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3편 (33/64)
알겠느냐?" "사부님, 왜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합니까?" 구양봉의 물음에 신독행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어 그러는 줄 아느냐? 그 놈들도 밖에서 우릴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느냐? 그 놈들이 우리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 산장을 불태우지 않았을 거다. 넌 그 놈들이 너한테 무슨 좋은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줄 아느냐? 그 놈들은 네가 강호에 나오기만 하면 천방백계로 널 대적할 생각만 하고 있다. 만일 네가 합마공을 알지 못하면 그 놈들이 마수를 뻗쳐도 막아내지 못할 게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을 쓴다 해도 그 놈들이 독을 사용하기만 하면 넌 꼼짝없이 죽고 마는 거다!" 신독행은 독설을 퍼붓다가 실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구양봉은 마음이 쓰라려 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합마공을 배우지 않았다가는 끝내 이곳에서 죽고 말 것이타. 그는 사부를 바라보며 결연히 대답했다. "사부님, 배우겠습니다." 신독행은 몹시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60년이 되도록 강호를 떠돌아다녔건만 적수를 만나지 못 했었다. 하지만 난 허장성세를 하지 않았고 강호에는 내가 유운장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나는 워낙 큰일을 해 보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마흔 살 나던 해에 너의 사숙과 다투게 되었다. 그 사람은 물론 나도 상처가 중하여 세상에 대한 웅심이 없어지고 말았지. 네가 합마공을 배우는데, 두려워할 사람은 당세의 기인 이다. 내가 앞서 들은 말에 의하면 중원에 기서가 있는데, 도종 황제 때 황상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서 《구음진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책은 실로 천하의 무학기보로서 여길 나가게 되면 꼭 그걸 찾아내어 익혀야 하느니라." 구양봉은 조용히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부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구음진경》은 바로 형님이 중원에서 찾으려는 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부가 아주 큰 성의를 갖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독행은 말을 이었다. "그 《구음진경》이란 책은 실로 비할 바 없이 기묘한 책이다. 일찍이 누구한텐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은 지금 종남산 전진교의 젊은 교주 왕중양의 손에 있다고 한다. 네가 가게 되면 기필코 그 사람과 한판 겨루어야 할 게다. 그래서 네가 그를 이겨야만 그 경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큰 교의 교주인 그가 쉽사리 너한테 그 기서를 넘겨줄 리가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구양봉은 아주 독한 자가 되어 중원에 가서 그 기서를 수중에 넣을 생각을 해 보았다. 더는 연약한 서생으로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절로 뛰었다. 구양봉은 그 자리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공손하게 아홉 배를 하고 맹세했다. "제자 구양봉은 노독물 신독행을 본받아 강호로 나가서 한평생 독과 악을 행하며 인간다운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나이다. 사부님의 합마공을 배운 후 나가서 사숙 사자우를 죽이고 유운장의 크고 작은 모든 작자들을 죽여 버리겠나이다……." 그가 머리를 들었다. "사부님, 마을의 하인들도 죽여야 하옵니까?" 신독행은 수염을 흔들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질렀다. "당연하지. 왜 죽이지 않겠느냐? 그들이라고 우리를 가만 놔둘 것 같으냐? 그들도 우리를 발견하면 발견하기가 무섭게 죽여 버리고 도망갈 거다. 그런 놈들을 죽여 버린다고 해서 아까울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한이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하인들도 죽여 버릴 것이며 유운장 안의 크고 작은 사람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리겠나이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긴다면 이 구양봉은 칼을 맞고 화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구양봉의 확고한 맹세에 신독행은 몹시 기뻐했다. "내가 너를 찾은 것은 나의 후신을 찾은 것이다. 드디어 지금 네가 나의 뜻을 이어받게 되었으니 이 어찌 내가 중생(重生)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를 지켜 보는 구양봉의 가슴은 노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말할 수 없이 쓰라렸다. 그는 비록 사부가 한평생 뜻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자기나마 그에게 위로가 되고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드려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석살 안에서 구양봉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사부로부터 합마공 심법에 대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 합마공 심법은 배우기가 무척 어려우니 잘 듣거라. 너의 사숙은 어렸을 때 조 사부님의 귀여움을 받았는지라 몇 마디를 가만 히 훔쳐 듣고 슬그머니 합마공을 익히려다가 주화입마가 되어 그때부터 키가 자라지 못했느니라. 그 놈은 줄곧 나를 원망하면서 내가 자기를 망쳐 놓았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 사실과는 다르니라. 그 놈은 합마공을 익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비명에 죽게 될 거다. 내가 그 놈을 미워하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총명한 사람이니 무공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며 반드시 스스로 합마공을 익혀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내공심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듣고 기억해두어라." 