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8편 (38/64)
자연히 그의 행동은 거칠고 무뚝뚝하여 종종 모용쟁의 기분을 상하게 하곤 했다. 그는 모용쟁은 내버려둔 채 머리를 숙이고 어떻게 하면 일속을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모용쟁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처럼 운이 없는 년도 없을 거야. 서역의 대사막에서 그 고생 끝에 다행히 구양 형제들을 만나 기뻐했더니 이렇게 비뚤어진 심보를 가진 사람들일 줄이야. 이런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는 건데.' 기분이 상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었어요. 그만 가서 자야겠어요." 그녀는 구양적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방에서 나가 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거리는 정적에 잠겼고 여관도 조용해졌다. 구양적은 침대맡에 앉아 옷을 갈아입은 뒤 사두장을 들고 일어섰다. 이때 삼경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일속 대사가 묵고 있는 방 앞으로 걸어갔다. 문틈으로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일속 대사는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구양적은 품에서 작은 통을 끄집어냈다. 통에 든 것은 그와 그의 사부가 차디찬 얼음 동굴에서 키워 낸 이상한 누에였다. 이 벌레는 독성이 비할 바 없이 강할 뿐만 아니라 놀랄 만큼 추위를 몰아 와 사람의 피부에 닿았다 하면 몸이 얼어붙어 동태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구양적과 사부는 10년이나 걸려서 이러한 누에를 한 쌍밖에 키워 내지 못했는데, 그나마 수컷은 사부의 손에 있고 이것은 암컷이었다. 구양적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 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일속을 넘어뜨릴 수 없을 테지. 하지만 이 벌레로 중독시킨다면 일속이 아니라 대라진선(大羅眞仙)이라 하더라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구양적은 문 앞에서 얼음누에가 약통을 벗어나 방바닥을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벌레는 구불구불 기어 곧장 일속에게로 향했다. 벌레가 기어가는 자리를 따라 한 갈래의 빙선( 線)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뜻하던 방바닥 한복판으로부터 얼음줄이 무시무시하게 뻗어 나왔다. 벌레는 일속이 자고 있는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구양적은 일속이 깨어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일 속은 가볍게 코까지 고는 품이 깊게 단잠이 든 모양이었다. 벌레는 이제 그의 등허리에 기어들어갔다. 한기가 일속의 체내에 주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구양적은 독사장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 곁에 서서 일격을 가할 틈을 노렸다. 이때 꼼짝 않고 누워 있던 일속의 장삼이 부스럭거리는 듯하더니 그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대는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는고?' 일속은 잠에 취한 듯 눈을 감은 채 입도 벙긋하지 않았으나 마치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아 구양적은 놀란 나머지 사두 장으로 일속의 머리에 일격을 가했다. 이것은 독사비천(毒蛇飛天), 일룡귀연(一龍歸淵), 용반호거(龍磐虎踞)라는, 사장독초(蛇杖毒招) 가운데 가장 악랄한 세 가지 타격 법이었다. 이 법수로 머리를 가격하면 제아무리 대단한 기공을 가진 일속이라 해도 축지 않고는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그 독사장을 막아낸다고 하더리도 벌레가 몸에 기어올라간 이상 반드시 죽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속은 신통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문득 왼손을 들어 꽃이라도 따듯 가볍게 그것을 막아내는 것이 아닌가? 구양적은 손에서 쥐가 나는 듯한 느낌에 하마터면 독사장을 떨어뜨릴 뻔했다. 구양적이 멈칫하자 일속은 손가락 두 개를 써서 독사장을 확 붙잡았다. 구양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의 무예로는 일속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구양적은 벌레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 런데 이미 일속의 몸에 달라붙은 벌레가 일속이 식지로 가리키는 시늉을 하자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일속이 정색을 하전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는 시주님이 길을 오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눈에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 살의는 다름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소. 나와 구양 시주님 사이에 무슨 연원이 있길래 시주님은 이처럼 나를 미워하는 것이오?" 구양적이 성난 기색으로 말했다. "일속, 당신은 내가 누군지나 알그 있소?" "그대는 서역 대사막의 으뜸가는 고수 구양적이 아니시오. 이미 알고 있소이다." 일속의 대답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말해 주지 않으니 알 리가 없지. 나의 사부님은 백면라살 수라아시다." 그의 말에 일속은 크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주의 사부님은 어디 계시오? 그녀가 지금도 살아 있소?" 구양적이 버럭 화를 냈다. "네 놈이 죽지 않았는데 사부님께서 어찌 죽을 수 있겠느냐?" 일속은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그는 천천히 구양적의 독사장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렇지, 그래. 내가 죽지 않았는데 그녀가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죽지 않고 있는데……." 일속은 그답지 않게 몹시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독사장을 집어든 구양적은 이때를 틈타 일격을 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였다. 그는 일속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일속은 몹시 괴로워하며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수라아, 수라아, 천룡팔부(天龍八部), 귀신은 나살(羅熬)을 위하고 신은 인도(人道)를 위함이니 여귀(女鬼)를 막아냄은 수라를 위함이라." 