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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7편 (17/64)

2026-09-24 21:22:51 조회 25
쌍검 옥문은 난쟁이 옆에 서서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난쟁이한테 아첨을 떨고 있는 듯했다. 또 그 옆에는 만월도를 잡은 만도 마혁, 쌍환 기노가 서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난쟁이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너희들 모두 밥통들이지? 그지?" 넷은 그저 난쟁이를 힐끔힐끔 볼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참 만에 쌍검 옥문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희들 재주로는 사두장 구양적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그자는 사막의 일인자라구요. 저희들의 무예는 그자와 비길 바가 못 됩니다." 난쟁이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웃어대더니 머리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 "그자가 사막의 일인자라면 난 뭐냐?" 넷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난쟁이는 그들이 대답을 못하자 기뻐했다. "이 바보들아, 내가 바로 서역의 일인자야. 너희들이 믿지 못하겠다면 내 솜씨를 한번 보여 주지!" 난쟁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솟구치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몸뚱이는 허공에서 멈추더니 순식간에 세 가지 동작을 해 보인 뒤 다시 날아 의자 위에 내려 앉았다. 방금 전에 앉았던 그 모양 그대로였는데 몸뚱이는 못이 박힌 듯 까딱도 안 했고, 거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 정말 대단합니다!" 먼저 쌍검 옥문이 큰소리로 칭찬하자 뒤따라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 만도 마혁도 이구동성으로 잘한다고 칭찬했다. 난쟁이 임일천은 본디 성질이 괴팍해서 걸핏하면 제자들의 잘못을 트집 잡아 호되게 질책하곤 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이 그의 제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 제자 중에서 그래도 총애를 받는 것은 쌍검 옥문이었다. 이 계집애는 얼굴이 예쁘장한데다가 말도 달콤하게 할 줄 알아서, 성깔을 부리는 난쟁이의 비위를 제법 잘 맞춰 주었다. 그래서 난쟁이가 웃을 때가 많 아졌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아는 옥문도 난쟁이가 납치해 온 여인이었다. 네 제자 중에서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이미 사막에서 명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스승 앞에선 머리를 숙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도 마혁은 본래 어리숙한 자이므로 스승의 질책에도 기분이 상하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욕을 먹을 때뿐이지 욕을 먹은 후에는 다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쌍환 기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난쟁이에게 꾸중을 들을 때마다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썼지만 이 쌍환 기노만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쟁이는 어릴 때부터 기노를 마구 치고 박고 윽박질렀고, 때로는 거의 죽을 정도까지 매를 안기기도 했는데 그래도 기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로 난쟁이는 기노에게서 아첨하는 말을 받아 내기를 포기했다 난쟁이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 재주로 구양적이란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겠나?" 쌍검 옥문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사부님의 무예는 세상에 비길 자가 없는데 구양적이란 놈이 어떻게 사부님의 적수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저희가 넷이 힘을 합쳐 싸운다 해도 그자의 적수가 못 되거든요. 아마도 사부님께서 친히 출전해야 그 놈을 잡아죽일 수 있을 거예요." 난쟁이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거풍아, 네가 보기에 구양적이란 자의 무예가 대관절 어디서 배워 온 것 같더냐?"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무예가 출중했을 뿐더러 견식도 넓었다. 그는 한참 궁리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 그자의 무공에는 비정상적인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도 사악한 파의 음독한 무예인 것 같습니다. 