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1편 (31/64)
"쾌도!" 그 순간 침대는 '쩍' 소리를 내며 그대로 땅 밑으로 꺼져 내렸다. 어린 사숙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 깜짝 놀라 잽싸게 침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데 돌연 뒷덜미에 칼날이 날아드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손을 떼고 얼른 몸을 돌렸다. 침대가 내려감과 동시에 거기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는 바로 구양봉이 유운장에 들어설 때 만났던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굴의 쾌도라는 사나이였다. 쾌도는 매우 얇은 절도(切刀)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칼 쓰는 법이 놀라울 정도로 정묘하고 번개 같았다. 쾌도는 시퍼런 칼날을 정신없이 휘둘러 순식간에 어린 사숙을 벽 한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사이 침대는 땅 밑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양옆으로부터 석판 두 개가 밀려 나와 입구를 딱 막아 버렸다. 신독행과 구양봉은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쾌도에게 분노를 느꼈다. 쾌도만 아니었어도 그는 벌써 신독행을 쫓아 밀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제 어디 가서 신독행을 찾으며 합마공의 내심공법은 어디 가서 알아낸단 말인가? "쾌도 이 놈아, 내 너를 박살내고 말겠다!" 아이는 악이 받쳐서 미친 듯이 덮쳐 들었다. 사실 쾌도는 오래 전부터 지하 밀실에서 기다리다가 침대 다리만 움직이면 뛰쳐나오기로 돼 있었다. 밀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오로지 칼 쓰는 법만 연구했다. 그래선지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번개 같이 날쌘 것은 물론 그 동작도 맹호같이 사나웠다. 그는 아이를 상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아이는 처음엔 쾌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밀실로 들어가 신독행을 죽 이고 구양봉의 입에서 내공심법을 받아 내는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점점 사납게 달려드는 쾌도의 칼끝에 그만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의복이 찢어지고 살가죽이 베어져 뻘건 피가 내비쳤다. 몸놀림이 민첩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 칼에 배가 두 쪽으로 갈라질 뻔했다. 아이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내도, 네 이 놈! 당장 달아라든가 아니면 내 손에 죽을 각오를 해라!" 그러나 그의 위협에는 아랑곳없이 쾌도의 칼은 점점 독해지고 날쌔졌다. 아이는 참다못해 맞받아 나가며 연속 몇 장을 쳐 갈겼다. 장풍이 어찌나 센지 쾌도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이는 더욱 묘한 몸놀림으로 쾌도의 칼을 요리조리 피하더니 뜻하지 않은 순간에 쾌도의 오른쪽 손목을 텁석 잡았다. 다급해진 쾌도는 칼로 아이를 치려고 했으나 아이는 틈을 주지 않고 두 손가 락으로 쾌도의 수양명대장경맥(手陽明大腸經脈) 위의 하렴(下廉)·편력(偏歷) 두 혈을 잽싸게 짚어 버렸다. 그러자 쾌도의 얼굴은 금세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주저앉더니 죽을 각오를 한 듯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이는 쾌도의 출현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듯 물었다. "도대체 신독행이 너한테 무슨 이득을 주었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드는 거냐? 나한테 밀실로 들어가는 길만 말해 다오. 그럼 내 너를 죽이진 않을 테니." 그 말에 쾌도는 처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죽어야 내 처자를 살려 주겠다고 했소. 내가 죽지 않으면 처자가 죽게 되오. 그러니 난 죽어도 원통하지 않소." 말을 마치자 쾌도는 갑자기 덥석 칼을 집어 들었다. 곁에서 말릴 새도 없이 쾌도의 목에서는 어느새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아이는 화가 나서 죽은 쾌도의 시체에 화풀이를 한 뒤 밀실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 입구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집안을 빙빙 돌며 구양봉과 신독행을 향해 갖은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문득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이렇게 찾아서야 그 놈들을 찾을 수가 없지. 온 유운장 사람들을 불러와야 한다. 장주님이 큰 봉변을 당하여 어디론지 사라졌다면 그들이 모두 찾으러 다닐 게 아닌가? 그러면야 밀실을 못 찾을리 없지. 어떻게든 내 손에 걸려들기 만 해 봐라. 그 길로 저승행이 될 테니까.' 