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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4편 (34/64)

2026-09-24 21:22:51 조회 21
속문성이 잽싸게 그를 제지했다. "큰형님, 저 사람은 귀신이 아니오. 사숙께서 저 사람을 대적하게 형님은 좀 가만 있으슈." 구양봉은 문득 석초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한쪽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는 성미가 급해서 두세 마디 안팎에 모든 심사를 다 드러내고 마는 사람인데 오늘은 어째서 한옆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지?' 속문성은 구양봉이 석초수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사숙에게 귀띔했다. "선비는 사흘 동안 만나지 못해도 다시 봐야 한다지 않소이까. 구양봉은 사부님한테서 합마신공을 배웠으니 내공에 필시 큰 성취가 있을 겝니다. 내 생각엔 셋째 동생으로 하여금 먼저 구양봉과 몇 합 싸워 보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사숙도 꾀가 밝은 사람인지라 속문성이 하는 이 몇 마디에 선뜻 수긍했다. '둘째란 놈이 그래도 충심인 것 같구나. 앞으로 저 놈을 죽여야 할 때가 오면 사정을 좀 봐 줘야겠다. 고통을 덜 느끼게 깨끗하게 죽여 버려야지. 그는 당장 석초수를 향해 소리쳤다. "셋째야, 저 사람을 잘 보거라. 저 놈이 너의 여편네 산이를 독살한 나쁜 놈이니라. 어서 저 놈을 죽여 버려라!" 석초수는 사숙의 미혼약을 마셨던 터라 그의 말을 듣자 자기는 분신쇄골하더라도 그녀를 위해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내가 어떻게 죽었고 또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하는 것은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산이를 죽였다구요?" 그가 칼끝으로 구양봉을 가리키며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가 대답했다. "그래, 바로 저 놈이야. 저 놈이 산이를 독살했어. 자넨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우리 유운장은 몇십 년을 지탱해 오면서 줄곧 태평스러웠고 한 번도 이런 참사를 겪어 본 적이 없었어. 모두들 재미있게 살고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독살당했잖나. 바로 저 놈이 왔기 때문이야. 저 놈이야말로 천하에서 으뜸가는 악인이란 말야! 저 놈은 산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네의 큰 사형 의 손자 두아를 죽였고 둘째 사형의 여편네도 죽였다네. 믿어지지 않거든 저 놈에게 물어 봐." 석초수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속문성을 바라보았다. 속문성이 맞장구를 쳤다. "셋째 동생, 틀림없어. 자네 집사람도 저 놈한테 죽었어." 석초수는 칼을 쳐들더니 한 손으로는 칼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틀어쥔 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틀림없이 저 놈이 산이를 죽였단 말이지요?" 속문성은 급히 그렇다고 대꾸했다. 석초수의 손이 떨리더니 번쩍이는 칼날이 구양봉의 몸으로 날아갔다. 구양봉은 손을 뻗쳐 힘들이지 않고 칼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내리기도 전에 격노한 울부짖음 소리와 함께 또 칼 한 자루가 연신 찍고 찌르면서 날아들었다. 구양봉은 연신 손을 내밀었는데 그 동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그는 이제 60년 공력을 가진 사람으로 변한 터라 손놀림과 발놀림이 마치 질풍 과도 같이 맹렬했다. 비록 동작이 능숙하진 않았지만 일단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 힘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석초수의 칼등을 내리쳤다. 힘이 아주 세어 오형제 가운데서 대력으로 이름이 높은 석초수는 한칼에 화산(華山)을 찍어 가를 기세였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윙윙 바람이 일어 한쪽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은근히 탄복하고 있었다. 그의 칼 쓰는 수법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구양봉이 손을 쓰는 동작을 보고 세 사람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구양봉은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몸동 작이 날렵하고 보법(步法)이 정확하여 매번 칼 밑으로 빠져 나가 석초수로 하여금 헛칼질을 하게 했다. 그는 또 수시로 손을 내밀어 칼등을 치곤 했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석초수는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깜짝 놀란 그는 칼자루를 고쳐 잡고 태도를 바꾸어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항했다. 곁에서 싸움을 지켜 보던 속문성은 가슴이 후둑후둑 뛰었다.