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6편 (36/64)

2026-09-24 21:22:51 조회 21
그런데 낭자께서는 나더러…… 이……." 그는 갑자기 머쓱해 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모용쟁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함자를 어떻게 쓰시나요. 그걸 왜 말 못하시나요? 말씀해 보세요." 그 사람은 히히 하고 웃더니 모용쟁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이름을 말하라는 것이오?" 모용쟁이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저의 이름은……." 그는 우물우물 이름 석 자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모용쟁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좀 큰소리로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이름이 뭔데요?" 그는 비로소 세 사람을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겠소. 난 주백통(周伯通)이라고 부르오. 이런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세 사람은 물론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주백통이란 사람은 그들 세 사람 다 자기 이름을 처음 듣는 듯하자 아주 기뻐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아니야, 아냐. 왕중양님의 말씀은 옳지 않아. 그분은 나를 천하에 이름난 괴물이라고 하셨소. 천하에 이름이 났다면 사람들마다 다 나를 알아야 되지 않겠소? 그런데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잖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몇십 번이나 곤두박질을 치다가 일어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왕중양님께 무공을 배우려고 그러시오?" 구양적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주백통은 모용쟁과 일속에게 눈길을 주었다. 두 사람 역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주백통은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럼 잘됐소. 나는 당신들이 모두 왕중양한테 무공을 배우러 온 줄만 알았소. 당신들이 왕중양한테 무공을 배우러 왔다면 그분은 나에게 영영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오. 안 그렇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분한테서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을 거요. 당신들의 재주로는 그분한테서 무공을 배워 낼 수 없을 게요. 그분의 재주는 천하에서 으뜸인데 당신들 공력으로는 배운다고 해도 저보다 못할 테니까요. 당신들이 그걸 배워서 뭘 하겠소. 안 그렇소?" 일속은 출가한 몸이라 남과 경쟁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구양적은 성격상 참지 못하고 주백통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주 형, 그대는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에 으뜸이란 걸 어떻게 아시오? 그대는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도리를 알고 있기나 하오?" 주백통이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그것도 모르시오? 사람들이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고 말하는 건 모두 허튼소리요. 그건 당신이 하늘 끝까지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한테 하는 소리지요. 나도 한 번은 보름 동안이나 올라갔지만 하늘 끝까지는 이르지 못했소. 당신은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당신이 종남산에 와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당신이 만일 왕중양이란 분을 만나 보았 더라면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오. 사람이 무공을 배우려면 처음부터 훌륭한 사부님을 모시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오. 내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려는 것은 그분이 천하에 으뜸가는 고수이기 때문이오. 말씀해 보시오. 내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고수한테서 무공을 배우게 되면 나의 무공도 남다르지 않겠소?" 구양적은 이 주백통을 사리에 밝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는데 정작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양적은 그가 입만 벌리면 왕중양이 천하에 으뜸가는 고수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왕중양의 무공을 보기나 하고 하는 소린지 의심스러웠다. "당신은 왕중양의 무공을 본 적이 있소?" 구양적의 물음에 주백통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도 마시오. 그분이 어디 나한테까지 자기의 무공을 보인답디까? 그분은, 자기는 나의 사부가 아니니까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거지요. 그분은, 자기의 전진교에는 나 같은 제자가 있어선 안 된답니다. 그분의 규칙이 얼마나 엄한지 나로서는 당할 수 없었소. 나는, 난 참을 수 없었소. 그래서 그분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본래 이 사람은 왕중양이 아예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용쟁이 그 말을 듣곤 우스운 생각이 들어 농담삼아 물었다. "왕중양이 당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데 그럼 내가 당신을 제자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주백통은 모용쟁의 심사를 눈치채지 못하고 당장 큰절이라도 올릴 태세였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닫고 물었다. "옳아, 서두를 것 없지. 서두를 것 없구말구. 서두르다간 차질이 생기는 거야. 내가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이 왕중양이란 분보다 훨씬 시원시원하기는 한데 그래 당신의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오?" 이 물음에 모용쟁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천하에서 으뜸이냐구? 나는 천하에서 백 번째, 천 번째도 안 될 거다.' 모용쟁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려 하나 그가 받아 주지 않는다면서요. 