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1편 (21/64)
구양적과 모용쟁은 처음엔 흥미있는 듯했지만 구양봉이 갈수록 흥이 나서 장광설을 퍼부어 대고 구경에만 눈이 팔려 있자 이젠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한 술집에 들어갔다. 변량의 이 술집은 천하가 다 아는 집이었다. 왜냐하면 이 집에 얽힌 유명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태조가 출세하기 전에 이 청우루(聽雨樓)에서 심부름꾼으로 있으면서 허드렛일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이 술집 이름은 청우루가 아니라 경화루(京華樓)였다. 어느 날 땅거미 질 무렵, 태조가 일을 마치고 땔나무를 쌓아 둔 광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태조는 일어나 동료들을 깨웠다. "다들 일어나게. 밖에 비가 오네. 비가 온단 말이야." 그때는 이른 봄이라 아직 비가 내린 적이 없는데 첫비가 내린다니 다들 희한하게 여겼다. 그래서 광에서 자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앉아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러다가 창문을 열어 보고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 밝고 별빛이 반짝일 뿐 비라고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단잠이 들었는데 비가 온다고 소리를 쳐서 깨워 놓았으니 누군들 화가 나지 않겠는가? 다들 태조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 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자식을 패 줘라!" 태조 역시 망연자실했다. 자기가 정말 빗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꿈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르면서 달려드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들어들 보게. 정말 비가 오네!" 사람들이 주먹질을 멈추고 다시 창 밖의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달이 여전하고 별들이 반짝이는데 과연 빗소리가 주룩주룩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하도 이상해서 밖으로 달려나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비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그 광에서 잔 사람들은 다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도 똑같은 빗소리를 들었다. 그 이튿날 아침, 이 집 심부름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난밤에 빗소리를 듣던 이야기를 하니 아무도 믿지 않아, 서로 낯을 붉혀가며 말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달이 대낮처럼 밝고 하늘에 별들이 반짝였는데 무슨 난데없는 빗소리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태조와 더불어 미치광이, 천치들이라고 조롱당했다. 진교병란(陳橋兵亂)이 일어나고 태조가 황포를 입고 용상에 오르게 되어서야 문득 깨달았다. 조광윤(趙匡胤)은 진룡천자(眞龍天子)였으니 그가 빗소리를 들었다면 꼭 비가 내리는 법인데 우둔한 범인들이 어찌 그것을 알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술집을 경화루라 부르지 않고 청우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양봉은 전고(典故)들을 익숙히 아는지라 청우루라는 간판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구양적과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이 집에 들어갑시다!" 그가 앞장서서 들어서고 그 뒤로 구양적과 모용쟁이 따라 들어갔다. 이 술집의 2층에 큰 편액이 걸려 있고 거기 청우루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획마다 힘이 있고 기세가 비범한 글씨였다. 구양봉은 이 편액을 놓치지 않았다. "이 글씨는 동피거사(東坡居士)가 쓴 것입니다." 회칠을 한 벽에 먹으로 쓴 현판들이 걸려 있었는데 술 먹으러 온 문인 묵객들이 남겨 놓은 것들이었다. 용(龍)이 날고 봉(鳳)이 춤추는 듯한 활달한 글씨들이었지만, 적지 않은 제자(題字), 제사(題詞)들이 빛이 바랜 것으로 미루어 시일이 상당히 흐른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구양봉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훑어보면서 개탄을 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조소하기도 했다. 그가 중얼거리면서 시구들을 읽었다. 비가 온다 안 온다 떠드는데 비가 온다고 말하니 다들 말이 없구나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있다가 구름으로 천하를 얻었으니 얻을 만한 사람이 얻은 거로다. 구양봉은 다 읊고 나서 품평을 했다. "이 시구도 그저 그렇네, 뭘. 태조가 빗소리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을 뿐이잖아. 아부의 뜻이 담겨 있으니 문품(文品)이 참으로 보잘것없군." 그는 이어 그 아래의 제사를 읽었다. 