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4편 (24/64)
나 구양봉도 유가(儒家) 선비이다. 불선(佛禪)을 논함도 유가 학설을 논함도 우리 송의 대소 유학 선비들의 소임이거늘 감히 나와 겨루려 들다니. 좋다, 어디 한번 해 보자.' 구양봉은 점쟁이에게 읍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자고로 뭔가를 달성하고 말겠다는 욕심에 일심전력 산으로 들어갔다가는 오히려 불상도 못 찾아 참배도 못 드리고 돌아 나오는 헛고생만 하는 수가 많지만, 반대로 무심히 산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정과(正果)를 얻어 진리를 깨닫는 수가 있지요." 뜻밖의 말에 놀란 점쟁이는 잠시 구양봉을 가만 올려다보다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선생께선 무슨 일로 여길 오셨습니까?" "하릴없이 오고 하릴없이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것 아니겠소?" 구양봉은 점쟁이가 불선을 담론하자는 줄로 알고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이 말에는 자기가 형 구양적처럼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중원에 온 것이 아니라 구경삼아 왔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선생의 손을 좀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구양봉이 손을 내밀어 보이자 점쟁이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점괘도 잘 보지만 의술에도 능합니다. 선생의 골격을 보니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 원하신다면 점괘를 보아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무방하다는 생각에 구양봉은 손을 내밀어 맥부터 짚어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한참이나 걸려서야 떨리는 손으로 겨우 구양봉의 맥을 짚어 냈다. 그는 한동안 맥을 짚고 있더니 갑자기 무척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선……선생은 워낙 무공은 모르시는군요." 구양봉은 은근히 놀랐다. '아니, 그러고 보니 꽤나 능한 점쟁이로군. 내가 무공에 익숙치 않다는 걸 진맥 한 번에 알아 맞추다니.' 그러나 구양봉은 자기가 무공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 스스로 비꼬듯 말했다. "내가 무공을 몰라 스스로 화날 때가 많은데 당신은 그 사실에 오히려 기뻐하다니. 그래 이것도 무심과 유심의 구별이란 말이오?" 그러자 점쟁이는 빙긋 웃었다. "선생의 문장이 대단히 능하지 않고서야 이렇듯 무공을 가볍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이 말에 구양봉은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 여기 주련 한 쌍이 있는데 재간이 없어 절반은 놔 두고 있습지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절반을 맞추어 주느라고 하였지만 어느 하나도 소인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놔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한번 도와주시 지 않으시렵니까?" 점쟁이의 청이었다. '그 잘난 두꺼비 주련 말이지?' 구양봉은 속으로 뇌까리다가 엉터리 주련을 맞추어 내어 점쟁이를 놀려먹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양봉은 선뜻 두꺼비 주련을 맞추겠노라 승낙했다. "부탁이 그러하시다면 내가 한번 맞추어 보지요." 구양봉이 웃으며 말하자 점쟁이는 잠시 묵묵히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선뜻 응낙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제 짐작대로 문장이 대단하신 분임에 틀림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호의로 선생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주련이 얼핏 봐선 시시해 보이나 아직까지 자연스럽고도 운치 있게 맞춰 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도 너무 얕잡아 보시진 마십시오." 그러나 구양봉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 같소. 이렇게 짧은 주련을 못 맞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 점쟁이는 비로소 기뻐하는 기색을 뚜렷이 보이며 구양봉을 재촉했다. "이제야 제대로 사람을 만난 것 같습니다. 선생의 글재간을 믿겠습니다. 제발 이 주련을 운치 있게 맞추어 주십시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 주련을 운치 있게 맞추는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소인이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여기에 나와 앉아 바람에 낯가죽이 트고 빗줄기에 온몸을 적시는 고생을 하던 참입니다. 제발 소인의 이 고초를 헤아려 아무쪼록 선생의 천하 문장을 보여 주십시오." 구양봉은 의아한 눈길로 점쟁이를 바라보았다. '이 잘난 주련을 가지고 날마다 여기서 기다려 왔다니? 이 중원에 한다 하는 유생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 주련 하나 맞출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아마 모두들 이 점쟁이를 곯려 주느라고 아무렇게나 해 주다 보니 그리 된 것이겠지. 이까짓 게 무슨 일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구양봉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말씀을 들어 보니 나도 그리 자신이 서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디 한번 맞추어 보지요. 잘 맞추지 못하더라도 웃지는 마십시오. 물론 괜찮게 된 성싶으면 웃음 한 번으로 흘려 보내도 좋겠지만." 그러자 점쟁이는 웃으며 읍을 하고 어서 맞출 것을 권했다. 구양봉은 즉시 상련으로부터 시작하여 단숨에 내리 읊었다. 하늘을 나는 봉황(天上飛鳳凰)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鳳凰乘風鳳凰力) 땅 위를 기는 두꺼비(地上爬蛤 )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蛤 獨行蛤 功). 주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쟁이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서며 구양봉의 옷자락을 텁석 부여잡았다. "멋지네요. 참 멋집니다.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참 멋들어지게 맞추셨습니다!" 구양봉은 이 사람이 그 잘난 주련을 갖고 왜 이다지도 기뻐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점쟁이는 갑자기 탁자 위에 놓았던 죽통을 와락 거머쥐더니 땅바닥에 냅다 던져 버렸다. "이거 경사입니다, 경사예요. 