그는 사람들을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양봉과 사부는 향이 반 대쯤 탈 시간이 지나서야 지하에 이르렀다. 구양봉이 정신을 가다듬어 사위를 둘러보니 사면의 벽이 모두 돌로 쌓여진 크나큰 석실이었다. 석실 안에는 식량과 물이 있고 탁자와 걸상, 또 다른 물건들도 있어 얼마간 살아가는 데는 걱정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여기가 어딥니까?" 신독행은 희미하게 냉소를 지었다. "여긴 내 무덤이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나를 여기에 순장시킬 셈인가?'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사부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내가 합마공을 가르쳐 주면 넌 나를 죽이고 이 밀실을 속히 나가라. 그렇지 않았다간 이 밀실에 갇혀 너도 죽는다." "사부님, 사부님 병구완을 하여 같이 나가겠습니다." 신독행은 차갑게 웃으며 더 말이 없었다. 구양봉은 사부를 의자에 옮겨 앉힌 다음 물을 한 그릇 떠다가 탁자 위에 놓았다. 신독행이 구양봉을 보고 갑자기 말했다. "너는 지금 네 궤계가 이루어졌다고 속으로 기뻐하고 있겠지? 그래, 나하고 같이 있게 되었으니 합마공, 이 천하 기공을 이젠 얻게 되었다고 정말 믿겠지?" 구양봉은 기가 막혀 어이없는 웃음만 웃었다. 사부의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왜 침대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 뛰쳐나가지 않았느냐?" "사부님만 놔 두고 나만 살자고 뛰쳐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전 사부님과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오직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대가 떨어질 때 저도 사부님과 함께 떨어져 내려온 겁니다." 신독행은 구양봉의 말이 미덥지 않은지 희미한 냉소만 입가에 머금었다. 구양봉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사부와 마주앉은 채 석실을 휘 둘러보았다. 석실은 백 사람도 더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공간이었다. 그런 큰 공간에 두 사람만 앉아 있자니 몹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 쾌도가 우리 침대 주변에서 나타났는지는 묻지 않느냐?" 구양봉은 사부의 묻는 뜻을 지레 짐작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사부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격한 쾌도가 은혜를 갚기 위해 날마다 사부님의 침대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사부님이 위험하다 싶으니 보호하고자 뛰쳐나온 거겠지요." 그의 말에 신독행은 앙천대소를 했다. "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래, 내가 그렇듯 인정 있는 착한사람 같아 보인단 말이냐? 내가 천하에서 제일 악한 악인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야? 난 지금껏 누구에게도 착하게 대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게끔 되어야 일이 제대로 되느니라. 쾌도는 내가 두려워 그러는 거다. 쾌도가 왜 날 두려워하는지 아느냐?" "그건 모릅니다." 구양봉의 대답에 노인은 아주 자만스레 말했다. "내가 그 놈의 처와 아들을 한 곳에 데려다 가두었다. 아주 좋은 곳이지, 조용하고. 그 놈은 처자와 매달 반나절만 만날 수 있지. 그래, 한 달에 반나절만 만나도 만족스러울까?" 구양봉은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처와 자식을 사랑한다면 한 달에 반나절만으로야 절대 만족스러울 리가 없지.' "물론 만족스러울 리 없겠지. 나는 그 놈에게, 그 놈이 죽지 않고 살아 여기에서 한 달 있으면 처자와 반나절을 만날 수 있고, 그 놈이 두 달 여기 있으면 처자와 하루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그 놈이 날 위해 애를 쓰거든. 알겠느냐? 구양봉, 어째 말이 없느냐?" "말할 게 있어야지요." "난 중상을 입었어. 장차 네가 여길 나가게 될 경우 너는 그 못된 다섯 형제 놈들을 모두 죽여 줄 테냐? 내 마귀 같은 사제를 꼭 죽여 버릴 테냐? 어디 대답해 봐라." 구양봉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을 하면 장차 그 여섯을 꼭 죽여야 하는데, 나 같은 무공을 갖고야 그들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또 사부님이 화를 낼 텐데 그러면 사부님의 몸에 얼마나 해로운가.' 구양봉이 대답을 하지 않자 신독행은 버럭 성을 내었다. "그러기 싫단 말이지? 싫으면 좋다. 어서 여기를 나가!" 구양봉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가 중상을 입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어떻게 혼자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가, 어서 가란 말이야. 난 너 따위들은 보기 싫다. 너 같은 인간들은 좋은 놈이 하나도 없어. 너도 나쁜 놈이야. 