우리 서역에는 이런 무예가 없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곤륜파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하고, 설산파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중원에서 이름 높은 협객 여문생( 文生)한테 물어 봤더니, 그런 무예를 익힌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죽었 으므로 이제는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난쟁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문생이 더 말한 건 없느냐?" "그분 말씀이, 그 사람 이름은 백면라살 수라아랍니다. 그분은 사부님께서도 그 여인을 기억하고 계실 거라더군요." 이 말에 난쟁이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으나 목소리는 또렷했다.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죽은 지 10여 년이 넘었어."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말했다. "그 여인에 대해선 전 잘 모릅니다. 여문생이란 분은 사부님께 매사에 조심하시라고 당부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라고?" 난쟁이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으나 내심 어지간히 겁을 먹고 있었다. 네 명의 제자들은 스승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조용히 분부를 기다렸다. "좋아, 밤이 깊었으니 너희들 모두 돌아가 쉬거라." 난쟁이가 분부하자 그들은 공손히 물러났다. 구양봉을 아주 기뻤다. 이 네 놈들이 자리를 뜨면 기회를 엿보아 모용 낭자를 찾을 수 있고, 모용 낭자를 찾으면 끌고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닌가? 만일 형이 돌아오면 형한테 무슨 방법이 있는지 묻고, 형이 돌아오지 않으면 모용 낭자를 깊숙이 숨겨 두면 되리라. 구양봉은 방안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 난쟁이는 방 안의 문들을 다 닫은 뒤 조심스럽게 상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큰 상자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더니 계속 수많은 작은 상자를 꺼내 놓는데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었다. 구양봉은 모양이 제각각인 그 상자들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난쟁이가 모용 낭자를 저런 상자에 집어 넣었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모용 낭자를 저렇게 작은 상자 속에다 어떻게 집어 넣는단 말인가?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난쟁이는 상자들 뚜껑을 죄다 열고는 하나하나 잘 배열해 놓는 것이었다. 다 배열한 뒤 난쟁이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걸 보시오, 이 상자에 담긴 건 천왕탑(天王塔)인데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 손수 비문을 쓴 그 탑이오……. 이건 천하에 보기 드문 보물이오. 그리고 이건 두 마리 용이 진주 구슬을 희롱하는 형상을 그대로 만든 것이라오. 이 구슬은 야명주요. 광채가 대단하잖소? 용들은 가느다란 금실을 엮어 만들었소. 정말 훌륭한 보물이야." 구양봉은 난쟁이가 다른 사람과 말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방에는 난쟁이뿐으로 자기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난쟁이가 이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게로군.' 난쟁이는 다시 그 작은 상자들이 다 잘 보이도록 정성스럽게 배열해 놓고는 천천히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 놓으면 그 여인도 만족할 거야." 난쟁이는 큰 시름이라도 던 듯이 잠시 앉았다가 이윽고 침대 밑에서 커다란 상자를 끌어냈다. 난쟁이는 이 상자를 자그마한 의자에 올려 놓은 후 상자 뚜껑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낭자, 어서 나오시오." 그리곤 상자에서 한 여인을 꺼냈는데, 바로 방금 구양봉의 집에서 빼앗아 온 모용쟁이었다. 모용쟁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난쟁이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당장 달려들어 그를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적의에 차서 난쟁이를 쏘아본들 도리가 없었다. 난장이가 몇 군데 대혈을 찔러 놓아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히죽거리면서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모용 낭자, 그대를 잃어버린 뒤 난 오매불망 그대를 사모했소. 난 여인들을 많이 간수해 봤지만 어느 여인도 그대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소." 난쟁이가 제 흥에 취해 떠벌렸지만 모용쟁은 고개를 비틀고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난쟁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 떠들었다. "모용 낭자, 그대는 천하에서 제일 아리따운 여인이오. 사내들이란 누구나 미인 앞에서는 오금을 쓰지 못하는 법이지." 모용쟁은 숫제 두 눈을 감고 못 들은 척했으나 난쟁이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지껄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인의 어여쁨은 허벅지에 있다고 했소. 