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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9편 (39/64)

2026-09-24 21:22:51 조회 28
아무리 고쳐 생각해 보아도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구양적은 사부가 일속을 끌어안고 냇가에 앉아 목놓아 우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부의 심정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부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찾아가서 복수하려 하지 않았고 또 무엇 때문에 《구음진경》을 구해 오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구음진경》을 얻어 무예를 닦은 다음 일속을 찾아 정식으로 겨루어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일속 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왜 내게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던 걸까? 일속을 죽이지 말라고 왜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았을까?' 구양적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일 구양적이 일속을 찾게 된다 하더라도 그가 절대 일속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구양적이 일속을 찾게 되더라도 일속이 절대 구양적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구양적이 얼음누에를 사용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또한 일속이 제대로 막아내지 않고 죽기로 작정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어느덧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발의 여인은 일속의 시체를 부둥켜안은 채 여전히 물가에 앉아 있었다. 일속의 몸에 돋아났던 얼음 덩이들도 어느덧 완전히 녹아 그와 수라아의 몸뚱이는 온통 젖어 있었다. 수라아는 한기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일속을 부둥켜안고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감히 나설 엄두가 안 나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모용쟁이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그분을 내려놓으세요.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수라아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꼭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모용쟁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런 걸 보고 애증이라고 하나? 남녀간의 사랑과 증오란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 이들의 생과 사는 원한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 때문인가?' 모용쟁은 잠자코 수라아의 모습을 지켜 보다가 마음을 다져 먹고 물 속에 들어섰다. 물은 어찌나 차가운지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그녀는 수라아에게 다가가 완곡한 말투로 권했다. "선배님, 춥지 않으세요? 일속 대사께서도 추워하실 텐데요……." 그러자 수라아는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뭐라구? 이분이 추워한다구?" 모용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아는 일속이 살아 있는 사람이기나 한 듯이 그에게 물었다. "명전 씨, 추운가요? 당신은 일양지신공을 하시는 분이니 춥지 않으시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이 찬물 속에 이렇게 있는 걸 원치 않으시죠? 당신은 선원(禪院)에서 등잔이나 낡은 불상을 지키고 앉아 있고 싶죠?" 수라아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천천히 기슭으로 올라가 일속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일속의 곁에 꿇어앉아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명전 씨, 당신은 돌아가셨군요. 당신은 정말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잠자코 서 있던 구양적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사부님, 이 제자가 죽일 놈입니다." "적아,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건 나와 저 사람 사이의 일이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수라아가 무심한 어조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는 옷소매로 일속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주고는 또다시 탄식했다. "당신은 여전히 스무 살의 젊은이 같지만, 절 보세요. 전 이제 꺼져 가는 촛불과도 같아요. 이렇게 덧없는 게 인생인 것을……." 그녀는 계속해서 일속의 몸을 정성들여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명전 씨, 당신은 어땠나요? 당신도 나와 헤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겠죠? 그런데 당신은 왜 도망을 갔나요? 왜 한마디도 나한테 귀띔하지 않았나요? 혹여 당신이 나와 헤어지고 싶었다면, 그런 말을 한마디라도 했던들 전 당신을 물고늘어 지진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왜 귀띔도 하지 않으셨어요?" 구양적은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품안에서 컸으며 그녀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녀는 그를 안아 줄 때마다 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명전이었던 것이다. 명전이 누구인지 구양적은 알지 못했었다. 그는 다만 사부가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분노가 차 올라 괴로워하신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런데 사부의 한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구양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부님, 적이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구양적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두장으로 자기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백면라살은 꿈짹도 하지 않고 구양적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용쟁이 잽싸게 달려들어 지팡이를 낚아챘다. "선배님, 구양 오라버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데 왜 막지 않나요?" 