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8편 (18/64)
난쟁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누가 뛰어들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서 이불을 놓더니 중얼거렸다. "모용 낭자, 보시오. 꾀죄죄한 사내 놈이 낭자를 구하러 왔소이다. 영웅이 미인을 구한다, 그런 말이지요. 한데 뛰어든 자가 영웅이 아니고 제 주제도 모르는 얼간이라면 어쩌겠소?" 난쟁이는 제 물음을 제가 받으면서 탄식을 했다. "딱하지만 내가 이 얼간이 새끼를 잡아죽여야 할 것 같소이다." 난쟁이는 후닥닥 뛰어 일어나면서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이 놈, 감히 여기까지 기어들었구나!" 구양봉이 호기 있게 외쳤다. "모용 낭자를 보내 드려라!" 난쟁이는 키들키들 웃으며 구양봉이 한 말을 그대로 흉내냈다. "모용 낭자를 보내 드려라……." 난쟁이가 자기의 말투를 너무나 똑같이 흉내내는 바람에 구양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구양봉을 바라보는 모용쟁의 표정에는 근심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구양봉의 무모한 소행이 한심스러웠다. '정말 멍청한 선비야! 공부 끝에 바보가 된다더니, 그 말이 꼭 맞지 뭐야! 나를 구하기는커녕 제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걸!' 난쟁이는 구양봉과 모용쟁을 번갈아 훑어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모용 낭자, 그래 이 얼간이가 임자의 사내란 말이오?" 모용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쟁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이 옳지? 난 임자 같은 미인들이 왜 나한테 와서 하나같이 안심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어. 난 그 년들이 내 상자 안에서 편안히 살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년들은 저마다 탈출할 궁리만 하고 있더라구. 그 년들이 그러는 것은 모두 네 놈처럼 흰 낯짝을 가진 사내들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까닭인 게야. 내 짐작이 틀림없어. 네 놈을 죽여 버리겠다!" 구양봉도 주눅들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임일천, 듣거라! 네 놈은 백타산군이라는 명색을 갖고 남의 부녀자들을 억지로 빼앗아 오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네 죄악이 얼마나 큰 줄 알고 있느냐?" 난쟁이가 반문했다. "네 놈이 어떻게 내가 모용 낭자를 억지로 빼앗아 온 줄 아느냐? 네 놈이 직접 물어 보아라. 내가 정말 억지로 빼앗아 왔는지." 구양봉은 모용쟁의 혈도를 풀려고 몇 군데 찔러 보았으나 그 요령을 알지 못하므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난쟁이는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구양씨네 젊은이가 이렇게 둔할 줄은 몰랐군. 그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라도 네 놈을 빨리 없애야겠구나!" 난쟁이는 고개를 돌려 모용쟁에게 말했다. "낭자, 아무래도 내가 저 얼간이를 없애 버려야 낭자가 잡생각을 털어 버리겠구려. 안 그렇소?" 난쟁이는 방바닥에서 몇 번 폴짝폴짝 뛰더니 구양봉 앞에 섰다. 난쟁이는 갈고리 같은 손을 뻗었다. 눈앞에 난쟁이의 손이 다가오자 구양봉은 몸을 비키려 했지만 어느새 그의 억센 손아귀에 목을 잡혔다. 난쟁이 임일천은 모용쟁을 보며 물었다. "이 자식을 죽일까, 살릴까? 빨리 대답하시오." 말을 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모용쟁은 마음만 조급했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표정을 눈여겨 살폈다. 그리고 모용쟁의 속마음을 알아내자 울화가 치밀었다. '네 년이 이 놈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구나! 내 오늘 네 눈앞에서 놈을 목 졸라 죽일 테니 네 년이 이후에 어떻게 놈을 그리워하는지 두고 보자.' 난쟁이가 손에 힘을 넣어 목을 조이자 구양봉은 사지를 뻗으며 기절해 버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손을 풀어라!" 난쟁이는 깜짝 놀라서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그는 등뒤에 다가선 사람이 무예가 아주 높은 사람이며, 그 사람이 자기 등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난쟁이는 침착하게 물었다. "네가 구양적이냐?" 난쟁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이었다. 구씨 할멈과 가시는 구양봉과 헤어진 후 부랴부랴 구양적을 찾아 나섰지만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도 그의 종적이 묘연했다. 