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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9편 (19/64)

2026-09-24 21:22:51 조회 25
난쟁이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침묵을 깨고 큰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냉큼 나서지 못할까!" 한동안 정적이 지속되다가 좀 전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네가 나서라고 호령하지만 난 나설 수 없구나! 난 너무 늙어서 걸음걸이가 불편하거든. 게다가 내 몸은 불구이니 아마 너희들이 크게 실망할 거다!" 난쟁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쌍검 옥문이 소리를 질렀다. "잔소리 말고 냉큼 나오너라!" 그 사람은 탄식했다. "쌍검을 쥐었구나. 예쁘장한 계집애가 애석하게도 가슴속에 살기를 가득 담고 있구나. 네 년은 오늘 두 볼에 칼을 받을 것이다!" 난쟁이가 손짓을 하자 다들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임일천도 어느덧 표정이 굳어져 숙연한 자세로 말했다. "선배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나와서 말씀하십시오." 임일천의 무예로도 이 사람이 어디에 몸을 감추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서워진 임일천은 저도 모르게 공손해졌던 것이다. 그 사람이 탄식했다. "일천아, 네가 내 제자를 대단찮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다. 네가 대단한 독공을 몸에 익혔으므로 독 있는 몽둥이도 널 해치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또 72가지 교장침법(巧長針法)을 연마했다고 천하의 무림을 우습게 여긴다만, 사람이 너무 우쭐대면 안 되느니라." 난쟁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허공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애들을 놓아주어라!" 난쟁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대꾸했다. "좋다. 구양적, 너만 가라." 구양적이 말했다. "내 아우와 모용 낭자를 데리고 가겠다." 난쟁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네 아우 구양봉은 데려가도 좋아. 하지만 모용 낭자는 내 보배야. 네가 뭔데 내 것을 가져가겠다는 거냐?" 이때 그 사람이 탄식하며 말했다. "적아, 넌 네 앞만 챙기면 되느니라. 남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 구양적은 흠칫 놀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부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구양적은 몸을 돌려 구양봉에게 다가가 해혈(解穴)시킨 다음 나지막하게 말했다. "봉아, 어서 돌아가자." 구양적은 차마 모용쟁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자 구양봉이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우리와 함께 갑시다." 모용쟁은 눈물이 고인 두 눈으로 말없이 구양봉을 바라보기만 했다. 구양적은 구양봉을 끌며 다급히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버티고 서서 모용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용 낭자, 함께 갑시다. 낭자가 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만 떠날 수 있겠소?" 구양적은 동생이 막무가내로 버티는 바람에 그와 함께 멈춰 서서 마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다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적아, 네 말대로 네 동생은 정말 정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로구나. 소원이라면 그 앨 여기에 남겨 두어라. 저 난쟁이가 저 앨 상전으로 환대할 리야 없겠지만……. 적아, 우린 가자!" 구양적이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사부님, 모용 낭자를 동생과 함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왜 허락을 안 하십니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난쟁이 임일천은 불현듯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구양적, 날 괴롭히지 말아라!" 구양적은 임일천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그 사람은 결심을 내렸는지 천천히 말했다. "난 20여 년 동안이나 세상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일천아, 날 괴롭히지 말아라!" 임일천이 악에 받쳐 도전했다. "당신이 모용 낭자를 데려가면 내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마당에서 1백 명이 넘는 임일천의 졸개들이 병장기를 손에 쥐고 구양 형제 등 네 사람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난쟁이가 명령을 내리기만 기다렸다. 그야말로 처절한 혈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이때 그 사람이 개탄했다. "난 손을 대기가 싫구나. 일천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쟁이가 냉소했다. "당신이 중원의 협객 여문생이오? 