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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6편 (26/64)

2026-09-24 21:22:51 조회 22
주련 복판에 유난히 크게 씌어진 글자 하나는 처음 속문성을 따라갔을 때 본 술집 주기에 적혀 있던 것과 같은 독(毒)이라는 글자였다. 송 때의 세속적인 관례대로라면 무장의 조벽에는 범 호(虎)자를 쓰고 문관의 조벽에는 단정하게 조용할 정(靜)자를 써 놓음이 마땅했다. 범 호를 쓰는 것은 호장(虎將)은 호문(虎門)에서 나고 호장(虎莊)에는 호자(虎子)가 많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의미에선지 조벽에다 독할 독(毒)자를 크게 써 놓았는가 하면, 주련의 상련에는 '집에 주인님이 계시니 복이 많고', 하련에는 '방에 어머님이 계시니 가슴이 설레는구나.' 하는 알 수 없는 문장을 써 놓고 있었다. 구양봉은 암만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때 앞에서 안내하던 쾌도라는 작자가 구양봉을 떠볼 작정인 듯 읍을 하며 치근덕거렸다. "공자님, 이 주련을 한번 봐 주십시오. 우리 주인님께서 써 주신 건데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어디 그 뜻을 해독할 수가 있습니까? 공자님께서 우리 유운장에 오신 걸 보니 아주 총명하신 분임에 틀림없사오니 이 주련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겠지요. 좀 가르쳐 주십시오." '분명 나를 떠보려는 수작이렷다?' 그래도 모두 북국에선 내노라 하는 인사들일 텐데 제집 주인이 쓴 주련의 의미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구양봉은 생각했다. '만일 내가 저것을 해독하지 못한다면 이자들이 나를 업신여길 게 분명해.' 구양봉은 보통 사람과 성미가 달랐다. 어떤 때는 고집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였으나 어떤 때는 고지식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강호의 예법을 알지 못했다. 강호 사람들처럼 겸손을 차리며 양보할 줄도, 듣기 좋은 말로 슬그머니 위기를 모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슬쩍 미룰 줄도 몰랐다. 구양봉은 어떻게든 자신의 학식을 과시하고 싶었다. 강호에서 제 잘난 척하다가는 왕왕 큰코를 다 친다는 것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련을 보니 당신네 주인님은 신농씨(神農氏)와 같은 인물이겠습니다. 옛날 신농씨께선 몸소 백초(百草)를 맛보시면서 독 있는 풀들을 잡수셨지요. 그분이 독 있는 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독 있는 풀을 가려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당신네 주인님께서도 그 같은 탁견이 계시기에 신농씨와 같은 의미로 독자를 크게 써붙인 것이 아닙니까? 저 주련이 그걸 잘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상련엔 주인 주(主)자가 있고 하련엔 어미 모(母)자가 있는데, 그것을 합치면 집에 주모(主母)가 있다는 의미가 되고 이 주모를 하나의 글자로 만들면 독할 독 자가 되지요. 이렇듯 독의 중함을 아니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소생이 보건대 당신네 주인님께서는 학식이 비범할 뿐만 아니라 독을 쓰고 또 해독도 할 줄 아는 천하의 대인인 듯싶습니다." 구양봉의 말을 귀담아듣던 여섯 사람은 일제히 구양봉을 향해 존경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쾌도라는 사나이는 더욱 크게 탄복하여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까지 했다. "공자님 말씀을 듣고 보니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습니다. 공자님의 가르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이어서 다섯 형제에게도 공경을 표했다. "제갈 형님, 그간 변경에서의 3년 고생이 헛고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쾌도와 다섯 형제는 다 같이 유쾌하게 웃었다. 여섯은 우선 구양봉을 데리고 객방을 지나 중간채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신 뒤 그들은 또 구양봉을 데리고 후당으로 향했다.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고어에 이르기를, 천자는 당(堂)이 아홉 개요, 제후는 당이 일곱 개고, 지부(知府)는 당이 다섯 개요, 현령 (縣令)은 당이 세 개이고, 선비는 당이 하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은 도대체 무슨 신분이기에 천자나 다름 없이 당을 아홉 개나 가지고 있단 말인가? 어쨌든 이 집 주인이 범상치 않은 일대 명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 북국 천산에 어찌 이런 인물이 있을까?' 