물론 이런 말들은 죄다 허튼소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대에게 이것만은 말해야겠소. 미인의 아리따움을 알려면 앞가슴과 등허리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이오." 말을 마친 난쟁이는 모용쟁의 옷을 벗기고 탁자 위에 앉혔다. 모용쟁은 탁자에 앉아 꼼짝달싹 못하고 난쟁이가 마음대로 자기를 다루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난쟁이는 한참 동안 모용쟁을 마음대로 만져 보다가 중얼거렸다. "등불 아래서 미인을 보는 것은 달빛 아래서 보는 것만 못하고, 달빛 아래서 보는 것은 진주 보석 아래서 보는 것만 못하다고 했소." 말을 마치자 난쟁이는 손을 흔들어 촛불을 꺼버렸다. 촛불이 꺼지면서 동시에 방 전체가 진주와 보석이 흩뿌리는 빛살로 현란하게 반짝였다. 그 황홀한 빛 속에서 모용쟁은 온몸이 금, 은, 진주의 빛으로 번쩍이는 미인으로 변했다. 게다가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가 빙글빙글 돌자 구양봉은 눈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현란한 빛 속에서 난쟁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모용 낭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인의 어여쁨은 보석의 빛을 빌어서 더욱 돋보인다는데, 그대는 이 말을 믿소?" 난쟁이는 모용쟁의 어여쁜 몸매를 구경하면서 손뼉을 치다가 고개를 흔들기도 했으며, 때로는 흥분을 못 이겨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모용 낭자여, 모용 낭자여! 그대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인이오! 그 아름다움을 내가 독차지했으니 이 임일천의 일생도 헛되지는 않구려……."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가도 너무 흥분했는지 한참씩 죽은 듯 입을 다물기도 했다. 밖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는 구양봉은 난쟁이의 소행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임일천이 여인을 좋아하는 방식엔 별난 데가 있구나. 흔히 사내들은 아름다운 여인과 살을 섞고 몸뚱이를 차지하려고 날뛰지. 그런데 이자는 여인들을 마치 노리개처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면서 가지고 놀려고만 하지, 살을 섞으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난쟁이 임일천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눈길로 모용쟁의 팔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슬슬 만지기 시작했다. "미인의 피부는 세옥(細玉)처럼 매끄럽고 양의 기름처럼 희다는 옛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오늘 낭자의 피부를 보고 난 그 말을 믿게 됐소이다." 난쟁이는 거듭 모용쟁의 팔을 훑어보면서 감탄했다. "아름다워라, 미인의 팔뚝이여!" 구양봉이 듣자니 난쟁이는 옛날 영웅의 탄식을 흉내내는 듯했다. 춘추 전국시대에 연의 태자 단(丹)은 자객 형가(荊軻)를 청해다가 진의 왕 영정(羸政)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형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자 단은 형가의 환심을 사려고 그를 극진히 환대했다. 태자가 베푼 주연에서 한 미인이 술을 따르게 되었는데, 형가는 그녀의 손을 보고 찬탄했다. "아름다워라, 미인의 손이여!" 이는 형가가 취중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태자 단이 형가에게 옥반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옥반에는 끔찍하게도 그 미인의 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태자 단의 잔인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이런 잔인함을 보인 것은, 형가가 자기를 대신하여 진 왕을 죽이기만 하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사가 주인을 위하여 힘을 다 바친 다는 일례이기도 했다. 구양봉은 난쟁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가 '형가가 진 왕을 찌르다'는 전고(典故)를 인용했음을 대뜸 알았다. 구양봉은 밖에서 들으면서 냉소했다. '등신 같은 난쟁이 놈이 어찌 태자 단과 형가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 교역에 불과했음을 알겠는가? 형가는 천교의 명성을 탐냈고 태자 단은 진 왕의 수급을 탐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는 여인의 손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여인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지. 지금 난쟁이는 적어도 모용쟁의 팔이나 목으로 무슨 물건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모용쟁의 팔뚝에 반한 난쟁이는 마치 마음에 드는 놀잇감이나 보석을 구경하듯이 정신이 다 팔려 자기마저 잊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난쟁이는 감탄을 했다. "미인의 아리따움이여, 내 정신을 다 빼앗아 가는구나!" 난쟁이는 너무 도취된 나머지 연신 머리를 흔들어 댔다. "모용 낭자, 내게는 진주 보석들이 무진장하오. 낭자에게 그것을 선물할 마음이 있으니 탐나는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난쟁이는 말을 마치더니 모용쟁을 한 번 쿡 찔렀다. 