빗소리, 바람소리 들으면 천시(天時)를 알리라 바람이 분다고 예측할 수도 있다지만 그 누가 바람을 차고 다니리요. 구양봉은 감탄했다. "이 시는 방금 전의 시와는 기품이 다르구나. 청신한 기풍과 오기가 있는 사람이 쓴 것 같아. 그러니 시구가 이처럼 고매하지." 모용쟁은 구양봉이 머리를 흔들면서 시를 읊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 혼자 시구들을 품평하는 것을 보면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막에서 밤중에 달을 보면서 시를 읊조리던 광경을 돌이켜보니 더더욱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 역시 구양봉 못지않은 재녀(才女)였다. 현판에 씌어 있는 시구들을 묵묵히 읽으면서 그녀 역시 속으로 품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예에 뛰어난 구양적은 어려서 양친을 잃고 혼자 살림을 떠맡아 온 바람에 참답게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시구들이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하릴없이 먼저 자리에 앉아 사위를 둘러보았다. 이 술집은 상당히 큰 편에 속하고 분위기가 정갈했다. 식사 시간이 이른 터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들 셋 외에 동남쪽 창문 옆에 놓인 식탁에 비좁게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들은 세 사람이 들어왔을 때도 저마다 자기 술잔을 내려다보며 누구 하나 시선을 주지 않았다. 구양적은 그들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모두 여덟 명인데 저마다 무예가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들 남자 일곱과 여자 한 명이 둘로 갈라져 마주 앉았는데 자리가 비좁았다. 식탁에서는 흔히 손님이 윗자리, 주인은 왼쪽 자리에 앉고 곁다리들은 오른쪽에, 부하들은 맞은편에 앉게 마련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여덟 사람들은 모두 좌우 양편에 몰려 앉아 윗자리와 아랫자리는 빈 채였다. 여덟 중에서 왼쪽의 넷은 모두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좌상인 듯 보이는 사람의 등에는 아홉 개나 되는 작은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다음 사람의 등에는 여덟 개의 작은 주머니들이 달려 있고 차례차례 하나씩 적어져서 마지막 사람의 등에는 여섯 개가 달려 있었다. 이 네 사람들의 옷은 더럽다 못해 썩은 냄새까지 풀풀 풍겼다. 그러나 맞은편의 네 사람은 화려한 능라주단들을 감고 있었다. 양쪽 사람들 모두 덤덤히 앉아 있는 데, 식탁에는 술단지 세 개와 산해진미가 그득하게 놓여 있었다. 구양적이 다시 눈여겨보니 이 사람들은 술잔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술을 마시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식당 안을 한바퀴 빙 돌아본 구양봉이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모용쟁을 상대로 시(詩), 사(辭), 부(賦)를 청산유수처럼 주워섬겼다. 모용쟁도 정신을 차리고 응수했다. 이때 나무계단에서 떨꺽떨꺽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올라왔다. 소리나는 쪽을 무심히 보던 구양봉은 두 사람을 보자 몹시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는 임안 흥안루의 요리사인 소씨 거렁뱅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를 꼬드겨 황궁 어선방에 기어 들어가 함께 음식을 훔쳐먹었던 홍칠이었다. 구양봉은 이 두 사람을 보고 하도 반가워 당장 알은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양적이 그를 잡아당기면서 소리를 치지 못하게 했다.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은 구양봉 쪽은 보지도 않고 곧장 동남쪽 구석에 앉은 여덟 사람을 향하여 걸어갔다. 구양봉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안색이 흐리멍덩했고, 옷차림이 너무나 괴상야릇했기 때문이다. 누더기도 그런 누더기가 없었다. 어깨에 누덕누덕 기운 자리가 적어도 한치 두께는 될 성싶었고 너무 더러워서 원래 무슨 색깔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옷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옷이기도 했다. 다른 것들 은 그만두고라도 오른쪽 가슴에 달린 단추와 금줄, 그리고 대롱거리는 추옥(墜玉)이 보기 드문 진품이었다. 이 옷은 복판에서 바느질을 했는데 왼쪽 절반은 누덕누덕한 넝마였고 오른쪽 절반은 화려하고 눈부셨다. 이런 차림을 하고 나타났으니 다들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데 이런 괴상한 차림을 한 소씨 거렁뱅이는 양미간에 시름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상석에 털썩 주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칠은 졸개들이 앉는 자리에 가서 앉더니 좌우의 여덟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리면서 이쪽저쪽 냄새를 맡다가 소리쳤다. "좋은 술이로구나! 50년 묵은 여아홍(女兒紅)이란 명주야. 내 오늘 화끈하게 먹어 보자!" 