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0편 (20/64)

2026-09-24 21:22:51 조회 25
이 깊고 시커먼 동굴에 잘못 뛰어들다간 자칫 다리가 부러지거나 발목이 삘 것이 아닌가? 모용쟁은 잔뜩 겁먹은 기색으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둘째 도련님, 전……." 구양봉도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사내가 여자 앞에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는지라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내가 먼저 뛰어들겠소. 낭자가 뛰어들면 내가 밑에서 받지요." 그러자 모용쟁이 앵돌아지며 대꾸했다. "도련님이 나를 받는다구요? 그 재주에 어떻게요?" 그녀는 구양봉이 자기를 받으려다 둘이 부둥켜안고 나동그라질 광경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달빛 아래서 모용쟁의 얼굴을 훔쳐본 구양봉은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모용 낭자는 참으로 이상한 여자야. 동굴 속에 뛰어내리기가 무섭다면서 수줍음은 왜 타지? 여자들은 원래 다 이런가?' 그래서 그는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그러면 낭자가 먼저 뛰어내려요." 모용쟁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구양봉은 형의 스승이 기다리다 짜증을 낼까봐 속으로 은근히 근심스러웠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니, 그럼 내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구양봉은 동굴로 훌쩍 뛰어내렸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봉은 시커먼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모용쟁은 더욱 겁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내가 먼저 뛰어내려야 해요. 도련님이 없으면 나 혼자 너무 무서워요." 그러나 구양봉은 이미 뛰어내린 뒤였으므로 대꾸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사위를 둘러보았다. 우중충한 산은 아무런 기척도 없고, 발 아래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시커먼 동굴만 보였다.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귓전에 바람이 쌩쌩 일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돌멩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녀는 누가 자기 몸을 밀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미끄러운 밑바닥은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는 성싶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계속 미끄러지다가 얼음벽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구양봉의 목소리만 들려 왔다. "모용 낭자, 내려왔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구양봉의 말에는 언제나 자기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어려 있음을 새삼스레 느낀 모용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대답을 하려는데 웬 손이 그녀의 몸뚱이를 더듬더니 앞가슴까지 만지려 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구양봉은 질겁하여 손을 움츠렸다. "모용 낭자, 왜 그래요?" 모용쟁이 생각해 보니 멋쩍은 일이라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아무 일도 아니에요." 동굴 속은 어두워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희미한 빛을 빌어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길다란 얼음길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길로는 한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옆과 앞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 걸어서야 그들은 커다란 얼음 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얼음 덩이는 아주 투명하고 굉장히 컸다. 그 높다란 얼음 덩이 위에 백면라살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제12장 중원에 가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이 얼음 동굴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떨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그들은 몸을 녹일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그 위에 발을 딛고 서서 몸을 녹일 수 있겠지 생각했으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얼음 벽과 얼음 바닥뿐 맨땅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추운데다가 허기까지 져서 뱃속에서 연신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서로 멍청하게 건너다볼 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백면라살을 찾아가 사정해 보기로 했다. 구양봉은 아무런 무예도 몸에 익히지 못했고 살집도 적은 사내였으므로 모용쟁보다도 더 부들부들 떨면서 사정했다. "선배님, 저희들이 몸을 녹일 만한 곳이 있을까요?" 그는 이빨을 딱딱거리면서 겨우 말을 했다. 모용쟁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녀 역시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얼어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는 백면라살을 향해 읍을 하고는 애걸했다. "선배님께서는 무예가 뛰어나시니 이 추운 동굴 안에서도 괜찮으시지만 저와 구양 도련님은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을 살려 주십시오." 백면라살은 개탄하듯 시 한 수를 읊었다. 얼음같이 찬 세상 세상 인심이 이러하도다 세상이 이런 줄 모르고서야 어떻게 세상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랴. 그녀의 대답에 구양봉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보아하니 이분은 인간들은 누구나 춥고 더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 주려는 것 같아. 부득이한 사정이 없다면 이 백발 여인이 어찌 이 어두운 얼음 동굴 속에서 시달림을 겪고 있겠는가? 