구씨와 가시가 맥이 풀려 있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산꼭대기에서 성큼성큼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가시가 시험삼아 불러 보았다. "큰 도련님! 큰 도련님!" 그런데 그 그림자가 잠깐 발걸음을 멈추더니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눈앞까지 다가온 걸 보니 바로 큰 도련님 구양적이었다. 구씨 할멈은 급히 그에게 자초지종을 알렸고, 그는 몹시 놀라서 그 길로 나는 듯이 달려왔던 것이다. 구양적은 첫눈에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싸늘한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자기가 난쟁이의 등뒤에 서 있으므로 자기만 손을 쓰지 않으면 난쟁이도 구양봉의 목을 계속 조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난쟁이는 구양적이 등뒤에 있으니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손아귀로 구양봉의 목을 움켜잡은 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난쟁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구양적, 마침 잘 왔다! 동생의 송장을 치울 때를 맞춰서 왔군……." 구양적이 을러댔다. "어디 내 아우를 죽여 봐라. 네 놈의 백타산장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놓을 테니!" 난쟁이가 냉소했다. "그래?" 난쟁이는 구양봉의 목을 쥔 채 천천히 몸을 돌려 독사장 구양적을 쏘아보며 위협했다. "내가 오늘 너희 두 형제를 함께 황천길로 보내 주마!" 난쟁이는 날쌔게 구양봉의 견정(肩井)과 상양(商陽) 대혈을 찔러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구양적을 쏘아보았다. "좋아, 오늘 우리 둘이 생사 결판을 내 보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임일천, 네 놈이 감히 나와 내 아우를 죽이려고 설치는구나! 좋다! 네 놈과 사생 결단을 해 보자!" 제11장 백타산장의 혈투 난쟁이 임일천은 구양적을 쏘아보았다. "구양적, 네 놈은 내 눈의 가시였다. 내가 백타산장에서 유유자적하게 사는데, 네 놈이 내 옆에 살면서 시끄럽게 굴고 서역의 일인자라고 뻐긴다면서? 네 놈이 으뜸이라면 이 백타산군 임일천은 어느 자리에 앉으란 말이야? 말도 안 되지. 네 놈을 없애 버리고 말 테다. 네 놈이 없어져야 내가 서역의 으뜸이 되지 않겠느냐?" 구양적은 난쟁이를 역겨운 듯 바라보며 천천히 대꾸했다. "임일천, 이제까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잘 지내 왔는데, 왜 자는 범에게 코침을 놓는 거냐?" 난쟁이는 요란하게 웃어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옛말 틀린 데 없구나. 구양적, 이 놈! 네 놈이 날 건드리지 않았어도 진작부터 네 놈을 죽여 버리려 했다. 내가 이제 겨우 천하 절색을 구해 왔는데 네 놈이 언감생심 손을 대려고 하니, 네가 미친놈이 아니고 뭐냐?" 구양적도 지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미녀들을 붙잡아 상자 안에 가두어 놓고 네 놈의 재산같이 부둥켜안고 있으니, 네 놈이야말로 미치광이로구나!" "네 놈이 감히 내게 훈계를 해? 네 놈이 제 발로 백타산장에 들어왔으니 죽은 목숨인 줄 알아라!" 난쟁이가 휘파람을 길게 뽑았다. 휘파람 소리가 그치자 밖에서 우당탕 퉁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대문들이 벌컥벌컥 열렸다. 삽시간에 문 밖에는 백타산장의 인마들이 근엄하게 늘어섰다. 맨 앞에 사막의 사걸이 버티고 있었고, 마당 한복판에는 백타산장의 무리들이 병장기를 손에 쥐고 살벌한 눈빛으로 구양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소리쳤다. "다들 들어라! 구양적을 놓치는 자는 목을 베겠다!" 말이 떨어지자 무리들이 이리떼마냥 소란스럽게 고함치면서 호응했다. 뒤이어 쌍검 옥문이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구양적 네 이 놈! 개뿔 같은 독사장을 휘둘러 보았자 결국은 이 백타산장에서 혀를 빼물고 쓰러질 것이다!" 만도 마혁은 더욱 위세를 부리면서 으르렁댔다. "구양적, 오늘이 네 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우리 사부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너는 우리 손에 죽을 것이다!" 난쟁이는 득의 양양한 얼굴로 모용쟁을 올려다보며 이죽거렸다. "모용 낭자, 난 낭자뿐만 아니라 저 구양 형제도 갖고 싶소이다. 놈들의 시체를 말이오. 낭자는 내 진보팔극(珍寶八極) 상자에 넣고 두 놈의 송장은 관에 넣어서 무덤에 보내겠소. 어떻소, 맘에 드시오?" 난쟁이는 말을 마치자 미친 듯이 웃어댔다. 구양적은 눈길이 동생에게 이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 한 몸이라면 이 백타산장에서 싸움을 하든 도망을 치든 아무 부담도 없을 테지만 아우와 모용 낭자가 옆에 있으니 상당히 난처했다. 싸움이 시작되어 미처 보호하지 못하면 구양봉과 모용쟁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칼에는 눈이 없다. 