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해도 구양봉은 선비 기질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 불안스런 기색이 엿보였고 걸음걸이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방금 무공을 익힌 터라 숙련이 되지 못하여 처음부터 자신만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합이 지나자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 듯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손놀림도 유연해져 갔다. 3, 40합쯤 싸 운 뒤엔 구양봉은 이제 의기양양해졌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 여유만만 해졌다. 깜짝 놀란 속문성은 구양봉이 무서운 적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싸우다가 구양봉이 물었다. "석 사형, 당신도 나의 사부님을 죽일 생각을 했더랬소?" 석초수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만일 그 늙다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칼로 토막 내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거다!" 그는 손에 든 칼을 더욱 힘껏 틀어쥐었다. 구양봉은 문득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세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놈한테 매여 시간을 끌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저 놈들이 한쪽에 서서 호시탐탐 나를 해치울 궁리만 하고 있지 않는가? 어서 이 셋째란 놈을 해치워야지 꾸물대다간 저 놈들의 독수(毒手)에 걸려 죽고 말 게야.' 구양봉은 갑자기 고함을 길게 내지르면서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여 진격하려는 듯하다가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어디로 도망가는 거냐?" 석초수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잽싸게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땅을 짚더니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머리를 들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바꾸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꽉꽉' 하는 두꺼비 우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수평으로 곧게 내밀었다.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석초수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나가고 사람의 몸뚱이가 마치 돌멩이처럼 먼지 속에 나뒹굴었다. 잠시 후 먼지는 걷혔으나 석초수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속문성과 사숙은 두리번거리다가 물너진 담장 앞 뿌리 뽑힌 나무 등걸 아래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얼른 그를 끄집어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몇 달 보이지 않은 사이에 구양봉의 무공이 놀라우리만큼 진전돼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꾀가 있고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제갈정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개죽음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양봉을 지켜 보던 사숙도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구양봉 자신도 몹시 당황해 있는 상태였다. 시험삼아 한 번 써 보았을 뿐인데 합마공의 효과가 너무도 엄청났던 것이다. '난 사람을 죽였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방금까지 펄펄 뛰던 사람이 나한테 죽었다. 그도 날 죽이려 하고 나도 그를 죽이려 했는데, 만일 이런 기공이 나한테 없었다면 그의 칼에 내가 먼저 죽고 말았으리라. 난 사람을 죽였다. 내 손이 이렇듯 피로 더럽혀진 이상 선량하게 살아가긴 어차피 틀렸다. 나는 진정 악인이 된 것이다.' 세 사람이 구양봉을 바라보니 긴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의 눈에 흉악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마치 창검과도 같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갑자기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사람을 죽였다. 난 사람을 죽였단 말이다. 사부님, 전 사람을 죽였사옵니다. 전 진정 악인이 되었사옵니다……." 그러더니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를 지켜 보던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구양봉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이젠 대적하기 어렵게 됐구나. 시일이 흐르면 더욱더 대적해 낼 수 없게 될 터이니 지금 손을 써야 한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동시에 손을 쓰고 독을 사용하면 그 하나쯤이야 당해 내지 못하겠는가.' 그는 마음을 다진 뒤 입을 열었다. "구양봉, 네가 셋째를 죽이기는 했다만 날 죽일 순 없을 게다." 그는 머리를 돌려 속문성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속문성은 사숙의 생각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대충 감을 잡고 제갈정을 향해 말했다. "큰형님, 저 가증스런 놈을 눈뜨고 봐 줄 수가 없구려. 