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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8편 (28/64)

2026-09-24 21:22:51 조회 27
노인의 말에 구양봉은 미소를 떠올리며 또렷한 음성으로 그 글을 읊기 시작하였다. 북쪽 먼 바다에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나니 그 이름을 일컬어 곤(鯤)이라고 하였다. 곤은 몸의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지 모른다. 곤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일컬어 붕(鵬)이라고 한다. 붕의 등도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른다. 붕이 날갯짓하여 높이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리는 채운(彩雲) 같았다. 붕은 광풍이 일고 파도가 하늘로 치솟을 적이면 남쪽 머나먼 바다로 날아가곤 하였다. 남쪽의 먼 바다는 천지(天池)이다. 《제해(齋諧)》란 책은 괴이한 사물만 기재한 책인데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적이면 퍼덕이는 날개에 부딪친 바닷물이 3천 리 밖까지 퉁겨 나가고 대붕은 세차게 이는 선풍을 타고 구만 리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붕은 6월의 세찬 폭풍을 타고 먼데로 날아간다.' 원야 임택(林澤)에 야생마가 달리는 듯한 안개는 티끌이 나는 것인바 그것은 생물이 내뿜는 숨결로 이루어짐이라. 하늘의 푸른 빛깔은 진정 하늘의 본색인가? 하늘은 원래 무한히 높고 멀어 아무래도 그 끝이 닿지 못하는 걸까? 가령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러하리라. 모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가 뜰 수 있는 부력이 모자라고, 웅덩이에 물 한 그릇 부어서는 풀잎밖에 띄울 수 없다. 만약 그릇을 띄우려 한다면 밑에 가라앉고 말 것이다. 물이 너무 얕은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풍력이 강하지 못하면 대붕의 거대한 날개도 힘을 잃게 된다. 그러하기에 오직 구만 리 창공 위라야만이 대붕의 두 날개를 받들어 주는 강대한 풍력이 있을 수 있고, 대붕은 이를 빌어 날갯짓을 할 수 있으며 대붕의 등이 아무런 거침이 없이 창천에 높이 뜰 수 있기에 남해로 날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인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장자의 말이 옳지. 말 잘했어. 내가 평생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장자야. 장자는 처가 죽은 다음 묘 앞에서 술을 먹으며 양푼을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불렀다지? 그야말로 진정한 우리 사파의 인물이야. 생각해 봐라. 사파 인물이 아니라면 그도 여느 정파의 인간들처럼 안 나오는 눈물을 쥐어짜며 꺼이꺼이 남이 듣기도 괴로운 곡을 하느라고 야단했을 게 아니냐? 난 그런 정파 인간들의 위선 을 가장 싫어해. 7척 장검으로 쳐죽이고 싶은 심정이지. 눈에 띄는 족족 모조리 쳐죽이고 싶단 말이야." 유운장에서 노인과 함께 머무는 동안 구양봉에겐 줄곧 떨쳐지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노인이 왜 그 좋은 집에서 살지 않고 하필이면 허름한 나무 구새 안에서 사는지 궁금했을 뿐더러, 제갈정을 비롯한 다섯 형제는 무슨 까닭으로 노인 앞에만 사면 벌벌 떨며 범을 만난 듯 겁을 집어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아이가 무얼 안다고 다짜고짜 유운장에서 도망가라고 권했는지 그것도 시종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한편 구양봉은 노인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문장을 듣는 가운데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묻겠다. 만약 네가 아버지와 처 이렇게 셋이서 한 배에 탔다가 배가 뒤집혀 모두 물에 빠졌다면 도대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느냐?" 노인의 물음에 구양봉은 잠시 망설이다가 되물었다.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천하엔 별일이 다 있는 법이지. 가령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겠느냐 이 말이다." 구양봉은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그야 물론 아버님부터 구해야지요. 사람들의 뼈는 아버지한테서 오고 피는 어머니한테서 오는 법인데 부모님부터 구하지 않는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틀렸다. 그 말은 틀려!" 노인이 거칠게 소리쳤다. 구양봉은 노인의 반응에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옳아! 노인은 대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처가 있어야 아들딸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스승님의 말씀은 먼저 처부터 구해야 된다는 겁니까?" 그의 대꾸에 노인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들어 보아라. 