만일 이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는가? 궁리하던 구양적이 난쟁이를 보고 말했다. "이보시오 산군, 내 아우와 모용 낭자를 놓아주면 내가 당신과 판가름을 하겠소. 어떻소?" 난쟁이는 머리를 흔들고 탁상 위로 뛰어오르며 대답했다. "내가 왜 저 둘을 놓아주겠나? 옛말에 이르기를 범을 잡기는 어려워도 놓아주기는 쉽다고 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잡소리는 그만둬라, 임일천. 놓아주겠어? 안 놓아주겠어?" "안 놓아준다! 얘들아, 저 놈을 쳐죽여라!" 난쟁이가 명령을 내리자 즉시 세 놈이 돌진해 왔다. 한 놈은 칼을 휘두르고, 한 놈은 쇠채찍을 휘두르고, 한 놈은 도끼를 휘둘렀다. 세 놈은 고함을 지르면서 구양적을 에워싸고 덤볐다. 도끼를 휘두르는 자는 산서(山西)의 나가부법(羅家斧法)을 익힌 자로, 그가 도끼 쓰는 법은 피풍도법(拔鳳刀法)에다 밀기[推], 막기[ ], 빼앗기[奪], 누르기[壓] 네 가지를 보탠 것이었다. 도끼를 휘두르니 바람이 휙휙 일어 얻어맞았다간 풍비박산이 날 판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자는 산서의 염가도법(閻家刀法)도 아니고 난쟁이의 지당도법(地 刀法)도 아닌 괴상한 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는 데, 칼을 휘두르는 동작이 느렸으며 앞동작보다 뒷동작이 더 느렸다. 구양적은 이 칼잡이의 재주가 만만치 않음을 알아채고 몸을 뒤로 비켰다. 채찍을 쓰는 자도 만만치 않았다. 편장막급(鞭長莫及)이라는 옛말이 있다. 채찍이 길어도 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자의 채찍은 아주 길어 단번에 구양적의 얼굴을 후려갈기려 했다. 구양적이 살짝 몸을 비키자 채찍이 탁자 위에 떨어졌는데 난쟁이가 모용쟁을 앉혀 놓았던 탁자가 칼로 내리친 듯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를 본 구양적은 속으로 은근히 놀라며 생각했다. '난쟁이와 사걸만 염두에 두었었는데 이자들이 뛰쳐나올 줄이야! 보아하니 이 세 놈의 무예도 사걸에 못지않구나! 백타산장에 이같이 출중한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군. 내가 오늘 이곳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하다 보니 손발이 굼떠졌다. 이 틈을 타서 세 놈이 더욱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길다란 뱀 같은 채찍이 구양적의 얼굴 앞에서 짱짱 울렸고 칼잡이의 칼이 빨라지더니 단번에 구양적을 베어 낼 듯이 이리저리 번뜩였다. 도끼장이도 뒤질세라 달려들어 내리찍고 옆으로 후려치며 다가들었다. 구양적은 냉소하며 외쳤다. "내 눈엔 너희들이 세 마리 생쥐로 보이는구나. 감히 어르신을 건드려 보려구?" 구양적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는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도끼잡이의 손에 있는 소음심경맥(少陰心經脈)의 소해(少海), 청영(靑靈), 통리(通里)의 세 대혈을 때리려고 날아갔다. 도끼잡이는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질겁하여 도망쳤다. 도끼잡이가 도망치자 구양적의 몽둥이는 픽 돌며 칼잡이의 가슴을 향했다. 가슴에 있는 여섯 곳의 대혈이 모두 구양적의 몽둥이 아래 놓인 칼잡이 는 당황하고 말았다. 구양적의 번개 같은 몽둥이에 여섯 곳의 대혈이 찔리면 목숨이 남아날 리 없었다. 칼잡이가 황급히 몸을 피한 후 다시 칼을 치켜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구양적이 방금 휘두른 몽둥이가 헛몽둥이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구양적이 헛몽둥이질로 칼잡이를 위협한 것은 그를 채찍잡이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구양적은 제일 밉살스럽게 굴던 채찍잡이를 겨냥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덮쳤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땅바닥을 후려갈기면서 뽀얀 흙먼지를 일으켰다. 채찍잡이의 손목이 독사장 끝에 찔린 것이다. 채찍잡이는 삽시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섰다. 그는 구양적의 몽둥이 끝에 독이 발라져 있으며, 그 독이 치명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몽둥이 끝에 손목을 찔렸으니 팔병신이 될 게 뻔했다. 몽둥이에 찔린 오른손은 벌써 퉁퉁 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팔을 잘라 버리려 했으나 어느새 독이 어깻죽지까지 올라와 있었다. 칼잡이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산군님, 저자의 배 ……뱀몽둥이에 도……독이 있습니다!" 그는 최후의 힘을 모아 채찍으로 구양적을 후려갈기려 했으나 몸만 몇 번 푸들푸들 떨더니 쿵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것을 본 나머지 둘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둘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공포에 질려 맥이 풀어지고 있었다. 