저 놈은 우리 식솔들을 죽이고도 부족해서 셋째 동생까지 죽여 버렸소. 형님 앞에서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구려." 제갈정은 고개를 돌려 속문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라구? 저 놈이 셋째를 죽였다구7" 속문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정이 이어서 말했다. "죽였으면 어쩌겠나. 셋째란 놈도 좋은 물건은 아니거든." 그는 또다시 멍해 있다가 물었다. "말해 보게. 저 놈은 대악인인가?" 속문성이 달빛을 빌어 살펴보니 제갈정의 눈에 흉악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움찔 놀란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탄식조로 말했다. "형님, 형님은 저 놈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저 구양봉에 비하면 형님이나 나나 소악(小惡)에 불과하오. 사부님이 두 가지 신공을 저 놈한테 전수한 걸 원망할 수밖에……." 제갈정은 크게 분노했다. 지금은 비록 온전한 정신이 아니지만, 그 동안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대악인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일들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구양봉이 사부한테서 진짜 무공을 전수받아 힘들이지 않고 대악인이 되었다지 않는가? 그는 불같이 치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구양봉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이는 음침하게 웃으며 제갈정을 부추겼다. 구양봉과 맞붙은 제갈정은 깜짝 놀랐다. 그의 내력이 어찌나 큰지 사부의 내력과 엇비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보아하니 그를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속문성은 사숙이 궤계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는지라 화급히 손을 써서 제갈정과 협력하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아이는 슬그머니 구양봉의 뒤로 움직여 갔다. 그는 허리춤에서 독분을 꺼내어 구양봉을 향해 냅다 뿌렸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한 독가루를 들이마시고도 구양봉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충격을 받은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속문성 역시 사숙의 솜씨가 효험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몸을 빼어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러 한 사정을 모르는 제갈정만이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구양봉에게 덤벼들었다. 구양봉은 제갈정의 집요한 태도를 보면서 갑자기 사부님이 그들에게 당하던 때의 참상이 떠올라 격심한 증오심을 느꼈다. 그는 긴 고함소리를 내면서 제갈정에게 죽음의 손길을 뻗쳤다. 한 주먹이 제갈정의 앞가슴을 치고 다른 한 주먹은 제갈정의 왼쪽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제잘정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주 르르 쏟아졌다. 속문성이 이를 보고 꽥 소리쳤다. "큰형님, 빨리 피하시오. 피하라니까!" 제갈정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면서 구양봉에게 발악적으로 덤벼들려 했다. 속문성이 안 되겠는지 머리를 썼다. "큰형님, 구양봉이 형님네 두아를 죽치려 하오. 형님이 물러나지 않으면 저 놈이 두아를 죽일 거요!" 그러자 제갈정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두아를 죽이지 마라. 두아를 죽이지 말란 말이야. 내가 물러가지. 내가 물러가면 될 거 아닌가."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 겅중겅중 뛰어 달아났다. 다른 놈들도 잇달아 도망쳤다. 구양봉은 난쟁이 사숙과 제갈정, 속문성 등을 일거에 죽여 버리려 했으나 그들이 모두 달아나 버리자 맥이 풀렸다. 그는 폐허를 보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부님, 이게 웬일입니까? 이게 웬일입니까, 사부님……." 온통 불타고 부서진 살풍경한 광경에서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또다시 중얼거렸다. "사부님, 전 떠나야겠습니다. 훗날 그 놈들을 보면 꼭 죽여 버리겠습니다. 사부님을 위해 복수하겠나이다!" 구양봉은 곧장 그곳을 떠났다. 그는 혼자서 큰길을 따라 가며 생각했다. '오랫동안 형님을 만나지 못했구나. 모용 낭자와는 어떻게 되었을까? 형님도 아마 날 생각하고 계시겠지?' 한편 구양적과 모용쟁 두 사람은 변경에서 구양봉과 작별한 뒤 곧장 종남산을 향해 걸었다. 구양적은 동생 구양봉에 대한 염려로 시종 침울한 기색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부족함을 한탄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동생을 그런 식으로 떠나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생을 북쪽 변강에 보내 차디찬 눈보라를 맞는 고초를 겪게 하다니. 그는 모용쟁과 함께 있는지라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 고 속으로만 가슴을 앓았다. 종남산에 당도하니 주막이 하나 눈에 띄었다. 