나는 40년 넘게 강호를 종횡해 오며 '늙은 독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강호에서 나만큼 독한 사람은 없지. 가령 배가 뒤집어져서 아버지와 처가 모두 물에 빠진 경우 누구를 먼저 건져 낼까. 이건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 결정하는 거야. 만약 아버지가 거부여서 자식들을 호의호식 잘살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아버지부터 구해야 하지. 그러나 아버지가 자식에게 얹혀 지 내면서 잔소리나 해대는 경우라면 구해 내서 뭣하겠느냐? 처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처가 꽃같이 아름다운 미인이라면 죽게 내버려두긴 너무 아깝지 않느냐? 또다시 그런 어여쁜 아내를 얻을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생기기도 못난데다가 밤낮으로 바가지나 긁는 여편네라면 살려 두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편만 평생 고생이지. 세상 일이란 이러하니 대장부라면 매사에 과단성 있 게 맺고 끊어야 하는 법. 그래야 큰일을 하는 법이다." 구양봉은 겉으로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듣는 척 머리를 조아렸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배은망덕하게 부모와 처자를 어떻게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노인은 마치 구양봉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나 하는 것처럼 냉소하며 말했다. "오늘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간 조만간에 큰 화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밤이 되자 구양봉은 다시 노인의 정실로 가 잠자리에 들었다. 정실에서는 미인들의 부드러운 말소리와 구양봉의 웃음 소리가 화기롭게 흘러 나왔다. 유운장에 오는 날부터 말 그대로 여색에 빠진 것이다. 문득문득 모용쟁의 얼굴이 떠오르거나 그녀와 함께 별빛 흐르는 사막의 밤을 동행하던 일들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모용쟁은 지금 형님과 함께 풍경이 수려한 강남을 다니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모용쟁은 형님을 마음에 두고 있을 뿐 자기 같은 책벌레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용쟁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선녀 같은 유운장의 미녀들이 꽃 같은 웃음으로 이렇듯 나를 위해 주지 않는가!' 구양봉은 유운장 여인들 속에 파묻혀 모용쟁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구양봉은 자기를 목욕시켜 주는 두 여자를 끼고 앉아서 서역의 사막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의 풍습과 인정에 대하여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새로 온 녀석이지?" 구양봉은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등뒤 탁자 위에 사숙이라고 불리는 어린아이가 척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구양봉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때 그는 한 팔로는 한 여자의 목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다른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양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향락에만 빠져 있는 초장왕(楚莊王)을 연상하게 했다. "자낸 아직 속까지는 썩지 않았구만. 늙은 영감네 제자들은 누구 하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썩어 고름이 질질 나지 않는 자가 없는 데 말이야. 자네는 내가 보는 데선 계집들을 끼고 뒹굴지 않는 게 좋아. 그러다가 이 어르신의 비위를 거슬려 놓으면……." "사숙께서도 재미를 보시겠으면 사숙 마음대로 골라잡으십시오. 유운장에 미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구양봉의 대꾸에 어린아이는 성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아니, 이 어르신이 네 놈 같은 줄 아느냐? 이 어르신은 30여 년을 살았지만 계집들과 놀아난 적은 한 번도 없다." 구양봉은 기가 막혔다.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애가 제갈정네 다섯 형제의 사숙이며 또 제 입으로 서른이 넘은 어른이라고 하니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하지만 그가 신독행의 사제라면 지니고 있는 무공이 매우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 구양봉은 단단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형(師兄)이 자네한테 뭘 가르쳐 주겠다던가? 봉황력과 합마공을 가르쳐 주겠다지?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천하절기(天下絶技)라고 하였을 테고. 그래, 안 그래?" 구양봉은 잠시 무어라고 대답할지 생각이 안 나서 엉뚱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이 우리 사부의 사제가 맞습니까?" 