아니면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오? 그도 아니면 천하에 소문난 거지 무리의 소씨 거렁뱅이요? 만일 이 세 분 중 한 분이라면 당신을 두려워하겠지만, 아니라면 당신이 오히려 나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오." 그 사람이 개탄했다. "오랜 세월 세상을 멀리했더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구나. 시시껄렁한 놈들이 우쭐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 인심이 옛날과 다르구나, 정말 달라." 그리고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일천아, 내가 알려 주마. 내 이름은 백면라살이다. 그 계집애를 놓아주어라. 그럼 네 목숨을 살려 주마." 임일천은 미친놈처럼 모용쟁의 앞뒤를 뱅뱅 돌면서 자기 귀를 비틀고 볼을 꼬집기도 하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안 돼. 천왕탑도, 이용주(二龍珠)도, 당신이 탐내는 건 다 가져갈 수 있으나 이것만은 안 된단 말이야. 안 되고말고……." 임일천은 나귀가 연자방아를 돌리듯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자그마한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백면라살이든 왕중양이든 소씨든 무슨 상관이냐? 난 천하를 다 돌아다녀서 겨우 저 계집앨 찾아냈다. 사람들은 천하의 계집들이 다 미녀라고 하지만 미인이 어디 그리 흔하더냐? 잔말 말고 냉큼 나서라. 오늘 너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나지막하게 웃는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제상에 계집에 미친 사내들이 많다고 하더라만, 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아무래도 널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순간 담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너진 담장쪽에서 유령의 모습이 표연히 다가왔다. 유령은 여자의 형상이었다. 그녀 뒤에는 그림자가 없었고 발 밑에는 소리가 없었으며 다가오는 쪽에서는 바람도, 냄새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구양 형제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 윤곽을 볼 수 없도록 길다란 은발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흰 비단 같은 은발이 발처럼 드리워져 도 저히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횐 손을 뻗자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손과 뾰족한 손가락 끝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손가락으로 구양봉을 가리키며 칭찬했다. "훌륭하다, 참 기특해! 적의 아우답다." 그녀는 깔깔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돌려 모용쟁을 훑어보았다. "네 이름은 뭐냐?" 모용쟁은 난쟁이에게 아혈을 찔렸으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백면라살은 성을 발칵 냈다. "날 업신여기는 거냐? 왜 대답을 안 하느냐?" 모용쟁은 조바심이 났다. 이 여인이 구양적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던 그녀는 구양적이 이 여인에게 사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더욱 놀랐다. 이 여인이 구양적의 스승이라면 무예가 대단하리라 생각하고 그녀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 몸은 이제 아무런 탈이 없느니라. 왜 입을 열지 않고 일어서지 않느냐?" 모용쟁은 반신반의하면서 몸을 일으키고 입을 열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몸이 전대로 회복되어 있지 않은가?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귀신 같은 재주와 유령 같은 몰골을 지닌 이 여인이 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모용쟁의 혈을 풀어 주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경탄과 함께 공포를 감추지 못했다. 난쟁이 임일천도 난처했다. 명색이 백타산장의 주인인데 도전을 했다가 물러선다면 부하들의 웃음을 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말했다. "백면라살, 대관절 어쩔 셈이냐?" 그런데 은발의 여인은 긴 머리를 드리우고 마당 안을 천천히 거닐면서 시구를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 옛날 그대와 작별할 때 미혼의 총각이었는데 오늘 만나 보니 아들딸이 수두룩하구려 아들딸들이 제 아비 손 흔들며 내가 어디서 오는가 묻는구려. 창칼을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는 자들이 어찌 이 여인의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옛정을 알 수 있으며,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구양봉은 이 여인이 읊조린 당시(唐詩)가 바로 자기의 심중을 고백하고 옛정을 토로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칼과 창이 번뜩이는 전란 속에서 천군만마를 개미떼로 여기고 채찍을 휘두르는 무사와 협객들도 때때로 장쾌한 시상 이 떠오르고 만단정회가 솟구치는 법이다. 구양봉은 불현듯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선비가 될지라도 규염객(?