수라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전 조상들께도 떳떳하고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게 살렵니다. 사부님께서 저더러 장가를 가라고 하시면 전 그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모용 낭자를 색시로 삼으라는 겁니까?" 백면라살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적아, 그럼 달리 보아 둔 처녀라도 있다는 거냐? 그렇다면 그 처녀를 만나 보도록 하자꾸나." 구양적은 대담하게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말씀드리지요. 제가 장가들려는 여인은 바로 사부님이십니다. 바로 백면라살 수라아입니다!" 백면라살은 순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양적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적아, 넌 이제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하지만 어찌 자기 사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을 거다. 게다가 너의 사부가 무슨 좋은 물건이라고 이러느냐? 사람들이 이전에 날 백면라살이라고 불렀던 건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형편없이 변했는데 어디 볼 데가 있다고 그러는 거냐? 적아, 어리석은 생각일랑 말아라." 구양적이 고집스레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제게 장가들라 하면 전 장가를 들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사부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느 날 얼음 동굴의 추위 속에서 백면라살 수라아가 구양적을 꼭 끌어안은 후부터 두 사람의 정은 싹터 올랐다. 구양적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사부의 품에서 자라났다. 그는 그때부터 각박한 인정과 거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어머니의 품에서 느끼는 그런 포근함과 따사로움을 수라아에게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구양적이 이렇게 말하자 백면라살은 큰 위안을 받기는 했지만 가 슴이 쓰려 왔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적아, 나는 이제 여자라고 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엔 훌륭한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하필 나를 고를 게 뭐냐?" 사부를 바라보는 구양적의 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내가 중원에 있을 때 그 단씨 성을 가진 공자를 만났더랬다. 그 때 그 공자는 풍류남아였는데 그와 나는 첫눈에 정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며칠을 보냈는데, 그분은 내 성미가 좋지 않은 걸 모르고 있었지. 난 그분한테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는데, 어느 날 그분은 조용히 내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 후 난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를 잊지 못한 채 급기야 병 이 나서 오늘날 이 꼴이 된 거지. 네가 날 처음 보았던 그 무렵부터 난 하루하루 나빠지고 있었던 거야. 적아, 넌 선녀와 같이 아름답던 시절의 내 모습은 본 일이 없어. 백면라살이란 이름이 괜히 얻어진 건 아니었단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의 감미로운 회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적아, 나도 널 좋아한다. 만일 내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내가 널 거절할 이유는 없다. 우린 자연히 함께할 것이고 누구도 우릴 갈라놓지 못할 거다. 나와 일속의 일은 이미 끝난 지 오래고, 나와 너 두 사람은 뜻깊은 한 쌍의 연인이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내 몰골로는 불가능하다. 네가 날 원한다 해도 내 쪽에서 원하지 않아. 난 이미 그 얼음 동굴로 돌아가기로 작심했다. 돌 아가자마자 동굴의 출입구를 막아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낼 생각이다. 그게 가장 현명한 처사야……."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가득 눈물이 괴었다.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이렇듯 가슴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을……." 그녀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조용히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그 삭수(溯水) 가에서 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았네 그녀의 머리칼은 치렁치렁하고 두 눈썹은 반달 같았네 그녀의 걸음걸이 가볍고 날씬한 그 자태 더욱 정답네 여인이 웃는 그 웃음 낯을 찡그려도 사랑스럽게 옥패(玉佩)를 끌러 내어 양인(良人)에게 드리네 착수는 유유히 흐르는데 그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 난 그이를 따르려니 한평생 갈라지지 않으리 하지만 해돋기를 기다려 풀었던 옷고름을 매노라 향차(香車) 떠나가매 기쁜 비 분분히 내리네 사람마다 날 노래하며 가인(佳人)을 얻었다 하네 졸지에 깨고 보니 꿈이요 몸 돌이키니 곁에 사람이 없네 하건만 그림자는 보이어 따라가려 해도 깊은 물이 앞을 막네 가슴이 터지게 부르고 불러도 그 사람은 이미 눈에 안 보이니 손에 쥔 그 옥패를 품속 깊이 간수할 뿐이어라……. 구양적은 시와 문장을 공부한 적은 없으나 사부가 읊은 시가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면라살이 읊은 것은 강에서 물려받은 옥패[江上玉佩]라는 제목의 옛이야기에서 따온 시였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한 풍류 공자가 강변에서 노닐다가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과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두 사람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 중 한 여인을 마음속으로 우러러 사모하게 되는데,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감히 그러지 못한다. 