몹시 갈증을 느끼던 터라 둘은 길도 물을 겸 주막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뚜걱뚜걱 들리더니 금나라 사람의 복장을 한 장정들 셋이 들어왔다. 그들은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술과 안주를 날라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세 사람은 구양적의 옆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안주를 가져올 동안 한담을 늘어놓기 시작 했다. 중년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기에 낭주(狼主)께서 마음만 있다면야 종남산이 문제가 아니지. 그래 왕중양이란 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조용히 하게. 사람들 말이 이 종남산 사방에 비적들이 살고 있다고 하네. 이처럼 주막을 운영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모두 왕중양네 사람들이라잖나." 그러자 중년의 사내가 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치며 외쳤다. "제기랄, 그자들이 왕중양네 사람들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나으리가 할말을 못할 것 같아? 못마땅하거든 어디 나한테 와서 덤벼 보라고 그래!" 그러면서 그는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았다. 그는 마치 싸우기 좋아하는 수탉처럼 누구든 걸려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와 다투려 하지 않았다. 주막 사람들은 감히 그를 똑바로 보지조차 못했다. 괜히 그런 작자를 건드렸다가는 피를 보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구양적의 마음은 매우 울적하였다. 금 사람들은 대송(大宋) 내에 들어와서 도 이렇듯 행패를 부렸다. 강산이 짓밟혀 철옹성이 절반이나 떨어져 나갔을 뿐 아니라 사람들도 이렇듯 수모를 당하며 살게 된 것이다. 또 한 사내가 끼여들었다. "여보게, 저자들은 왕중양 패거리들이 아닐세. 저들에게 싸움을 걸어 뭣하겠나?" 그러자 한쪽에 있던 깡마른 사내가 말했다. "왕중양을 본 적이 있었다면 이렇듯 함부로 호기를 부리진 못할 걸?" 성미 사나운 중년 사내는 그의 비꼬는 듯한 말에 화가 치밀어 탁자를 마구 두들겨 댔다. "지금 내 부아를 돋을 셈인가? 대금국(大金國)의 용사인 내가 왕중양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은가? 내가 그대들과 함께 종남산으로 가서 그 왕중양을 찾겠네, 그래서 그자가 그 무슨 《구음진경》이라는 책을 바치는지 안 바치는지를 보면 될 거 아냐. 그자가 그걸 바치면 가만 놔두고 만일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 형제들 솜씨가 어떤가 맛을 보여 주겠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던 구양적은 내심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쁜 것은 이제 종남산에 당도하였으니 즉시 왕중양을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왕중양의 수중에 정말 그 《구음진경》이란 책이 있다면 그것을 손안에 넣을 희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근심스러운 것은 이 세 사람이 주막에서 큰소리로 《구음진경》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으로 보아 중원의 무림 전체가 이 경서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뭇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판이니 그것을 손안에 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상념에 잠겨 있는데 때아니게 맑은 염불 소리가 들려 왔다. "나무아미타불, 아불자비(我佛慈悲)……." 한 젊은 중이 낡은 장삼 차림으로 주막에 들어섰다. 아주 자비롭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염불 소리는 가슴 깊숙한 데서 울려 나오는 듯싶었다. 그가 가볍게 외고 있는데도 목소리가 이처럼 맑은 것을 보면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한쪽에 자리잡고 앉더니 고개를 숙인 채 앞에 있는 목탁만 들여다보았다. 주막 심부름꾼이 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하며 물었다. "대사께서는 무슨 음식을 드시렵니까?" 중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냉수 한 대접 떠 오시우." 심부름꾼은 중이 불경을 외는 줄 잘못 알아듣고 자리에 선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중은 눈을 감은 채 양신(養神)을 하면서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심부름꾼은 잠시 기다리다가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대사님, 무얼 드시려는지요?" 중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냉수 한 대접만 주시오." 심부름꾼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밥도 아니고 국도 아니고 냉수 한 대접이라니. 심부름꾼은 또다시 물었다. "다른 건 드시지 않겠는지요?" 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글어글한 눈동자에서 만만치 않은 빛이 흘러 나왔다. 그는 두 눈을 껌벅이더니 다시 한 번 대답했다. "냉수 한 대접을 주시오." 