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0편 (30/64)
구양봉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밖으로 나갔다. 달빛 아래 꼬마 사숙이 서 있고 그 곁에는 기절해 쓰러진 신독행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신독행에게 다가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았다. 스승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 보니 겨우 실낱 같은 숨결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초조와 불안에 싸인 구양봉이 아이를 향해 물었다. "사숙님, 사부님께선 과연 회생할 수가 있을까요?" 구양봉을 보는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에 없는 소린 하지도 마. 네 사부가 죽으면 너야 좀 좋으냐? 그 두 가지 절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심산에 들어가 수련만 제대로 하고 나면 고금에 위풍을 떨치는 무학 대가가 될 텐데 말야. 넌 아마 사부님이 죽으면 속으로는 춤을 출 게다." 그 말에 당황한 구양봉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더듬거리며 변명하려 하자 아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다. 됐어. 나와 같이 사부님을 정실로 모셔 가기부터 하자." 구양봉은 아이와 함께 사부를 맞들고 조심스레 정실로 향했다. 몸을 움직이자 고통이 느껴지는지 신독행은 처절한 신음 소리를 냈다. 아이가 중얼거렸다. "이런 꼴에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물로 자처하고 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군. 그렇게 총명하다는 사람이 제자들한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불쌍도 하지." 구양봉은 입을 다문 채 사숙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의 일세영명(一世英名)이 이 한 번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구나. 사람이 살려면 정말 독하지 않고는 안 되는가 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사부님이 제자들에게 독하게 굴지 않았던들 제갈정네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을 모의했겠는가…….' 정실로 들어간 그들은 노인을 큰 옥침대 위에 눕혔다. 종잇장같이 창백해진 신독행은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구양봉과 아이는 옆에서 조용히 노인을 지켰다. 어느덧 날이 어슴푸레 밝아 왔다. 닭이 홰치는 소리와 더불어 유운장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마치 신독행이 깨어나면 찔러 죽이기라도 할 듯이 단도를 쥐고 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신독행은 숨이 막히는 듯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하지만 아이는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앉아 뱅그르르 몸을 돌리는 재미에 빠져 신독행의 생명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것 같았다. "사숙님, 사부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구양봉이 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아이는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웃어댔다. "네 사부의 목숨은 천하에 가장 뛰어난 의원이 와도 구해 내긴 다 틀렸어. 그러니 우리 같은 것이 암만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낸 그저 눈물 몇 방울 쥐어짜는 성의나 보이면 돼." "사숙님, 이 궤짝에 가득한 약 가운데 소용되는 약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사부님께 드리려면 어떤 약이 좋을까요?" "그래, 그래. 약을 먹여, 약을 먹여야지. 독약을 먹여 죽으면 모든 것이 시원하게 끝이 나는 거고, 좋은 약을 먹여 되살아나면 비록 큰 효과는 없다 해도 몇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겠지." 아이는 공연히 신명이 나서 떠들더니 약상자 앞으로 냉큼 뛰어갔다.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약이나 마구 가져다가 신독행의 입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신독행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약들은 신독행의 입가에서 흘러내려 비단 이불을 더럽혔다. "왜 이 모양이야! 약을 먹어야지. 약 먹어, 약을 먹으라니까." 아이는 짜증스레 떠들어대더니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신독행의 입을 벌리고는 다시 약을 던져 넣었다. 