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5편 (25/64)
속문성은 동전 세 닢을 한번 추스려 보이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한마디 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양손을 이용하여 구양적의 앞가슴에 있는 육대 사혈(六大死穴)을 향해 동전 여섯 개를 내뿌리면서 중얼거렸다. 석숭(石崇)은 돈을 만들어 부자가 되었고 자야(子耶)는 쌀을 팔아 가난뱅이가 되었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동전만 바람 타고 날아다니네. 구양적은 사장을 휘둘러 동전을 막으면서 속문성의 무공에 은근히 탄복했다. 병법에 의하면 치[寸]가 척(尺)보다 짧다는 걸 알아야 한다지 않던가. 그런데 속문성은 구양봉이 마구 휘두르는 사장 앞에서도 때를 놓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동전을 내뿌리곤 하였다. 구양적의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의 상양(商陽)·오리(五里)·곡지(曲池) 삼혈(三穴)을 공격하는가 하면, 또 술법을 바꾸어 구양적의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불용(不容)·유근(乳根)·대거(大巨) 삼혈을 겨냥했다. 사실 구양적도 웬만하면 속문성을 단번에 사장으로 요절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양적의 사장이 속문성의 골통을 내리치려고 하면 동전 세 닢이 그의 삼혈을 향하여 날아오는 통에 그걸 막기에 급급했다. 구양적은 화가 났다. 속문성의 무공은 그에 비하여 변법도 많았거니와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날쌔기까지 하였다. 미인이 나풀나풀 춤을 추는 듯한 몸짓 또한 일품이었다. 반면에 구양적은 사장을 휘두르기조차 점점 벅차 왔다. 이런 식으로라면 승부는 뻔했다. "잠깐!" 구양적은 소리 지르면서 한 옆으로 물러섰다. 속문성도 싸움을 멈추고 뒷짐을 지며 서 버렸다. 아주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구양적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누구보다 놀라고 얼떨떨해진 사람은 구양봉이었다. 그는 형님이 한 번만 손을 쓰면 이 오합지졸 같은 북국의 사람들이 당장에 무릎을 꿇거나 놀라 달아나 버리리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형님의 절묘한 장법(杖法)이 속문성의 여섯 개 동전을 막지 못하고 패하고 말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구양적이 입을 다물고 있자 속문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쯤에서 동생이 북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동생의 안전은 염려 마십시오. 이 속문성이 보장하리다." 구양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모용쟁이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저이의 일을 왜 저한테 먼저 물어 보지 않습니까?" "낭자는 누구시오? 구양봉 선생은 형님 말만 꺼냈지 다른 사람에 대해선 말이 없었소." 속문성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모용쟁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 없었다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오, 그래요. 저와 한바탕 다투다가 화가 나서 국자감 구경을 간다고 훌쩍 가 버렸거든요. 그런데 당신네 같은 괴물들을 데리고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참, 저이가 저한테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저의……." 모용쟁은 말을 끌다가 불쑥 내뱉었다. "저의 남편이에요." 이 말이 떨어지자 구양적과 구양봉은 동시에 놀라 쳐다보았다. 속문성네도 어리둥절해져서 모용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낭자의 뜻은 무엇입니까?" 속문성이 물었다. 모용쟁이 미소를 띤 채 그들 몇 사람을 일일이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들과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거죠. 속문성 선생은 우리 아주버님과 겨루어 보았으니 그만두시고, 저는 저 두 형제와 겨루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래서 내가 지면 또 저 노인과 겨루어 보겠어요. 언제든 한 번은 이길 때가 있겠죠." "이기면 어쩌구 지면 어쩌자는 거요?" 속문성의 물음에 모용쟁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기면야 내 남편을 당신들에게 내줄 수가 없죠. 진다고 해도 전 끝까지 해 보겠어요." "그래서야 됩니까? 우리들 중 어느 한사람과 겨루어 보십시오. 그래서 이기면 낭자의 뜻대로 하시고 지면 두말할 것 없이 구양봉 공자님을 우리와 함께 가시도록 하는 겁니다.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낭자 역시 우리와 함께 가시든가요." 속문성의 이 말은 구양봉네 세 사람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다. 구양적은 모용쟁이 동생 구양봉에 대한 마음을 오늘에야 제대로 내보인 것 같아 내심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생과 모용쟁을 천리 밖인 북국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과 모용쟁을 놈들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가 모용쟁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모용쟁은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었다. '저 바보같이 서 있는 구양봉이 내 남편이라구? 어림도 없는 소리. 사나이다운 기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바보를 내 남편이라고 한 것은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야. 저 바보를 구해내려고 머리를 쓴 것뿐이라구.' 대답을 기다리던 속문성은 답답한 듯 하늘을 올려보다가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답답할 데가 있나. 구양 공자님, 우리 주인님께서 공자님을 학수고대한 지 벌써 3년이나 됩니다. 연로하신 주인님께서는 매일 문설주에 기대 서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 세 사람은 모두 가솔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렇게 3년을 타관 객지에서 지냈습니다. 자라나는 자식들이 자기 아버지를 몰라보게 되었고, 꿈속에서나마 아버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이 고충을 널리 헤아리시어 부디 저희와 함께 북국으로 가서 우리 주인님의 갈망을 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합니다." 속문성의 간곡한 애원이었다. 