백면라살이 탄식조로 대답했다. "너 같은 계집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저 앤 죽어야 해. 일속이 죽었으니 저 애도 죽어야 해. 그리고 저 애가 죽게 되면 나라고 해서 혼자 살아 있을 성싶으냐?" 그녀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모용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참지 못하고 속엣말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당신은 한 남자를 죽이고도 모자라 당신의 제자까지 함께 죽일 작정이에요? 제자는 당신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인데, 그것이 설령 잘못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다 누구 탓인데요? 당신이 일속 대사를 죽도록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쓰라린 결과가 빚어진 거예요. 자업자득이라구요!" 구양적이 모용쟁의 말을 막았다. "모용 낭자, 그만하라구!" 모용쟁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백면라살 수라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이 모든 건 자업자득이니 남을 원망할 것이 없지." 그녀는 모용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말을 대담하게 할 줄 아는 이 처녀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일속의 시체를 한쪽에 눕혀 놓고 세 사람은 조용히 마주앉았다. 그들은 각자 상념에 잠겨 말이 없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 올 뿐 사위는 그지없이 고요했다. 백면라살이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적아, 저분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더냐?"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그는 그제야 일속의 말들이 생각났다. "저분은 게어(渴語)로 말씀하셨는데 승인들이 죽을 때 말하는 도리 같았습니다." 여인이 재촉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내게 들려주렴." 그녀는 구양적이 그것을 다 기억하기 어려우리란 걸 알고 덧붙여 말했다. "네가 기억하는 만큼만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구양적은 사실 일속이 했던 말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사(詩詞) 따위에는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죽어 가는 사람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제가 사부님께서 얼음 동굴 속에서 12년이나 계셨다고 하니까 그분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속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얼음 동굴 속에서 살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이때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마침 밖에서 그분이 게를 읊으시는 걸 들었는데 말씀드리지요." "어서 말해 보아라." 모용쟁은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 속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그대는 날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난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독하고 그대도 독하지만 마음은 둘 다 고독하구려. 여인은 조용히 듣더니 그것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 속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었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명전 씨, 나는 얼음 동굴에서 살더라도 당신은 그 벌레를 피했어야 했어요. 얼음 동굴에서는 사람이 살 수가 있지만 얼음누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당신은 정말 어리석구려." 그녀는 다시 눈물을 쏟으면서 일속의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대는 날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난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네……. 당신 말씀이 맞아요. 난 당신을 지독하다고 생각하고 당신도 날 지독하다고 생각하셨겠죠. 당신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독한 생각이 골수에 뻗쳐 백발이 되었지요. 독한 생각에 영혼이 없어지고 독한 생각에 배가 긁혀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지요." 구양적파 모용쟁은 그녀를 보면서 슬픈 생각에 젖어 들었다. 불제자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버리고 떠난 남자를 잊지 못해 자신의 삶을 훼멸시키면서까지 애증을 키워 온 이 여인……. 이처럼 비극적이고 허무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제22장 사랑과 이별 백면라살 수라아와 구양적, 모용쟁은 모두 일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 묘지에 눕힌 일속의 모습은 너무도 평온하고 고요해 보였다. 세 사람을 향한 그의 미소 띤 얼굴은 모든 속념에서 해탈되어 아무런 근심도 괴로움도 없어 보였다. 이제 그는 극락 세계에 이르러 더는 세속의 풍진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리라. 백면라살 수라아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적아, 이제 그만 저분을…… 묻어 드리자." 구양적과 모용쟁은 사부를 부축하여 한쪽으로 비켜서게 한 뒤 묻기 시작했다. 봉분을 한 뒤 구양적은 팻말을 세우기 위해 옆에 뒹구는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그가 팻말에 일속의 이름을 새기려 고 하자 백면라살이 말렸다. "그분은 생전에 이름을 남기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돌아가셔서도 남이 자기를 두고 시끄럽게 구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야." 그녀의 어조는 너무나 담담해서 조금 전까지의 슬픔이나 고통의 기색은 흔적조차 없어 보였다. 