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9편 (29/64)
그러면 앞으로 꼭 좋은 일이 있을 게다." "사부님, 화주란 독한 술이오니 과음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속문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뭣이 어째? 아니, 날 단속하려 드는 거냐?" 사부는 대뜸 눈을 부릅뜨며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쇠 돌 깨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속문성의 이마에서 검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자들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순식간에 술단지는 동이 났다. 빈 단지를 들여다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쨉쩝 다시던 사부는 급기야 푸르르 역정을 냈다. "제갈정, 이 얼간이 같으니. 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느냐?" 제갈정이 몸을 떨며 대꾸했다. "저희에게 잘못이 있다면 사부님의 가르침을 달게 받겠습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이 좋은 술을 왜 딱 한 단지만 가져왔느냐, 엉!" 구양봉은 사부의 행동거지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미 한번 고약한 늙은이군. 제갈정네 형제들은 참 어진 사람들이구나.' 그런데 갑자기 사부의 입에서 '윽'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곧장 몸을 날려 제갈정을 덮쳤다. 미리부터 대비하고 있었던 듯 제갈정 일행은 날쌔게 피해 물러났다. "이……이 놈……이……놈들이 나를 독살시키려고 했겠다?" 노인은 서릿발같이 매서운 표정이 되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릎을 꺾고 앉아 내력을 운기하여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본 제갈정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성공이다, 성공! 망할 놈의 영감탱이야, 우리 손에 꺼꾸러져 봐라." 제갈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은 사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몇 걸음 다가오다가는 겁이 나는지 그저 에워싸고만 있었다. 사부는 오랫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제갈정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네가 우리를 제자로 보지 않는데 우리가 너를 사부님으로 섬길 줄 알았느냐? 우리 모르게 독초를 먹이지를 않나, 우리 집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놓고 협박하지를 않나. 그 동안 네 놈이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장 쳐죽여도 분이 안 풀린다. 이 망할 놈아, 너 같은 건 하루빨리 죽어야 해. 너 같은 것이 죽으면 이 세상에 독물이 하나 줄어들고 큰 화근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니 얼마나 좋 은 일이냐?" 구양봉은 사부를 구할 마음으로 달려 나가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제갈정 다섯 형제를 당해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노인이 속문성을 쳐다보며 사정했다. "문성아, 넌 어려서부터 날 따랐지 않느냐? 내가 너를 세 번이나 살려 주었는데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를 해치려 한단 말이냐? 내가 내상을 치료할 동안만 날 보호해 다오. 내 몸이 회복되면 꼭 너에게 합마공을 가르쳐 주마. 유운장의 제5대 장주가 되게 해 주마." 사부의 말에 구양봉은 한가닥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속문성이 사부의 말을 듣고 사부를 도우려고만 하면 그의 무공과 기지로 사부를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부님, 저한테 정말 합마공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속문성이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선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문성아, 나를 구하지 않고 어딜 가는 게냐?" "구양봉이란 녀석을 요절내고 오겠습니다." 속문성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애를 왜 죽인단 말이냐?" "그 놈을 죽여야 사부님이 나한테 합마공을 가르쳐 주실 거 아닙니까?" 속문성은 노인을 떠보듯 음흉스레 웃었다. 노인은 그만 할말을 잃었다. 노인은 구양봉을 죽이기 싫었다. 구양봉의 행동과 처사가 자신과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천 리나 먼 변경에서 그 같은 사람을 데려오기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재를 함부로 죽이기란 너무 아까웠다. "날 속이려 들다니. 내가 속을 줄 알았나? 이 망할 늙은이를 그냥……." 