말을 마치자 그는 술잔을 잡더니 마치 고래가 물을 삼키듯 연거푸 아홉 잔을 마셔 댔다. 양편에 앉은 사람들은 그가 술 마시는 것을 구경할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실컷 먹었을 때 비단옷을 입은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방주님, 방주님께서 보시건대……." 그의 말을 뚝 끊으며 소씨 거렁뱅이가 큰소리로 떠들어 댔다. "날 방주님이라고 부르지 마. 너희들의 방주 노릇을 하는 게 뭐가 좋아? 너희들은 허구헌 날 싸움질만 하잖아. 금의파(錦衣派)다 오의파(汚衣派)다 서로 작당을 해 가지고서는 싸움판을 벌여대는 통에 난 골치가 아프다. 너희들이 좀 말해 봐라. 내 이 옷 좀 보라구 너희들이 날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알겠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난 옷가지는 하나면 족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때는 이 옷 을, 저때는 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아우성이니 그 비위를 어떻게 맞춰? 너희들 보기에 내가 궁리해 낸 이 방법이 어떠냐? 난 어느 때는 더러운 옷을 입고 어느 때는 비단옷을 입어야 하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지. 이 옷만 입으면 만사 형통이야. 한쪽은 오의파고 다른 한쪽은 금의파니 말이다. 이제 누구도 불만이 없겠지? 다들 어떻게 생각해?" 그는 여덟 사람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고, 내 이 옷에도 나쁜 점이 있지. 이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전부 나를 구경하거든. 마치 무슨 괴물을 보듯이. 정말이지 기분 나빠, 나쁘고 말고……." 소씨 거렁뱅이는 몹시 속상한 듯 연신 한숨을 쉬었다. 금의파 중 나이 든 자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방주님께서 이런 옷차림을 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 노인이 이유를 늘어놓기도 전에 소씨 거렁뱅이가 발끈 성을 냈다. "자네 방금 뭐겠어?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소씨 거렁뱅이가 펄펄 뛰자 노인은 다급하게 변명을 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는 건, 방주님의 옷차림이 법도에 맞지 않아서입니다, 방주님……."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의 옷차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고 하자 더욱 화가 났다. "내가 어째서 자네들의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거지? 조 영감, 이 절반이 비단옷이 아니란 말이야? 이건 비단 중에서도 아주 화사한 거라구. 이 금줄과 추옥 두 개, 그리고 단추들은 모두 진품이야. 내가 은전을 50냥이나 주고 구한 거라구. 자네 대답해 보게. 그래, 내 옷이 금의가 아니란 말인가?" 소씨 거렁뱅이가 다그치자 조 영감은 부득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주님, 그 옷은 금의가 분명합니다. 정말 우리 금의파의 방주답습니다. 한데 ……." 소씨 거렁뱅이가 큰소리로 말을 잡아챘다. "됐네, 됐어. 금의가 옳으면 옳은 거고, 방주다우면 다운 거고……. 잔말 말고 술이나 마시지. 자네 금의파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됐네. 그리고 우(于) 양반, 자네 오의파에서도 별다른 의견은 없겠지?" 그 말에 수염을 세 가닥 길게 기른 사내가 일어섰다. "방주님, 소인도 조 형의 소견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주님의 옷차림은 오의로 보자니 오의 같지 않고 금의로 보자니 금의 같지 않습니다. 우리 개방의 제자들은 방주님께서 왜 이런 옷을 입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방주님께선 달리 온전한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소씨 거렁뱅이는 울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네가 좀 알려 주렴. 대관절 뭣이 온전한 대책이냐? 너희들은 한쪽에서는 헌옷을 입으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비단옷을 입으라고 하니 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이런 옷차림을 하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구." 말을 마친 소씨 거렁뱅이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동안 여덟 사람은 중구난방으로 소씨 거렁뱅이에게 오의를 입으라, 금의(錦衣)를 입으라 서로 권하느라 소란을 피웠다. 구양봉과 구양적, 그리고 모용쟁은 소씨 거렁뱅이가 그들의 말을 귀찮게 여기고 있으며 옷차림을 바꿀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한 가지만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여덟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소씨 거렁뱅이를 기다린 것이 단지 그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가를 토의하기 위해서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무렵 천하의 큰 무리 중에서 가장 큰 무리가 거지 무리였다. 