그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덜미의 대혈을 꼬집자 약이 목구멍으로 굴러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환약 하나가 너무 큰 탓인지 목구멍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아이는 신독행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사정없이 북 치듯 하는지 구양봉은 은근히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주먹으로 두드린 탓인지 목에 걸렸던 약은 신독행의 목을 넘어 뱃 속으로 쑥 내려가는 눈치였다. 신독행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암담한 우수와 처량한 비애가 서린 눈으로 아이와 구양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가 날 구했구나." 노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형님이 뭐 좋다고 내가 구해 줘? 난 형님을 사람으로도 안 보는데." 아이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내가 너를 두 번 구해 주고 이번엔 네가 날 두 번째로 구해 주었으니 우린 서로 빚갚음을 한 셈이구나. 다음엔 너도 날 죽일 수 있고 나도 너를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인간 봐라? 목숨이 겨우 붙어 있으면서도 다음 타령이네?" 아이가 빈정댔다. "개 같은 자식, 죽지 못해 까부느냐?" 신독행은 노하여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갈갈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는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냉큼 침대 머리맡에 올라앉더니 신독행의 얼굴에 대고 사설을 늘어놓았다. "20년 전 형님이 맞아들인 제자가 누구요? 제갈정이지? 제갈정이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악인이 없다고 좋아하며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어떤가? 아둔하고 심보 더럽고, 악인도 제대로 된 악인인가? 이런 제자를 둔 게 잘했소?" "글쎄 그건 잘못했네." 노인은 한탄했다. "잘못한 줄 알면 어디 그 악과가 어떤지 맛 좀 보시오." 아이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독행의 입 언저리에서 수염 몇 개를 쭉 뽑아 들더니 입으로 휘휘 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5년이 지나 또 술집에서 거렁뱅이 떼를 만났는데 그 거렁뱅이들이 마침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두들겨 패고 있었지. 그 아이가 급한 나머지 거렁뱅이 주머니에서 독사를 뽑아 내어 휘둘러 댔겠다? 독사한테 물린 거렁뱅이들이 아우성 치며 야단이 났었는데 이것을 보고 형님은 그 아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이라고 기뻐하며 데리고 와 둘째 제자를 삼았지요? 그런데 이 속문성이라는 둘째 제자도 음흉하고 괴벽한 엉터리 악종임을 누가 알았겠소? 제자감이 아닌 걸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래 이건 잘못이 아니오?" 신독행은 역시 풀이 죽어 대꾸했다. "잘못이지, 그것도 큰 잘못이지. 세상에 진정한 악인이란 드물거든." 아이는 그 말에 히죽 웃더니 또 잽싸게 신독행의 입에서 수염을 몇 가닥 뽑아 냈다. 신독행의 얼굴이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구양봉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말끝마다 운운하는 그 진정한 악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 "사부님, 사숙님, 두 분께선 말끝마다 진정으로 큰 악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진정한 악인이란 어떤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구양봉이 참다못해 이렇게 묻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날 보고 네 사부님을 보면 안다. 우린 세상에서 제일 큰 두 악인들이다. 난 형님보다 못됐고 형님은 나보다 악하고." 아이가 웃으며 대답하자 신독행이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가 나보다 악하고, 내가 너보다 못됐지." 둘은 누가 더 악한가를 가지고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아이가 먼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만둡시다. 그만둬요. 나이 먹은 늙은이가 나 같은 어린애와 다투다니, 나이가 아깝지 않소?" "이 녀석아. 네가 아이냐? 자라지 못해 그렇지, 꾀는 누구보다 멀쩡한 놈이." 둘은 또 옥신각신하였다. "사부님, 사숙님, 진정한 큰 악인이란 어떤 사람인지나 말씀해 주십시오. 제갈정이나 속문성도 큰 악인에 드나요?" 구양봉이 물었다. 신독행이 말 같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자 아이 쪽에서 입을 열었다. "우리 구사독옹 문하는 악인도 여느 악인이 아니라 천하의 가장 큰 악인이 되는 게 소원이지. 평생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첫번째는 진나라 개국 황제인 진시황 영정이야. 그는 젊어서 진왕(秦王)이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중부(仲父), 기실은 그의 친아버지인 여불위를 죽였지. 그리고 그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살아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을 산 채로 마대에 넣 고 때려죽였어. 