속문성은 당장이라도 쳐죽일 듯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노인은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제갈정네 다섯은 변경에서 지내는 3년 동안 밤낮으로 사부 신독행을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만 궁리해 왔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온 것이다. "신독행, 독공비적(毒功 籍)도 이리 내고 합마공도 바쳐라! 그러면 편히 죽여 주겠다." 제갈정이 강요했다. 그러나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속문성이 부드럽게 구슬렀다. "사부님, 극독이 이미 몸에 배어 골수에 미쳤으니 가만 놔 두면 조만간 죽습니다. 그 두 가지 무공을 우리한테 넘겨주면 죽어도 편히 죽게 해 드리겠다니까요. 어떻습니까?" "사부님, 어서 말씀하세요. 사부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큰형님도 둘째 형님도 사부님이 편하게 눈을 감게 해 드린답니다." 석초수도 거들었다. 한쪽에 선 두 젊은이는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 신독행이 세상을 횡행하다가 너희 같은 망나니들한테 죽게 될 줄은 참으로 몰랐구나." 신독행이 길게 탄식했다. 제갈정은 득의양양해서 웃어댔다. "어차피 내 손에 죽게 된 마당에 말이 많구나." 그는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넷째 동생과 다섯째 동생, 동생들 둘이 덮쳐서 한 사람이 일장 씩 갈겨 뼈가 부러지도록 중상을 입혀 놓게." 벙어리처럼 과묵한 장한 둘은 제갈정과 땅에 앉아 있는 사부를 번갈아 보면서 몹시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사형들과 뜻을 같이하긴 했으나 막상 자기들 손으로 사부를 죽이자니 망설여졌던 것이다. "우리 형제들 다섯이 모두 손을 써야 해.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 명은 우리 모두 함께 감당하는 거다. 누구도 발뺌을 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제갈정이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 앞에 이르자 하나가 불쑥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한 뒤 결연히 몸을 일으키더니 단번에 노인의 왼쪽 어깨를 한 장 갈겼다. 힘을 반밖에 넣지 않았는데도 노인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왈칵 피를 토했다. 다른 하나도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노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노인은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기침을 하며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제갈정이 비아냥거렸다. "사부님, 이미 그 지경이 된 바엔 죽는 편이 더 나을 거외다. 그 많은 금은보화에 그 많은 천하절색을 거느리고서도 마음놓고 한 번 즐겨 보지 못하고 밤낮 나무에만 거꾸로 매달려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뒷일일랑 염려 붙들어매시고 가기나 하시구려. 가신 다음 장사만큼은 후하게 지내 드리리다. 사부님께서 아끼던 금은보화 십분의 일쯤 순장품으로 넣어 드리고 사부님께서 총애하 던 계집들도 몇은 순장을 시켜 딸려 보낼 생각이오. 어떻습니까, 사부님?"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사부님, 사부님의 그 창자가 끊어질 듯한 독초는 내가 이미 손에 넣었습니다. 그 따위로 우리 형제를 협박할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요." 속문성이 낄낄거렸다. 제갈정이 석초수에게 일렀다. "셋째 아우, 이번엔 아우가 저 화상을 한 대 갈기게. 조심해서 저 화상의 한쪽 다리만 부러뜨려 놓게." 그러자 석초수는 어두운 기색이 되며 머뭇거렸다. "셋째, 왜 꾸물거리나!" 제갈정이 엄하게 다그쳤다. 옆에서 지켜 보던 속문성이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가만, 내가 잊을 뻔했군. 자네가 손을 대지 않으면 자네 처는 오늘 중독이 되어……." 석초수가 급히 외쳤다. "둘째 형님,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내일 아침까지 우리가 돌아가지 못하면 절명단(絶命丹) 한 알을 셋째 제수에게 먹이라고 내 처에게 당부해 놓고 왔을 뿐이야." 속문성은 음흉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되자 석초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 좋소. 형님들 말을 들어야지요." 석초수는 신독행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말을 마친 뒤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사부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의 일장에 신독행은 몸서리쳐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푹 거꾸러졌다. 제갈정과 속문성은 서로를 쳐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차례군요.