그러자 아이는 자기 가슴을 툭 치며 으쓱해서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그는 신독행이고 난 사자우(査自雨)라고 해. 알아? 내가 그 영감의 사제라는 건 강호인 모두가 알고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물어 봐." "저희 사부의 사제시 라면 저에게는 사숙이 되는데, 그렇게 어리디어린 나이에 사숙이 되다니 잘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러자 아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숙이면 사숙이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자네같이 도문(道門)에 갓 들어온 풋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저 심보 더러운 제갈정이나 꾀 많은 속문성까지도 내 앞에선 설설 기는 판인데. 이 어르신 춘추가 올해 얼마인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린가?" "기껏해야 올해 열 살이나 되었겠지요." 아이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너도 시정의 바보들처럼 이 어르신을 열 살로밖에 안 보는구나. 이 어르신은 올해 서른아홉이야. 알겠어? 신축년(辛丑年) 국월(菊月) 초닷새 생이니 어디 꼽아 봐. 올해 딱 서른아홉이 아닌가?" 겉으로 봐선 암만해도 열 살 안팎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한사코 서른아홉이라고 우기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구양봉은 생각했다. 이때 어린아이가 바짝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29년 전 내가 한창 합마공을 수련하고 있을 때 너의 그 망나니 사부가 나를 주화입마(走火入魔)시켰단 말이다. 다행히 내 사부가 구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난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거야." 구양봉은 적이 놀랐다. 사부의 말에 의하면 합마공은 꼭 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수해 내려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사부님의 말씀은 그 두 절기(絶技)는 제자 한 사람에게만 전수 한다고 하던데요. 저희 사부님께서 합마공을 전수받았는데 어떻게 사숙도 같이 배울 수 있었습니까?" 구양봉의 물음에 아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독행을 사부로 삼았으면 신독행한테 가서 물어 보지 왜 나한테 묻나?" "사숙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사부님께서 솔직한 답변을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테지. 당시 나와 그는 구사독옹(九邪毒翁)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하였는데 그는 스승의 큰 제자이고 나는 스승의 관문제자(關門第子)였어. 사부님은 그한테는 봉황력을 가르치고 나한테는 합마공을 가르치셨지. 그런데 그는 사부님의 병이 위중한 틈을 타서, 내가 한창 수련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내 내력을 분산시켜 버렸지. 그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주화입마가 되어 죽을 뻔한 거야, 그런 걸 내 스승님이 구해 주셨는데, 내가 이렇게 자라지 못하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구양봉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봉황력은 사부가 마흔 살 때 자기 스스로 창조한 절세의 경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숙은 그 것이 이 사문(師門)의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도대체 어느 말이 옳단 말인가?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사숙께선 어린 나이에 나를 속이는 군요. 그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네 선생한테 가서 대놓고 물어 보면 될 거 아냐!" 아이는 사납게 내뱉고는 눈물을 훔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은 말할 수 없이 언짢은 기분이 되어 여자들을 물러가게 한 뒤 정실을 나왔다. 그가 큰 나무 아래에 이르자 사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구양봉이냐? 어서 들어오너라." 구양봉이 허리를 굽히며 나무집 안에 들어가니 사부는 처음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구나무 선 자세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구양봉은 묻고 싶은 말이 속에 가득하였으나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 "정실에서 재미를 보지 않고 이 음산한 곳엔 왜 찾아왔느냐?" 매우 인정 어린 어조로 사부가 말했다. 순간 구양봉은 마음이 훈훈해지며 방금까지 품었던 온갖 의문들이 봄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사부님이 이 정도로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시는데 사숙의 말에 쉽게 의심을 품다니. 