髥客)이나 이정(李靖) 같은 호협한 사람이 되어야지, 일개 문약한 글방 도련님이 되어 남들로부터 수모나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바로 형의 스승님처럼 세상을 멀리하여 세속의 티끌에 젖지 않아야 비로소 문무기재(文武奇才)를 갖출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순간 구양봉의 마음속은 형의 스승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 찼다. 여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녀의 앞뒤와 좌우에는 칼과 그 외의 무기가 숲을 이루었지만 누구도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여인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앉아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손을 펴보게 되었구나." 여인은 돌연 임일천의 무리들을 향해 번개 같은 권법으로 맹공격을 가했다. 여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칼과 창이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사람들은 썩은 나무등걸처럼 거꾸러졌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걸어 나가는 풍경이었다. 난쟁이 임일천은 여인이 종횡무진하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 여자를 죽여랏!" 사막의 사걸이 일제히 여인을 에워쌌다. 백타산장 놈들이 일제히 사부를 공격하는 것을 본 구양적은 독사 몽둥이를 들고 덮치려 했다. 이때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적아, 내가 손을 쓰고 있는 걸 보지 못하느냐? 네 스승이 이 생쥐 같은 놈들한테 질 것 같느냐?" 말을 마치자 삽시에 두 주먹이 우박이 내리치듯 했고 몽둥이가 귀신의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는데, 여인이 이르는 곳마다 피가 튀었다. 난쟁이 임일천이 외쳤다. "백면라살, 손을 멈춰라!" 여인은 서서히 손발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난쟁이, 무슨 할말이 있느냐?" 난쟁이 임일천은 이를 갈며 외쳤다. "백면라살, 할말이 있다. 내겐 일흔두 가지 교장침법이 있다. 당신과 오늘 생사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백면라살은 태연히 서 있었으나 난쟁이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자그마한 두 손이 갑자기 모양을 바꾸었다. 왼손을 높이 들어 귓전에 대고 손가락을 꽃처럼 펼쳐 식지와 엄지손가락으로는 무슨 물건을 집으려는 것 같았다. 이때 오른손은 허리춤으로부터 앞으로 곧게 뻗어 식지와 엄지손가락을 뒤로 구부렸는데, 천하의 절기인 '탄지신통법(彈指神通法)'을 쓰려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정신을 차려 백면라살이 선수를 쓰기만 기다렸다. 백면라살은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두 손을 늘어뜨리고 머리카락은 흔들리지도 않는데 옷자락은 바람이 없이도 저절로 펄럭펄럭 나부꼈다. 여인은 난쟁이 임일천의 주위를 세 바퀴 돌더니 갑자기 멈춰 서서 뼈만 앙상한 손가락을 쫙 뻗어 난쟁이의 두개골을 움켜 쥐려 했다. 난쟁이는 하하 하고 웃더니 몸을 날려 허공에 떴다가는 백면라살의 뒤로 날아 내려 여인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 다. 난쟁이의 작은 손은 찌르기도 하고 닭이 모이를 쪼듯 아래로 쪼기도 하면서 열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열 손가락은 백면라살의 앞가슴과 뒤통수의 대혈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자그마한 손가락에 찔리기만 하면 끝장이었다. 백면라살의 발걸음이 빨라졌지만 삼단 같은 머리칼이 드리워져서 여전히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치켜 들더니 뾰족한 손가락으로 난쟁이의 대맥을 할퀴려고 덮쳤다. 여인이 할퀴어 대면 그 서슬에 휘익휘익 바람이 일었다. 그 손톱에 한 번 할퀴면 쇠로 만든 병장기마저 파손되니 사람의 피와 살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난쟁이 임일천의 수중에도 병기가 있었다. 왼손에 쥔 빗과 오른손에 쥔 금비녀가 그것들이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빗질하듯이 박박 긁어 내리고 오른손으로는 송곳질 하듯이 앞으로 쿡쿡 찌르면서 사납게 덤벼들었다. 둘은 10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난쟁이 임일천은 은근히 기뻤다. '천하에 유명한 백면라살의 무예도 별것 아니구나!' 합에도 승부가 나지 않자 백면라살은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이 백면라살이 정말로 늙었단 말인가? 늙어서 저 쥐새끼 같은 놈도 골탕먹일 수 없단 말인가?' 그녀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수를 바꾸었다. 그녀는 자기가 얼음 동굴 안에서 10년 동안이나 고심해서 연마한 신기한 법술 '천라지(天羅指)'를 펼쳤다. 난쟁이 임일천은 갑자기 눈앞의 백면라살이 차가운 얼음 덩이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한테서 찬바람이 휙휙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쫙 펴면서 앞으로 내밀자 손가락 끝에서 피익피익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냉기가 난쟁이 임일천을 휘감았다. 