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6편 (16/64)

2026-09-24 21:22:51 조회 20
어떻게 하면 좋아? 궁지에 빠진 그는 절망적으로 울다가 기진맥진해져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혼곤히 잠이 들었다. 이 동굴 속의 얼음 위에서 깊은 잠에 빠지면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자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도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나 누군가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얘야, 깨어나거라! 어서 깨어나거라." 그는 흐리멍텅한 의식 속에서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깨어났다. 그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어렴풋하게 그는 그 그림자의 주인이 여인이고, 삼단 같은 머리칼을 드리우고 자기 귀에 입을 대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양적은 총명한 아이였다. 그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나, 여인의 품에 안기면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자는 척했다. 여인은 몇 번 불러서 깨우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가련하구나. 이렇게 귀여운 애가 동굴에 빠져 죽다니!" 어린 구양적은 여인이 자기가 자는 척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여인은 잔꾀를 부리는 아이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여인은 다시 말했다. "만일 네가 죽으면 널 만 길도 넘는 얼음 동굴 속으로 떨어뜨릴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시체가 영원히 썩지 않을 테니, 나도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겠지." 그러나 구양적은 무섭지 않았다. 여인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구양적은 여인이 자기를 동굴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그냥 자는 척하기로 작심했다. 구양적은 자기가 있는 곳이 커다란 얼음 덩이 위이고, 여인이 바로 이 얼음 덩이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청나게 큰 이 얼음 덩이는 반짝반짝하고 투명한 빛을 뿌렸다. 반짝거리는 얼음 덩이의 빛을 빌어 구양적은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삼단 같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으나 얼굴은 아주 부드러웠다. 구양적은 얼음 덩이가 뿌리는 빛 속에 서 여인의 머리칼과 얼굴에 괴이한 기품이 서려 있음을 보고, 아마도 귀신이나 정령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때 여인은 구양적을 동굴 바닥에 떨구어 버리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구양적은 소리를 질렀다. "떨어뜨리지 말아요! 제발, 떨어뜨리지 말아요! 난 죽지 않았어요……." 여인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물었다. "난 네가 죽지 않았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다. 넌 누구지? 어쩌다 내 동굴 속에 떨어졌느냐?"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에요. 산에서 삭정이를 줍고 까불다가 떨어졌어요." "네 이름이 뭐냐?" "구양적이라고 해요. 동생 이름은 구양봉이구요." "네 아버지 이름은 뭐냐? 그리고 엄마는?" 이 물음에 구양적은 처량한 기색으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아빠 엄만 일찍 돌아가셨어요……." 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로군……. 여인의 가슴속에 동병상린의 정이 샘 솟듯 피어 올랐다. "나도 팔자가 사나운 여자란다. 너도 나처럼 박복한 아이로구나. 조실부모하고 어린 나이에 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얼음 구덩이에 빠졌으니 참으로 불쌍하구나. 날 만나지 않았더라면 넌 꼼짝없이 죽었을 거다. 네가 오늘 얼음 동굴에 빠진 것은 나와 인연이 있는 게야. 내가 너를 구해 줬으니 날 사부로 섬기는 게 어떠냐?" 구양적은 총명한 아이였으므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좋아요, 당신을 사부로 모시겠어요. 그럼 이제부터는 허드렛일을 하지 않아도 되나요?" "물론이지, 네가 나한테 무예를 배우기만 한다면 말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악한 짓을 하는 놈들을 잡아죽이는 거야. 어떠냐, 마음에 들지?" 구양적은 가만히 궁리했다. '이 여인을 사부로 섬기는 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이제 허드렛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잖아, 그리고 강호의 협객이 되어 나쁜 놈들을 잡아죽인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사부님께서 무예를 가르쳐 주시면 난 열심히 배울 거야!' 이렇게 생각한 구양적은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게 무예를 가르쳐 주십시오. 무예를 닦은 후에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나쁜 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겠습니다. 제가 사부님의 복수도 해 드릴 거예요." 아이의 천진한 말에 여인은 코끝이 시큰했다. '네가 아직 철이 안 들었으니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가 없지. 네가 나 대신 복수를 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나의 적수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아느냐? 네 말만 같다면 나도 이 차가운 얼음 동굴 속에서 홀로 갇혀 있지는 않았을 게다. 그자는 천하에 보기 드문 기재란다. 그자의 무예를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나도 그자의 적수가 못 되는데…….' 