신독행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에 대해 한마디 한마디 씩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대력 (大力)이 허하면 오규(五竅)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그 실(實)이 온몸에 전부 들어와 올바르게 유도되지 못하면 기가 빠지지 못한다. 기가 온몸에 차고 넘치면 마구 토하고 싶게 되느니라. 손으로 지기(地氣)를 접하여 상지(上肢)를 지탱하면 마치 호랑이나 늑대와 같이 날쌔진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끌어 잡아당기면 지기가 움직이고 그 기가 온몸에 차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기는 발로 부터 몸에 들어왔다가 손을 통하여 나가며 손으로 들어왔다가는 발을 통하여 나가는데 이처럼 무궁하게 순환하는 법이다. 만일 소리를 내면 꾸꾸꾸 하는 두꺼비 소리가 나는데, 호랑이나 독수리 울음 소리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그 기가 닿는 한 쇠붙이나 돌도 부서지고 말며 사람의 인력으로는 감당해 내지 못한다." 총칙을 이야기한 뒤 그는 한 단락의 법문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어찌나 총명한지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마다 그대로 다 깨우쳐서 신독행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몸이 성하다면 저처럼 총명한 놈이 있는 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경계하다가 결국 죽여 버려야 했을 게다. 이 정도로 총명한 놈이면 이 노독물이 죽은 후에라도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테니 복이 굴러온 셈이구나.' 신독행은 제자의 총명함에 크나큰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이 합마공은 사문의 내공심법으로서 이것을 몸에 익히기만 하면 다른 어떤 기술을 배우든지 간에 힘이 덜 들고 효과가 곱절로 높아진다. 구양봉은 사부의 가르침에 따라 조용히 자세를 취하고 일합막준거식(一蛤 踞式)이나 쌍수안전변환수식(雙手眼前變換數式) 등을 연습해 보았는데, 이것들은 다 내력을 끌어내 오는 기공이었다. 그 다음에는 몸을 도약하여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으로, 공중에서 마음대로 회전하다가 땅에 내려서는 훈련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두꺼비처럼 '꾹꾹' 하는 소리도 내었다. 이 소리를 내는 데도 내력을 모아야 하는데, 땅에서 내력을 끌어들여 대력을 키우면 무궁무진한 힘이 솟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적과 싸울 때 무림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힘을 이어 대지 못하여 중도에서 무력해지는 것이다. 상대가 열 가지 법수를 알고 있 는데 다섯 가지 법수밖에 모르면서도 맨주먹으로 싸운다면 실속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저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양봉은 이제 합마공을 알게 되었으니 수시로 내력을 끌어낼 수 있으며 남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한 사람은 정성들여 가르치고 다른 한 사람은 신중하게 배웠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운 탓에 전수해 주고 배우는 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열흘 동안 배우고 나자 구양봉은 제법 숙련된 합마공을 펼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사부님이 길이 잠든 틈을 타서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굴 어귀로 나갔다. '사부님께서 이 합마공을 배우기만 하면 굴 문을 열 수 있다고 했으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나갈 수 있다면 사부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리라.' 그는 꿇어앉는 자세를 취하고 신력을 모아 굴 문을 힘껏 후려쳤다. 와르르 하는 소리에 놀란 구양봉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서 굴 어귀를 바라보았다. 흙벽이 무너져 내려 먼지가 뭉실뭉실 피어 올랐으나 길은 들리지 않았다. '내 힘으로는 이 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사부님께서 나를 나무라시겠구나! 만일 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 혼자 이곳에 남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 애썼으나 끝내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신독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모르게 가서 시험해 보았던 게지? 그래 굴 문이 열리더냐?" 구양봉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아니요." "네가 지금 굴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이제 막 합마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굴 문을 열어젖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내가 이렇듯 몸이 상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굴 문을 열었을 텐데……." 구양봉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그럴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아무래도 두 사람이 이 석굴 안에서 나갈 수 있는 날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굴 안에 머물러 있는 석 달 동안 사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구양봉은 사부의 상처가 하루하루 악화되어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그가 닦은 합마공은 어느 정도 보람이 있어 두 손바닥으로 밀면 석벽의 흙덩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곤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신독행은 구양봉의 합마공이 이젠 3, 4할쯤은 숙련되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신독행이 몹시 기진맥진하여 구양봉을 불렀다. "양봉아, 너는 오늘부터 천하에 드문 악인이고 독물이다. 하지만 너는 절대로 날 미워해선 안……." 