나를 속여 절세신공이나 얻어 볼까 해서 지키고 앉아 있기만 하는 놈, 네 놈의 심보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구양봉은 사부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약간 비켜 앉았다. '다섯 제자들에게 참혹하게 중상을 입은 판국에 속이 좋을 리 없지. 그런 와중에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게 무리지.' 그런데 신독행은 구양봉이 비켜 앉자 자기가 싫어서인 줄 알고 더욱 성이 나서 소리쳤다. "구양봉 이 놈, 너도 그놈들과 같은 놈이다. 너도 날 속이려고만 해!" 신독행은 또 왈칵 피를 토하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부님, 고정하시고 좀 쉬세요. 이렇게 성을 내시면 몸에 해롭다니까요?" 신독행이 냉소를 머금으며 악이 받쳐 소리쳤다. "뭐? 사부님? 상처가 어떻다고? 네깟 놈이, 네가 어떤 놈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나한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환심을 사려 들어?" 그는 돌연 구양봉을 덮쳤다. 중상을 입었지만 손엔 그래도 강한 힘이 남아 있었다. 그는 구양봉의 목을 움켜쥐고 조이기 시작했다.. "사부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구양봉은 대항해 볼 수도 있었으나 차마 사부와 싸울 수가 없어 애원을 하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깨어나 보니 사부는 자기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기분은 좀 맑아진 듯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넌 악인이 되려면 멀었어. 넌 내 제자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 네가 악인이었다면 날 죽였을 게다." 신독행이 구양봉의 목을 조일 때 구양봉이 이미 갖고 있는 정도의 합마공만 썼어도 신독행은 당장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양봉은 마음이 약한 탓으로 도리어 신독행에게 목 졸려 죽을 뻔한 것이다. 이 점은 구양봉이나 신독행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독행은 탄식을 했다. 변경에서 겨우 찾아내어 데려왔다는 구양봉이 악인이 아니고 우유부단한 서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인간인 줄 애당초 알았다면 벌써 없애 치웠을 텐데……." 신독행은 몇 번이고 푸념하면서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난 합마공을 가르쳐 줄 수 없다. 너 같은 위인은 합마공을 완전히 익혀서 고수가 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강호에서 남의 손에 죽기나 할 것이니 그러면 내 합마공의 가치만 떨어뜨리는 꼴이 되지. 이렇듯 내 명성이나 더럽힐 짓을 내가 뭣 땜에 하겠느냐?" 구양봉은 말이 없었다. '나더러 자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야단인데,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어쨌든 사부가 아닌가? 사부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구양봉, 세상에는 간악도 큰 간악이 있고 작은 간악이 있는 법, 너는 작은 간악에 속하는 소인배다. 마음이 착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가령 조금 전의 그런 일이 강호에서 생겼다면 너 같은 위인은 아무런 대책 없이 벌써 죽었을 게다. 대단한 기공을 가졌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큰 간악을 가진 자만이 큰일을 하고 큰 영웅이 되는 법이야. 알겠느냐?" 구양봉은 그의 말을 되새겼다. 가령 방금 자기가 사부의 손에 죽었다면 값없는 원귀밖에 더 되었겠는가. 아무런 큰일도 못해 보고 여기서 초개처럼 죽임을 당했다면 그처럼 덧없는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사부님의 가르침이 옳은지 어떤지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공감을 느꼈다. 신독행은 또 말했다. "인간이란 좋은 일을 하기는 쉬우나 나쁜 일을 하기는 쉽지 않느니라. 나쁜 일에는 대저 세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그 나쁜 일이 자기와 남에게 모두 좋은 점이 없는 것이지. 이런 나쁜 일을 하는 인간은 따라 배울 바가 못 된다. 이런 인간을 보면 죽여 버려. 공연히 천하 대악인의 명성만 더럽히지 않게 말이야. 두 번째 부류는 나쁜 일을 한 것이 남에게는 조금도 좋은 점이 없지만 자기 한테는 좋은 점이 있는 것인데, 이것도 소인지견(小人之見)에 불과하기에 나, 이 늙은 독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세 번째 부류는 그들이 해놓은 나쁜 일이 자기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좋은 점이 아주 많은 것이지. 나쁜 일을 한 것이 자기에게는 큰 위업이 되고 또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된다면 왜 이런 일을 안 하겠느냐? 네 사숙이 말하던 그 측천무후를 봐라. 자기는 황제가 되었고 남에게는 좋은 일을 좀 많이 했느냐? 측천무후가 너처럼 주춤거리기만 했다면 그런 큰일을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구양봉은 사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나 남에게 모두 좋은 일이라면 살인을 못할 것이 무엇인가? 