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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7편 (27/64)

2026-09-24 21:22:51 조회 21
구양봉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대꾸가 없었다. 그의 심중을 읽은 듯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구양 공자, 어디 한번 나 같은 향락을 맛보지 않겠나?" 그는 곧장 사람을 불렀다. 자그마한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시녀는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주인님께선 무슨 분부가 계시는지요?" "구양 공자를 내 집으로 모셔 가거라. 내 집에서 오늘 밤 유숙하게 하여라." 시녀는 노인의 말을 듣고 놀란 눈길을 던졌다. 마치 노인의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한 듯한 태도였다. "주인님의 방은 이미 여러 해째 비워 두었는데요." 시녀가 급히 하는 말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 공자님을 모시고 가서 인간의 쾌락을 한번 잘 맛보시게 하여라." "알겠사옵니다. 구양 공자님께선 절 따라오시지요." 시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한들한들 앞서 걸어갔다. 그들은 높은 담벽 사이의 긴 복도를 지나서 엄청나게 큰 집 앞에 이르렀다. "주인님의 정실로 왜 외간 사람을 데리고 오시나?" 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시녀에게 물었다. "외간 사람이라니요? 주인님께서 한 집안 사람으로 대하는 분이세요. 공자님을 집에 모셔서 주인님의 향락을 누려 보시게 하라고 하셨어요." 은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시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문지기는 곧 자세를 바로하며 구양봉에게 절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용서하시고 어서 드십시오." 안으로 들어가니 방안은 아주 조용하면서 사치스러웠다. 창문 쪽으로는 높이가 칠 척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산호 나무가 있고 그 위에는 숱한 구슬이 달려 있는데 모두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귀한 보물들이었다. "공자님, 어두우면 저 나무를 조금 움직이세요. 그럼 환해진답니다." 시녀가 보란 듯 산호 나무를 조금 밀어 놓으니 산호 가지가 움직이는 소리와 더불어 엄청나게 큰 야명주 하나가 드러나며 눈부신 빛을 뿌렸다. 구양봉은 혀를 내둘렀다. 시녀는 또 구양봉에게 집 안에 있는 보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 모두 진귀한 진주 보석들 아니면 제왕들만이 쓸 수 있는 옥석기명들이었다. '과연 내가 이런 진귀한 보물들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내가 이런 향락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천하에 몇 안 되는 제왕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 유운장의 가주(家主)와 같아지는 게 아닌가?'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시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구양봉은 흥분을 달래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순간 조심조심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은 눈을 내리깐 채 난초같이 그윽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공자님, 목욕 준비가 되었는데요." 침대 좌우에 두 여인이 와 서 있었다. 둘 다 대단한 미녀들로 모용쟁에 비할 게 아니었다. "먼길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어서 목욕을 하고 한잠 푹 주무시지요." 두 미인은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다가와서는 구양봉을 부드럽게 부축해 일으켰다. 구양봉은 두 여인에게 이끌려 방을 나와 두 개의 긴 낭하를 지나 둥근 지붕을 한 큰 집에 이르렀다. 집 안에는 더운 물이 담긴 큰 욕조가 있고 욕조 옆에는 두 미녀가 알몸으로 서서 구양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인들이 내 몸을 씻어 줄 모양이구나.' 구양봉은 쑥스러운 한편 가슴이 뛰었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나체의 두 미인이 인사를 했다. 구양봉은 두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은 그리 뜨겁지 않아 좋았다. 두 여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이 구양봉을 흥분시켰다. 여태까지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구양봉은 어쩔 줄을 몰랐다. 한 여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목욕을 하십니다. 공자님께선 이게 싫으신가요?" "아니, 좋소. 그저 주인님에게 하던 대로 하시오." 구양봉이 이렇게 대답하자 이인들은 마음이 놓이는지 구양봉의 몸을 부드럽게 씻어 주고 밀어 주기 시작했다. 