구양봉은 눈물을 흘렸다. "사부님, 사부님께선 저를 구해 주셨고 저는 오직 감사할 따름인데 미워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날 미워하는 건 대수롭지 않으나 네가 한 맹세만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네가 그걸 시행하지 않는다면 난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이며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노라 대답했다. 신독행이 기운을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합마공엔 화공대법(化功大法)이란 법수가 있다. 화공대법으로 네 손을 나의 전중혈( 中穴)에 갖다 대면 거기로부터 나의 공력을 흡수할 수 있다. 나의 공력을 흡수하기만 하면 너는 굴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구양봉은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아니, 사부님! 그렇게는 못합니다!" "넌 그래 이 구사독옹의 문하생이 아니더냐? 행동거지가 이처럼 계집년 같아서야 어찌 나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달래듯 말했다. "양봉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게다." 그는 기를 쓰고 구양봉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의 손을 틀어쥐고 자기의 전중혈에 갖다 대면서 힘껏 토해냈다. 그의 대력이 구양봉에게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이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그가 배우는 합마공은 일종의 기공으로서 적수가 강하면 강할 수록 내력이 도리어 더욱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부가 기를 쓰고 공력을 토해 내자 이에 따라 그의 내력도 스스로 터져 나와 사부의 공력과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두 갈래의 내력이 한데 모아지자 사부의 전중혈에 갖다 댄 그의 손은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긴장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부의 내력을 받아들였다. 신독행은 자기의 내력이 구양봉한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자 도리어 기분이 느긋해지는 눈치였다. 그는 한마음으로 구양봉에게 내력을 주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까. 신독행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뒤틀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구양봉은 쓰라린 심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 이러실 필요까진 없으셨는데……." 신독행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양봉아,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넌 이 사부를 기억하고 천하에 드문 악인이 되어 큰일을 하거라……." 사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숨결은 점점 미미해지다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구양봉은 만감이 교차해서 망연히 사부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자기의 다섯 제자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나한테만은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 주셨다. 난 반드시 그런 사부님의 뜻을 따라 천하에 드문 악인이 되리라. 난 그 꼬마 사숙을 죽여 사부님의 복수를 해 드릴 테다. 내 손으로 그 유운장의 인간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말리라.' 구양봉은 눈물을 흘리며 굳게 결심했다. 그는 이제 자기의 내력이 커져서 사부의 60년 공력을 몽땅 흡수했음을 절감했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얽힌 심정으로 그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제 이곳에서 나가자.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사부님을 위해 복수하여 사부님께서 구천에서도 편안히 눈을 감으시게 하리라.' 그는 사부의 유체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아홉 배를 한 뒤 소리 내어 말했다. "사부님, 저는 이제 떠나가겠습니다. 만일 사부님 말씀이 옳으시다면 전 꼭 밖으로 나갈수 있을 겁니다. 제가 나가게 되면 사부님 대신 반드시 복수를 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그는 굴 어귀로 향했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쉰 다음 내공을 끌어올려 석판을 힘껏 떼밀었다. 제19장 최초의 살인 어느새 의식이 돌아온 석초수가 난쟁이 사숙과 속문성, 그리고 제갈정과 함께 폐허 위에서 이 얘기 저 얘기 주고받고 있을 때 노독물 신독행이 있던 석실 쪽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마구 피어 올랐다. 놀란 네 사람이 동시에 바라보니 초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3, 4장 되는 높이로 쑥 날아올랐다가는 땅에 내려섰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였다. 네 사람은 모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자리에 선 채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행동거지로 보아 이 폐허가 몹시 생소하게 느껴지는 눈치였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는 머리칼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고 수염이 더부룩하여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아이가 그에게로 나는 듯이 달려가 물었다. "넌 누구냐?" 그는 이마에 드리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껄껄 웃었는데 그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그 웃음 소리는 내력이 충만한 사람의 것으로 기공이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아이는 은근히 놀라며 큰 소리로 재차 물었다. "넌 누구냐?" 그는 긴 머리칼을 가볍게 가슴 쪽으로 끌어다가 좌우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리면서 아이를 향해 말했다. "사숙, 그래 나를 몰라보시겠소?" 