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쓸까요?" "우리 둘 중 어느 한 사람만 손을 써도 숨이 끊어질 테니 아우가 마저 끝을 맺어 버리게나." 제갈정이 잔인하게 웃었다. 마치 양보라도 하는 듯한 제갈정의 태도에 속문성은 혐오감을 느꼈다. '나한테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나중에 나마저 해치우려는 수작이로군. 내가 그 따위 흉계에 걸려들 줄 알고?' 하지만 차마 제갈정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갈정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다가는 당장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신독행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제자 인사 올립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읍만 세 번 했다. 그러자 석초수가 나무랐다. "둘째 형님, 우린 모두 사부님께 큰절을 했는데 형님께선 왜 읍만 하십니까?" 속문성이 대꾸했다. "큰절하는 놈은 큰절하는 이유가 있고 읍하는 나는 읍만 하는 까닭이 있지. 사부님은 나를 자네들을 대하듯 잘 대해 주지 않았어. 사부님이 지닌 절기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나에겐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나로선 이 정도도 대단한 인사야."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훌쩍 뛰어오르더니 신독행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노인은 이제 살 가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능함이 한스러웠다. 그는 절단난 노인의 오른쪽 다리를 가슴 아프게 바라 보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혼절해 넘어졌던 노인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다섯 형제를 노려보더니 독한 웃음을 사려 물었다. "나를 그렇게 수월하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제갈정 이 놈, 네가 덤벼라. 난 네 놈 손에 죽겠다." 제갈정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속문성을 질책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노인에게 말했다. "사부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사부님의 최후를 장식해 드릴 테니까요." 제갈정은 노인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천천히 치켜 들었다. 그가 한 번만 내리치면 노인은 그대로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조급해진 구양봉은 그대로 뛰쳐나가 다섯 형제와 죽기살기로 싸워 볼 작정을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 참 답답한 일이로군. 구해 주자니 내 마음이 허락칠 않고, 그렇다고 제갈정 같은 망나니들이 자기 사부님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자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구사독옹 문하를 손가락질하며 웃을까봐 무섭고. 그렇게 되면 장차 무슨 낯으로 강호 밥을 먹겠는가? 이 어르신이 눈을 뻔히 뜨고 있는 한 이런 짓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놀란 제갈정이 사위를 둘러 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숙님, 할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말하시오. 왜 숨어서 그러십니까?" 제갈정은 악이 받쳐 소리쳤다. "왜 나서라는 건가? 내가 나가기만 하면 자넨 낭패를 볼 텐데." 아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사숙님, 사숙님도 사부님께 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이 이러는 것이 기실은 사숙님 분풀이를 해 드리는 게 아닙니까?" 제갈정의 말에 아이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그래도 안 되네. 자네들이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이 강호에 퍼지면 내가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니겠냔 말야. 그럴 바엔 내가 죽이는 편이 낫지. 나와는 형제지간이니 사부님을 죽였다는 말은 아니 들을 게 아닌가? 내 말이 어떤가?" 그의 말은 제갈정에게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사실 노인을 죽일 작정은 했으나 사부님을 죽였다는 죄명을 들을 일이 내심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자기 대신 이 일을 책임져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다 노인은 이미 다리가 끊어지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더는 걱정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사숙님, 사숙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저희로선 기쁜 일이지요." 