얼음 동굴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고독하고 적막한 나날을 지내던 여인은 오랜만에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여인은 구양적을 얼음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구, 차가워라!" 구양적은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얼음 위에서 콩콩 뛰었다. 얼음 덩이가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것이다. "사부님, 이 얼음 덩이가 왜 이렇게 차가운가요?" 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것은 천 년 묵은 얼음 덩이란다. 그러니 다른 얼음 덩이보다 찰 수밖에……." "사부님, 사부님께선 이 얼음 덩이 위에 앉아 있어도 춥지 않아요?" 이 물음에 여인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오랜 세월 차디찬 얼음 덩이 위에 앉아 있었지만 누가 한 번 이렇게 물어 보아 주었던가? 구양적의 이 물음은 여인의 가슴속에 오만 가지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서역에서 유명한 백면라살 수라아(修羅兒)라는 이 여인은, 자기 원수와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고 도처로 피해다니다가 결국 이 얼음 동굴 속에 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적아, 보아하니 넌 자질이 있는 것 같구나. 나를 따라 무예를 익힐 생각이 있느냐?" "좋아요, 정말 좋아요." "네가 원한다면 무예를 전수해 주겠다. 지금 네가 찬 얼음판 위에 앉아 있으니 오늘은 얼음판 위에서 앉는 법부터 가르쳐 주마." 그러나 구양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사부님께 배울 수가 없어요. 우선 집에 돌아가 동생한테 먹을 걸 마련해 준 다음 다시 올게요." 이 말에 여인이 발칵 역정을 냈다. "네 동생이고 뭐고 다 귀찮으니 잔말 말고 여기 있거라. 내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살아 있을 줄 아느냐?" 구양적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인의 말이 옳았다. 여기 있으라고 하니 있어 보자. 무예를 얼마간 배운 다음에 나가서 동생한테 먹을 걸 얻어다 주어도 되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구양적이 대답했다. "좋아요, 사부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이리하여 구양적과 여인은 빙판 위에 마주앉게 되었다. 여인은 그에게 기이한 무예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氣)를 단련하는 법이었다. 한 손은 곧게 앞으로 뻗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손은 뒤로 뻗어 손바닥이 땅을 향한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천지팔황유아독존(天地八荒唯我獨尊)'이라는 것이었다. 워낙 총명한 구양적인지라 한 번 보고는 단번에 그 표리를 터득 하고 말았다. 여인은 몹시 기뻐했다. "훌륭하다, 참 훌륭해. 너 같은 자질을 가지고 무슨 무예인들 못 익히겠느냐? 3, 4년만 있으면 이 '천지팔황유아독존'을 몸에 익힐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3, 4년이나 걸린다구요? 그럼 전 그만두겠어요!" 여인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만두겠다는 거냐?" "동생한테 먹을 걸 구해다 줘야 해요……. 내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한단 말이에요." 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적아, 네가 내 제자냐, 아니냐?" 구양적이 머리를 끄덕이니 여인이 냉소를 했다. "그럼 됐지 않느냐? 내 제자라면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네 동생이 너에게 부담거리가 된다면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어라." 여인의 냉정한 말을 들은 구양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여인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동생을 돌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야. 내가 돌봐 주지 않으면 그 앤 굶어 죽고 말거야. 반드시 집에 돌아가 먹을 걸 얻어다 주어야 해. 내가 없으면 그 앤 울며불며 날 찾을 거야.' 구양적은 한참 궁리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오줌이 마렵습니다." "이 동굴 안에서 오줌을 누어라." "사부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은 차갑게 말했다. "할말이 있으면 해라!" "사부님의 동굴에서 오줌을 싸는 게 좀……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이 생길 텐데, 그러면 사부님의 동굴 안에서 지린내가 진동할 겁니다. 이렇게 깨끗한 데다 오줌을 눌 순 없습니다……." 그녀는 이 꼬마가 꾀를 부리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으므로 수월하게 응낙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럼 동굴 밖으로 나가서 오줌을 누도록 해라." "사부님께서 절 동굴 밖까지 데려다 줄 수 없는지요?" "난 동굴 밖에 나가기 싫다. 너 혼자 가려무나." 구양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어 버리자 여인이 물었다. "한숨은 왜 쉬는 거냐?" "전 사부님이 강호에서 제일 이름 높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사부님을 모셨으니 앞으로 밖에 나가 자랑스럽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어요……." 여인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지?" "그건…… 말씀 드리기가 거북합니다." 여인은 아이의 꾀에 넘어가 계속 따져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스승이 물으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 거다. 대답을 안 하면 널 죽여 버릴 테니까." "전 사부님께선 무예가 비범하시니 날개가 돋친 듯 동굴 속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재주가 없으면 사부님께서 어떻게 이 동굴 속에 계실 수 있겠어요? 