이 거지 무리를 개방이라고 하는데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한 파는 오의파(汚衣派)고 다른 한 파는 금의파(錦衣派)였다. 오의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내가 거지인 이상 먹는 것은 동냥해 온 밥이요, 입는 옷은 남들이 입다가 던진 헌옷이며, 사는 집은 오두막이다. 이렇지 않고서야 어찌 거지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금의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지란 원래 서러운지라 잘 먹지도 못하고 좋은 집에서 자지도 못하므로 옷이라도 좋은 걸 입고 다녀야 한다. 속담에 사람은 옷이 날개라고 했는데, 옷을 잘 입으면 남들도 우러러보지 않는가?" 하지만 오의파들은 이런 주장을 비웃었다. "거지가 옷만 잘 입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거지는 어디를 가나 동냥해야 배를 채울 수 있고 아무 데나 누우면 집인데 좋은 옷을 입으면 어떻게 하는가? 아무 데나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으니 체면만 차리다가는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수밖에 없다." 두 파는 논쟁을 벌인 지가 오래 되었지만 어느 쪽도 상대방을 설복시키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 법도를 정하기로 했다. 즉 방주는 자기가 아무 쪽에도 기울지 않고 금의파와 오의파를 똑같이 대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동안은 금의를 입고 한동안은 오의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이런 시끄러움을 견뎌 낼 사람이 아닌데다가 방주가 된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터라 이런 얼토당토않은 법도를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앉은 사람들에게 역정을 냈다. "난 너희들의 방주가 되고 싶지 않다. 난 가겠어, 가겠단 말야. 너희들이 하고픈 대로 해 보라구……."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너희들이 아예 새 방주를 추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난 이런 잔소리를 기억하지 못해. 더러운 옷이니 깨끗한 옷이니, 이따위 것들은 기억하지 못한다구." 그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여덟 사람들이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나란히 서서 소씨 거렁뱅이를 막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벌컥 화를 냈다. "아이쿠! 얘들이 날 죽이려 드는구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땅바닥으로 몸을 굴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여덟 명이 일제히 막아 서며 조여드는 통에 그만 뒷걸음질을 쳤다. 소씨 거렁뱅이는 몸을 훌쩍 솟구치더니 다시 자기 자리에 날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왜들 서서 설치는 거냐? 점잖게 앉아서 술이나 먹지 않고?" 그는 홍칠을 건너다보았다. 홍칠이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걸 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넌 뭐가 좋아서 히죽거리는 거야? 네가 한번 방주 노릇을 해 봐라. 머리가 아파서 죽지 않으면 다행일걸!" 소씨 거렁뱅이는 말을 마치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양적은 이 개방의 두목인 소씨 거렁뱅이의 무예가 자기 스승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땅바닥에서 몸을 굴리는 솜씨는 그야말로 귀신 같았다. 그는 부하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자기 자리에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이미 이 청우루를 빠져 나갔을 것인데, 그때는 어디 가서 그의 종적을 찾는단 말인가? 구양적은 속으로 크게 탄복했다. 한창 술상에서 권커니 자커니 술잔이 오고 가는데 아래에서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철장방(鐵掌幇) 상관위 방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윽고 계단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아홉 사람이 올라왔다. 웃고 떠드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층에 손님이 두 무리나 있는 것을 보았다. 구양적 네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꺼리지 않는 눈치였으나, 자기들과 맞은편에 앉아있는 동남쪽 창문가의 식탁을 건너다보고는 유쾌한 기색이 흐려졌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방주님, 자리를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복판에 선 사람이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들이 여기 앉으면 돼." 