사숙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어. 공연히 사부님 심기만 흐려 드릴 뻔했구나.' 구양봉은 사부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의 방에서 향락을 누리는데 사부님께서는 이런 데서 고생하고 계시니 마음이 불편하여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양봉, 재삼 일깨워 주는데, 네가 내 두 가지 절기를 익히고 나면 반드시 모든 무림들을 경계해야 한다. 네가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기만 하면 이 신독행은 죽어도 한이 없다." 사부는 절실하고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의 말을 듣는 동안 구양봉은 이제 사숙의 말 따위는 까마득히 잊게 되었다. '사부님이 이렇게까지 나를 총애하시는데 나를 해칠 리가 있겠는가.' 그는 사숙의 말을 하나의 우스갯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구양봉이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구양봉의 속마음을 짐작이나 한 듯 사부가 물었다. "오늘 심기가 그리 좋지 못한 모양인데, 그래 어째서 이 밤중에 여길 나왔느냐?" "제가 정실에 있는데 어린 사숙님이……." 구양봉은 하는 수 없이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 너한테 뭐라고 하더냐?" "사부님, 제자는……." 구양봉은 잠시 더듬거렸다. "내가 자기를 해쳤다고 했겠지?" 구양봉은 흠칫 놀랐으나 곧 그렇다고 대답했다. 노기 어린 어조로 사부가 다시 물었다. "나 때문에 주화입마가 되어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고도 말했겠지?"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사부는 야릇한 소리를 내며 웃다가 한바퀴 허공돌기를 하더니 구양봉 앞에 똑바로 마주섰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구양봉을 쏘아 보았다. "네 스승이 그처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노인이 정색하여 묻는 바람에 구양봉은 가슴이 후두둑 뛰어 급히 대답했다. "그런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의 말을 믿을 리 있겠습니까? 비록 사숙이라고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 놈의 말은 전부 사실이야!" 사부가 소리쳤다. 구양봉은 제 귀를 의심하며 사부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 정도로 지독한 독물이야. 네 사숙을 내가 해쳤을 뿐만 아니라 너의 사형들에게도 내가 손을 썼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들이 왜 내 앞에서 그렇게 설설 기겠느냐?" "사부님, 설마……설마 사부님께서……." "이 놈아, 내가 너를 속여 무엇하겠느냐? 내 다시 일깨워 주지. 장차 강호를 종횡하려면 반드시 독해져야 한다. 독하지 않고야 어떻게 천하를 횡행하겠느냐? 약육강식이라 하였다. 독하지 못하면 독한 남에게 먹히게 되어 있지. 그때 가서 독하지 못했던 걸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부님. 내가 남에게 잘하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들겠습니까?" "뭐? 내가 남에게 잘하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들겠느냐고?" 신독행은 앙천대소하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웃음 소리였다. "구양봉, 네가 나로부터 합마공을 배워 내면 네 사형들이 너를 가만 놔 두지 않으려고 할 거다. 그 놈들이 불원천리 변경에서 너를 데려온 것은 자기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냐. 내가 그 녀석들한테 독약을 먹여 놓고 매년 봄마다 변경에서 너 같은 사람을 찾아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지. 난 우리 사문의 대를 이을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그 녀석들처럼 아둔하지 않은 후계자를 말이야. 마침 천행으로 그 소원이 실현되었다." 사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이 돌아오자 난 한 놈에게 한 알씩 해독약을 먹였다. 그 한 알이면 명년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니라." 실로 놀라울 일이었다. 구양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도 잘못 보이면 그들처럼 독약을 먹게 되겠구나.' 구양봉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이때 밖에서 사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제자들 알현하고자 합니다." "봐라. 녀석들이 왔다. 녀석들이 좋은 심보를 가지고 날 찾아올 리는 없고, 나를 죽이려고 왔는지도 모르지." 노인은 낮은 소리로 구양봉에게 말하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 구양봉은 눈을 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앞에는 제갈정, 속문성, 석초수가, 뒤에는 언제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나이 둘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너무나 공손한 태도였다. "사부님, 제갈정 등 제자 다섯이 사부님의 알현을 바라옵니다." 