난쟁이는 삽시에 온몸이 얼어드는 것을 느꼈다. 난쟁이의 72가지 교장침법은 세밀한 무예였으므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뛰고 솟아야 재주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온몸이 꽝꽝 얼어붙으니 마음껏 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난쟁이는 백면라살한테 참패 직전에 놓였다. 옆에 서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과 쌍환 기노는 사부의 처지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자 구양적도 독사장을 비껴 들고 싸움에 뛰어들려 했다. 이때 백면라살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렸다. "적아, 내가 셋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러느냐?" 구양적은 손을 멈추고 독사장을 쥔 채 싸움판을 지켜 보기로 했다. 백면라살의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렸고, 두 손은 춤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두 사람을 넘어서 한 손으로는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쌍환 기노의 은환을 틀어쥐었다. 쌍환 기노는 그녀가 환을 잡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네 년이 스스로 죽을 차비를 하는구나. 이 쌍환을 살과 피로 된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어?' 쌍환 기노가 은환 속에 숨겨져 있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기관(機關)을 사용하려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은환으로부터 손에 전해져 은환을 떨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팔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은환을 떨어뜨린 그는 당황한 나머지 몸을 돌려 싸움판에서 물러서려 하는데 떨어뜨린 은환이 자기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은환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에 박혔다. 쌍환 기노는 졸지에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는 평소에 가장 지독한 자였는데 오늘은 사막의 사걸 중에서 제일 큰 타격을 받았다. 뒤따라 달려들던 쌍검 옥문과 만도 마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은 허투로 검과 칼을 몇 번 휘두르다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감히 나서지 못했다. 난쟁이 임일천은 가슴이 후들후들 뛰었다. 만일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과 쌍환 기노가 달려들지 않았다면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자신이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백면라살, 어쩌자고 이러느냐?" 백면라살이 대답했다. "이 계집애를 풀어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내 말을 안 들었지. 네 놈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난쟁이의 기세가 금방 수그러들었다. "당신이 다른 걸 달라면 다 허락하겠소. 왜 하필이면 이 계집을 달라는 거요? 이 계집을 데려다 어디에 쓰려는 거요?" 백면라살이 대답했다. "어디다 쓰려는 거냐고? 이 계집애는 내 제자 아우의 계집이기 때문이다. 네가 풀어 주기만 하면 만사가 다 잘 풀릴 것이다." 난쟁이는 이를 악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타산장은 서역의 큰 패거리이고 백타산장의 주인인 임일천은 서역에서 종횡무진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백면라살한테 골탕을 먹고 대패했으니 난쟁이는 분하고 수치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백면라살,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그러나 백면라살은 난쟁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용쟁에게 걸어가 횃불 빛에 그녀를 살펴 보면서 탄식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경국지색이로구나. 적아, 네 아우가 목숨을 걸고 이 애를 구하려는 그 마음을 알 만하다." 백면라살은 모용쟁을 응시하면서 못박인 듯 서 있었다. 모용쟁은 생각에 잠긴 듯한 백면라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선배님의 머리는 왜 그렇게 세었나요……." 백면라살은 흠칫했다. 그녀는 머리가 다 세었으나 지금껏 자기의 백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음 동굴 안에서 오랫동안 살면서도 구양적은 그녀의 은발을 화제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용쟁이 묻자 그녀는 처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가슴속에도 근심이 있으면 머리가 셀 것이다. 구양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너를 아껴 주길 바란다. 마음속에 번뇌가 없으면 머리도 세지 않는 법이지." 백면라살이 모용쟁의 손을 잡고 백타산장을 나서자 구양적과 구양봉도 뒤따랐다. 