그의 달라진 태도에 구양봉은 연민과 의협심이 발동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럼 따라가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북국으로 가는 길의 길흉을 가늠할 수가 없는 터라 무슨 일이 생길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모용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요. 속 선생께서 내놓으신 제안에 따르기로 하죠. 하지만 누구와 무공을 겨룰지 그 상대는 내가 결정하겠어요."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열 손가락도 각각 그 길이가 다른데 무공이 모두 속문성과 같지야 않겠지, 동전 여섯 닢으로 독장(毒杖)을 막아낼 정도면 보통 무공은 아니거든. 어디 보자……. 저들 중에 저 석씨라는 사람이 제일 힘이 센 것 같은데, 자칫하다간 주먹 한 방에 등뼈가 부서지겠어……. 뒤에 서 있는 저치들도 만만치 않겠군. 태양혈이 튀어나오고 기름을 바른 듯 얼굴이 번들번들한 것만 봐도 내공과 외공을 모두 겸비한 작자들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모용쟁은 속문성 패거리들을 살피다가 한쪽에 서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저 노인은 눈썹이 축 늘어지고 작은 눈이 게슴츠레한 게 정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꼴이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울 정도군. 얼굴색은 꼭 산송장 같은 게 칼 한 번만 가볍게 휘둘러도 밑둥 잘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겠어.' 모용쟁은 함빡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노인과 겨루어 보겠어요." 그러자 속문성과 그 일행이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그들이 웃거나 말거나 자신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스스로 자족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다른 사람과 겨루어 보는 것이 더 좋을 성싶구려." 속문성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모용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필이면 너희들 중 제일 약한 고리를 짚어서 후회가 되는가 보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이니 사정을 봐 주리라 기대하진 말아라.' "칼 받아라!" 모용쟁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칼을 내찔렀다. 그런데 그 노인은 너무 늙어 움직일 기운조차 없는지 칼아 가슴팍에 다가온 순간에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모용쟁은 이런 무기력한 노인을 이렇게 간단히 죽여 버릴 생각까진 없었으므로 얼른 칼끝을 옆으로 빗나가게 하려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검 끝이 노인의 의복을 찢으며 가슴에 푹 박히는가 싶었으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노인은 놀랍게도 오른손 두 손가락만을 이용해서 모용쟁의 칼날을 간단히 막아낸 것이다. "보아하니 아가씨의 마음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으니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노인은 느릿느릿 말하더니 칼을 잡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칼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모용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모용쟁이 만만하게 본 이 노인이 사실은 그들 패거리 가운데 무공이 제일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잠자코 지켜 보던 속문성이 느긋하게 물었다. "구양 공자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가씨도 함께 데리고 가시렵니까, 아니면 혼자 따라가시겠습니까?" 일이 이쯤 되자 구양적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동생을 당신들이 데리고 가려면 당신들이 대관절 어떤 사람들이며 우리 동생을 데리고 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소." "죄송하지만 저로서도 이 한 가지밖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저희가 둘째 공자님을 북국에 모시고 가는 데는 절대 악의가 없으니 아무 염려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낭자께서도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면 저희들이 함께 모시고 갈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많은 시간 공자님과 헤어져 혼자 계셔야 할 것임을 미리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혼자 있다니요?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모용쟁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거기 가시면 구양 공자님께선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시게 될 것입니다." 구양적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속문성 일행의 무공이 대단함은 이제 명약관화했다. 제갈정이라는 노인 한 사람도 대적하기 어렵거늘 일류 고수들인 속문성과 저 장한들을 어떻게 당해 낼 수 있겠 는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침묵만 지키는데 속문성이 갑자기 모용쟁의 손목을 덥석 잡아 쥐더니 동강난 칼을 낚아채어 번쩍 치켜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짧은 순간에 자기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내리쳤다. 끊어진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구양 공자를 잘못 건드린다면 이 손가락처럼 될 것입니다." 구양적과 모용쟁, 그리고 구양봉은 말문이 막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속문성이 이처럼 독한 맹세까지 하면서 구양봉을 북국으로 끌고 가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정을 하는데야 무턱대고 반대만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구양적은 비로소 긴장을 풀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동생을 보내도록 하겠소.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그게 궁금하오." "빠르면 1, 2년 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주인님의 마음에 들면 3년이 될 수도 있으나 마음에 들지 못할 경우엔 반년도 못 되어 돌려보낼 수도 있지요." 