그래 내가 한 마음으로 사부님께 배운다면 무예를 다 익힌 뒤 이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이 동굴을 벗어나시지 못하는데 제가 무 예를 다 배운들 어떻게 동굴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이 말에 여인은 화가 나서 대꾸했다. "어떻게 내가 이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단정하느냐?" 구양적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응수했다. "사부님께서는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없는 게 분명해요. 동굴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면 왜 이 추운 얼음 동굴 속에서 고생을 하시겠어요? 보아하니 사부님의 재주로도 이 동굴을 빠져 나갈 수 없는 것 같으니 전 무예를 안 배우겠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무예는 배워서 뭐하겠습니까?" 여인은 더욱 화가 났다. "내가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 여인은 구양적을 들어 올렸다가 공깃돌 팽개치듯이 저쪽으로 휙 던져 버렸다. 구양적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 뼈가 다 부스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데도 상하지 않고 몸뚱이가 가볍게 바닥에 닿는 것이 아닌가? "어때? 아직도 내 재주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구양적은 더 이상 까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사부님의 무예가 쓸모 없다고 대꾸한다면 필시 그녀의 화를 돋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스승이 정말로 성깔이 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는 끝장이지 않은가. 구양적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사부님, 무예가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길고 긴 세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동안 여인은 자기의 무예를 칭찬해 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구양적의 갈채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구양적의 청을 순순히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내가 당장 널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 주마." 말을 마치자마자 여인은 구양적의 뒷덜미를 턱 잡더니 얼음 바닥에서 몸을 몇 번 굴렀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동굴 입구에 닿았다. 동굴 입구의 얼음벽은 아주 두터웠다. 구양적은 여인이 밧줄 같은 것을 가지고 기어오르려니 짐작했는데 여인은 몸만 솟구치면서 간단히 오르는 것이 아닌가? 얼음벽에 붙었다가 다시 몸을 솟구치면 한층 더 높은 벽에 올라 붙고……. 이렇게 서너 번 몸을 솟구치더니 두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 있는 곳에 이른 것이다. '난 이 동굴을 벗어나는 법부터 배워야 해. 그런 재주가 없으면 맨날 동굴 속에 처박혀 있다가 얼어 죽을 거야.' 구양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여인은 몸을 훌쩍 날려 산꼭대기 위에 올라섰다. 구양적이 산 아래를 굽어보니 백타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이라 집집의 등불들이 하늘의 잔별들처럼 촘촘히 깔려 있었다. 동생을 생각하니 구양적은 또 조바심이 났다. 동생이 날 찾으며 울고 있지나 않을까? 구양적은 여인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 전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얼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뛰지도 못했는데 뒤에서 자꾸만 몸뚱이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도망치려고? 어림도 없어!" 구양적은 애원했다. "도망치려구 그러는 게 아니구요……, 동생이 보고 싶어 그래요!" 여인은 살기등등한 어조로 위협했다. "내 말을 거역하면 네 동생을 죽여 버릴 테다!" 구양적은 새파랗게 질려서 애걸했다. "사부님, 제발 동생을 죽이지 마세요. 제발 제 동생을……." "좋아,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면 네 동생은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말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네 동생을 죽이고 뼈까지 가루를 내어 얼음 동굴 바닥에 처넣고 말 테다!" "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매일 밤 네 동생이 잠들면 이 동굴로 찾아와 무예를 익혀야 한다. 만일 하루라도 오지 않으면 네 동생이 죽는 줄 알아라." "사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여인은 아직도 구양적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차분하게 들려 왔다. "적아, 우리 둘이 지내 온 지도 어언 10여 년이 지났구나." "11년입니다. 11년하고도 23일이 지났습니다." 여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적아, 이제는 내 곁을 떠나도 괜찮다. 네 동생을 해치지 않을테니 걱정 말아라. 네가 이미 무예를 몸에 익혔으니 말이다……." 구양적은 따스한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사부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동안은 아무래도 사부님 곁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여인이 깜짝 놀랐다. "적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얼마 전에 영지상인과 팽연호한테서 중원에 무림비적(武林 籍)이 유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책을 《구음진경》이라 부른답니다. 무예의 보고라고 하는데 그 학문과 술법이 넓고도 깊다는군요. 제가 중원에 가서 그 책을 구할 생각입니다. 그 책 속에 사부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비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인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구음진경》이라? 