삼단 같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들의 몸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가볍게 문질러 대는 여인의 손길이 구양봉의 마음을 한껏 흥분시켰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런 기분은 맛본 적이 없었다. '일개 서생이면 어떻고 황제면 어떤가? 인생에 이런 향락만 누릴 수 있다면 그게 천하 제일이지.' 구양봉운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구양봉의 눈이 흥분으로 충혈되는 것을 본 두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저희 주인님께선 그런 연세에도 목욕탕에 들어온시면 세 번 이상 운우지정을 푸시는데 공자님은 한창 젊으신 나이에 점잔만 빼시는 게 이상하네요. 그렇게 속만 태우시지 말고 내키시는 대로 하시지요." 그녀들은 정감 어린 눈길로 교태를 부리며 농담을 했다. 구양봉은 말문이 막혔다. 목욕이 끝나자 두 여인은 구양봉을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호리호리한 허리에다 매끈한 팔다리가 눈이 부셨다. 구양봉은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며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와 주질 않았다. 문득 모용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가 모용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절감했다. 또 미인들 몇이 안으로 들어왔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도 있고 얇은 천 따위로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린 여인도 있었다. "어느 애가 마음에 드세요? 누구든 원하시는 아이에게 수청 들도록 해드리지요." 구양봉의 몸을 씻어 주던 미인 하나가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어디서 이런 절세미인들을 한꺼번에 만나 본단 말인가. 여자들은 하나같이 구양봉의 눈에 들기 위해 자태를 뽐내느라 야단이었다. 봄날의 난초나 가을의 국화나 각기 자기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고인의 시구가 생각날 정도로 어느 하나 버리기가 아까운 심정이었다. 구양봉은 실로 난감해졌다. 목욕을 시켜 주던 여인이 다시 소곤거렸다. "공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 애들은 한꺼번에 공자님 수청을 들 것이에요. 어때요?" 구양봉은 물론 그랬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직 여인들과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데다가, 이 생소한 곳에 오자마자 이 많은 여인들을 한꺼번에 안아 본다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의 몸을 씻어 주던 여인이 그중 부드럽고 돋보이는 것 같아 어색함을 숨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애들은 다 돌려보내고 너만 남거라." "좋아요." 여인이 함빡 웃음을 떠올렸다. 다른 여인들이 다 돌아가자 고요한 욕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성년이 되어 여태까지 여인을 한 번도 안아 보지 못한 구양봉은 아름다운 여인과 단둘이 남게 되자 더욱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여인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윽고 구양봉은 난생 처음 엄청난 쾌락을 맛보았다. 구양봉이 방으로 돌아와 나른한 기분으로 앉아 있노라니 또 한 여자가 들어와 무릎을 꿇으며 주과(朱果) 한 알을 올렸다. 천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주과인데 먹으면 내력이 커지는 선약(仙葯)이라는 것이다. 구양봉은 두말 없이 그 주과를 받아 먹었다. 첫맛은 좀 씁쓸한 것 같더니 다음 맛은 비길 데 없이 감미로웠다. 게다가 단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정신이 번쩍 들고 온몸에 기운이 솟는 듯했다. 이어서 여인들 몇 명이 또 안으로 들어왔다. "구양 공자님께서는 아악(雅樂)을 즐기시는지요?" 구양봉은 너무 기뻤다. 듣기에 공자(孔子)는 아악을 즐기느라고 석 달 동안 고기 맛도 몰랐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아악을 자신이 몸소 듣게 된 것이다. "전에 주인님께서 이 아악을 구하느라 무진 애를 썼지요. 온 세상을 헤매고도 구하지 못하던 것을 가주님의 하인 한 분이 낙양(洛陽)에서 발견하였지요. 어느 고총을 팠는데 그 고총 안에 이 악보가 있더랍니다. 그래 그것을 정리하니 이런 멋들어진 곡이 되었지요. 공자님께서도 즐겨 들으실 줄 믿습니다." 구양봉은 이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들려 주구려." 구양봉은 미소를 떠올렸다. 일곱 미인들은 일곱 가지 서로 다른 악기를 갖고 있었다. 철쟁(鐵錚)·공후( ) 같은 것은 구양봉도 본 적이 있으나 옹자배기 같은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민간에서 쓰는 호(瓠)라는 악기 같기도 했다. '사람들 중엔 글 읽는 선비가 되어 일생을 청고(淸高)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청고함이란 참 한심스런 것이구나. 