제갈정의 말이 떨어지자 사숙이 조르르 달려나와 노인 앞에 턱 버텨 섰다. 그는 자기 사형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안됐구려. 그 총명하신 양반이 어리석을 때는 또 한없이 어리석거든. 제갈정이 평소 형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형님도 잘 알고 있었으련만 이렇게 저들 올가미에 걸려들다니." 그는 제갈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독약을 썼기에 독약에 대해서는 세상 으뜸인 너희들 사부를 다 꺼꾸러뜨렸지?" 제갈정은 내심 우쭐하였으나 겸손을 가장하여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번에 변경에 가서 제법 멋들어진 처방을 얻어 왔는데, 반독(半毒)·반독(半毒)·반독(半毒), 즉 '삼반(三半)'이라고 하지요. 소상히 말씀드리자면 술에 독이 절반 있고 옥잔에 독이 또 절반 있고 사람에게 독이 또 절반 있는데 이 세 가지 독이 합쳐지면 누구든지 죽고야 마는 그런 처방입니다. 사부님께선 이 세 가지 독을 모두 가지게 되어 이 지경이 된 것이지요." 아이가 뒷짐을 진 채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제갈정, 사람에게 독이 절반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사숙의 무공이 대단함을 알고 있는 제갈정은 그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얼른 대답했다. "그건 말입니다, 술은 화주이기에 맹렬하고 강한 물건이고 옥은 찬 물건인데, 그 옥잔에 화주를 먹으면 음양이 서로 조화되어 사람에게 대단히 이롭지요. 하지만 음기가 과한 사람이 마시면 음위(陰淮) 양위(陽淮) 두 맥이 상하게 되어, 사람에게 절반의 독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세 가지 독이 한데 엉키면 죽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제갈정의 말에 아이는 땅 꺼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노인을 향해 말했다. "자업자득이라고, 악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끝을 못 맺는 법인데, 형님은 지금 후회되는 일이 없소?" "후회는 무슨 후회! 난 오직 저 놈들을 쳐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노인은 이를 갈았다. 아이는 눈을 굴리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손뼉을 짝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솔직히 말하면 형님을 가장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요. 그런데 난 지금 제갈정도 미워하오. 글쎄 제갈정의 여편네는 나한테 엿을 주지 않지, 아들 녀석은 나하고 싸우려고 하지, 이것들한텐 위아래가 없다니까. 덜돼먹은 인간들이지요. 저 속문성도 마찬가지요. 그 여편네는 귀신 대가리 두꺼비 눈깔을 해 가지고 속문성보다 더 못돼 먹었어요. 유유상종이라더니 부 부가 어찌 그리 닮았는지. 내 저것들 버릇을 좀 단단히 고쳐 놔야겠소. 형님께서 돌아가시면 저 자식들이 날 안중에도 안 둘 것인데, 안 되겠어. 형님을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지." 아이는 갑자기 동정심까지 생기는지 조그마한 손으로 신독행의 얼굴에 흐르는 피까지 닦아 주었다. "사숙님, 그 따위 헛생각 말아요. 우리 다섯이 손을 쓰면 사숙 혼자서 견디기 힘들 거외다!" 제갈정이 소리쳤다. "좋다. 그럼 싸워 볼까?" 아이가 흔쾌히 말했다. 그는 곧장 제갈정에게 덮쳐들 듯하다가는 갑자기 멈춰 서며 중얼거렸다. "참, 한 가지 잊었군. 아주 중요한 걸 깜빡 잊어먹을 뻔했어. 그는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석초수를 가리켰다. "네 이 놈 셋째야, 내가 금방 네 집에서 네 처와 함께 햇비둘기를 구워 먹었는데, 글쎄 햇비둘기 고기를 먹다가 갑자기 네 처가 까무러쳐 넘어지더구나. 날이 무덥지도 않은데 갑자기 더위를 먹은 건가?" 그 말에 석초수는 크게 놀라 당장 집으로 달려갔다. "서둘러라. 잘못하면 그 사이에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석초수의 등에 대고 소리친 뒤 킥킥 웃으며 이번에는 속문성을 향해 말했다. "속문성, 너도 여편네가 어떻게 됐나 집에 가 보지 그래?" 속문성이 음산하게 대꾸했다. "소인의 여편네야 늙어 볼 것이 없으니 차라리 사숙님 손에 죽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젊고 이쁜 여편네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보다 고마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속문성이 끄떡도 하지 않자 아이는 내심 당황했다. 이때를 틈타 제갈정과 속문성, 그리고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나이 둘이 아이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아이는 더럭 겁을 집어먹으며 소리쳤다. "야단났네. 야단났어! 이 놈들이 사람 죽인다!" 그러나 유운장에서 이곳은 금지 구역으로 누구 하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어린애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달려나와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제갈정을 보고 웃었다. "아 참, 나한테 사탕이 원래는 여섯 알이 있었지. 