아이가 크게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신독행과 함께 침대에 앉았다가 땅속으로 꺼져 내려간 구양봉이었다. 구양봉임을 알아낸 그는 내심 반가웠다. 두 사람이 땅속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그는 이제 합마공이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실망했었는데 구양봉이 이렇게 살아 나왔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아이는 야릇한 미소를 떠올리며 구양봉에게 물었다. "네 사부님은 어디 계신가? 그는 왜 나오지 않지?" 구양봉은 그가 사부에 대해서 묻자 분노를 느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죽이고도 염치없이 관심 있는 체 꾸며대는 거요?" "자네 사부님이 죽었다고? 참말인가?" 구양봉은 머리를 들어 달을 가리고 있는 검은 구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무겁게 대꾸했다. "사부님은 돌아가셨소이다." 아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뼉을 쳐댔다. "잘됐구나. 노독물이 결국 죽었구나. 내 뜻대로 되었어. 양봉아, 노독물이 죽을 때 너한테 합마공 심법을 전수해 주지 않더냐?" 구양봉은 속으로 탄식했다. 유운장 안의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사부의 생사에 관심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새삼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는 생전에 그처럼 위풍이 있고 강직했건만 죽고 나니 누구 하나 그를 마음에 두는 이가 없는 것이다. 밀실에서 거처하다 고독하게 죽었으니 그의 넋 또한 고독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구양봉이 상심해 하는 것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가 너한테 합마공을 전수하여 주었지?"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사숙이 합마공에 대해 저렇듯 집착하는 것을 보니 단단히 조심해야 되겠구나.' 아이는 선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봉아, 그럼 네가 나한테 그 합마공을 전수해 주면 안 되겠냐?" 구양봉이 거칠게 대답했다. "허튼소리 작작 하시오!" 워낙 기공 따위의 법수란 대대주 그 가문의 장문인(掌門人)이거나 가장 유력한 제자한테만 전수하는 것으로서 타인은 듣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사숙은 합마공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이 모든 규례를 무시하고 후안무치하게도 구양봉에게 이 같은 청을 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큰소리로 웃고는 입을 열었다. "사숙이 이 합마공을 배우고 싶으면 나를 사부로 모셔야 하지 않겠소? 사숙은 본래 나의 선배인데 나를 사부로 모신다면 그게 어디 선배로서 격에 맞는 일이오? 이건 사숙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지." 아이가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바르며 대꾸했다. "양봉이, 난 보다시피 이렇게 자라다 만 사람이네. 자네를 사부로 모셔도 부끄럽지가 않아. 하물며 자낸 우리 문중에 하나뿐인 진정한 제자가 아닌가? 우리 문중에선 앞으로 자네를 우러러 받들텐데 내가 자넬 사부로 모시면 영광이지 부끄러울 게 뭐 있겠나?" 구양봉은 이 난쟁이 사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사독옹 문하에는 대개가 이런 후안무치한 인간들뿐이었다. 신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항렬과 선후배도 따지지 않고 수치도 모르니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이 냉랭한 어조로 내뱉었다. "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해치고 우리 두 사람을 산 채로 땅속에 파묻혀 있게 한 장본인 아니오? 만일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 시체가 돼 버렸을 거요. 이런 일을 생각하면 당신을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어찌 제자로 받아 줄 수 있겠소?" 구양봉의 대꾸에 체면이 여지없이 하였는데도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소리 내어 웃다가 안색을 바꾸며 차갑게 말했다. "이것 봐, 여기에 나는 물론 자네의 큰 사형, 둘째 사형이 있는 데, 자네 태도에 따라 생사가 결정될 거야. 알아듣겠나?" 구양봉도 안색이 변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인간이란 워낙 이러한 것인가? 한마디 말에 수시로 낯색이 달라지는구나. 인심이 이러할진대 더 말해 무엇하랴.' 구양봉은 아주 냉정하게 말을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합마공 심법을 전수하실 때 나에게 지독한 맹세를 하게끔 하셨소. 당신들은 물론 당신의 식솔들까지 몽땅 죽여 버리라고 말이오. 그러니 어서 대처하는 게 좋을 거요." 아이가 소리쳤다. "구양봉, 너는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너의 사부님이 20년이 가깝도록 나와 겨뤄 왔는데 그도 날 죽이지 못하고 나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네 사부님의 무공으로도 지금까지 나를 어쩌지 못했는데 네가 나하고 겨뤄 보겠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구양봉은 아무 대답이 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속문성이 구양봉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양봉이, 내가 변경에 있을 때 자네를 사리에 밝은 사람으로 보았기에 자네로 하여금 시를 읊은 것으로 대처하도록 한 걸세. 우리 오형제가 자네를 변경으로부터 데려온 건 자네가 악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내가 보건대 자네가 합마신공을 배운 건 자네한테 그리 득될 게 없으니 그 신공 심법을 알려 주고 형님을 찾아 변경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 구양봉은 냉소를 머금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한편 제갈정은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구양봉의 모습을 악귀로 착각한 나머지 몹시 놀라고 있었다. "넌 사람이냐, 귀신이냐? 넌 사람이냐, 귀신이냐? 네가 두아를 데려갔지? 우리 두아를 내놓아라!" 그는 감히 구양봉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불현듯 주먹을 휘두르면서 덤빌 듯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