저 악기가 무슨 악기인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귀인에게도 학문이 있고 사치 속에도 학문이 있는 셈이지 뭔가.' 기악 소리가 은은히 울리기 시작했다. 미인들은 제각기 재주를 다하여 구양봉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다. 아악은 확실히 고상한 음악이었다. 바다처럼 의젓한 기백이 흐르는 곡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대지의 광활함과 인생의 기쁨을 감지하게 했으며 세상의 평화로움과 산천경개의 수려함을 느끼게 했다. 그 크나큰 감동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멋지구나, 멋져!" 구양봉은 기분이 좋아 소리쳤다. '글 읽는 선비라는 위인이 여태까지 이렇듯 좋은 음악인 아악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니. 유운장에 오지 않았다면 이 아악을 어디서 들어 본단 말인가? 유운장의 가주는 확실히 아무나 쉽사리 누릴 수 없는 쾌락을 누리고 있구나.' 구양봉은 내심 감탄을 하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고 이젠 돌아들 가요. 다음에 또 듣기로 하지." 여인들은 일제히 연주를 멈추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구양봉을 바라보며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들 그러고 앉았느냐?" 구양봉이 의아해서 물었다. "공자님께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을 올릴까 합니다." 한 여인이 말했다. '정풍과 위풍이라니?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구양봉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 여자들이 정풍과 위풍도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듣기에 공자는 정풍과 위풍이 가장 음탕하다고 하였다는데, 도대체 정풍과 위풍이 어떻기에 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선비들 중에도 정풍과 위풍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기실 그들도 정풍과 위풍을 직접 들어 본 것은 아니고 오로지 공자의 말을 그대로 빌어 쓰는 것이 아닐까?' "공자님, 저희 주인님께서는 저희를 불러서 언제나 아악을 들은 뒤 정풍과 위풍의 가무를 보시곤 하셨어요. 공자님께서도 정풍과 위풍을 들어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좋소, 그렇다면 들어 봐야지." 구양봉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악기들을 만져 보지 못했던지 아니면 오랫동안 이 정풍과 위풍을 연주해 보지 못했던 것인지, 여인들은 구양봉의 말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미묘한 선율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구성지고 애절하기 짝이 없는 기악 소리는 마치 규방의 미인이 우수에 젖은 감상으로 속마음을 하소연하는 듯했다. 기악 소리에 맞춰 몇 명은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악 소리도 듣기 좋았지만 미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여인들은 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구양봉을 싸고 돌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의 마음을 내 가슴에 묻어 주세요 봉긋한 나의 젖봉오리는 그대의 분묘예요 그대의 마음 영원히 내 가슴에 살아 있으리 헤어져 만나지 못해도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있으리. 달콤한 미녀들의 노랫소리는 점차 노골적인 사랑가로 변했다.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되어 몸이 달아올랐다. 오신다니 기다려요 물이 불어도 기다려요 물이 불어 발목을 적시는데도 어이하여 오지를 않나요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오신다니 기다려요 물이 불어 허리를 적셔도 어이하여 오지를 않나요 애간장이 타도록 기다리는데 어이하여 오지를 않나요 오시려나 마시려나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 이 얼마나 애절한 노래인가? 시시각각 불어 오르는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움직이지 않고 서서 사랑하는 님을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하는 그 애달픔, 그 뜨거운 사랑을 미인들의 달콤한 노랫소리로 듣노라니 구양봉의 가슴도 절절한 욕망으로 벅차 올랐다. 오신다니 기다렸어요 물이 불어 목을 넘어도 기다렸어요. 기다렸어요 이대로 나는 죽어요 그대만 홀로 남겨 놓고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물이 너무 깊어 빠질까 봐 겁이 나요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여인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사랑에 미친 옛이야기, 사랑에 미친 한 여인이 사나이를 애간장이 타도록 기다리는 옛이야기, 불어 오르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그냥 서서 오로지 사랑하는 이만 생각하는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여인들의 가무에 흠뻑 취한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내게도 저토록 기다려 주는 여인이 있다면……. 