세상에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문인은 문필로 사람을 주살하고, 무장은 창검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판에 흉악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사숙도, 다섯 사형들도 모두 악인이며 살인하는 자들이다. 내가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죽일 것이며, 내가 살려면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이다. 그들이 죽지 않는데 내가 왜 먼저 죽겠는가?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고 신독행이 또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녀석, 이젠 머리가 좀 돌아가느냐? 그렇지 않다면 합마공을 더 배울 것 없이 일찌감치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앞으로 봐라. 네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그 다섯 놈들이 꼭 너를 찾을 거다.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지 놈들은 너를 찾아내어 합마공을 알아내고 그 다음엔 너를 죽여 없앨 거야." "전 합마공을 끝까지 배우지 못했는데요." 구양봉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런 말은 나한테 할 필요가 없어. 그 놈들한테 가서 해. 그 놈들한테 난 합마공을 채 못 배웠습니다 하면 그 놈들이 아주 잘 믿겠다. 곧이듣겠어." 신독행은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구양봉은 신독행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놈들은 구양봉한테서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알아내려고 괴롭힌 끝에 결국 그를 죽일 것이다. 죽이지 않아도 병신을 만들어 죽느니 만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구양봉은 가슴이 떨렸다. 어찌하면 좋을까? 놈들에게 죽기보다 여기서 천하 무적인 합마공을 익혀 놈들을 죽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제18장 폐허가 된 유운장 밤이 깊어선지 가을 바람이 몹시 싸늘했다. 이 외딴 폐허에는 날짐승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이곳은 너무나도 황막하여 있다면 도깨비나 남아 있을까, 살아 있는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허물어진 담벽들과 잎새가 말라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금방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그 허물어진 담벽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이지러진 구름을 보노라니 바람에 밀려 파도가 이는 듯 구름 송이 하나 남아서 마을을 장식하누나 강산이 짓밟히고 인걸이 뒤바뀌니 쓸쓸한 그 광경 애처롭기 그지없네 뉘 말했던고, 산천이 의구하고 고국의 모습 강개하였다고 모든 것은 유수처럼 흘러가 버리고 하늘엔 석양빛만 붉게 타누나. 산천과 영웅을 기리는 노래이건만 그 노랫소리는 애간장을 말릴 듯 한없이 처량했다. 멀리 울창한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그 속에서 어른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멍하니 서서 허물어진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드러난 폐허의 광경은 무척 기괴하게 보였다. 불에 타다 만 흔적들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으나 그 사람은 별다른 기색 없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축축한 밤이슬을 맞은데다가 소슬한 가을바람까지 불어오자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산(珊), 산…… 가엾은 사람…… 그대가 그렇게 죽다니. 단 하룻밤밖에 정을 나누지 못했는데……. 그 기나긴 밤에 난 변경에서 돌아와 그대에게 머리 장식품을 주었지. 평소에 머리 장식품을 그렇게도 즐기던 그대가 그날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만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나만 꼭 끌어 안았지. 그날 밤 우린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를 꼭 끌어안고만 있었지. 그 밤이 지나자 난 사부님 의 일로 또 바삐 보내게 되었는데 그대가 이렇게 죽어 버릴 줄이야……. 내가 그 놈을 죽일 테야. 그 놈을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오래도록 폐허를 바라보았다. 