구양봉은 내심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후당을 지나니 아름드리 나무들이 여러 그루 한데 모여 있는데 무성하게 자란 가지들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집이 있어 늘어진 가지들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집안은 어두컴컴하여 밖에서는 아무것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속문성 일행은 여기에 당도하자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웃음을 거두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제갈노인이 앞에 서고 점쟁이 속문성이 그 뒤에 섰으며, 그 다음은 석초수, 그 다음은 시종일관 말이 없던 두 형제, 그리고 맨 마지막은 쾌도라고 불리는 사나이 순으로 줄을 지어 섰다. 제갈 노인이 목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말했다. "주인님, 늙은 노복 제갈정을 비롯한 여섯 노복이 변경에서 돌아와 주인님께 복명하나이다." 노인은 마치 앓는 병자가 놀랄까 봐 저어하듯이, 혹은 자는 아이가 깨어날까 봐 저어하듯이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아주 조심스레 말했다. 구양봉의 형님과 모용쟁을 대할 때의 그 위풍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엇이 저 노인으로 하여금 나무 아래 오두막집에 이르러선 저렇듯 쩔쩔매게 하는 것일까. 구양봉은 아마도 그 오두막집 안에 그들 다섯 형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 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이라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제갈 노인이 거듭 두 번이나 말했으나 집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제갈 노인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한 채 일렬로 늘어선 일행과 함께 묵묵히 기다렸다. '참, 이 주인님이란 사람 성미 한번 고약하군. 그렇게 벌벌 떨면서 부르는데 얼마나 더 위풍을 떨겠다는 거야? 그만하면 안으로 들게 해도 좋을 성싶은데…….' 구양봉은 은근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기는 외지에서 온 손님인데다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도 알 수 없는 터라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때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보건대 너희들 다섯 중에 하나도 쓸 만한 놈이 없는 성싶다. 늙다리는 밤낮 남들을 못살게 굴 생각만 하느라고 빼빼 여위었고, 너 속문성은 언제나 빚쟁이처럼 표정이 굳어 있고, 그리고 저 바보 같은 녀석은 언제나 성난 얼굴을 하고 있기에 피가 몰려서 얼굴이 수수떡 같고 배가 두꺼비 배가 되었구나. 그런가 하면 저 두 젊은 녀석은 하루 종일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하는 녀석들 아냐? 장가든 날 밤에도 신방에 들어서 촛불이 다 타도록 땀만 뻘뻘 흘리며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이젠 잡시다' 한마디 했다던가……?" 구양봉은 방금 들은 목소리가 분명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 목소리인데 말투는 너무나 어른스러워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이렇게 만나자마자 욕을 해대는 것인가. 그런데 속문성 일행은 누구 하나 그 말에 대꾸하려 들지 않고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이번에도 한결같이 허리를 크게 굽혀 인사를 올렸다. "사숙님, 안녕하셨습니까?" 구양봉은 그제야 지붕같이 얽힌 나뭇가지 위에 한 어린애가 가지를 흔들며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몸에는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한 갈래로 땋아 늘인 모습이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기껏해야 아홉 살이나 열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가 어째서 제갈 노인과 다른 네 어른들의 사숙이 된다는 것인지 구양봉으로선 납득이 안 되었다. "제갈정, 자네가 가 있는 3년 동안에 자네 처가 나한테 아주 불손하게 굴었지. 지난달엔 엿을 고아서 나한테는 작은 걸로 한 옹배기밖에 주지 않더란 말이야. 뭐 많이 먹으면 탈이 날까 봐 그런다나? 흥! 윗사람을 공대할 줄 모르고 거짓말이나 일삼다니. 게다가 자네 손자 놈은 나와 탄자(彈子) 놀이를 하다가 나를 윽박지르지를 않나. 이젠 자네가 왔으니 잘 좀 교육시키란 얘기야. 다음부터 이 어른 공대 좀 잘하게 버릇 좀 가르치라구." 구양봉은 기가 막혀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다섯 형제는 그런 말에 익숙한 듯 조금도 개의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갈 노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숙님, 천만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어린것은 이제 그 허우대 좋은 장한을 가리키며 훈계를 시작했다. "석초수, 자네 여편네는 3년 동안 얼마나 울어댔는지 아나? 