선생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학수고대하던 선생이 과연 오셨구려. 이게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 경사겠습니까……?" 그는 너스레를 떨면서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점치는 탁자까지 일장에 박살을 내고 또 그 왕망이 한을 찬탈하였을 때 찍은 신전 세 닢도 미련 없이 내던져 버렸다. "기쁩니다. 정말 기쁩니다.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과연 멋들어집니다." 점쟁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비 오듯 흘려 댔다. 구양봉은 얼떨떨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자기가 맞춘 주련이 제아무리 신묘하다 해도 전렇게까지 미친 듯이 날뛸 수가 있나 싶었다. 점쟁이의 하는 양을 보면, 오로지 주련을 제대로 맞추는 사람만 나타나면 점치는 일은 그 즉시 집어치울 작정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련을 한 쌍 맞춘 데 불과한데 어찌 그리 기뻐하시오?" 구양봉의 물음에 점쟁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웃음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아심하우(我心何憂)는 천지척척(天之戚戚)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근심과 걱정은 하늘만이 안다는 말이다. 그는 이어서 무엇을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구양봉에게 읍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렇듯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선생과 더불어 어디 가서 술 한잔 했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공이 없이는 녹을 받지 말라 했는데, 초면에 그런 폐를 끼칠 수가 있겠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일견이 여구하다는 말도 있는데 폐라니요? 다 그렇게 해서 가까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점쟁이가 점치는 도구들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간청하다시피 하는 데다가 어느새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와 둘러서는 바람에 구양봉은 점쟁이가 끄는 대로 따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작은 성을 나와 주기 (酒旗)가 펄럭이는 한 주점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주기를 보던 구양봉은 소스라쳐 놀랐다. 주기의 글자는 술 주(酒)자가 아니라 독(毒)자였다. 주점이 분명한데 독자를 써 놓다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술꾼들을 불러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주점 안의 정경이었다. 주점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 몇 명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들 벌겋게 된 눈을 게슴츠레 뜨고 구양봉과 점쟁이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술집 주인이 점쟁이를 보고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둘째 동생이 이 시간에 술 마시러 오는 걸 보니 일이 성공한 모양이네그려?" 그러자 점쟁이는 희색이 만면하여 떠들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성공하다마다요. 3년을 내처 기다리다가 끝내 이렇게 만났단 말이오. 보시오, 이 공자님을 보시오. 이 공자님이 내가 날이면 날마다 풍우를 무릅쓰고 앉아 학수고대하던, 3년이나 기다리던 그분이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양봉에게 쏠렸다. 구양봉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쟁이의 말에 설령 과장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거지로 봐서는 학수고대하였단 말이 거짓은 아닌 성싶었다. 그렇다면 구양봉을 3년이나 기다렸다는 말이 되는데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잘난 두꺼비 주련을 맞출 사람을 3년씩이나 기다릴 만한 까닭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멋진 수염을 가진 한 장한(壯漢)이 구양봉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 당신이 그 주련을 맞췄단 말인가?" 적의를 품은 장한의 태도에 구양봉은 더욱 놀랐다. 기껏해야 주련을 맞춰 준 일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걸까? 구양봉이 어리둥절해서 서 있자 장한이 그에게로 바싹 다가오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형장께서 그렇듯 재간이 좋으시다니 어디 한번 형장의 수단이 어떠한지를 겨뤄 봅시다." 그는 당장 구양봉을 잡아당기려 했다. 구양봉은 이 사내가 왜 이러는가 싶어 얼른 뒤로 물러섰으나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괴상한 동작을 하며 구양봉의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구양봉은 비록 무공이 익숙치 못해도 상대방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술법은 극히 교묘하여 형님의 스승도 이보다 뛰어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큰 화 를 당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기가 올라 나 같은 걸 죽이려고 든다면 그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안 구양봉은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그가 무슨 짓을 하든지 참고 견디는 도리밖에 없다는 배짱이 생겼다. 구양봉이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자 장한은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손에 한껏 힘을 넣었다. 장한에게 붙잡힌 손이 바스러지는 듯 아파 왔으나 구양봉은 비명 소리도 내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앙다물었다. 장한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는 구양봉이 어떤 특출한 무공을 갖고 있어서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손아귀에 점점 힘을 넣다가 어째선지 구양봉이 전혀 내공을 쓰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정말 천하에 없는 고수인지라 엄청난 정력을 갖고 있어서 나 같은 건 상대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너무 주제넘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손에 계속 힘을 넣으면서 보니 상대방은 말없이 비지땀만 흘릴 뿐 특별한 무공은 없는 것 같았다. 