한편 무너진 길다란 담벽 위에 자그마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농가의 어린애가 구들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있듯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는데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한바탕 웃고 나서 또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고로 악인들이 강량(强梁)을 떠들었지만 그가 어찌 무검(舞劍) 항장(項庄)에 미칠 수 있으리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 방벽을 이루었고 목왕(穆王)이 여덟 준마 휘몰아 서왕모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도다 그대 정녕 악인이 되려 할진대 여불위 뒤에 시황제가 있듯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음을 깨달아야 하리라 하건만 이 모든 풍류 귀객들 가차없이 한줌의 흙이 되었어라! 그는 웃다가 울다가 하며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허물어진 담벽 앞에는 그말고도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아무 기척도 없이 발자국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그 작은 사람 앞에서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노인이었는데 남루한 옷을 걸치고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에 핏발이 섰고 손도 시뻘겋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 하나를 등에 들쳐 업고 있었는데 아이는 오래 전에 죽은 듯 눈이 말라붙고 입이 까매졌을 뿐만 아니라 역한 시취까지 풍겼다. 그 노인은 노래 부르는 어린아이를 뼈다귀째 씹어 삼킬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노인의 옆에 서 있는 사람도 나이가 꽤 들어 보였는데 깨끗한 얼굴에 선비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도 음흉한 웃음을 띤 채 담벽에 걸터앉아 노래부르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노인이 입을 열었다. "두아야, 너 지쳤구나. 지쳤으면 이 할애비랑 가서 자자. 남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돼. 남의 음식이란 좋지 않단다. 좋은 음식이 라도 먹으면 안 돼. 남의 집 꿀떡 속엔 독이 있어." 노인은 머리를 돌려 자애로운 표정으로 등에 업힌 아이를 쓰다듬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큰형님, 그러지 마슈. 그 앤 이미 죽었어요. 벌써 독이 퍼져 냄새까지 나는데 왜 자꾸 그러시우?" 노인이 버럭 역정을 냈다. "둘째, 지금 뭐라 했나? 두아가 죽었다구? 자네야말로 죽었어. 자네야말로 벌써 죽었어야 했어!" 그는 흥분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두 사람은 주먹과 손바닥을 엇갈아 내밀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정없이 치고 받고 하였으나 사형제 처지라 서로 상대방의 권법에 아주 익숙하여 수십 합을 싸워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들은 몹시 지쳐 숨이 턱에 차서야 싸움을 그만두었다. 속문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갈정 형님, 나한테 이러자 마슈. 형님의 원수는 저쪽에 앉아 있는데 저 놈 죽일 생각은 않고 왜 나한테 분풀이요?" "둘째, 두 번 다시 두아가 죽었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자넬 죽여 버릴 테야!" 제갈정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거칠게 내뱉고는 머리를 돌려 담벽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를 보더니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대들도 오셨군!"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속문성이 입을 열었다. "사숙님, 우리 오형제는 사숙님을 대단찮게 보아 왔었는데 오늘 만나 뵙고 나니 큰 오산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숙님의 총명하심은 우리 형제들은 비길 바가 아니십니다." 속문성이 굽신거리자 아이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너희들 오형제는 너희들 사부한테 하는 것과는 달리 날 여지없이 깔보았지. 그런데 오늘은 어찌하여 날 사숙님이라 부르면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사숙님은 아주 총명하십니다. 사숙님께선 이젠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손에 넣었으니 자연히 천하 으뜸이 되었소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비적을 얻었더라면 가만히 숨어서 그 무예를 마저 익혔을 것인데, 사숙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으니 우리 오형제가 어찌 사숙님을 죽일 수 있겠소이까. 그러니 저희가 어찌하면 사숙님께서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감추신 곳을 알 수 있겠소이까?" 속문성의 말에 아이는 삿대질을 하며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