그러자 모용쟁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난쟁이는 깜짝 놀라서 투덜거렸다. "낭자! 그렇게 마구 소리질러선 안 되오. 미인이라면 미인답게 앵도 같은 입술을 살짝 열고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야 하오. 노고지리나 제비들이 지저귀듯 말이오. 낭자께서 지금처럼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 대는 건 정도(正道)가 아니오." 모용쟁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응 낭자, 낭자께서 탐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드리겠소. 낭자만 내 손에 있으면 이런 진주, 보석 따위들은 분토밖에 안 되니 사양 말고 말씀하시오. 이 천왕탑이 탐나시오? 아니면 두 마리의 용이 진주를 가지고 노는 이것이? 둘 중 어느 것이든 가져도 좋소." 모용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싫다! 네 놈의 물건은 싫어!" 난쟁이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낭자는 왜 내 물건이 싫다고 하시오? 내 물건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씀이오?" 모용쟁은 난쟁이를 보기도 역겹다는 듯이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낭자가 화를 내는 것도 보았고 우는 것도 보았지만 웃는 모습은 보지 못했소. 낭자가 웃는 모습은 어떨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려. 옛날에 유왕(幽王)이 보사( )를 그토록 사랑했다오. 유왕은 보사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8백 리에 봉화를 올리게 하고 제후들 오금에서 비파 소리가 날 정도로 동분서주하게 영을 내렸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사가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지 않소? 한데 내 가 무얼로 낭자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겠소? 난 미인이 웃는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소. 정말로 천 가지 교태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곁들여지는지 보고 싶소." 모용쟁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개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네 놈이 뒈지기만 하면 내가 당장 웃을걸." 난쟁이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좋소이다. 좋소이다. 낭자가 웃기만 한다면 난 무엇이든……. 한데……." 난쟁이는 바보처럼 모용쟁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안 돼, 안 되고말고. 내가 죽으면 낭자가 아무리 웃어도 볼 수 없게 되지 않소? 두 눈을 감은 다음에야 미인의 웃음에 천 가지 교태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모용쟁은 이 미치광이 같은 난쟁이와 입씨름해 봤자 아무 쓸모가 없는 줄 잘 알므로 입을 꾹 다물고 난쟁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두었다. "모용 낭자, 옛날 고시(古詩)에는 '치장할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요, 보여 줄 사람이 없음이로다'라고 읊었소이다." 모용쟁이 대답을 하지 않자 난쟁이는 맥이 빠진 듯 탄식했다. "이런! 모용 낭자께선 가타부타 통 대답을 안 하시니 답답하구려!" 그는 모용쟁을 보면서 또 입을 열었다. "옛날 사람들은 장상(張敞)이란 녀석이 제 마누라의 눈썹을 그려 주어서 천하에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소이다. 장상이란 녀석은 제 마누라의 눈썹을 그려 주었을 뿐이지만, 난 미인을 화장시켜 주는 데 대단한 솜씨가 있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답니까?" 말을 마친 난쟁이는 왼손에 검은 상자를 올려 놓고 오른손으로 빗을 들더니 모용쟁에게 물었다. "모용 낭자, 내가 잘 치장해 드리고 싶은데, 어떻소?" 모용쟁은 큰소리로 외쳤다. "싫다, 싫어……!" 모용쟁이 악을 쓰는 것이 듣기 싫은지 난쟁이는 다시 모용쟁의 아혈을 쿡 찔렀다. 그러고 나서는 또 나지막한 소리로 이죽거렸다. "모용 낭자님, 미녀가 치장을 할 때는 조용한 법이오. 아름다운 눈에는 은근한 정이 담뿍 담겨 있어 마치 가을의 호수마냥 그윽하오. 그 눈길은 정든 님을 고대하는 눈길임에 틀림없소. 아미는 먼 언덕 같은데 언덕 너머 정든 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오. 낭자께서 말씀이 없으니 치장하기에는 안성맞춤이구려." 모용쟁은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밖에서 보니 난쟁이의 몸뚱이가 갑자기 붕 뜨더니 모용쟁의 전후좌우로 오락가락했다. 삼단 같은 모용쟁의 머리칼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 시원스럽게 드리워졌다가 날아오르는 화살처럼 정수리 위로 치솟기도 했으며, 또 잠깐 후에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 송이처럼 부풀어 있기도 했다. 난쟁이가 앞에 달라붙어 빗질을 하면 아름다운 얼굴이 머리칼 뒤에 숨겨졌고, 뒤에 달라붙어 빗질을 하면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난쟁이의 작은 빗은 실북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모용쟁의 머리를 윤이 반질반질 나도록 빗어 놓았다. 