그리고 6국을 삼키고는 6국의 재물은 물론 미녀란 미녀들은 몽땅 수레로 끌어다가 몇십 리나 되는 아방궁을 지어 놓고 밤낮으로 뚱땅거리면서 온갖 향락을 다 누렸지. 후에 그가 죽자 다른 사람이 그 아방궁에 불을 질렀는데 타는 데만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나? 그래 이 진시황이 천하 최고의 악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신독행도 진시황을 흠모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악인은, 그 사람은 당나라의 두 황제와 놀아난 여인인데, 태종과 고종 두 황제의 귀비가 되어 황후 노릇을 했지. 아들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서는 태후 노릇에 성이 안 차 아들을 제치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지,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한고 자기 이름은 무조(武 )라고 부르게 했는데, 이 조( )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글자로 해와 달이 떠있는 하늘이란 뜻이지. 그러니 그 야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잖아? 그리고 여자만 남의 희비가 되어 무릎을 꿇을 것이 아니라 남자도 희비가 되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서 남자들을 떡 주무르듯 가지고 놀았는데,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파리 잡듯 죽여 버리곤 했지. 그리고 계집들도 과거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그땐 여자들도 재주가 있으면 과거하여 벼슬할 수 있었지. 이렇게 그 여자로 인하여 천하의 남자 일과 여자 일이 뒤 죽박죽 뒤집어지게 되었어. 사람이 살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주 큰 재주잖아?" 신독행은 어느새 숙연한 기색이 되어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대해 경모의 심정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그들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시황 영정을 폭군이라고 한다. 6국을 삼키고 무고한 사람을 수 없이 죽였을 뿐만 아니라, 중부를 죽였으니 인정이 없고, 동생들을 산 채로 때려죽였으니 의(義)가 없고, 장성을 쌓느라고 무수한 창생을 죽였으니 제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해도 폭군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폭군을 숭배하면서 그런 사람이 되기가 소원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게다가 여인이라면 단정하고 현숙하고 부드러워야 할진대 남자처럼 세상을 쥐고 흔들려 해서야 어디 여인다운 여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측천무후가 대주 황제가 된 다음 후궁엔 남자 첩이 활개치고 음탕한 일이 천하에 널리 퍼졌는데 세상 천지에 이런 악한 여자는 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부와 사숙이 그런 측천무후를 이토록 칭송하니 구양봉으로서는 납득하려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어이가 없어 멍청히 앉아 있자 아이가 놀리듯 말했다. "자낸 나쁜 일을 하고 싶지 않나? 나쁜 짓을 하다가 남에게 들킬 때 기분이 어때? 기쁘지 않아? 악인이 돼 봐. 제 마음대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어 좋거든. 세상에 큰 악인이 또 하나 있는데, 나와 네 사부님이 모두 감복하는 사람이야. 그 악인이 누군가 하면 남송의 재상 진회란 인물이지. 그만하면 나쁜 것도 합격이고 악한 것도 합격이야. 남송 천하를 아예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거든. 뻔히 이겨 놓고도 악비를 억울하게 죽이고 금에게 노예처럼 해마다 숱한 공물을 바치게 하였으니 날고 뛰는 사람이 아닌가? 천하에 악인이 적지 않지만 진회처럼 나쁘고도 능력 있는 자는 별로 없거든. 듣자 하니 임안 철왕묘(鐵王廟)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진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처인 왕씨라더군. 어떤 사람이 진회의 동상을 보고 성이 나서 주먹질을 냅다 했 는데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몰랐을 정도래. 진회에 대한 증오심이 그 정도면 진회는 실로 굉장한 악인이지. 자네도 악인이 되려면 제멋대로 아무 짓이나 할 줄 알아야 하네. 남이야 어떤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말야.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기나 하나?" 구양봉은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는 글을 읽으며 언제나 선악을 분별하여 자기를 단속하는 삶을 살아왔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건 상상조차 안 해 봤다. 정말 사람이 저 하고 싶은대로 자유자재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쾌락일까? 