그런데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이 웃음이 어찌나 교태가 넘치는지, 그것을 본 공자는 삽시에 머리에서 삼혼(三塊)이 달아나고 발 밑으로 육백(六魄)이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는 급히 그 여인을 뒤쫓기 시작한다. 늘씬한 몸매에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교태스러운지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뒤쫓아가노라니 두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그를 흘깃 쳐다보는데 그 눈길에는 은근한 유혹의 빛 이 깃들어 있다. 그는 그 두 여인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말한다. "소생은 강변에서 우연히 두 미인을 만나 보게 되었사온데, 무슨 큰 바람이 있는 건 아니고 다만 두 분께서 소생한테 자그마한 물건을 남겨 주시면 기념으로 삼고자 합니다. 소생이 늘그막에 그것을 가지고 자손들에게 자랑할까 해서지요. 내가 젊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만났는데 그들에게 이런 예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다가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쪽에서 입을 연다. "언니, 자손들에게 자랑하겠다는데 언니가 저분한테 무엇인가 좀 드리지 그래?"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언니인 모양으로, 수줍음을 타는 그녀는 당장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모기만한 소리로 말한다. "내가 무슨 물건을 드리겠니? 네가 드리려무나." 불은 옷을 입은 여인이 몸에 달고 있던 옥패를 풀어 공자에게 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공자님께선 다정한 분이시니 밤에 주무실 때 가장 좋기는 이 옥……."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녀는 실언을 했다고 느꼈는지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을 끌고 얼른 달아나기 시작한다. 두 여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잠시 후 먼 곳에서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가졌던 옥패를 가생(佳生)한테 주었나니 그대 만일 날 생각하려거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노랫소리는 점점 약해졌으나 메아리가 되어 길게 울려 퍼진다. 백면라살은 이 시를 읊어 자기와 구양적 간의 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경중월수(鏡中月水) 중의 꽃이요, 강 위에서 옥패를 남겨 주었다는 것들은 허구로 꾸며 넣은 이야기로 무슨 대단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양적은 그녀의 운율 속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녀에게 화답할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은 가볍게 탄식하며 막했다. '걱아, 너의 마음을 알고 있다만 넌 구양씨 가문을 위해 꼭 아내를 얻어야 한다. 이 일만큼은 내 말을 듣는 게 좋아." "사부님……." 구양적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백면라살이 가로챘다. "적아, 네가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난 네 앞에서 죽을 작정이다. 명전 씨까지 죽었으니 난 이 세상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는 없다. 내가 그냥 해 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구양적이 눈물을 흘리면서 비로소 대답했다. "좋습니다, 사부님. 사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 쌍의 강호의 아들딸이 산기슭 나무 아래에서 사부인 백면라살의 주례하에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우선 하늘과 땅에 첫 절을 올리고, 두 번째 절은 부모님께, 그리고 마지막 절은 나에게 해라. 너희들은 오늘부터 부부간이니라. 모용 낭자는 하루 속히 완치되어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고, 두 사 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두 사람은 사부에게 절을 올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들 세 사란은 일찌감치 여관에 들었다. 백면라살이 구양적에게 말했다. "적아, 넌 이제 혼례를 치렀다. 강호의 아들딸들이야 워낙 이것 저것 따질 처지가 못 된다. 모용 낭자의 상태가 몹시 위급하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내 보기엔 너희들이 오늘 밤에 한 몸이 되는 게 좋겠다. 모용 낭자의 상처를 되도록 빨리 치료하는 일이 중하니라." 구양적과 모용쟁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밤이 깊었는데도 구양적은 여관 뜰에서 서성거리며 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등잔불을 밝혀 놓은 두 방을 바라보았다. 방 하나에는 그의 사부가 들어 있다. 그와 가장 가까운 백면라살이. 오늘부터 그는 다시는 사부와 포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더는 사부의 구양적이 아니라 모용 낭자의 남편이며 구양씨 가문의 가장인 것이다. 하 지만 그는 얼음 동굴에서 뜨겁게 지냈던 일이며 10여 년 간 사부와 나눈 육친과도 같은 정에 사로잡혀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사부님께서 오늘 밤을 어찌 견디실까? 눈물이나 흘리시지 않을는지? 혹여 사부님께서 상심하여 돌아가시지는 않을지……." 구양적은 사부가 묵고 있는 방문을 슬며시 밀어 보았다. 문은 안으로 잠겨 열리지 않았다. 구양적이 소리쳤다. "사부님, 문 좀 열어 보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에서 백면라살의 말이 들려 왔다.