재차 들려 오는 소리에도 사부는 그냥 내다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구양봉에게 다시 소곤거렸다. "저 놈들 다섯은 언제나 나에 대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 지금도 분명 나를 해치려고 왔을 거야." 구양봉은 도무지 사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형제가 이렇게 야밤에 찾아온 데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때 제갈정이 술단지 하나를 앞으로 내놓으며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저희가 이번에 변경에 갔다가 변경 황궁 안에 굉장히 좋은 화주(火酒)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단지 구해 왔나이다. 변경에서 불원천리 가져온 진품인지라 이렇게 들고 왔사옵니다." 구양봉은 속으로 탄식했다. '사부님이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게야. 저런 제자들을 믿지 못하다니. 사부님께 드리려고 불원천리 변경에서 맛좋은 술까지 구해 오는 제자들을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의심하니 답답한 일이구나.' "분명 저 술에다가 독약을 풀었을 거야……." 사부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냉소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이 늙다리 독물의 제자들이 저 술을 그냥 줄 리가 없지. 제갈정과 속문성도 이젠 독약을 쓰는 재간이 보통이 아니거든." 이때 제갈정이 마치 사부의 심중을 헤아린 듯 말했다. "저를 낳은 사람은 부모님이고 저를 아는 사람은 사부님이시지요. 변경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도 사부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화주를, 불공스럽지만 제자가 먼저 검식을 하여 드리겠습니 다." 제갈정은 소매 안에서 술잔을 꺼냈다. 고풍스러운 옥잔으로 달빛에 반사되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 술잔을 본 신독행은 놀라며 물었다. "제갈정, 그 술잔은 어디서 가져왔느냐?" "이 술잔은 변경 황궁 안의 보물인데 제자가 궁에 들어갔다가 슬쩍 훔쳐내 온 겁니다. 사부님 마음에 드신다면 사부님께 올리겠습니다." 제갈정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옥잔을 손에 드니 화주에 속이 훈훈합니다. 술맛이 세상에 다시 없는 별맛이옵니다." 그는 술잔을 단지 위에 올려 놓은 뒤 형제들과 더불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부는 새삼 탐욕스런 눈길로 술단지 위에서 빛나는 옥잔을 노려보았다. 부드러운 광채를 뿌리는 옥잔은 세상에 둘도 없는 진품이었다. "구양봉, 저 옥잔은 필시 그것이다. 그 옥잔이 틀림없어. 이 어르신이 몇 해를 줄곧 생각해 오던 그 옥잔이야. 그런데 제갈정 저 나쁜 녀석의 손에 들어갈 수가 있다니. 하여튼 대단한 놈이다." 구양봉은 사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잠자코 얼굴만 바라보았다. 사부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 술잔은 은나라 주왕(紂王)께서 여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던 옥잔이다. 한 팔로는 여자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저 옥잔을 들었었지. 주왕은 대단한 풍류객이었다. 사람의 한평생이 주왕과 같으면야 살아 볼 만하지. 저 놈들이 나쁜 맘을 품고 있든 어떻든 한번 나가 봐야겠다. 옥잔에 화주가 일생에 몇 번 있겠느냐?" 사부는 천천히 나무집에서 걸어 나갔다. 그는 술단지 앞으로 가서 옥잔을 집어 들고 달빛에 비추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의 얼굴은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그는 제갈정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들 정성으로 이 좋은 술을 옥잔으로 마시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그리고는 석초수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술에 무슨 다른 건 없겠지?" 석초수는 흠칫 놀라며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나와 더불어 몇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담만 커져서 못하는 짓이라곤 없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사부의 말에 제갈정 일행은 쩔쩔매며 몸둘 바를 몰랐다. 사부는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술단지를 덮은 마개를 떼어 던져 버리고는 옥잔으로 술을 휘저었다. 그윽한 술향기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사부는 더는 말하지 않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일단 맛을 본 그는 아예 술독을 끌어안고 몇 잔을 거푸 퍼마시더니 입을 닦으며 다섯 형제들을 향해 말했다. "술맛 참 좋다. 제갈정, 그래, 이렇게만 이 사부님을 모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