장한은 마음이 놓여 구양봉을 골탕먹이기로 작정했다. 구양봉은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애걸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동정을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는 한 방에 장한을 쳐죽이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원통할 뿐이었다. 장한은 자기의 이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술법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반도 안 되는 힘만 써도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구양봉은 그러지 않는 것이 화가 났다. 그는 어떻게든 구양봉이 애걸복걸 무릎을 꿇게 하겠다고 작심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써도 구양봉은 여전했다. 장한은 놀라는 한편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 인간에게 정말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이 분근착골의 술법을 견뎌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왜 묵묵히 참고 견디기만 하면서 손은 쓰지 않는단 말인가. 구양봉이 고초를 겪는 동안 점쟁이는 한쪽 탁자에 앉아 술 한 주전자를 청해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구양봉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하는 것을 보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무공을 지니고 계시면 마음대로 쳐 갈겨 보시오. 저 사람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리다." 구양봉은 그의 괘씸한 태도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원래 네 놈들의 그 두꺼비 주련은 나를 놀려 주려는 것이었구나. 여기로 나를 데리고 온 것도 작당하여 나를 욕보이자는 것이었고. 내가 너희들과 도대체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 짓들이냐?' 그가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는데 장한의 손에 다시금 힘이 가해졌다. 구양봉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더 이상은 아픔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그가 얼음 동굴에 있을 때 형님의 스승이 읊어 주던 시가 생각났다. 속을 찢어 발기는 듯한 아픔을 덜어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입에서 무심코 그 시가 흘러 나왔다. 얼음같이 찬 세상 세상 인심이 이러하도다 세상이 이런 줄 모르고서야 어떻게 세상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랴. 이 시는 당시 구양봉이 얼음 동굴에서 고생하면서 형님의 스승 백면라살에게 추위를 어떻게 하면 견딜 수 있겠는가고 물었을 때 그가 읊어 준 시였다. 지금 구양봉이 그 시를 읊은 것은 생각을 딴 데로 돌려서라도 어떻게든 고통을 견뎌 보자는 행동에 불과했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스라쳐 놀랐다. 장한의 분근착골 술법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법이 구양봉에게는 먹혀 드는 것 같지 않더니 급기야 난데없이 시를 읊어 대지 않는가. 뜻하지 않은 구양봉의 태도에 장한마저 흠칫하여 손을 놓았다. '그렇다. 대도(大道)를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고통 앞에서 이렇듯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일제히 구양봉에 대한 존경심으로 숙연해졌다. "둘째 동생, 정말 바로 모셔 왔네." 술집 주인은 점쟁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구양봉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장한도 웃으며 구양봉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얼떨떨해진 구양봉은 얼결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한은 아예 덜컥 무릎을 꿇더니 머리로 바닥을 찧을 듯 넙죽 절까지 한 뒤 희색이 만면하여 일어서는 게 아닌가. 한동안 주점 안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로 술렁였다. 술집 주인도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소리쳤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자,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사람들인 양 집 소리가 나오자 모두들 어린애들처럼 기뻐 날뛰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자꾸만 주절대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 선생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대호(大號)는 무엇이며 어디 분이십니까?" 점쟁이가 물었다. '반나절이나 실랑이질을 하고서 이제 통성명을 하자고?'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 "서역 사람이오. 이름은 봉으로 구양씨인데 형님과 더불어 강남 구경을 왔소." 물론 형님이 중원을 찾아온 진정한 까닭은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북국 사람들입니다. 모두 형제나 다름없죠.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점쟁이가 자기 패거리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에게 욕을 보이던 장한은 석초수(石楚秀), 점쟁이는 속문성(續文成), 나이 지긋한 노인은 제갈정(諸葛征), 그리고 또 장비같이 험하게 생긴 사나이가 둘, 이렇게 모두 다섯이었다. 구양봉은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건성으로 흘려 들었다. 다섯 명의 이름을 일시에 모두 기억할 수도 없었거니와,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인데 그 이 름을 기억하여 무얼 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이러다 헤어지면 모두들 구름같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기약 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소개가 끝나고 점쟁이 속문성이 말했다. "저희들은 여기서 꼬박 3년이나 기다렸지요. 우리 집 주인님께서 꼭 이 북지(北地) 변경( 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기다리면 꼭 오신다고 말입니다. 