속문성의 말에 구양적은 동생의 손을 잡아 쥐었다. "내게 일이 없으면 너를 따라 나도 북국에 가 보고 싶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구나."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모용쟁을 돌아보았다. 동생을 따라갈지 말지 모용쟁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모용쟁은 구양적의 눈길을 피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정말로 얼뜨기 구양봉을 좋아하는 줄 아는가 보지?' 그녀는 고생길이 훤한 구양봉을 따라가서 괜히 자기까지 화를 입을 까닭은 없다고 생각했다. '백 타산장의 장주(莊主)에게 끌려 사막에 가서 그 고생 한 것도 몸서리쳐지는데 내가 또 무슨 고생을 하자고 북국엘 가?' 모용쟁이 잠자코 딴청을 부리자 구양적은 그녀의 마음을 읽고 반감이 치밀었다. 동생 구양봉을 자기 남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을 정도면 그만큼 정이 깊다는 얘긴데 선뜻 따라 나서지 않는 태도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못 가면서 모용쟁더러만 따라가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형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구양봉의 마음은 전에 없이 슬퍼졌다. 구양봉이 딱 한 번 형과 헤어져 홀로 경성 임안에 가 본 적이 있지만 잠시뿐이고, 그 이후로는 형과 헤어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북국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고 또 어떻게 될지 그 길흉화복을 점칠 수도 없지 않은가. 구양봉은 코끝이 시큰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구양적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중원에 중요한 일이 있어 따라갈 수가 없다. 여기 일이 끝나면 그 즉시 북국으로 가겠다.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꼭 찾아가마. 그동안 네가 무사하면 내가 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릴 테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사부님을 모시고와서 저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마음속 근심을 털어 버릴 수 없는 구양적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홀로 떠나 보내기가 여간 괴롭지 않았다. 두 형제가 눈물겹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속문성네 일행은 한편에 서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형님과 모용쟁을 뒤로하고 속문성을 따라 몇 걸음 걷다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닦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용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용쟁은 형님을 좋아해. 이제 형님과 단둘이 있게 됐으니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형님이 구해 준 은공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되지. 그들 일행은 어느 큰 읍에 이르렀다. 속문성은 준마 여섯 필을 샀다. 그들 여섯은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깊어서야 주막에 들면서 북으로 북으로 말을 달렸다. 말이 지치면 또 새로 준마를 사서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며칠 만에 천여 리 길을 달려왔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북국에 가는지도 모르는 채 구양봉 역시 속문성 일행을 따라 말을 재촉했다. 모두 무예가 뛰어난 속문성네 일행은 길을 가는 동안 아무리 괴상한 일을 만나도 끼여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술도 한잔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속문성은 자기들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구양봉한테만큼은 각별한 태도로 술을 권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량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장한은 매번 끼니마다 술이 없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술잔을 움켜쥐곤 할 정도였는데, 빈 잔이라도 들고 있어야 술 생각이 달래진다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그들의 이러한 인내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구양봉은 틈만 나면 속문성에게, 왜 자기를 북국에 데려가는 것이며, 주인이 자기를 그토록 기다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과연 무슨 일을 시키려 하는 건지를 물어 보곤 했다. 그러나 속문성은 그냥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8월 가을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 더욱 쌀쌀해서 옷을 두텁게 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향이 가까워 오자 석씨 성을 가진 장한은 눈물이 글썽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창창한 하늘 망망한 들판 내 고향 귀틀집 내 옷을 빨아 주는 사랑하는 내 아내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 우리 함께 사냥하여 사슴을 잡고 우리 함께 자식 낳아 가죽옷 입혀 기르네. 석초수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일행의 향수를 자아내는 듯 나머지 다섯도 일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아― 내 고향 귀틀집 사랑하는 아내여 혹진주 같은 눈동자로 남편의 환향을 기다리네 휘장을 드리우고 원앙처럼 즐겨 보세 검은 머리 흴 때까지 백년해로 잊지 마세. 그들의 노랫소리에 구양봉도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런 사람들이 두꺼비 주련을 맞출 줄 아는 자기 같은 사람을 찾느라고 변경에서 3년이나 고생하며 지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구양봉은 그들을 따라 이미 천리 밖인 북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숲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지키는 사람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들 그에게 공손하게 대하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달아날까봐 경계심도 늦추지 않고 있음을 구양봉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얼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구양봉은 잠결에 느닷없이 들려 오는 함성과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눈을 떴다. 