밤만 되면 버릇처럼 베개를 끌어안고 엉엉 울더라구. 아마도 자네 생각 때문에 그랬겠지. 그런데 울다간 또 웃곤 하더군. 웃긴 왜 웃냔 말이야. 자네 들어가거든 물어 봐. 그리고 내일 아침에 나한테 알려 줘." 장한은 그저 얼굴이 시뻘개져서 꺽꺽거릴 뿐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었다. 구양봉은 저 조그만 것이 무슨 수로 열 길도 넘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갔으며, 어떻게 제갈 노인의 사숙이 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어린것이 비로소 구양봉을 발견하고 손뼉을 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옳아, 저것들이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자네구나?" 어린것의 직접적인 질문에 구양봉은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소. 저 사람들이 데리고 온 사람이오." 구양봉의 대답에 어린것은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아이구 야단났네, 야단났어. 속았어, 속았다고!" "속다니?"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하여 반문했다. 어린것은 냉큼 몸을 솟구치더니 나뭇잎처럼 후르르 나무에서 날아 내려왔다. 그는 구양봉 앞에 마주서기가 무섭게 말을 이었다. "잔말 말고 빨리 튀어. 저것들이 임자를 데리고 온 건 흑심이 있기 때문이야. 자네더러 독(毒)을 배우라는 건데 독을 배우는 게 좋은 일인 줄 아나? 이 어르신도 그 해를 단단히 입었지. 저것들한테 붙잡혀 왔으니 자넨 이제 큰일났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달아나라구. 이 어르신한테 양식도 있고 노자도 있으니 어서 갖고 내빼. 내 혼자 저것들 다섯을 막아 줄 테니 어서 내빼라니까!" 그는 호주머니에서 엿 세 가락과 떡 두 쪽, 은 석 냥을 꺼내어 구양봉에게 건네주었다. 어린것이 나무 위에 있을 적엔 몰랐는데 내려온 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백납의(百衲衣)를 입고 있었다. 백납의란 당시 아이를 낳으면 백여 집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에서 꽃무늬 천 한 쪼가리씩을 얻어 만든 저고리로, 장수하란 뜻에서 아이에게 입힌다. 이런 꽃저고리를 입으면 백 살까지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양봉은 호주머니에 엿가락을 넣고 다니는 코흘리개가 자기더러 어서 달아나라고 재촉하는 통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이때였다. 늙은 노인의 짱짱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이제야 돌아들 왔느냐?" 그 소리에 속문성은 바짝 긴장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부님, 저희 다섯 형제가 돌아왔음을 아뢰옵니다." "그래 찾아오라는 사람은 찾아왔느냐?" "예, 찾아왔나이다. 구양봉이라는 분으로 바로 여기 서 계십니다." 속문성이 급히 대답했다. 노인의 말소리가 들리자 어린것도 대번에 안색이 변하여 구양봉에게 소곤거렸다. "큰일났다, 큰일났어. 영감이 깨어났으니 이젠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구." 그리고는 모둠발로 팔짝 뛰어 단번에 여덟 장이나 뛰어나갔다. 그는 이렇게 두세 번 반복하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문성네 다섯 형제도 구양봉만 큰 나무 앞에 세워 놓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드디어 노인이 구양봉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구양봉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집 안에 들어서니 그곳은 커다란 나무 구새였다. 구새통 안의 노인을 발견한 구양봉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노인은 벽에 기대어 물구나무를 서 있었는데 풀어져 거꾸로 드리운 머리카락은 마치 지심을 향해 뻗은 나무뿌리 같았다. 발은 맨발인데 발바닥이 나무에 닿게 매어져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구양봉 은 보지도 않고 물었다. "자네가 내 주련을 맞춘 잔가?" "그렇습니다. 제가 변경에서 한가로이 다니다가 뜻하지 않게 그 주련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주련을 읊었다. "하늘을 나는 봉황,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 구양봉은 자기더러 하련을 다시 맞추어 읊어 보라는 줄로 알고 소리 내어 하련을 읊었다. "땅 위를 기는 두꺼비,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노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자네는 틀렸네. 자고로 문행사육(文行四六)은 그 글귀가 짝이 되게 맞추는 법이야. 하늘 천(天)은 따지(地)로 맞추고, 날 일(日)은 달 월(月)로, 청풍(淸風)은 유수(流水)로 맞추지. 학식이 있다는 사람이면 이런 도리쯤은 어련히 알고 있을 터인데, '바람 타고 난다'는 '승풍(乘風)'에다 '혼자서 기어간다'는 '독행(獨行)'을 갖다 대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봉황력(鳳凰力)이라 는 힘 력(力)자에 합마공(蛤 功)의 공력 공(功)자를 맞추는 법도 없지. 