과연 저희 주인님의 말씀대로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구양 선생께선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선생께서 응낙하시지 않더라도 저희들은 반드시 선생을 저희 주인님께 모셔 갈 것입니다." 순간 구양봉은 형님 구양적과 모용쟁을 떠올리고 초조해졌다. 설령 동행이 없는 혼자 몸이라 해도 생전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을 따라 그 주인을 만나러 갈 이유가 없었다. 구양봉은 일언지하에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나는 북국에 갈 수가 없소." 속문성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공손하게 대꾸했다. "구양 선생 뜻이 그러시다 해도 저희들은 선생을 북국으로 모셔갈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내가 가지 않겠다는데 방법은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문성은 구양봉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 있습지요. 구양 선생께서 선뜻 응낙하심이 상책인데, 그러면 저희들이 사람을 보내어 구양 선생의 형님에게 알린 뒤에 이곳을 떠나 북국으로 가는 것이고, 중책은 저희들이 하는 수 없이 선생을 협박해서라도 모셔 가는 것인데 그러면 가는 동안 선생님께 자유를 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 하책은, 선생께서 끝까지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신다면 우리는 부득 불 선생의 형님을 죽이고 선생을 마취시켜서라도 북국엘 모셔 가는 것입니다."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다. '이자들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우리 형님 구양적도 나처럼 아무렇게나 주물러도 될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줄 알았다간 큰코 다치지. 우리 형님이 서역 대사막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고수인 줄도 모르고. 하긴 내 형님이 고수라는 걸 네놈들이 알 리가 없지.'. 구양봉은 이자들을 형님한테 데리고 가 혼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들 중에 가장 힘을 쓴다는 놈이 장한이라면 아마도 그의 분근착골 술법이 이자들 중에선 가장 위력을 가진 것일 터였다. 그것은 형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놈들이야 상대나 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선선히 말했다. "정 그렇다면 좋소. 우필 형님한테 먼저 가 봅시다. 형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신들을 따라 북국으로 가겠소." 그러자 모두들 기뻐하며 구양봉을 따라 구양적을 만나러 떠났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객점에서 구양봉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국자감인지 어딘지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도록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때맞춰 구양봉이 성큼 객점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친구들 몇을 데리고 왔습니다." '친구라니? 변경에 친구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 데.' 구양적은 납득이 안 가는 얼굴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뭣 하는 사람들이지?' 불청객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구양적은 은근히 놀랐다. 그들은 모두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무림의 인물들이었다. 맨 앞에 선 속문성도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거니와, 그 뒤에 있는 장한 석초수도 한의 맹장 번쾌(樊 )처럼 생겼고, 깡마른 영감도 무공의 정도를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구양봉은 형을 만나자 자기 일을 말 하기에만 급급했다. "형님, 이 사람들이 날 억지로 북국에 데려가겠다지 뭐요? 뭐,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 있다나요?"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라니요? 뭔데요?" 모용쟁이 입빠르게 물었다. "합의하에 좋게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상책이고, 나를 묶어 억지로 잡아가는 것이 중책이고, 하책은 형님을 죽이고 나를 마취시켜 잡아가는 것이랍니다." 구양적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하책은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죽인다고 했습니다. 구양 선생께서 끝내 우리 소청을 거절할 경우 당신과 이 처녀는 여기서 죽습니다." 속문성이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구양적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래 우리 세 사람이 그렇게도 만만히 죽을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오?" 구양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사장(蛇杖)을 들고 버텨 섰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없으면 우리 동생 석초수가 있고, 석초수가 죽이지 못하면 또 제갈정이 있지요. 우리는 한번 한다 하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들이오." 속문성의 수작에 격노한 구양적은 사장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무겁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장 손을 쓰지 않소?" 구양적은 사장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손등이 눈길과 수평이 되게 했다. "자, 덤벼 보시오." 조용히 상대방의 공격을 기다리는 태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개 점쟁이에 지나지 않던 속문성은 태도를 바꿔 손바닥이 위로 가게 오른손을 펴 내밀었다. 손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보란 듯 주먹을 쥐자 네 손가락 사이에서 큼직큼직한 동전 세 닢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전 복판의 네모난 구멍으로 손가락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큰 동전이었다. 그렇게 큰 동전을 병기로 쓰는 걸로 보아 속문성의 무공이 여간이 아님을 짐 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