인생을 살면서 천하의 좋은 일을 다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고초를 겪는 것도 낙으로 생각하면서 견뎌 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추위도 견뎌 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구양봉은 어쩐지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차가운 얼음 동굴에서도 뜨거운 여름철이라고 생각한다면 추위가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리라. 이리하여 그는 무예 연마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견뎌 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쟁은 구양봉만큼 생각이 깊지 못했으므로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할망구가 미쳤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 얼음 동굴에서 살 수가 있어?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 얼어 죽겠다!' 모용쟁은 크게 소리질렀다. "얼어 죽겠어요! 얼어 죽는단 말이에요!" 그러나 백면라살은 모용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얼음 덩이에서 뛰어내려 구양봉을 움켜잡고는 훌쩍 몸을 날려 다시 얼음 덩이 위에 올라앉았다. 구양봉은 이 얼음 덩이에 몸이 닿자 몸이 더욱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선배님, 이 얼음 덩이는 왜 다른 얼음보다 훨씬 차가운가요?" 백면라살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은 천 년 묵은 현빙(玄 )이다. 그러니 다른 것들보다 훨씬 차갑지." 구양봉은 몸이 더욱 떨려 왔다. 구양봉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모용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둘은 함께 이 얼음 동굴 안에 있는데 왜 저 사람만 저토록 견디기 어려워하는 걸까? 저 투명한 얼음 덩이에 이상한 점이 있는 걸까?' 그녀는 손으로 그 얼음 덩이를 만져 보았다. 대뜸 찬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구양봉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뛰어내리려 하는데 백면라살이 갑자기 물었다. "적의 말에 의하면 자넨 책 읽기를 그만두고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협객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면서? 하지만 무예를 몸에 익히기란 엄청나게 고통스럽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 현빙은 뼈가 저리도록 차갑지만 무예를 익히는 사람에게는 보배인 거야. 이 현빙 위에서 두 시간만 버터 내면 넌 무예를 익히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구양봉은 할 수 없이 한기를 견디면서 백면라살 곁에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한기가 미려혈(尾閭穴)을 뚫고 들어와 척추와 등뼈를 거쳐 뇌리에까지 뻗쳤고, 이어 오장에까지 흩어지면서 졸지에 얼음 사람이 되는 듯했다. 그는 자기의 무능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무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따뜻한 기운을 내정(內庭)에 흘러들게 하고 내력으로 자기의 심맥을 보호할 것이었 다. 이런 방법을 모르면 자칫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얼음 덩이 위에서 두 시간을 버텨 보기로 했다. 모용쟁은 구양봉이 현빙 위에 앉아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미쳤어요? 이건 현빙이에요. 아무 재주도 없는 주제에! 두 시간이 아니라 반 시간도 되기 전에 송장이 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동굴 안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그러나 구양봉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구양봉의 얼굴색은 푸르다 못해 하얘졌고 다시 시퍼래졌다. 입술에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아무 감각이 없어졌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자그마한 쾌감이 남아 있었다. '누가 나한테 무예를 못 배운다고 하는가? 보통 사람이 이 현빙위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버텨 낼 수 있겠어? 이 구양봉은 버텨냈다! 남들이 못 버텨도 나는 버텨 냈어!' 그는 갑자기 머리가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동굴 안이 전과 달랐다. 횃불이 얼음벽 위에서 툭탁거리며 타오르고 있었고, 눈앞에선 형 구양적과 모용 낭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가슴속에서 열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사지의 뼈마디들도 느긋하고 편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등허리로부터 따끔따끔한 뜨거움을 느꼈다. 그가 온몸이 나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구양적이 말했다. "봉아, 사부님 덕분에 네가 살아났다." 구양봉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한마디 말도 못했다. 이때 백면라살이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적아, 내가 보니 네 동생은 뜻이 높고 생긴 것도 굳세구나. 네 동생이 무예를 배우면 장래에 무술이 너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 말에 구양봉은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백면라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저는 무예를 배우고 싶습니다. 제 소원을 풀어 주십시오!" 구양봉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그녀가 형님의 스승이자 자기의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백면라살이 왜 20여년이나 얼음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형이 배운 독장(毒杖) 무예가 모두 악랄하고 음험하며 사악한 사파(邪派)의 무예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면라살은 빙그레 웃으면서 구양적을 바라보았다. "적아, 내가 네 아우를 제자로 받아야 하겠느냐?" 구양봉은 형을 보면서 속으로 기뻐했다. 형의 스승이 자기를 거절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구양봉은 진작부터 형이 자기의 마음을 알고 있으므로 흔쾌히 허락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승의 이 물음에 구양적은 깜짝 놀라면서 바닥에 꿇어 엎드려 큰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우리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은 아우뿐입니다. 