구양적은 둘이 주저하는 틈을 노려 벽력 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두 놈의 정수리를 몽둥이로 연거푸 내리쳤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걸 본 사막의 사걸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철장, 만도, 검, 쌍환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그 틈에 몽둥이의 공격에서 벗어나 뒤로 몸을 뺐다. 구양적은 욕설을 퍼부었다. "임일천, 나 하나와 겨루는데 한 무리의 졸개들을 풀어 놓아 시끄럽게 구니 네 재주를 알 만하구나! 담이 있으면 네 놈 혼자 나서라! 우리 마당에 나가서 승부를 가려 보자!" 난쟁이가 냉소하면서 응수했다. "좋아, 어디 우리 둘이 겨루어 보자. 서역의 일인자라는 네 놈의 재주를 구경하자!" 임일천이 명령을 내리자 그의 부하들이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임일천은 쌍검 옥문과 다른 제자를 시켜 탁자 위에 앉힌 모용쟁을 들어 내오고 구양봉도 끌어내도록 했다. 임일천은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기면 넌 죽음을 면치 못할 거고, 내가 져도 그건 마찬가지다!" 마당에는 난쟁이의 부하들이 빙 둘러서 있는데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었다. 마당 복판은 텅 비어 있고, 그 둘레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밝혀 마당 전체가 백주처럼 밝았다. 임일천은 새된 소리로 웃어대더니 마당 한복판에 나서서 자그마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구양적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임일천을 마주한 구양적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이 싸움에 자기의 명성뿐 아니라 아우와 모용쟁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난쟁이가 비아냥거렸다. "다들 네 놈의 뱀몽둥이에는 귀신도 막아내기 어려운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만, 내가 보기엔 네 재주가 별것 아니구나. 방금 네가 설산삼로(雪山三老)와 맞붙어 장편(長鞭)잡이 진독(泰獨)을 좀 상하게 했더구나. 네 놈이 자신 있다면 나한테도 상처를 좀 내 보아라!" 구양적이 몽둥이를 휘두르려는데 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와지끈 툭탁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박살나면서 웬 사람이 뛰쳐나왔다. 머리를 풀어헤친 그는 왼손에 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는 몇 번 공중제비를 해서 구양적 앞에 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구양적, 해독제를 가져와라!" 구양적은 냉소하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채찍을 휘둘러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후려쳤다. 구양적이 슬쩍 비키자 허공을 때린 채찍은 휘익 되돌아가 채찍 임자의 목을 친친 휘감았다. 채찍 임자는 졸지에 얼굴이 돼지 간처럼 벌개지더니 숨이 막혀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그의 눈알이 시뻘개지고 양미간이 새까매지더니 꺼억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난쟁이의 부하들은 너무나 무섭고 끔찍스러워 누구 하나 입을 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도 있었다.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의 재주는 저 뱀몽둥이에 있구나! 실력자인 장편잡이 진독이 저 몽둥이에 살짝 찔렸는데도 졸지에 황천객이 되고 말았으니, 저 몽둥이를 멀리하는 게 상책이야!' 갑자기 난쟁이 임일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양적, 네 놈이 그 뱀몽둥이 하나로 내 백타산장을 요절낼 것 같으냐? 이 어르신네도 한때는 뱀 무리들을 몰면서 중원을 두루 섭렵했었다. 그 동해 도화도의 주인 황약사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네 놈도 내 사진(蛇陣)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을 텐데. 네 놈이 그따위 뱀몽둥이를 믿고 우쭐한다마는 내게는 대수롭지 않다!" 말을 마친 임일천이 휘파람을 길게 불자 그의 졸개들이 벌떼처럼 구양적에게 달려들었다. 구양적은 앞장선 임일천과 맞붙어 치고 박고 찌르고 막으면서 한바탕 열이 나게 싸웠다. 구양적은 요해만 겨냥하여 몽둥이를 휘둘러 댔지만 임일천은 원숭이처럼 몸을 가볍게 움직여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두 사람이 진퇴를 거듭하면서 한데 어울려 수십 합을 싸웠으나 요란한 소리 한 번 나지 않았으 며 그 싸우는 자세도 절묘하기 그지없었다. 