내가 그대를 가련히 여겨 제자로 받아 주는 거예요. 나의 무공이 천하에서 몇 번째인가는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요." 주백통이 큰소리로 말했다. "왜 관계가 없다는 거요? 보시면 알겠지만 나의 무공도 형편없진 않소이다.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이 나의 사부 노릇을 하면서 날 가르친단 말이오?" 그는 모용쟁이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장권(長拳)이란 무공 동작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이 장권이란 무공은 구양적과 일속 스님같은 대가들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백통의 동작을 눈여겨보았다. 그의 동작은 힘도 있고 정확성도 높아서 결함 같은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모든 동작을 끝낸 뒤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어떻소?" 모용쟁은 그에게 농담을 했던 것이지 정말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읍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대단해요. 당신을 제자로 받지 않겠어요." 주백통이 기뻐하며 대꾸했다. "그렇지, 그렇구말구. 다행이오. 난 사실 여인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당신이 나의 사부가 되신다면 난 어떻게 하겠소?" 이때 안으로 들어갔던 마옥이 나왔다. "늦어 미안합니다. 사부님께서 세 분을 청하십니다." 구양적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어떤 사람이며 그의 무공은 도대체 어느 수준일까? 내가 그 사람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모용쟁도 호기심을 품고 걸어가면서, 입 가진 사람마다 왕중양을 칭송하는데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했다. 막상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죄어 드는 게 아니었다. 일속은 달랐다. 그는 워낙 《구음진경》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없었으므로 구양적이나 모용쟁과는 달리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는 마옥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좋소이다. 시주께서 먼저 드시지요!" 구양적도 말없이 마옥의 뒤를 따라 중양궁으로 들어갔다. 말이 궁관(宮館)이지 그 안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대청에 들어서니 사방에 흰 기들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삼청수상(三淸 像)이 걸려 있는데 아주 멋진 그림이었다. 앞에 향안(香案)이 놓여있는데 그다지 정교하지는 못했고, 그 위에는 밀국수며 제철 과실 따위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 줄지어 놓인 긴 걸상들에는 도인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것은 두 사람뿐으로, 한 사람은 서른 살쯤 되는 도인이었다. 우의도관(羽衣道冠) 차림을 한 그는 두 눈에 정기가 넘쳐 실로 선풍도꼴의 기품이 엿보였다. 그의 오른쪽에는 그보다 더 젊은 도사가 앉아 있다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들어온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 젊은 도사는 뭔가 몹시 갑갑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마옥은 도사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부님, 이분들이 알현을 청한 세 분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분은 바로 사부님을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겠다고 몇 년째 드나들고 있는 주백통입니다." 복판에 앉은 도사가 바로 종남산의 새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숙연히 읍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먼 길을 오셨는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왕중양을 본 구양적은 어쩐지 가슴이 써늘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저 사람은 중원 종남산에 있는 전진교의 교주이고 나는 서역 대사막에서 제일가는 고수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같이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걸까?' 구양적은 왕중양을 향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저 구양적은 집안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종남산 전진교의 교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듣건대 전진교에서 《구음진경》이란 기서를 얻었다고 하기에 읽어 보려고 왔습니다." 일속 스님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소승도 무공을 배우는 사람이 온데 역시 《구음진경》을 읽어 보러 왔사오니 중양 진인의 배려를 바라옵니다." 그 뒤에 섰던 주백통이 급히 말을 가로챘다. "저는 스승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왕중양님,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겠습니까, 안 받아 주시겠습니까? 받아 주신다면야 별문제가 없겠으나 만일 안 받아 주신다면 소인이 날이면 날마다 찾아올 것이니 이 얼마나 시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중양 진인은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구양적 등 세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주백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벌써 몇 번이나 말했나? 자네와 나 사이엔 사제지간의 연분이 없다고 말이야." 그러자 주백통이 소리쳤다. "왕중양, 당신은 무림의 제일가는 고수인데 당신이 날 제자로 받지 않으면 내가 어디 가서 당신과 같은 사부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거부당하는 것이 분해서 펄펄 뛰었다. 왕중양은 그의 성미를 아는지라 더는 알은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구양적 등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우연히 《구음진경》이란 기서를 얻었는데 정말로 가짜가 아니었소. 출가한 사람은 이기심이 없는 법이니, 천천히 이것을 전파하여 언젠가는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다 이 《구음진경》을 알도록 할 생각이오. 