구양적은 염불을 모르는지라 일속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속이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어안이벙벙해졌다. 갑자기 일속이 구양적의 옷자 락을 틀어쥐며 물었다. "말해 주게,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12년이나 되도록 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사부님은 얼음 동굴 속에 계시지. 그분은 네 놈을 죽이려고 벼르고 계시다. 그동안 사부님의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분은 너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하고 있어. 만일 그분이 네 놈을 만났더라면 기어이 죽여 버렸을 거다!" 구양적의 대답에 일속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녀가 어떻게 혼자 얼음 동굴 속에서 살 수 있어? 그리고 그 아리따운 얼굴에 어찌 혈색이 없을 수 있어?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가 어찌 백발이 될 수 있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속은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이미 죽은 몸이고 마음도 죽었어. 다만 숨만 쉬고 있을 뿐이야. 그것은 내게 아직도 자그마한 속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난 그녀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괴롭히는 까닭은 뭔가? 나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야? 자네는 왜 그녀가 잘살고 있고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지 못하나? 그렇게 말하면 자네한테 해라도 생긴단 말인가?" 구양적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나? 나 역시 사부님을 사랑한다. 그 분은 나를 구해 주셨고 무예를 가르쳐 주셨지. 난 그분을 좋아한다. 난 그분이 어떤 지경이 되었는지 네 놈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 아. 세상 누구든 그분을 만나려 한다면 난 그 놈을 죽여 버리고 말 거다." 일속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구양적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자네, 그 말이 진정인가?" 구양적이 머리를 끄덕이자 일속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더는 말이 없었다. 일속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듯싶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방안을 한바퀴 날아서 돌았다. 이것은 그의 일지 법인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기만 하면 마음대로 허공을 떠다닐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침대에 돌아와 평온하게 앉더니 손으로 얼음누에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음 동굴이 차다고 하는데 이 벌레보다 더 찬가? 인심이 독하다고 하는데 이 벌레보다 더 독한가?" 일속은 마치 그 벌레가 얼마나 독한지를 전혀 모르는 듯이 손바닥에 놓고 말했다. "구양적, 이 벌레가 독이 있다고 하지만 나를 해칠 수는 없네. 보게나." 일속이 왼손을 곧게 펼치자 벌레가 내뿜은 냉기로 인해 손바닥이 삽시에 얼음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혈맥 속의 피는 여전히 제대로 순환하고 있었다. 일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독벌레가 있다고 해도 나한테 일양지신공이 있으니 자낸 나를 해치기 어려울 걸세." 그러나 구양적이 보기에 그의 왼팔은 이미 얼음 덩이가 되었고 몸은 덜덜 떠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독벌레를 이겨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속은 오른손을 내밀어 식지로 왼쪽 어깨의 천천혈(天泉穴)을 가리켰다. 식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니 매우 힘든 눈치였다. 그러나 그 식지가 차례로 아래쪽을 가리키자 시꺼멓게 죽었던 혈색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본래대 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저 놈이 이렇듯 기공이 대단한데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다 해도 그의 적수가 되기는 어려웠겠구나……." 구양적은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살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졌다. 일속은 여전히 손바닥에 벌레를 놓은 채 구양적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나의 수법을 보여 준 건 자네에게 내 마음을 알리기 위해서네. 나는 벌레의 독을 달갑게 받고 싶네. 내가 죽은 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수라아에게 전해 주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일세." 일속은 숙연히 정좌를 하고 두 손을 한데 모아 쥐었다. 손에 여전히 벌레를 쥔 채, 그걸 들여다보며 그가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얼음 동굴에 있고 나는 얼음 벌레를 들었으니 손발도 얼고 마음조차 차가워졌구려 그대는 나를 지독하다고 미워하고 나는 그대를 지독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독하고 그대도 독하지만 마음은 둘 다 고독하구려. 구양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일속이 무엇 때문에 두 손으로 벌레를 그냥 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벌레를 두 손으로 쥐고 마음속에 끌어들이면 혈맥을 통하여 온몸이 굳어 버리므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속은 얼굴에 평온한 미소를 띠고 각오가 되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추호의 속념도 없이 곧장 서방의 극락 세계로 갈 참이었다. 구양적은 멍하니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백면라살 수라아를 스승으로 모신 뒤 사문의 원수를 저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속이 언 시체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리고 싶었고 빨리 사부께 알리고 싶었다. 이제 사문의 원수가 죽어 없어질 테니 그녀의 근심은 사라져 이제 사부는 얼음 동굴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모용쟁이 들어왔다. 