무덤을 마저 정리하고 아홉 번 큰절을 한 뒤 구양적이 사부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백면라살 수라아는 생각을 더듬어 본 뒤 입을 열었다. "적아, 너와 나는 이 중원에서 해야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동생을 잃어버렸으니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구양적은 그 동안 동생 일엔 마음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사부의 말에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대답했다. "만일 사부님께서 나서신다면 저는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놈들의 무예가 어찌나 대단한지 저 혼자서는 당해 낼 수가 없었거든요." 백면라살이 말했다. "난 그 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사부는 북강에서 가장 이름난 고수지. 악인으로 소문이 난데다 그 놈 스스로도 자기를 대악인이라고 자처하고 있느니라. 그 놈은 남들이 싫어하는 일만 저지르는 데, 동생이 그 놈들 손에 들어갔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구나." 모용쟁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정암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시 남쪽으로 간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사부님이나 정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난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 사람들과 함께 북강에 가는 게 좋겠어. 만일 이들을 도와 구양봉을 찾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지. "선배님, 저도 둘째 공자를 찾는 데 동행하면 안 될까요?" 백면라살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되고말고. 원한다면 함께 가자꾸나." 세 사람은 함께 북강을 향해 길을 떠났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가까스로 북강에 당도하여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유운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 사람은 몹시 기뻤다. 이제 유운장에만 가면 구양봉의 행방을 알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유운장에 당도한 그들은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운장은 온통 폐허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담벽 하나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도처에 쥐들이 득실거렸으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 사람은 반나절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 길을 걷다가 한 인가에 들러 물어 보니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라 했다.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유운장에서 불이 났는데, 피해가 어찌나 심했던지 장원 사람들이 거의 다 타 죽고 겨우 몇몇 사람만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장원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나쁜 짓만 일삼아 왔던지, 큰불이 나자 사람들은 가서 구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손뼉을 치면서 통쾌해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이제 그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그곳에 가끔 귀신이 나타났었다고 했다. 야밤 삼경이면 누군가가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귀신조차 머물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구양적이 다급해서 물었다. "노인장, 작년에 이 부락에 한 서생이 왔던 일을 모르십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도 불에 타 죽었을 거요. 생각해 보시구려, 그 부락 사람들은 모두 무예에 능통한 사람들인데도 불에 타 죽었는데 서생이야 더 말할 게 있겠소? 죽은 게 틀림없소. 암 죽었고말고……." 구양적은 동생이 죽었으리라는 말을 듣자 눈물이 솟구쳤다. "네가 죽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모용정은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위로했다. "구양 오라버니, 동생이 꼭 죽었다고는 볼 수 없으니 너무 상심 마세요." "그 앤 무예를 모르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오. 그 애가 무슨 수로 이런 상황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었겠소?" 구양적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쪽에 서 있던 백면라살 수라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적아, 울지 마라. 너나나나 고달픈 인생을 타고난 사람들 아니더냐? 그 애 역시 밤낮으로 고생만 하며 살아왔는데, 그게 어디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인생이란 그렇듯 덧없는 것, 너와 나도 함께 따라 죽으면 되는 일이다. 그 애가 며칠 먼저 저 세상에 갔기로 그게 무슨 슬퍼할 일이겠냐?" 구양적은 울음을 멈추고 멍청히 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적아, 우리가 그 앨 찾지 못할 바엔 다시 얼음 동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우리 둘이 그곳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 게 시름을 놓는 일이다." "사부님, 전 고생하며 그 애를 키우면서 일심으로 그 애가 우리 구양씨 가문을 빛내 주기를 바라 왔어요. 하지만 그 애가 이렇게 죽을 줄, 이 북강 노독물의 손에 죽을 줄을 어찌 알았겠어요?" 구양적이 절망스럽게 말했다. 백면라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아, 내 짐작으로 너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앤 북강의 대악인 신독행의 손에 떨어져 이미 잘못된 것 같다. 그러니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다." 구양적은 여전히 비탄에 잠겨 헤어나지 못했다. 구양적은 백면라살 수라아에게 무예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얼음 동굴에서 사문의 독공을 배우다 보니 몸에 변이가 생겨 더는 당당한 사내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몸에 번진 음독(陰毒)은 그의 육체뿐 아니라 성미까지도 달라지게 했다. 이 일은 구양적 자신은 물론 백면라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와 백면라살 수라아는 정이 들 대로 들어, 그는 백면라살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장 가까운 애인이기도 했다. 