난쟁이는 두 눈을 멍하니 뜨고 그들 일행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백면라살이 구양적 형제를 데리고 무너진 벽을 넘어서 나간 뒤 한참 후, 그들의 그림자조차 사라졌을 때였다. 갑자기 쌍검 옥문이 울부짖었다. "내 얼굴, 내 얼굴이……." 네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백타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백면라살이 다른 사람들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여기서 쉬었다 가자꾸나." 그녀는 먼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구양적과 구양봉은 한쪽에 잠자코 서 있고 모용쟁만 살며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달이 구름 속에 얼굴을 감추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네 사람은 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백면라살이 물었다. "모용 낭자는 강남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디서 무예를 배웠나?" 모용쟁이 읍을 하고 대답했다. "강남 정암에서 배웠습니다." "강남 정암이라? 난 들어 보지 못했는데……." 시답지 않은 그녀의 말투에 모용쟁은 불쾌했다. '내가 강남 정암의 제자라고 하니 시답지 않게 여기는군. 언젠가는 강남 정암 제자의 재주가 어떤지 본때를 보여 주겠어.' 모용쟁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강호에서는 강남 정암의 무예를 대단하게 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어 보지 못하신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백면라살은 겸손한 모용쟁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적아네 형제가 그토록 애를 써 가면서 이 계집애를 구하려고 한것은 아마도 이 계집애가 이렇게 겸손하기 때문이리라. 계집애가 워낙 예쁜데다가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니 누군들 마음이 쏠리지 않겠는가?' 백면라살은 흡족한 기색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말 괜찮은 애야." 구양봉과 모용쟁은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었으나 구양적만은 아주 기뻐했다. 그는 스승이 사람들을 칭찬할 때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모용쟁을 괜찮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는 정말로 모용쟁에게 호감을 가졌음을 뜻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선 다른 사람을 칭찬하실 때가 아주 드물지요……." 모용쟁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살짝 웃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백면라살을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선배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양봉은 세 사람 중에서 모용쟁의 성격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처럼 공손해진 모용쟁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사람의 성격은 자꾸 변하는 모양이구나. 사막에서는 사납기만 하더니 오늘 형과 형의 사부님 앞에서는 이처럼 얌전하고 공손하니 말이야. 아마도 형한테 마음을 두고 있어서 그러는 걸 거야. 그러기에 나한테는 사나운 몰골을 하고 아무 말이나 가리지 않지만, 형 앞에서는 얌전을 부리고 이처럼 부드럽게 굴지.'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싱긋 웃었으나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백면라살이 구양적을 보며 말했다. "적아, 내 생각엔 너희들이 백타산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이 길로 집에 돌아가 집사람들을 한동안 피난시키는 게 어떠냐? 다 안돈시킨 후에 다시 나를 찾아오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구양적이 대답했다. "예, 할멈과 가시를 피난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우와 모용 낭자는 어떻게……." "이 애들은 내가 동굴로 데려갈 테니 넌 빨리 갔다가 돌아오도록 해라." 백면라살은 이렇게 분부하고는 구양봉과 모용쟁에게 묻지도 않고 몸을 일으켜 길 떠날 차비를 했다. "봉아, 넌 모용 낭자와 함께 사부님을 모시고 가거라. 난 집에 갔다가 즉시 그리로 가마." 구양적은 아우에게 말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구양적의 당부도 있고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해서 백면라살을 따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바위숲을 지나 산정의 동굴 입구에 닿았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동굴 안으로 어떻게 뛰어들어가는지 보지 못했다. 그녀의 그림자가 번뜩하더니 시커먼 동굴 밑으로 날아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깊이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없는 시커먼 동굴을 내려다 보면서 겁이 덜컥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