그녀는 일속 대사와 구양적을 번갈아 보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었다. 그녀는 곧장 일속에게로 달려가려 했으나 구양적 의 사두장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녀는 사두장에 밀려 곤두박질쳤다.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구양적이 쌀쌀하게 말했다. "낭자가 저 사람을 건드리면 낭자도 죽고 마오. 저 사람이 쥐고 있는 벌레에는 무서운 독이 있어서 죽지 않고는 못 배기오." 모용쟁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에 불을 켜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군요!" 모용쟁은 다시 일속에게로 가려 했다. 구양적이 두 번이나 막아 섰으나 모용쟁은 기어이 그를 뿌리치고 일속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있는 벌레를 땅바닥에 떨쳐 버렸다. "당신은 미쳤어요. 얼음 벌레로 중독시 켰으니 저분은 죽고 말 거예요!" 그녀는 펄펄 뛰었다. 구양적이 차가운 어조로 빈정댔다. "모용낭자, 저 놈이 죽고 사는 건 우리 사문의 일인데 낭자가 무슨 상관이오? 어서 물러나시오." 벌레는 땅바닥에서 여전히 꿈틀거리며 기고 있었다. 모용쟁은 홧김에 얼음누에를 밟아 죽이며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비열한 인간이군요! 정정당당히 싸워서는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이런 악독한 궤계를 쓰는 거지요? 벌레로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이런 부끄러운 짓이 어디 있어요!" "모용 낭자, 저 놈은 우리 사문의 원수요. 낭자는 상관 말고 물러나시오!" 모용쟁은 서글픈 심정으로 일속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속 대사를 무척 존경했다. 이 세상에서 일속 대사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기란 어려울 것임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속은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굳어 있었다. 모용쟁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구양적, 당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당신은 인간도 아니라구요!"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구양적은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서역 대사막에 계시는 사부님께서 이 제자가 사문의 원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신다면 큰 위안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사부님께선 이제 더는 그 얼음 동굴에서 고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이번엔 일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속 대사, 그대는 아주 비장한 죽음을 택했소. 내가 돌아가면 사부님께 그대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하겠소." 구양적은 비록 일속이 읊은 게(偈)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속에 은밀한 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고스란히 사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관에서 달려나온 모용쟁은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저려 왔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극악스러운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못살게 구는가? 일속 대사 같은 인물은 실로 귀한 분인데 구양적은 왜 그분을 기어이 죽이고 말았을까? 아 아, 알 수 없는 일이야.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무거운 심정으로 수림 근처에까지 와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모용쟁,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며 어떻게 살아 나갈 작정이지? 너는 정암으로 돌아가려느냐, 아니면 강호에서 유랑하려느냐? 너는 부모 형제는 물론 돌봐 줄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녀는 갖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이렇듯 번뇌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듯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모용 낭자, 이곳에서 뭘 하고 있지?" 깜짝 놀란 모용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세요? 제가 모용쟁인 걸 어떻게 아시나요?"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천년 묵은 얼음 동굴에서 한 번 상봉하였거니, 오로지 지난 일을 알 뿐 내세를 알 수는 없도다." "당신은 백면라살 수라아시군요!" 모용쟁이 놀라며 말했다. 상대방은 그렇다고 대답한 뒤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모용쟁, 넌 왜 우리 적이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가 널 버렸느냐?" 그녀는 모용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적이는 자기의 동생과 함께 있겠구나." 모용쟁이 대답했다. "구양봉은 북강 노독물(老毒物)의 제자들한테 끌려갔어요." 여인이 놀란 듯 되물었다. "뭐라고?" 모용쟁이 다시 한 번 똑같이 대답하자 여인은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노독물을 잘 아는 그녀는 구양봉이 노독물의 부하들한테 잡혀 갔으니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적이는……, 그 앤 잘 있느냐?" 그녀의 이 물음에는 깊은 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모용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여인은 정말 흉악한 인간이지 뭐야? 자기가 그 얼음 동굴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구양적을 짐승같이 무서운 사람으로 만들다니!' 모용쟁은 이런 생각을 하며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당신의 그 제잔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뭐예요? 그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여인이 놀란 소리로 물었다. "뭐?