아니, 나는 저렇게 기다리게 내버려둘 수 없어. 사람을 기다리는 일처럼 괴로운 일은 없으니까.' 구양봉이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느닷없이 노랫소리가 뚝 멎더니 여인들이 우르르 다가와 구양봉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저희들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시니 공자님도 다감하신 분이시네요. 공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저희들의 크나큰 복이에요." 여자들은 다시 일어나 되풀이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신다니 기다렸어요 물이 불어 목을 넘어도 기다렸어요. 기다렸어요 ……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곁에 앉아 있던 여인은 매끄러운 손길로 구양봉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한 구양봉인지라 이내 숨이 거칠어지고 흥분으로 몸이 녹아날 지경이었다. 그림처럼 고운 여인들, 노래처럼 달콤한 여인들, 시처럼 우아한 여인들! 구양봉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지. 제왕도 부럽지 않게 이렇게 살아야 산 보람이 있는 거야. 나 구양봉이라고 이렇게 살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 집 주인의 합마공만 배운다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을 테고, 이 강호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다.' 그날 밤, 구양봉은 미인들을 끌어안고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잠결에 그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구양 공자, 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무슨 잠을 이렇게 자나?" 구양봉은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요? 왜 이러시는 거요?" "내가 누구냐구? 그래,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단 말인가?" 구슬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몽롱하게 보였다. 눈을 비비며 자세히 살피다가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자기에게 집을 내준 그 노인이 앉아 있지 않는가? 노인은 웃는 눈으로 구양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떤가? 이런 향락을 누리고 싶나?" 구양봉은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우리 유운장에는 천하 제일의 미인도 있고 천하 제일의 금은보화도 있고 산 같은 재화도 있지. 난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내고 말아. 모두 내 마음에 달렸거든.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손아귀에 들어 있네. 기분이 좋으면 천하 재해민들을 구해 주어 집집에서 나의 장생위패(長生位牌)를 모시게 할 수도 있으나, 기분이 나쁘면 무림 파벌 하나쯤 하룻밤 사이에 깨끗이 죽여 없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학벌이 어떤 특출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지. 어떤가? 젊은이,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노인의 물음에 구양봉은 그렇게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려면 나같이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하네.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땐 사람을 죽여야 해. 저 계집들은 내 것이지만 내가 죽이고 싶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버릴 수 있어. 며칠 지나 더 예쁜 계집들을 구해 오면 되니까." 노인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자들을 하찮다는 눈길로 돌아보았다. 여자들은 이미 노인한테 혼수혈(昏睡穴)을 눌린 터라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유운장의 주인인 이 노인은 천하를 하찮게 보는 명실상부한 영웅이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유운장의 주인은 구름같이 떠도는 손님, 운객을 머물게 하면서도 천하 무림을 하찮게 여기는 영웅이다.'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천하에 드문 영웅이 되는 걸세. 기공(奇功)을 지닌 강호의 필수가 되는 거지." 노인의 말이었다. 