뒤쪽에 앉아 있던 세 금인(金人)들은 이 중의 기이한 거동을 눈길 한번 떼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심부름꾼이 냉수를 가져다 탁자 위에 놓아 주었다. 중은 합장을 한 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승인이 세속에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남의 골혈(骨血)을 탐내고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지어다. 오늘 또다시 남의 경권(經捲)을 탕하였으니 계율에 크게 어긋났느니라. 죄과로다, 죄과로다……." 그는 합장한 채 주문을 외고 나서 두 손을 내리더니 품속에서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보따리는 아주 작았으나 단단히 묶어 놓아서 그것을 풀기가 여간 힘든 것 같지 않았다. 중은 참을성 있게 매듭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보따리를 펼치니 그 속에선 금덩이도 은덩이도 아닌 바싹 마른 꽃잎 몇 장이 나왔다. 중은 엄지와 식지, 장지 세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서 가볍게 대접안의 물에 적신 뒤 입에 대고 물방울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는 모양이 그러했다. 물을 마신 뒤 그는 이번엔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로 마른 꽃잎을 집어 들고는 자세히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과로다. 죄과로다. 춘화추실(春花秋實)도 생명이로다. 중이 계율을 범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아니 하도다." 말을 마치자 그는 꽃잎 한 송이를 입 안에 넣고 아주 맛좋은 듯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막 안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무슨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저 사람은 과연 물과 꽃잎만 먹고도 견뎌 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중은 아무런 기색도 없이 천천히 물건을 거두어 아까처럼 단단히 묶어서는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다 물값으로 엽전 두 닢을 놓았다. 중은 심부름꾼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는 그대로 떠나지 않고 걸음을 옮겨 세 금인들 앞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예를 갖추며 물었다. "세 분 시주님, 승인이 아까 듣자니 왕중양이란 사람이 경서 한 부를 지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의 물음에 중년이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가던 길이나 가시지 말라비틀어질 놈의 경서는 무슨 경서? 고불청등(古佛靑燈)이라고 임자는 피로 쓴 대장경(大藏經)인 줄 아는 모양이지? 아니면 여섯 대를 내려오면서 베껴 쓴 금강경(金剛經)인 줄 아는가? 우리가 말한 건 무경(武經)이니 중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중은 여전히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소인이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무술을 익히는 비적이옵니다. 세 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 소승도 잘못 듣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마도 《구음진경》이지요? 그 경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세 분 시주께서 알고 계신다면 소승을 데리고 가셔서 그것을 찾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년의 사내는 중의 어리석은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구음진경》은 아주 귀한 보물로서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치고 그 것을 탐내지 않는 자가 없는데 자기를 함께 데리고 가서 그 경서를 구하게 해 달라니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는가. 한쪽에 서 있던 젊은 사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 놈이 《구음진경》에 대해 물을 자격이나 있는 놈이냐?" 중은 순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 사나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주님 보시기에 그걸 물어 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젊은 사내는 손을 들어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대번에 박살이 나서 주저앉았다. 구양적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그 사나이의 무공은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은 부서진 탁자를 보며 한탄조로 말했다. "천물(天物)을 폭진(暴殄)하였으니 죄과로다! 시주님은 하필 아까운 탁자에 대고 화풀이를 하십니까?" 그는 부서진 탁자가 몹시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더욱 화가 나서 대금국의 용사도 몰라본다며 대꾸할 새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