나는 이 책을 숨길 마음이 없으므로 속히 이 경서를 베껴 내어 천하 무림의 사람들이 모두 다 알도록 하려고 했소. 그래서 난 지난달부터 문을 걸어 닫고 힘들여 이 《구음진경 》을 읽었는데, 무학을 정밀하게 서술한데다가 그 속의 지식이 해박하기가 실로 일구난설이올시다. 하지만 이 경서에서 다소의 문제점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말허리를 잠깐 끊고는 탄식하며 몹시 안타까운 기색을 보였다. 구양적이 급한 생각에서 물었다. "교주님의 공력으로 그 책의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왕중양이 대답했다. "이 경서는 앞머리에 총칙이 있고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만여 자 가량 되오. 보노라면 실로 글자마다 주옥 같고 구절마다 정화(精華)인데, 지금의 무림인 가운덴 이 책을 깨우칠 인재가 없을 것이오. 이 책은 도종 황제 때 수서관원(修書官員)이었던 황상이 엮어 낸 것이오. 그분은 처음에는 이런 글을 엮을 생각이 없었으나, 천하에 널려 있는 밀서 사본들을 두루 읽던 중에 《만수도 장(萬壽道藏)》을 수정해 내게 되었던 것이오. 도종 황제는 5천4백81권으로 된 《만수도장》을 수정하고 천하의 모든 도학 서적들을 모조리 정리하여 한 부의 《도학대관(道學大觀)》을 만들어 내려 했소. 황상은 책을 잘 만들지 못하면 목이 떨어질 판인지라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였소. 그는 전전긍긍 갖은 힘을 다하여 한 권 한 권 자세히 읽으면서 책을 수정해 나갔소. 이와 같이 도가의 전진(全眞)을 전부 읽던 중에 무학 기재가 되었던 것이오. 그는 스승이 없이 자력으로 무학에 통달한 사람인데 강호의 사람들 중 고수 황상이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소? 하지만 후에 황제께서 그를 파견하여 명교(明敎)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가 손을 펴니 사람들이 죽었소. 무수한 강호의 호수(好手)들이 죽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불복하여 그와 겨루는데 무더기 로 덤벼들어서야 그에게 중상을 입혔을 정도요. 그는 도망가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수들을 물리칠 수많은 모법들을 생각해 낸 후에야 다시 나타나 원수들을 찾았다고 하오. 그가 산속에 들어가 40년이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 뒤 지난날의 원수들을 찾으니 모두들 황천객이 된 지 오래였다 하오. 그 당시 묘령의 소녀이던 한 여인만이 살아 남았는데, 그녀도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되어 있었 지요. 황상은 탄식하면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세월이란 흐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굴 속에 들어앉아 이 《구음진경》을 써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준 것이오." 왕중양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사람들은 그윽한 감회에 잠겨 황상이 걸은 길을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음미했다. 그러고 보면 사상이니 불가의 열반이니 도가의 단사(丹砂)니 하는 것들이 모두 눈앞에 지나가는 운무처럼 속절없었다. 잠시 후 왕중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구음진경》을 보면서 실로 탄복하였소.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나 같은 재주로도 천하의 영웅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소. 이 경서는 실로 전인미답의 내용을 가지고 있소. 한데 이 경서에는 큰 폐단도 있는데, 책 가운데 있는 일부 기공사술(奇功邪術)은 사람들에게 주는 해가 적지 않소. 이 책이 무림에 유입된다고 할 때 다행히 정착의 인물이 그것을 얻는다면 천하의 창생들에 게 행복이 되겠지만 만일 사악한 인물이 그것을 얻을 경우 화근 덩어리가 될 것이오. 나는 고민 끝에 몇 번이나 이 책을 불태워 버릴 생각까지 했었소.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번번이 그만두곤 했지요." 왕중양은 이야기를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양적은 왕중양의 말이 진정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의기소침해진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이처럼 고뇌에 잠긴 것은 마치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간수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 밤잠을 설치는 것과 같구나. 인간이란 역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가 보다. 욕심이 많을수록 근심도 많아지는 법. 하지만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일까? 혹시 자기는 《구음진경》에 있는 술법을 다 배워 놓고 그 책을 불태워 버린 후 그 무적의 무공을 혼자 장악하기 위해 저렇듯 꾀를 쓰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일속은 구양적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왕중양이 상모(相貌)가 청수(淸秀)하고 선풍도골을 갖춘 것으로 보아 절대로 간교한 인간이 아니라고 인정하였으며 그가 한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속이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불조는 자비하고 진인(眞人)은 일념이거니, 천하의 무림 인사들을 무수히 구할 수 있을진저……." 모용쟁은 무심한 척 앉아 있었으나 왕중양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중양 진인께서는 이미 그 《구음진경》을 읽으셨겠군요?" 왕중양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용쟁이 다시 물었다. "중양 진인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당신 한 사람만이 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알고 있는 셈이 되는데, 그런가요?" 모용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지만 태도만은 사뭇 공손했다. 왕중양은 모용쟁의 성격도 모르거니와 그녀가 묻는 용의도 모르는지라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오." 모용쟁이 입가에 웃음을 베어 물고 물었다.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익히졌다니 천하의 무림에선 좋은 일만 생기겠군요? 이제부터 소동이 일어나게 될 거고 끝없이 어지러운 세상이 올 테니까요." 멍해진 왕중양은 이 처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모용쟁은 웃으면서 기막힌 언변으로 말을 이었다.