잘못되었으니 어디 다시 새로 맞추어 보지 않으려나?" "어르신께서 이 집의 주인 어른이 틀림 없으십니까?" 구양봉이 물었다. 노인은 또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제가 대문을 들어서며 조벽을 보니 거기에도 주련이 있던데 그 주련도 주인 어른의 글이 틀림 없습니까?" 구양봉이 웃으며 또 물었다. "생각나는 대로 쓴 난필이니 웃지 말게." "제가 보기에 그건 아주 잘 쓰신 주련입니다. 의미도 범상치 않고 글 속에 그림도 있고, 두 연을 합쳐 놓으면 한 개 글자가 되고 두 연을 갈라놓으면 주인 어른의 흉금을 과시하게 되니 이런 극치가 없을 줄 압니다." "글쎄, 난 그 주련이 어떻게 좋은지는 아직 모르고 있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노인의 얼굴은 득의로 가득 찼다. "그러나 주인 어른의 그 주련도 소생이 맞춘 주련처럼 짝이 전혀 맞지 않는 주련입니다. 대단히 틀린 주련이지요." 이 말은 한창 득의에 차 있는 노인의 머리에 냉수를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분이 상한 노인이 싸늘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주련의 무엇이 틀렸는지 어디 말해 보게나." 그러면서 노인은 손을 홱 내저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뭇가지 하나가 휙 날아와 구양봉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순간 구양봉은 자신의 머리가 두 조각이 나는 듯한 아픔에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쳐서 벽에 기대 섰다; 그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만져 봤다. 머리칼 사이에 꽂힌 나뭇가지의 한 끝이 나무 구새 벽 속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손에 피는 묻어 나지 않았다. "노인장, 왜 이러십니까?" "다른 소리 말고 그 주련이 어디가 통하지 않는가만 말해 봐라." "그 주련은 분명 짝이 맞지 않습니다. 내가 '바람 타고 난다'는 '승풍(乘風)'에 '혼자 간다'는 '독행(獨行)'을 맞춘 것이 틀리다면, 노인장께서 주인이라는 '주(主)'자에 어머니라는 '모(母)'자를 맞춘 것이나, 집 '가(家)'에 방 '실(室)'을 맞춘 것이나, 많을 '다(多)'에 고칠 '갱(更)'을 맞춘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구양봉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껄껄 웃어대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거 그럴 듯하구먼. 자네 지적이 틀리지는 않아. 난 실은 책벌레, 서방의 꽁생원 따위는 눈꼴시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일세. 그자들은 밤낮 공자왈 맹자왈 글을 외우고 글을 쓸 때도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많지. 그리고 큰 학문이나 있는 듯이 때로는 옛적 현인들의 시도 몇 줄 읊고 또 무슨 큰 도리나 알고 있는 듯 경서의 말도 이 말 저 말 가져다 쓰지만, 기실은 권세와 금전 앞에서는 오금 을 못 쓰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지. 이런 자들을 난 보는 족족 깨끗이 죽여 버리고만 싶네." "옳은 말씀입니다. 묘한 말씀입니다. 노인장의 말씀은 내 마음과 딱 맞습니다."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솟구치며 외쳤다. 그러자 꽂힌 나뭇가지에 상투가 당겨지는 바람에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비명을 질렀다. 노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그래도 자넨 세상에 '혼자 간다'는 독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됐네. 내 이름이 바로 신독행(愼獨行)일세." 그제야 구양봉은 자기가 맞춘 그 주련이 바로 노인의 이름을 맞춘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몇 마디 묻겠는데, 사실대로 대답해야 되네." 노인의 말에 구양봉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자네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군가?" 노인의 갑작스런 물음에 구양봉은 어리둥절해졌다. '제일 미운 사람이라고?' 그는 일순 백타산장 임일천과 백방으로 그를 못살게 굴던 소씨 거렁뱅이를 떠올려 보았으나 딱히 누구라고는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만일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들을 죽여 버릴 생각이 있겠지?" 구양봉은 임일천의 행패가 생각나서 주저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죽여 버릴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또 껄껄 웃었다. "그래 자네는 재물과 권세, 술과 미녀들도 좋아하겠지?" 구양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물론 좋아하지요. 