구양봉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제자가 되어 노인의 무공을 계승하여 천하를 종횡하는 독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제16장 신기한 합마공 세상일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유운장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구양봉은 자신이 이 노인의 제자가 되어 세상 최고의 독물(毒物)이 되기를 원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신독행 영감을 스승으로 모시고 봉황력과 합마공이라는 신기한 술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자그마한 나무집 안에서 신독행은 구양봉에게 말했다. "이 무공을 난 이제껏 제자들에게 전수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지. 이 기이한 무공은 마음이 아주 독하여 독단 독행하는, 그러면서도 문무가 겸비된 제자에게만 전수되어 내려오는 까닭이지. 무림의 세계에서 무공은 정파(正派)와 사파(邪派) 이렇게 두 개 파로 나뉜다. 정파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정직하다는 뜻에서 정파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배우는 주공이 내 공으로부터 시작한다 해서 그렇게 일컫는 것이야. 어려서부터 내공과 심법(心法)을 수련하여 한 단계씩 순서대로 점진하는데, 이래야 10년에 성(成)이 되고, 20년에 형(形)을 이루고, 30년에 파(派)를 가지며, 40년엔 명(名)이 있어, 50년에 이르러야 엄연한 대가가 되는 것이지. 정과가 무공을 배움이 대저 그러하니 그 얼마나 황당한가?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평생을 모두 무공을 닦는 데만 보낼 수 있겠나? 50년 만에야 대가가 될 수 있다니, 그때에 이르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는데 무공을 닦아 어디다 쓰겠냔 말이지." 구양봉은 노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내가 가르치는 사파(邪派) 무공은 그렇지 않지. 정파 무공처럼 단순히 평(平)·순(順)·달(達)·오(悟)·명(明)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邪)·괴(怪)·독(毒)·한(恨)을 강조하지. 사람들은 합마공이 천하에 둘도 없는, 얼마나 기이한 무공인지 모르고 얕잡아 보는데, 생각해 봐라. 두꺼비만큼 센 것이 어디 있는가? 대저 내공이란 기(氣)를 강구하는 법인데, 세상 만물, 큰 것으로 말하 면 말에서부터 작은 것을 말하면 곤충에 이르기까지 두꺼비처럼 운기(運氣)하여 자기 몸뚱어리를 몇 배 크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기가 이르면 돌도 깨지는 것이 합마공이야. 합마공의 신묘한 용처는 무궁무진하니 다음날 자세히 더 얘기하기로 하자." 노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나만이 갖고 있는 봉황력이라는 경공(輕功)이지. 장자(莊子)의 말대로라면 세상 만물 중에 곤붕(鯤鵬)만큼 큰 짐승이 없는데, 한 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 리를 난다고 해. 그럼 곤붕이란 무엇인가? 곤붕이란 즉 봉황이야. 새들의 왕이지. 새들의 왕이 아니면 어떻게 한 번에 구만 리를 날 수 있겠나? 내 이 봉황력이란 바로 봉황이 나래 치는 자세를 본딴 것인데 도합 13식(式)으로 되어 있지. 이 13식이 천하에 둘도 없는 경공을 이루는 거야. 내 먼저 설명부터 하고 시범을 보여 주지." 노인은 구양봉에게 봉황력 13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상구천(鳳翔丸天)·봉시출소(鳳翅出巢)·단족입애(單足立崖)·일시충소(一翅沖 )·박격만리(搏擊萬里)·봉환소(鳳還巢)…… 이렇게 13식을 차례로 설명한 뒤에 노인은 두 발을 급히 구르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서 쑥 날아올라 열 장도 더 돼 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앉았다. 나뭇가지 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노인 은 마치 한줌의 솜뭉치처럼 아주 가볍게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었다. 천하에 가장 절륜한 경공이었다. 사막에서 최고의 고수로 알려진 형님이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바람처럼 질주하곤 했지만 신독행과 같은 비상한 재주는 갖고 있지 못했다. 형님더러 신독행처럼 몸을 솟구쳐 열 장 높이의 나무 끝에 솜처럼 가볍게 올라앉으라 하면 올라앉을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인은 다시 가볍게 몸을 움직여 나무에서 내려오는 듯하더니 공중에서 자세를 몇 번 바꾸어 다시 나무 끝으로 날아 올라갔다. 아마 이게 봉환소라는 것인가 보았다. 자고로 봉황은 깃들 때 곧바로 둥지에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둥지가 있는 오동나무를 싸고 돌며 울다가 둥지에 든다고 한다. 노인의 동작이 그러했다. 놀란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수리개가 날갯짓하며 오가는 것 같기도 했다. "구양봉, 내 이 봉황력이란 이름은 장자의 '소요유·북명의 물고기(逍遙游·北冥有魚)'에서 따낸 것이다. 자네는 책을 많이 읽었으니 장자의 이 글을 외워 읊을 수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