그런데 내가 하나 먹었으니 몇 개 남았겠나?" 아이는 제갈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마를 탁 쳤다. "다섯 개가 남아야 하는데, 보라구. 몇 개 남았나? 네 개밖에 없잖나. 이거 큰일났군. 제갈정, 자네 손자 녀석이 내 사탕을 한 알 훔쳐먹은 게 틀림없어!" 제갈정의 안색이 확 변했다. 주춤거리자 속문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형님, 사숙의 말에 흔들리지 마시오. 사숙을 죽이면 해독약 정도 찾아내는 건 간단한 일이오." "흥, 과연 그럴까? 난 주머니에 사탕을 열일곱 개나 가지고 다니는데 어느 것에 어떤 독이 있는지 알고 해독약을 쓴단 말이냐? 사탕알마다 독이 다른데 그걸 먹여 보다간 네 손자 녀석은 목숨이 끊어지고 말걸?" 아이는 고개를 비딱하니 젖히고 소리 내어 웃어댔다. 제17장 새로운 시작 잔인무도한 제갈정이지만 자기 손자만은 몹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손자가 독사탕을 먹었다는 말을 듣자 몹시 불안해졌다. 일순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사부를 죽이려고 작심한 지 10여 년이나 되는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지만 어린 손자의 생명도 경각을 다투는 판이니 방심할 수가 없었다.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형님, 사숙의 말을 곧이듣지 마시오. 거짓말입니다." 속문성이 소리쳤으나 어린 손자 녀석에 대한 근심만 더해 갈 뿐이었다. "사숙님, 정말 우리 손자한테 독사탁을 먹였단 말씀입니까?" 제갈정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 같은 어린 사람들의 말엔 거짓이 없어. 내가 자네들처럼 거짓말로 밥벌이하는 줄 아는가? 우린 거짓말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자, 보라구. 가슴이 뛰길 하나 얼굴색이 변하길 했나?"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때 갑자기 제갈정이 소리쳤다. "아서라, 멈추지 못할까!" 제갈정과 사숙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속문성이 신독행을 죽이기 위해 슬그머니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양호위환(養虎爲患)이란 말도 모르시오? 이 기회를 놓치면 조만간 우리가 해를 입습니다." 속문성의 말에 제갈정은 성난 얼굴로 고집했다. "잔말 말고 내 말 들어!" 제갈정은 속문성을 노려보았다. 제 자식 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제갈정은 속문성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숙은 가냘픈 숨을 몰아쉬는 신독행과 망설이고 있는 제갈정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제갈정이 문득 물었다. "사숙님, 저희들이 사부님을 놓아주면 사숙님도 우리를 놓아주겠지요?" 아이는 깊이 생각해 보는 척하다 한참 만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녀석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구나. 기다려라, 조만간 이 원수를 갚을 날이 있을 게다.' 제갈정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정중하게 물었다. "사숙님께서 해독하는 처방을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셋이 집에 돌아가 해독을 시키지요. 사부님 일은 사숙님께 맡기겠습니다." 아이는 이에 두말없이 주머니를 뒤져 알사탕 두 알을 꺼내 제갈정과 속문성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어서, 어서 가지고 가라. 다시 와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제갈정과 속문성은 그 알사탕이 도대체 진짜 해독제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의심스런 마음을 숨기고 일단 가져다가 먹이고 보자는 심산으로 급히 그곳을 떠났다. 아이는 신독행을 살피고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나무집 안을 향해 꽥 소리쳤다. "이 녀석, 냉큼 이리로 나오지 못할까!" 그리고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식, 대단한 놈이군. 늙은 독물과 꼭 같아. 사부님이 죽어 가는데도 제자란 녀석이 꼼짝도 않고 제 목숨 부지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 형님, 천하에 인종이 많아도 이런 인종은 드문데 어떻게 이렇게 형님이 몽땅 긁어 왔소?" 그러다가 그는 재차 꽥 소리를 질렀다. "구양봉, 이 자식아, 냉큼 나오지 못해!" 구양봉은 내심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부님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제자로서 나가 보지조차 않았으니 누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사부를 구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