난쟁이의 손바닥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빗이 눈 깜짝할 새에 자그마한 함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난쟁이가 한 손을 흔들자 다른 함 뚜껑이 달카닥 열렸는데 함 속에서 머리 장식품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앞뒤를 맴돌면서 손에 쥔 비녀며 보석 귀걸이를 순식간에 머리와 귀에 꽂아 놓았다. 치장을 다한 모용쟁은 금은 보석들에 둘러싸여 눈부신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이처럼 아름다운 미녀를 본 구양봉의 두 눈이 황홀해졌다. '저 여인이 살기등등하여 나를 쏘아보던 모용쟁이란 말인가? 사막에서 언제나 적의에 찬 눈길로 나를 대하던 모용쟁이 저 여인이란 말인가?' 난쟁이는 득의양양해서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내 솜씨가 어떻소?" 난쟁이는 크게 웃어대면서 모용쟁의 눈앞에 거울을 가져다 보였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거울 속의 이 여인이 나란 말인가?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은 소박하고 단정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요염하고 화려한 귀부인이었다. 거울 속의 여인은 그녀의 어머니와 너무도 흡사했다. 모용쟁은 거울을 보고 일찌감치 세상을 뜬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난쟁이도 구양봉도 모용쟁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자기 나름대로 추측했다. '모용 낭자는 이처럼 모욕을 당한 것이 분해서 울고 있을 거야. 난쟁이의 이 끝없는 모욕에 누군들 분통이 치밀지 않겠어?' 구양봉의 추측도 과히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처녀들의 치장은 워낙 규방의 밀사(密事)이므로 사내들이 엿보지 못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사내가 마음대로 머리와 얼굴을 가지고 놀았으니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어디 있겠는가? 구양봉은 모용쟁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모용쟁이 서럽게 우는 것을 보자 난쟁이도 당황하고 말았다. "모용 낭자, 걱정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주시오. 내가 시름을 덜어 드릴 테니." 모용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난쟁이는 스스로 사내 대장부라 자칭하는 자인데, 원래 사내 대장부는 여인의 눈물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다. 하물며 미인의 눈물이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모용 낭자, 오늘은 낭자께서 내 침대에서 주무실 수밖에 없소." 모용쟁이 보니 난쟁이의 눈길에는 애모의 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감만한 난쟁이의 침대에서 자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마음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낭자께선 여기서 주무시오. 상자 안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나을거요." 모용쟁은 싫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더욱 눈물이 솟았다. 난쟁이는 울고 있는 모용쟁을 보면서 말했다. "제발 그만 우시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오……." 난쟁이도 제풀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난쟁이가 여인들과 골동품을 그러모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미친 놈이라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난쟁이가 모용쟁을 침대 위에 뉘어 몸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하자 구양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만일 형이 계셨더라면 분연히 뛰쳐나가 그 독장(毒杖)으로 난쟁이를 단매에 요절냈을 거야!' 생각이 이에 미치자 구양봉은 고함을 지르면서 문을 박차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난쟁이는 이불을 펴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모용 낭자, 밤에 잘 때 무서워하는 것이라도 있소? 무서우면 날 깨우시오." 그때 구양봉이 불쑥 뛰어들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달려갔다. 구양봉을 본 모용쟁은 놀랍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하여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을 걱정한 나머지 이곳까지 달려와 준 구양봉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구양봉이 난쟁이의 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까지 찾아오긴 했으나 모용쟁을 구하기는커녕 십중팔구 제 목숨까지 덤으로 내주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