저는 사부님과 함께 사부님의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고 우리 파에 가담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사부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빕니다." 구양봉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스승한테 원수가 있다면 찾아서 복수를 하면 되는 것이지 우리 가문의 일은 왜 곁들이며, 삽시에 얼굴 색이 변할 것은 또 무언가? 그리고 내가 형의 스승한테서 무예를 배우는 게 어째서 구양씨 가문이 대를 잇는 데 지장이 된다는 말인가? 그래, 이 백발 여인의 제자로 들어가면 절이나 암자에 들어가는 것처럼 한평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자식을 낳지 못한단 말인가? 구양봉은 형이 자기에게 무슨 말이든 하겠지 생각했으나, 형은 자기 스승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구양봉 쪽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은 출중한 무예로 서역의 일인자가 되어 독사장을 손에 쥐고 천하를 종횡무진하지만, 난 어떤 꼴인가? 사막에서 계집애에게 수모를 당하고 백타산장에서는 남들의 노리갯감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남들로부터 수모를 당하니 어찌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분이 날 가르치지 않으면 내가 다른 스승을 찾아가서 배우지도 못할 등신인 줄 아는 모양이지?' 그러나 구양봉은 마음이 괴로웠다. 형의 스승에게서 무예를 배울 수 없는데 다른 스승을 찾아서 배운다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구양봉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풀이 죽은 채 현빙에서 내려와 모용쟁과 나란히 섰다. 백면라살한테 무예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니 현빙 위에서 더 버틸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자기가 현빙위에 주저앉았을 때 모용쟁이 자기를 향해 큰소리를 지르면서 말리던 광경을 머리에 떠올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모용쟁의 말에는 자기에 대한 근심이 담뿍 어려있었던 것이다. 그는 흐뭇 해져서 모용쟁을 바라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백면라살은 현빙 위에 앉아 낮은 소리로 구양적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구양적은 몸을 훌쩍 날려 얼음 위에 올라가 스승 앞에 꿇어 엎드렸다. "적아, 네가 말하던 중원의 무공 비적인 《구음진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그 책을 꼭 얻어야겠다. 우리의 원수는 무예가 아주 높으니 우리 사제 둘의 힘으로는 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구나. 더구나 그자도 10여 년 동안 강호에는 발길을 끊었으니 무예가 더욱 높아졌을 거다. 내 몸에 병만 없어도 그자와 한번 겨루어 보겠는데 숙환이라 당장 나아질 수도 없으니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 구나. 네가 중원에 가서 전진교의 교주인 왕중양을 찾아 그 경서를 빼앗아 오도록 하거라. 그러면 우리의 원수를 갚을 가망이 있을 것 같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지도 모르지." 구양적은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았다. 백면라살 수라아는 모용쟁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낭자는 강남 사람이니 사막의 바람과 추위를 겪어 보지 못했겠지? 그러니 적을 따라 강남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가는 길에 낭자를 보호할 수 있으니 잘됐군." 모용쟁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백면라살이 자기를 강남으로 돌려보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강남은 그녀가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기 혼자 대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구양적과 동행하게 되었으니 백타산장 놈들이 달려들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예를 올렸다. "선배님께서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양봉은 영리한 사람이었으므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형님은 강남에 가는 길에 모용 낭자까지 동행하게 되었으니, 산천 구경도 실컷 하고 둘이 웃고 떠들면 얼마나 재미날까? 나만 이 얼음 동굴 속에 남아 매일 저 어른을 모시고 있으라니, 이건 말도 안돼!' 그는 억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백타산장의 무리들이 찾아와서 괴롭힐까봐 걱정되었고, 또 이 쌀쌀맞은 백면라살을 매일 상대할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큰소리로 청을 했다. "형님은 중원에 가는 길도 잘 모르시니 내가 길잡이로 나서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구양적이 거절했다. "넌 여기서 기다려라. 길어야 한 일년이고 짧으면 반년이면 돌아올 게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이 얼음 동굴 속에서 반나절 지내는 것이 그에게는 마치 한평생을 사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데 일년이고 반년이라니……. 그래서 그는 얼른 둘러댔다. "중원에 가시더라도 몇 사람들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행길에다 아무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형님을 이상하게 여길 거고 또 적으로 생각할 것이니 시끄러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면라살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이 녀석이 제 형보다 백 배나 영리하구나. 이 두 녀석은 친형제간이니 서로 힘을 합하기 좋을 거야. 중원 무림의 인물들과 교제를 할 때 구양봉의 꾀에다 적의 무예를 합치면 그 《구음진경》을 쉽게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궁리한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구양봉에게 물었다. "자넨 중원의 인물들을 알고 있나?" 중원에 가고 싶은 구양봉은 마냥 겸손할 수가 없었다. "제가 지난번에 임안에 갔을 때 몇몇 인물들을 사귀었습니다. 