이 무렵, 정신을 차린 구양봉은 두 눈은 똑바로 뜨고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어우러져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구양봉은 문득 느끼는 점이 있었다. 형과 난쟁이가 몸에 익힌 것은 다 유연한 음유공부(陰柔功夫)여서, 마치 둘이 어울려 춤이라도 추듯이 동작이 교묘하고 진퇴와 공수가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강하고 맹 렬한 힘과 기세가 부족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강한 내력과 용맹한 기세가 있다면 눈을 어지럽히는 저 많은 기묘한 동작과 재주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구양봉은 문제점을 똑똑히 보고 있었지만 마당 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서로 물러서고 공격하는 두 사람이 손발을 어찌나 빨리 놀리는지,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무예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였다. 5, 60합을 싸운 뒤 두 사람은 갑자기 양쪽으로 비켜 섰는데, 싸움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구양적은 뱀 몽둥이를 손에 잡은 자세였고, 난쟁이 임일천도 두 손으로 가슴을 엇막은 원래의 그 자세였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두 사람이 한바탕 싸움을 벌였지만 승부를 가릴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구양적은 오른손에 몽둥이를 잡고 말했다. "임일천, 내일 다시 승부를 가르기로 하고 내 아우와 모용 낭자를 풀어 주어라!" 난쟁이가 히죽거리면서 응수했다. "구양적, 네가 서역의 일인자라는 건 알고 보니 헛소문이었구나. 내 오늘 기어이 네 놈을 없애 버리고 말겠다!" 임일천이 손짓을 하자 쌍검 옥문과 만도 마혁이 달려 나오면서 물었다. "사부님, 무슨 분부십니까?" 임일천은 구양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을 끌어내라. 형제간에 서로 정이나 나누게 말이다." 쌍검 옥문은 긴 검으로는 구양봉의 머리를 단검으로는 구양봉의 허리를 겨냥하고, 만도 마혁은 칼로 구양봉의 배를 겨냥하여 마당 한복판으로 끌어냈다. 난쟁이는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말했다. "구양적, 냉큼 그 뱀몽둥이를 집어 던지고 네 스스로 목을 베어라! 그러면 네 아우와 모용 낭자를 살려 주겠다. 이 총각과 처녀가 배필이 되어 너희 구양 가문이 대를 잇도록 해 주마." 구양적은 약이 올라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난쟁이는 더욱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네 이름을 세 번 외칠 때까지 목숨을 끊어야 한다. 뱀몽둥이로 목숨을 끊든지 주먹으로 정수리를 쳐서 죽든지 그건 네 좋을대로 해라. 내가 세 번 외칠 때까지 목숨을 끊지 않으면 동생은 이 자리에서 송장이 되는 줄 알아라." 구양적의 몸은 돌처럼 굳어졌다. 난쟁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구양적을 가리키면서 계속 약을 올렸다.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 어른, 당신은 죽는 게 좋겠소, 사는 게 좋겠소?" 구양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물었다. 그는 당장 이 난쟁이를 박살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난쟁이는 구양적의 일그러진 얼굴은 본 체도 하지 않고 턱을 잔뜩 치킨 채 더욱 큰소리로 약을 올렸다. "서역의 일인자이신 구양적 어른, 당신은 살아야 마땅하오? 죽어야 마땅하오?" 구양적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손은 경련을 일으킨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쟁이는 그가 더 이상 궁리할 틈도 주지 않고 큰소리로 재촉했다.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 어른, 당신은 마땅히 죽어……!" 난쟁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중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구양적이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는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네 놈이 뭔데 그의 생사를 결정하려 드느냐?"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정말 깊은 무예를 가진 사람이로구나! 사람들 모두 커다란 전율을 느꼈다. 모두들 천천히 사위를 둘러 보았으나 소리가 어디서 들려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구양적만 낯빛이 변했다. 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