하지만 속으로 꿈에서나 좋아할 뿐, 소생 같은 인간에게 어디 차례나 오겠습니까?" 노인은 그 말에 또 웃었다. 그러더니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몸을 위로 솟구쳤다. 훌쩍 날아 구양봉 앞에 내려앉았다. "젊은이, 자네가 내 주련을 맞힌 걸 보면 우리들은 인연이 있는 모양이야. 내가 지닌 기이한 무공을 몽땅 자네에게 가르쳐 주지." 그리고 노인은 목소리를 길게 빼며 주련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봉황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 땅 위를 기는 두꺼비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노인은 다시 훌쩍 몸을 솟구치더니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공중에서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 술법은 형님 구양적의 스승인 백면라살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굉장했다. 노인은 또 땅으로 내려와 사지를 두꺼비처럼 웅크리고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을 크게 벌리며 '꽥, 꽥!' 두꺼비 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두 팔을 번개처럼 휘두르는데 마치 천여 개의 팔이 한꺼번 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 뒤 노인은 다시 한 번 '꽥'소리를 지르더니 양손바닥을 펴서 세워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아름드리 고목이 절반이나 빠개져 나가면서 푸른 하늘이 환하게 내다보였다. "이건 천하에 없는 두 가지 무공이지. 한 가지는 봉황력이요 다른 한 가지는 합마공인데, 원한다면 내가 이 두 가지 무공을 모두 가르쳐 줄 작정이네." 노인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구양봉은 물론 바라는 바였다. 그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땅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노인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이러지 말고 내 말을 더 듣게. 내 이 신공(神功)을 배우려면 먼저 독을 쓰고 독을 먹을 줄 알아 독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네." 구양봉은 자기더러 어서 달아나라던 어린아이의 말이 생각났다. 이 노인이 독약을 먼저 먹이는 모양인데 그것을 먹다가 죽어 버리면 송장밖에 더 되겠는가 싶어 구양봉은 더럭 겁이 났다. 한 목숨 죽으면 그만인데 무공이고 나발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절대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런 독 있는 사람은 안 되렵니다. 그런 사람은 되기 싫습니다." 그의 말에 노인은 웃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모르는 소리. 독 있는 사람이 뭐가 나쁘다는 겐가? 독 있는 사람이 하고많은데 자네 하나 더 늘어난다고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전 싫습니다. 정말 싫습니다." "내 말 좀 듣게. 그 조그만 녀석의 말은 괘념치 말아. 그 녀석의 말은 믿을 게 못 돼. 내 말만 듣게. 어떤가?" 구양봉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한테 자꾸만 눈길이 쏠림을 어쩔 수 없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이 생각났다. 모용쟁도 백타산장 난쟁이 임일천한테 잡혀가 하루를 지냈는데, 그 난쟁이의 눈을 자꾸만 들여다보다가 그만 부지불식간에 난쟁이를 졸졸 따라 나서게 되었다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 노인도 그런 섭혼술(攝魂術)로 자기를 사로잡으려는 건지도 몰랐다. 노인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업신여기며 때리고 욕하곤 하지?" 구양봉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맞서 싸우지 못하나? 왜 강약을 겨루어 보지 못하지?" 구양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무공이 있어야지요." 노인은 구양봉의 말에 다시 껄껄 웃더니 말했다. "난 자네가 숱한 미녀와 노복을 거느리고 맘껏 부려먹으며 살게 할 수도 있네. 자네를 천하에 으뜸가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지. 황제가 원이라면 황제로 올려 놓을 수도 있고 황제가 싫다면 무림의 패자로 만들 수도 있어. 어쨌든 천하의 지존이 되게 할 수가 있으니 자네 의사가 어떤가에 달렸네." 구양봉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노인의 말을 거부하자니 여태까지 겪어 큰 치욕적인 생활을 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활개치고 다니고 싶은 욕심이 앞서고, 노인의 말을 따르자니 그러다가 사악한 길에 빠져 들어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