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어서 가거라, 너의 새 사람이 널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구양적은 문을 짓부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문 앞에 멍하니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백면라살은 사위가 잠잠하자 구양적이 간 줄 알고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구양적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적아, 돌아가서 쉬려무나." 구양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백면라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방문을 닫은 뒤 구양적의 손을 잡고 모용쟁의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모용쟁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데도 고개를 들어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은 아주 작고 초라했다. 백면라살은 주인에게 오늘은 두 후배들의 특별한 날이니 방안을 깨끗이 해 달라고 미리 부탁해 두었었다. 그래서인지 방안은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객점 주인이 일부러 가져온 붉은 이불이 가져올 때 그대로 얌전히 놓여 있고 창턱엔 팔뚝만큼 굵은 초가 아름답게 타고 있었다. 백면라살은 모용쟁에게 다가갔다. "모용 낭자, 낭자와 적이는 혼례를 치렀으니 오늘 밤을 기쁘게 보내야 해. 내가 적이한테 낭자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일러 두었으니 시름을 놓게." 방안의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다. 구양적은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첫날밤을 맞이할 줄은 이제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실 모용 낭자를, 사부에 대한 감정과는 다르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길에서 만난 여인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부터 모용쟁은 그의 아내가 되고 가장 가까운 사람 이 되는 것이다. 한편 모용쟁은 가슴이 타서 재가 될 지경이었다. 그녀가 꿈속에서 그리던 낭군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밤부터는 꼼짝없이 구양적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자 백면라살이 웃음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새 사람들이 신방에 들게 될 때에는 복남복녀(福男福女)들이 이부자리를 펴 드려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는 그 사람들이 없구나. 그러니 나라도 대신할 수밖에. 나는 비록 타고난 운명이 이렇지만, 너희들이 금슬 좋게 잘살 것을 축원한다." 말을 마친 뒤 백면라살은 신발과 버선을 차례로 벗기 시작했다. 한쌍의 유연하고 미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순간 모용쟁과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백면라살 수라아가 저렇듯 아름다운 발을 가진 여인이었다니……." 모용쟁은 속으로 감탄했다. 만일 이 여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 신비스런 발만 본다면 사내가 아닌 같은 여자끼리라도 그 매력에 심취될 것 같았다. '보아하니 구양 오라버니의 사부님은 이전엔 아주 절색이었겠어.' 구양적은 백면라살과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도 모용쟁과 마찬가지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사부님은 이런 발을 갖고 있었구나. 이렇게 훌륭한 발을 갖고 있었구나……." 백면라살은 웃음 어린 얼굴로 천천히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이불을 펴면서 노래를 불렀다. 붉은 비단 이불을 펴고 함께 기쁘게 잠자리에 드네 자손이 끊이지 말고 근심 걱정 사라지라 원앙침이라 원앙침 원앙침을 베고서 밤낮으로 즐겨 보세 사내도 탐이 났고 여인도 혼이 나갔는데 두 원앙, 생사를 같이하네. 백면라살은 정성들여 이불을 펴고 베개를 놓은 다음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또 휘장을 쳐 주면서 노래를 계속했다. 함께 기쁘게 침대에 들어 붉은 파도 일면 두 남녀 얼마나 기쁘랴 아름다운 머리 풀고 옷고름 끄르노라면 너와 나 상사(相思)가 예서 생겨나리. 이것은 혼례 때 집빈인(執賓人)이 부르는 희사(喜詞)였다. 이전에는 혼례를 할 때 언제나 희인(喜人)들을 신방에 끌어들였다. 이런 희사들은 각양각색이지만 하나같이 남녀간의 정사를 노래하고 기쁨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백면라살은 만면에 웃음을 담고 성의껏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 부르다 말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혼례는 못해 보았어. 이 희사들은 모두 내가 어렸을 때 혼례식에서 얻어들은 것들이야. 전부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흥이 날 때면 두어 마디 부르곤 하지." 그녀는 다시 서성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밤은 그대의 가장 멋진 시간 새 사람의 꿈이런가 살결은 눈과 같고 웃음은 꿀과 같구나 마음 황황하고 얼굴 뜨겁고 발걸음 비틀거리네 하고픈 말 안 하고 애무도 멈추었거니 그게 어디 급한 일이랴? 새 사람들 머리 풀어 폭포처럼 드리우고 배우자 앞에 머리 숙여 맹세를 다지누나 희촉(喜燭)은 타서 눈물이 되고 새옷 가지런히 벽에 걸렸는데 갑자기 방이 어두워지매 만음월강(漫淫月光)이 빛나누나. 이 노래는 계속될수록 그 내용이 점점 짓궂어지는데, 나중에는 속삭이듯 부르다가 슬슬 밖으로 나가 문을 가볍게 닫는다. 그리하여 사람과 노랫소리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백면라살이 그렇게 사라지고 나자 모용쟁과 구양적만이 남게 되었다. 침묵 속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붉은 초는 백면라살이 꺼 놓았고 방문도 백면라살이 잘 닫아 놓았으므로 더 이상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구양적이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쟁은 훌륭한 처녀다. 그녀가 나한테 시집오자니 속으로 원통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