하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려면 도덕과 윤리는 꼭 지켜져야 하는 게 아닐까? 구양봉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때 신독행이 말했다. "구양봉, 머잖아 제갈정 패거리가 다시 돌아와 날 죽이려고 할 게다. 두고 봐라,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 구양봉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제갈정이 사부님께 사죄하러 온다면 모르겠지만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구양봉이 할말을 찾지 못해 묵묵히 앉아 있는데 신독행이 그의 귀에 대고 다시금 소곤거렸다. "난 아무래도 살 것 같지 않구나. 너는 이미 나한테서 신공 두 가지를 얻었으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어서 달아나거라. 내가 죽기만 하면 사숙도 너를 가만 놔 두지 않을 거다. 죽일 거야." 구양봉은 흠칫 놀랐으나 사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부님을 구해 준 사숙이다. 그런데 설마 나를 죽이기야…….'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사숙을 바라보았다. 구양봉은 사숙이 금방 세 악인을 칭송하던 말을 떠올리곤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사부를 저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사부님, 전 여기서 사부님을 구완하겠습니다. 사부님께는 현재 병구완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네 사숙은 무공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도망가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워." 사부는 한숨을 쉬었다. 구양봉은 사숙을 돌아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죽일 테면 죽이라지.' 밤은 지겨울 정도로 천천히 흘러갔다. 세 사람은 이제 지친 듯 각자 침묵을 지켰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일이 지나면 저 구양봉도 진정한 대악인이 될 놈이다. 나만 살아 있으면 구양봉은 성미도 점차 사납게 되고 사람도 점차 악하게 되어 나 같은 늙은 독물이 될 것인데, 내 목숨이 경각을 다투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구나. 저게 약빠르지 않으면 저 조그만 귀신 같은 녀석이나 제갈정 패거리에게 꼼짝없이 당할 텐데. 그러면 구양봉에게 가르친 신공 두 가지가 그들의 손에 넘어갈 게 뻔한 데, 차라리 구양봉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구양봉은 사숙이 어린 몸에 고생이 많다는 생각에 신독행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지 못한 채 말했다. "사숙님, 사숙님은 돌아가 쉬시지요. 제가 사부님을 돌봐 드리다가 임종하실 것 같으면 사숙님을 부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숙은 빙긋이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어야지. 그래야 큰일을 그르치지 않지." "큰일이라니요? 무슨 일인치요? 저한테 알려 주시면 제가 때를 어기지 않고 깨워 드리지요." "네가 날 깨워 줘?" 사숙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 뭘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냐? 난 네 사부님이 숨을 거두면 두 가지 일을 해낼 계획이야. 한 가지는 화공대법(化功大法)으로 네 사부의 공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네 사부의 몸을 들추어 그 두 신공을 적은 비적을 찾아내는 거야. 그런데도 날 깨워 주겠다는 겐가?"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사부님, 저 사숙님이 지금 농을 하시는 겁니까?" 신독행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농이 아니다. 내가 죽고 나면 너도 죽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 시체를 짓이겨 맘껏 원한을 풀 게다." 구양봉은 비로소 자신이 처한 위험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사부는 비록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하나? 사부님이 돌아가시면 나 혼자서 싸워야 하는데 좋은 방책이 없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부의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숨결도 점점 가늘어졌다. 구양봉은 황황한 마음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부가 죽으면 자기는 사숙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밤이 깊어 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부가 힘없는 목소리로 사숙을 불렀다. "자우(自雨), 여보게, 내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몇 마디 가르칠 테니 옆에서 엿듣지 말게." 그러자 아이가 화를 벌컥 냈다. "둘 다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엿들을 필요가 뭐 있소? 