정이 통할 때면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고 몇 날이고 그 차가운 얼음 동굴에서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만나던 날로부터 지금까지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었으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구양적은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 끝에 하루라도 빨리 동생을 장가들여 가업을 이어 나가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모용 낭자와 동생이 가까워지길 바랐던 것도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변을 만나 동생을 잃게 될 줄이야. 한참을 비탄에 잠겨 있던 구양적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을 따라 얼음 동굴로 가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며 강호의 인사들과도 교제를 끊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동생이 죽어 구양 가문의 대가 끊겼으니 제가 죽은 후 부모님을 만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가슴을 치며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백면라살 역시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구양 형제 두 사람이 중원에 들어와 재앙을 당한 것은 순전히 자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통에 잠겨 있는 구양적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모용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용쟁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구양씨 가문에 후손이 없겠는가? 난 반드시 구양씨 가문에 대를 잇게 해 줄 테다. 내겐 대사막에서 몇십 년 살아오는 동안 모아 둔 재산도 좀 있다. 구양씨 가문에 후손이 생기게 된다면 재산을 내주어 그가 서역 사막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살 수 있게 해 줄 테다.' 백면라살은 기인으로서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내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적아, 내가 모용 낭자와 할말이 있으니 넌 자리를 좀 비켜 주렴." 백면라살이 담담한 얼굴로 구양적에게 말했다. 구양적이 자리를 피하고, 두 여인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사뭇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이 신중하려 애쓰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듣기로 그대는 정암에서 도망쳐 나왔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모용쟁은 머리를 끄덕였다. 백면라살이 탄식조로 말했다. "구양씨 가문의 두 형제는 모두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야. 굳이 비교하자면 구양봉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구양봉이 중원에 들어와 늙은 독물 신독행의 손에 들어가 비명에 죽었으니 이렇게 애석할 수가 없군. 그래, 이젠 적이 혼자 남았는데 어떻게 살아 나갈지 걱정이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모용쟁이 의아한 듯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처리에는 매우 과단성이 있던데 지금은 뭘 저렇게 주저하는 거지?' 모용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어려워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백면라살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낭자는 과연 시원시원한 사람이로군. 그럼 솔직히 얘기하지. 낭자한테 한 가지 묻겠는데, 낭잔 우리 적이의 아내가 될 생각이 없나?"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구양적의 사부가 자기한테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녀는 비록 구양적과 동행하여 대사막을 지나 중원으로 오는 동안 몇 달 간 함께 지내기는 하였지만 구양적과 인연을 맺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백면라살 수라아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리 적이 정도면 괜찮은 성격이지. 난 그 애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 보아 아는데, 그 앤 말수는 적어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야. 그 앤 강호의 보통 사나이들과는 달라. 낭자만 좋다면 나는 두 사람을 혼인시킬 생각인데, 어떤가?" 모용쟁은 망설였다. 뜻하지 않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성격과는 달리 수줍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모용쟁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선배님, 저는 정암 문하의 사람이에요. 비록 출가한 몸은 아니어도 백타산군 임일천한테 잡혔을 땐 옥쇄(玉碎)하리라 작심했었어요. 다행히도 하늘이 돌보셨는지 구양 공자가 절 구해 주었지요. 하지만 요즘 들어 저는 자꾸만 생사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뜬구름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저는 정암에 돌아가 삭발하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칠까 해요." 백면라살 수라아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린 나이에 벌써 속세를 등지고 살 생각을 품고 있다니. 이 애가 불가에 귀의한다면 꽃다운 나이에 아름다운 용모가 아깝지 않나.' 백면라살이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단지 우리 적이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낭자를 위한 것이기도 해. 낭자는 자기가 얼음누에의 한독(寒毒)을 받은 걸 알고 있나? 적이 말에 의하면 낭자는 일속을 구하려고 손끝으로 얼음누에를 쳐서 떨어뜨렸다면서? 낭잔 그 얼음누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를 거야. 손발이나 피부에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독이 퍼지지. 남녀가 동시에 중독되 면 여자 쪽이 좀 늦게 발작하지만 정작 발작하면 더욱 심해져. 그것은 여자가 음(陰)에 속하므로 음독을 막아내지 못하는 까닭이야. 낭자가 만일 얼음누에에 닿았다면 즉시 약을 복용해야 해. 그러면 보름 사이에 천천히 회복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