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을 습득하셨으니 천하의 무림에 난이 일어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배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양 진인은 일속 대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방외지인(方外之人)이니 인생인세(人生人世)에 대하여 이해가 있을 줄로 알아요. 인간의 선악이란 일념지간(一念之間)에 따라 뒤바뀌는 것이지요. 불조께서도 일찍이 세 차례나 미오(迷誤)에 빠지셨으 니, 범인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어요? 중양 진인께서 손에 《구음진경》을 들고 보물을 가졌다고 여기신다면 이건 하늘을 탐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에요. 하지만 중양 진인의 사람됨으로 보아 그러시진 않으리라고 믿어요." 왕중양은 범속한 인간이 아니었다. 지난날 그는 중원의 무림 인물들에게 요청하여 의병을 모아 금에 맞서 용감히 싸웠던 사람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들 만나보지 않았겠는가? 그는 곧 모용쟁의 말뜻을 알아듣고 가벼운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오. 천하의 물건이란 덕이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게 마련이고 재능 있는 자도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지요. 음식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그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오. 그걸 즐기는 사람에겐 그것이 중한 것이 되지만 그걸 싫어하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요. 하나의 보물이 진짜 보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누구든지 그것을 볼 줄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 있소. 《구음진경》은 비록 보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왕중양은 잠깐 말을 멈추고 일속 스님, 구양적, 모용쟁과 자기의 두 제자(큰 제자 마옥과 둘째 제자 구처기), 그리고 그들의 뒤 편에 서 있는 주백통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함부로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이곳에 모인 분들 가운데서 다만 두 사람만이 이 《구음진경》과 인연을 갖고 있소." 모두들 그 말을 듣고 왕중양이 자기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옥과 구처기는 사부가 자기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내심 기뻐했고, 구양적은 자기와 모용쟁 낭자를 두고 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주백통의 생각은 달랐다. '저자가 나를 제자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판에 그 책을 나한테 보여 줄 리가 없지.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야.' 그러나 이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오로지 그만이 이 《구음진경》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그저 어리숙하기만 하던 주백통이 훗날 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가장 익숙하게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그렇다치고, 일속 스님만이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그는 중양 진인이 이 경서에 있는 무공은 배워 둘 바가 못 된다고 하니 안 배우면 그만이고 유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양 진인이 말하는, 그 경서와 인연을 가졌다는 사람 속에 자기가 끼여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구양적이 참지 못하고 넌지시 왕중양을 떠보았다. "중양 진인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먼 곳에서 찾아왔음에 도 불구하고 《구음진경》과는 인연이 없겠군요." 왕중양이 대답했다. "그렇소." 생각이 빗나가자 구양적은 발끈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중양 진인은 실로 오만한 분이로군요? 내가 중양 진인께 몇 수 배워야겠소. 그러면 이 《구음진경》의 무공이 해명을 날리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길다란 자루에서 사두장을 꺼냈다. 그러자 왕중양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비록 세상과 단절되어 소식에 어두운 사람이긴 해도 구양 선생의 크나큰 명성은 익히 들어 왔소. 선생은 서역 대사막의 으뜸 가는 고수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선생과 무예를 겨루어 보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양적도 따라 일어났다. 사람들을 모두 중양궁에서 나와 전진교 교주와 구양적 간의 시합을 지켜 보았다. 두 사람이 마주섰다. 왕중양은 신선 같은 풍채로 바람을 마주보고 섰는데 긴 소매가 펄펄 나부끼는 품에 서릿발 같은 정기가 엿보였다. 구양적은 어두운 낯빛으로 사두장을 들고 무심한 듯이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이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주백통은 한가롭게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 내가 당신을 찾아와 제자로 받아 달라고 그렇게 사정했건만 당신은 끝까지 승낙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이 진짜로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소? 당신이 정말 재주가 있다면 이 주백통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으로 모실 테요. 하지만 당신이 경요화병(景 花甁)처럼 겉모양뿐이라면 당신을 스승으로 모실 이유가 없지.' 한편 모용쟁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인들 중 호걸에 속하지만, 서역의 대사막을 지나 중원의 종남산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 길을 몇 달 동안 구양적과 동행해 오는 동안 무척 정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구양적이 왕중양과 자웅을 가리겠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구양적이 이길 가능성보다는 질 가능성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졌다 . 그가 만일 패한다면 《구음진경》을 얻지 못하게 됨은 물론이고 무슨 낯으로 사부님을 뵙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