난 형님이 죽고 나면 저것도 죽일 작정이오. 그러면 저것이 무릎을 꿇고 손발이 닳도록 빌며 목숨을 구하고자 봉황력과 합마공의 비결을 토설할 게 뻔한데 내가 뭣 때문에 좀스럽게 엿듣는 짓을 한단말요?" "내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알려 주면 구양봉이 자네를 이길 텐데 겁나지 않나?" "구양봉이 아무리 무공을 닦은들 한 마리 두꺼비밖에 더 될까? 겁나긴 뭐가 겁난단 말요?" 아이는 가소롭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구양봉, 내 곁으로 가까이 좀 오너라." 구양봉은 사부의 말대로 바짝 다가앉았다. 사부의 창백한 모습에 구양봉은 목이 메었다. '사부님이 죽더라도 그 시체를 사숙이 능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숙의 손아귀에서 사부님을 구해 내야 할 텐데……." 구양봉은 암만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사숙이 사부님을 다치기만 하면 나도 생사 결단으로 사숙과 싸우리라.' 신독행은 구양봉을 향해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내가 죽게 되면 네 사형들처럼 속으로 기뻐하겠지?" 사부의 뜻하지 않은 말에 구양봉은 급히 대답했다. "사부님, 전…… 전……." 기뻐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늙은 독물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사부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어떻게 해야 사숙님이 사부님을 손대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을 뿐입니다." 신독행은 구양봉을 보며 한동안 숨을 헐떡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나 신독행은 평생 악한 짓만 한 사람인데 너와 같은 착한 제자를 얻게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기쁘다는 소리인지 못마땅하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구양봉은 사부의 심란한 심중을 헤아려 묵묵히 듣고만 앉아 있었다. "자, 이런 소린 그만두자. 아무튼 너와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니 어쨌든 합마공 내공심법을 전수해 주겠다." 천하기공(天下奇功)인 합마공을 잘못 수련하다가는 주화입마가 되어 오히려 화를 입음을 잘 알고 있기에 신독행은 지금까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초보적인 입문에 관한 것만 가르쳐 주었을 뿐이지 합마공의 내공심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워진 지금, 구양봉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가르쳐 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공심법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다.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며 앉아 있던 아이는 속으로 비웃었다. '신독행, 이 늙은 것아, 넌 정말 총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구나. 네가 여기서 내공심법을 얘기하면 내가 못 들을 것 같으냐? 저 미련한 놈이 미처 알아듣기도 전에 내 쪽에서 먼저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터득할 터인데, 네 놈이 죽은 뒤 저 제자 놈마저 내가 죽여 버리면 천하에 합마공을 아는 사람은 나만 남을 게 아니냐?' 아이는 쾌재라도 부를 듯 득의에 차서 희색이 만면해졌다. "자우야, 구양봉에게 합마공을 가르치는 것을 몰래 엿들으면 안된다. 천하 악인들은 정정당당하게 행동해야 하느니라." 신독행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어린 사숙은 구양봉과 신독행을 번갈아 살핀 뒤 대꾸했다. "좋아요. 듣지 말라면 그렇게 하겠소." 아이는 제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저 못된 화상이 중요한 대목에서 얼버무리고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 상태로 영감태기가 죽어 버리면 내가 어디 가서 합마공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구양봉에게나마 제대로 전수하도록 피해 주자. 어쨌든 구양봉은 내 초롱에 든 새요, 구양봉의 것이 조만간에 내 것이 될 텐데 서두를 까닭이 없지.' 아이는 덧붙여 말했다. "영감, 그 잘난 합마공이 뭐라구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는 거야? 나는 합마공이라면 진저리가 나는 사람이야. 조만간에 난 영감의 저 보배 제자와 더불어 합마공을 매장해 버릴 생각이오. 그래서 천하에 합마공의 뿌리를 아예 없애 치우고 말겠어." 그가 합마공을 수련하다가 주화입마가 되었기에 합마공을 이처럼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한 신독행은 그가 정말 나중에 구양봉을 생매장시킬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신독행은 눈짓으로 구양봉을 자기 곁에 더 바싹 다가앉게 했다. 구양봉은 사부가 자기에게 합마공 비결을 얘기해 주려는 줄 알고 사부의 곁에 바싹 다가갔다. 갑자기 신독행이 손으로 침대 다리를 부여잡고는 소리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