먼저 말을 꺼냈던 사람이 공손히 대답한 뒤 구양적네가 앉은 곳에서 의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걸 소맷자락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은 후 자기네 방주에게 앉도록 권하고, 주인을 불러 술과 안주를 청했다. 주인이 물러가자 아홉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술과 안주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구양적은 이 아홉 사람들 중 적어도 일곱 사람은 무예가 뛰어나다고 짐작했다. 그들 중 가장 억센 기상을 지닌 사내가 상관위 방주로 마흔 고개를 넘은 것 같았다. 무쇠로 부어 만든 것 같은 시커먼 손만 보아서도 출중한 장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위층에 올라올 때만 해도 웃고 떠들어댔지만, 식탁에 모여 앉은 거지 무리를 발견한 뒤로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 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방주가 한마디했다. "빨리 먹고 떠나자." 그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안주만 오기를 기다렸다. 안주가 오자 다들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들 방주만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가 먹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술집 주인이 술단지를 하나 가져다 그의 앞에 놓았다. 이 상관위 방주란 사내는 술단지 뚜껑을 열고 코로 냄새를 맡더니 냉수를 퍼마시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문어귀에서 작은 아이가 달려 들어왔다. 한눈에 거지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시커먼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상관위 방주 앞을 지나쳤다. 그곳을 지나 거지 무리가 모여 앉은 식탁으로 달려가 먹을 것을 구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다가 그만 술단지를 잡은 방주의 팔을 툭 쳤다. 술단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거지애는 겁이 나서 비명을 질렀다. 술단지가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나려는 순간, 방주가 히죽 웃으면서 발끝으로 술단지를 차 올렸다. 그러자 술단지가 솟구쳐 올라 다시 머리 위쪽으로 날아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는 대뜸 두 손을 뻗어 술단지를 받았다. 상관 방주 옆에 있던 사내가 거지 아이를 냉큼 붙잡았다. "네 애비 상이라도 당했느냐?" 거지 아이는 말은 못하고 질질 울기만 하더니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방주가 말은 안 하지만 자기가 거지 아이를 한바탕 때려 줄 것을 바란다고 여겼는지, 일어서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놈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도 말썽을 부릴 거야!" 그 사내는 주먹을 들어 거지 아이를 때리려 했다. 그때 갑자기 상관위 방주가 거지 아이의 옷자락을 와락 낚아챘다. 거지 아이의 너덜너덜한 넝마가 뭉청 뜯어져 나갔다. 거지 아이는 엉엉 울면서 대들었다. "내 옷을 내놔요, 옷을 내놔요!" 그 사내가 소리를 꽥 질렀다. "듣기 싫어! 네가 우리 방주님의 술을 쏟았지만 널더러 술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까짓 넝마조각이야 찢어지면 어떠냐? 어디 한번 된매를 맞아 볼래?" 사내가 매를 들려는데 상관위 방주가 말리더니, 몸을 낮추면서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친절한 목소리였다. 거지 아이는 방주가 몸을 낮추고 자기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자 울음을 그쳤다. 거지 아이는 입속말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구천인( 千 )이라고 해요." 이때 옆에 있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훌륭한 이름이로구나! 천인이라, 그럼 네 키가 아주 크겠구나, 허허허!" 거지 아이는 정색하여 대꾸했다. "내 키는 별로 안 커요. 난 두 번째로 크지요. 내 형은 구천장( 千丈)인데 나보다 더 커요. 내 여동생은 구천척( 千尺)인데 나보다 키가 작구요." 구양적은 한쪽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만일 그 사내가 정말로 거지 아이를 때렸다면 구양적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구양적은 물론이고 또 다른 쪽에 앉아서 이 장면을 노려보고 있던 소씨 거렁뱅이 역시 잠자코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쥐고 있는 젓가락이 날기만 하면 그 사내의 팔뚝에 정확히 꽂혔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상관위 방주가 갑자기 상냥한 기 색으로 거지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바람에 소씨 거렁뱅이와 구양적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