저만치 앞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가죽옷을 입고 창칼이나 활 같은 무기들을 지닌 그들은 하나같이 용맹스런 모습이었다. 구양봉 일행에게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그들 중 한 사람이 꽥 소리를 질렀다. "네 이 놈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우리는 북국의 범, 표범, 이리, 늑대, 개로 알려진 다섯 맹수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무릎을 꿇고 냉큼 물건들을 내놓아라!" 느닷없는 기습에 일제히 잠에서 깨어난 속문성 일행은 그러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그들의 무공이 비상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저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저마다 활을 지닌 마당에 속문성네가 무슨 재간으로 막아낼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속문성과 그 일행들은 웃는 낯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도적떼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향 친구들이라도 만난 듯한 기색이었다. "어서 물건들을 내놓지 못할까? 그래 내 칼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두목인 듯한 놈이 소리쳤다. "물건을 내놓으라구? 물건이야 있지. 멀고먼 변경에서 왔는데 귀한 물건이 없을 리 있겠나." 속문성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서로 마주보며 너털웃음을 쳤다. "대관절 너희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칼을 들이대며 죽일 듯이 위협하는데도 너털웃음을 웃는 작자들을 보고 놀란 듯 두목이 물었다. "이 사람 둘째, 이런 한심한 일이 있나. 변경에 가서 3년 있다 왔다고 이렇게도 사람을 몰라본단 말인가?" 늙은 제갈정이 개탄하였다. "형님, 내버려두시오. 몇 마디 하다 보면 자연 우리가 누군지 알게 될 테니." 속문성의 말이 끝나자 다섯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자 도적 두목이 갑자기 겁을 먹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유운장(留雲庄) 분들이 아니십니까?" 다섯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이들이 틀림없는 유운장의 다섯 형제들임을 깨딜은 두목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나으리들을 몰라보다니,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너희들 다섯 맹수가 어떤 죽을 죄를 저질렀는지 그건 알 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단잠이 들었는데 이렇게 소란을 떨었으니, 그래 무엇으로 우리 형제들의 용서를 바라겠느냐?" 속문성이 빈정대자 다섯 맹수 중의 형인 범이란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눈이 있어도 유운장 다섯 형제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 눈을 뭣에 쓰겠습니까?" 그는 대뜸 제 손가락으로 제 눈알을 후벼 파내더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에 서 있던 네 사람도 일제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놈들, 어서 물러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우린 노독이 풀리지 않아 한잠 푹 자야겠다." 속문성이 빙글거리며 성가시다는 듯 말하자 도적출은 번개처럼 일어나 삽시간에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 제15장 유혹 그 일이 있은 뒤 그들 여섯은 별일 없이 북국 천산(千山) 자락에 있는 큰 장원 앞에 이르렀다. 남방의 장원과 달리 이 큰 장원은 모두 빽빽한 수림에 싸여 있어서 먼데서 보면 지붕 끝만 보일 듯 말 듯했다. 장원의 규모는 실로 대단해서 눈짐작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장원의 원문(圓門)은 족히 오층집 높이는 되고, 맹수를 조각한 추녀가 아주 위풍이 있었다. 문어귀에는 장정 열 명이 줄 지어 서 있었다. 속문성 일행을 발견한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 중 두목으로 보이는 얼굴이 칼날처럼 길쭉한 사나이가 몹시 반기며 달려와 제갈정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아이구! 이게 웬일입니까? 다섯 형제분이 마침내 이렇게 돌아오셨구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다른 사람들과도 뜨겁게 포옹을 하고는 부하들을 향해 큰소리로 명령했다. "대문을 열어라, 어서! 그리고 누구 한 사람은 중당(中堂)에 들어가 후원 정실(靜室) 밖에 계시는 꼬마 사숙(師叔)님께 다섯 형제분이 오셨다고 아뢰어라." 말을 마친 그는 마치 희귀한 보물을 보는 양 구양봉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형님, 이번엔 제대로 물색을 하신 거요? 작년인가, 병호(病虎) 조춘(曹春)이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주인님께서 주야로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냈다고 떠들어댔었어요. 주인님께서는 물론 무척 기뻐하시며 그 사람을 모셔 들이라 했는데, 막상 시험을 해 보니 영 둔자(鈍者)지 뭡니까? 주인님은 기가 막혀 말을 못하셨지요. 이번 사람은 어떻소? 또 주인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아야 할 텐데." "쾌도(快刀),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되네. 우리 다섯 형제가 사람을 잘못 고를 리가 있겠나." 속문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 일행은 쾌도라는 사람을 따라 가벼운 걸음으로 대문을 들어섰다. 대문 안에 들어서자 구양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의 장원은 대문 안에 조벽(照壁 ;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막는 바람벽)이 있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의 조벽은 크기도 엄청난데다가 그 위에 씌어진 주련 또한 기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