고담을 하는 가게에서 동해 도화도의 주인인 황약사란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분은 무예가 특이하여 중원의 인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속이라는 중도 만났는데 무예가 황약사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그분의 재주는 손가락에 있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적과 싸우는데 대단히 비범했지요. 제가 볼 때 그분은 풍채가 선풍도 골(仙風道骨)로 빼어날 뿐만 아니라 수양도 일류였습니다. 그분은 운남 대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구양봉이 일속이라는 중의 이야기를 꺼내자 백면라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녀의 은발이 갑자기 위로 약간 솟구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다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뭇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네가 말하는 그 일속이라는 중이 운남 대리 사람이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손가락을 잘 쓴다고." 구양봉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백면라살이 계속 물었다. "그 사람 나이는 얼마나 돼 보이고 생김새는 어떻던가?" 구양봉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답을 했다. "수척한 얼굴에 골격이 반듯했어요. 나이는 3, 40정도 돼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보아 그 동해 도화도 주인인 황 약사보다 횔씬 흠모할 만한 분이었습니다." 그 순간 백면라살의 백발이 팽팽해지더니 마치 화살처럼 뒤로 흩날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해골 같은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녀는 깔깔거리면서 괴상한 웃음을 웃더니 새처럼 날아와 두 손으로 구양봉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급박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처참한 느낌이 있었다. "날 보게, 날 보란 말이야. 자네 눈엔 내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나?" 구양봉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백면라살이 왜 자기 나이를 알아 맞추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백면라살과 일속이라는 중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는 운남에 있고 하나는 사막의 북변에 있는데 무슨 인연으로 안단 말인가? 그러나 백면라살의 반응으로 보아 필시 무슨 연고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백면라살이 또 물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손가락을 쓰지 않던가?" 말을 마친 그녀는 자세를 고치더니 두 손을 쭉 내미는 것이었다. 그 모양은 부처님이 손가락으로 꽃송이를 집는 것 같기도 했고, 소녀가 손가락으로 턱을 고이고 상념에 잠긴 것 같기도 했는데, 얼굴 표정은 어딘지 짓궂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여인의 기색은 금방 장중하고 엄숙하게 변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쓰는 거동은 산처럼 무게가 있었고, 대가의 솜씨를 역력히 드러냈다. 닭이 모이 를 쪼듯 쪼기도 하고 송곳으로 물건을 찌르듯 찌르기도 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변화무쌍했다. 그녀는 실북 나르듯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구양봉에게 물었다. "그 중이 이렇게 손가락을 쓰지 않던가?" 정신이 팔려 바라보던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백면라살의 지법(指法)이 일속이라는 중이 쓰던 지법과 똑같았던 것이다. 구양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면라살 수라아는 머리를 숙이고 상념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중이 됐다고! 그 사람이 중이 됐어……." 옆에서 듣는 사람으로서는 미워서 그러는지 유감스러워서 그러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구양적은 깨닫는 바가 있어서 마음이 밝아졌으나 한편으로는 머리칼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면라살의 원수는 다름아닌 그 일속이라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백면라살이 10여 년 간 한시도 잊지 않은 사람은 중이 아니라 대리 황실 단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지금 그 도련님은 없어지고 일속이라는 법명을 가진 중이 남았다. 그 원수가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니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상대방은 이미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불산(佛山)에 들어갔는데 기어코 찾아서 복수를 한다는 것은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면라살 수라아는 머리를 젖히고 소리쳤다. "단 도령, 내 말을 듣느냐? 네 놈이 어찌하여 절에 들어가 밝은 등잔불 밑에서 불공이나 드리는 중이 되었단 말이냐?" 그녀의 움푹 꺼진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구양봉은 백면라살과 일속이라는 중 사이에 무슨 증오와 사랑이 얽혀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 후에 백면라살이 입을 열었다. "적아, 넌 동생과 함께 중원에 다녀오너라. 함께 다니면 서로 의지가 되겠지." 구양적은 기뻐하면서 사부의 분부를 따르기로 했다. 얼음 동굴에서 나온 세 사람은 대사막을 지나 석림을 뚫고 막북(莫北)을 거쳐 중원에 들어섰다. 이날 그들은 변량( 梁)에 닿았다. 구양적 일행이 걸음을 재촉하다 쉬다 하며 이윽고 도착한 북쪽 지방의 변량은 북지의 큰 도회지로 가는 곳마다 온통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리저리 뚫린 크고 작은 거리들에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길 양옆에는 가게와 점포들이 즐비하여 그 번화함이 강남에 못지않았다. 번화한 거리에 들어서자 구양봉은 딴사람이 된 듯했다. 그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제 흥에 겨워 중얼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형님과 모용쟁이 지나가면서 물으면 그는 더욱 흥이 나서 저 비둘기장 같은 작은 집들엔 황제가 시험을 거쳐 뽑은 선비들이 머문다느니, 저 편액에 씌어 있는 글자들은 당대 문호들의 친필이라느니 하면서 구구한 설 명을 붙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