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그래 누굴 죽이고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은 일속 스님을 죽였어요." 모용쟁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인은 모용쟁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모용쟁의 머리칼을 틀어쥐더니 큰소리로 물었다. "그 애가 어디에 있느냐? 빨리 말해라. 그 애가 어디에 있지?" 모용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 사람은 객점에 있어요. 운우(雲雨) 여관에 말이에요.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그곳에나 가 보세요. 날 괴롭히지 말고." 여인은 모용쟁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나는 듯이 걸어갔다. 구양적은 일속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죽어 가던 일속이 구양적에게 할말이 생각났는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다만 두 눈으로 구양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있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일속 대사, 당신이 죽으면 내가 묻어 주리다. 하지만 당신의 머리는 베어 내야겠소. 서역에 갖고 가서 사부님께 보여야 하니까." 일속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양적이 한 말을 알아듣고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백발의 여인이 나는 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일속에게 다가가 그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란 구양적은 얼른 그녀를 뒤쫓았다. "적아!" 일속을 안고 나가던 여인이 소리쳤다. 구양적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사부님이 어떻게 여길…….' 구양적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뒤쫓았다. 멀리 사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림 속으로 번개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구양적은 영문을 모른 채 부지런히 뒤쫓았으나 사부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시냇가에 앉아 있는 사부를 발견했다. 달빛 아래서 일속을 안고 앉아 있는 사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속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명전(明 )씨, 내가 당신을 해쳤어요. 내가 당신을 해쳤다구요……." 구양적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모용쟁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구양적의 곁에 섰다. 일속은 이미 잿빛으로 죽어 가고 있었으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 듯 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그가 불가에 귀의하기 이전의 속세지념(俗世之念)을 남겨 준 그 여인임을 알았다. 바로 그녀가 그로 하여금 불조와 만날 수 없게 했고 한평생 우울하고 허무한 나날을 보내게 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면서 백발 여인과 일속 스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일속 스님을 꼭 끌어안은 채 여인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명전 씨,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군요. 만일 당신이 죽을 생각이 없었던들 적이가 어찌 당신을 죽일 수 있었겠어요? 적이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명전씨……, 난 최근에야 당신이 무엇 때문에 법명을 일속이라 지었는지 알게 됐어요. 당신이 일속이라 한 건 일 점(一點)의 속념, 즉 저를 염두에 둔 것이지요? 말씀해 주세요.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 구양적과 모용쟁은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속의 몸에서는 점점 얼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인은 일속의 이빨 사이로 약을 흘려 넣으려 했다. 그것은 얼음누에의 독을 푸는 영약(靈藥)이었다. 하지만 일속은 그녀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명전 씨, 입을 벌리세요. 이 약을 자셔야지요. 이 약을 자시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그녀는 자기의 입으로 환약을 씹어서는 일속의 입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일속은 여전히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녀가 일속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일속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오열을 터뜨렸다. 비 오듯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시냇물이 일속의 몸에 돋은 얼음을 씻어 갔다. 얼음 조각들이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자 시냇물에서 물고기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벌레의 독성이 어찌나 극렬한지 시냇물의 물고기들까지 모두 중독되어 죽어 버린 것이다. 백발의 여인은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어리석군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당신은 일양지공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음누에한테 독살당한단 말이에요? 당신은 그래 일양지공을 사용하기가 소원이 아니었던가요? 바보 같은 양반……, 바보 같은 양반……." 그녀는 자기와 함께 웃으면서 인생을 담론하던 지난날의 일속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얼마나 유쾌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던가?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일속은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그녀는 얼음 동굴 속에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그랬던 것이 어언 12년, 뼈를 깎는 고통 끝에 만나고 보니 그는 스님이 되어 있고, 또 죽어서 자기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