난 왜 지금까지 그 책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 봤을까?" "저도 얼마 전에야 들었습니다. 중원에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책을 구하기만 하면 그 길로 돌아오겠습니다." 여인은 구양적의 몸에 기대어 속삭였다. "적아, 내 병은 낫기 어려울 거야. 네가 가든 말든 난 개의치 않겠다. 하지만 여기 남아 내 동무를 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사부님 병은 꼭 고칠 수 있습니다. 사부님의 병을 고친 다음 함께 그 원수를 찾아가 복수를 합시다." 이 말에 여인의 두 눈에 빛이 번뜩였다. "네……네가 정말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정말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구말구요!" 두 사람은 더욱 힘차게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백면라살의 몸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적아, 난 무섭구나. 이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동굴 밖으로 나가 세상 사람들을 대하기가 두렵단 말이야." "두려울 것 없어요. 누구든 사부님을 흉보면 제가 한칼에 요절을 내겠습니다!" 구양적은 여인을 위로했다. 제10장 난쟁이의 노리개 구양봉은 자신이 모용쟁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형 구양적이 돌아와야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백타산군의 뒤 꽁무니를 따라 백타산장까지 부득부득 쫓아가려 했다. 그런데 쌍검 옥문과 쌍환 기노가 뛰쳐나와 앞을 가로막고 구양봉을 노려보면서 호통쳤다. "계속 따라오면 죽여 버릴 테다!" 옥문이 쌍검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구양봉은 너스레 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더 쫓아가지 않겠소." 쌍환 기노가 입을 열었다. "구양적이 돌아오면 쫓아오라고 해라." 그 말은 구양적이 백타산장까지 쫓아와도 무섭지 않다는 뜻이었다. 구양봉은 멀쩡하게 서서 난쟁이가 모용쟁을 끌고 백타산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구양봉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놈들이 차근차근 이치를 따지기 전에 사람을 베고 죽일 줄만 아니, 무기력한 그로선 방법이 없었다. 그는 구씨 할멈과 가시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형을 찾으러 가거라. 찾으면 모용 낭자가 또 백타산장 놈들한테 끌려갔다고 알려라." 구씨 할멈과 가시는 분부대로 부랴부랴 구양적을 찾으러 떠났다. 구양봉은 먼발치에서 슬금슬금 옥문과 기노의 뒤 꽁무니를 밟아 백타산장에 이르렀다. 뒤에 숨어서 살펴보니 기노와 옥문이 입구에서 파수를 보는 졸개들한테 뭐라고 명령을 했다. 이윽고 졸개들이 허궁다리를 내려놓자 두 사람은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백타산장은 방비가 엄밀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까짓 백타산장이 뭐 대단한 게 있겠어! 난 임안의 황궁에도 들어가 보았어! 백타산장의 방비가 아무리 엄밀하다 해도 황궁보다야 더하겠어? 땅거미가 지면 산장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오늘은 난쟁이 놈이 대관절 어떻게 노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테야.' 이렇게 작심한 구양봉은 구석에 앉아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머리 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오늘 형님이 계셨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을까? 두말할 것 없이 형은 큰 싸움을 벌였을 거야. 형은 서역의 일인자니까 손을 쓰기만 하면 놈들은 지탱해 내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형은 난쟁이와 무예를 겨루어 본 적이 없잖아? 형이 과연 난쟁이를 이길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구양봉의 생각은 자연히 모용쟁한테로 옮아갔다. '모용쟁은 자존심이 강하고 무예도 출중한 낭자가 아닌가? 총명하긴 하지만 쉽게 성을 내는 성깔 사나운 여자이기도 하지. 만일 낭자가 정신이 들어 난쟁이를 마구 욕한다면 죽음을 자초할 수도 있어…….' 구양봉은 형 생각, 모용쟁 생각으로 골몰하다가 날이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형이 달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구씨 할멈과 가시가 그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혼자 백타산장으로 숨어 들어가 모용쟁의 행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날은 벌써 새까맣게 저물었고, 산장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산장 입구에서는 몇몇 파수꾼들이 모여 앉아 투전놀이를 하느라 왁자지껄했다.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일 구양봉의 무예가 뛰어났다면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 쥐도 새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는 입구로는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파수꾼들이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면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그 래서 그는 벽을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담벽 꼭대기에 기어오른 그는 산장 안쪽을 살펴보았으나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날려 담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이 닿으면서 쿵 하고 육중한 소리가 났으나 다행히 그곳은 구석진 곳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는 스스로를 욕했다. '구양봉, 넌 정말 밥통이야. 남들은 무예를 익혀 몸이 그토록 날랜데 넌 이렇게 우둔하니……. 어떻게 이런 재주로 남을 구할 수 있겠느냐?' 그는 어두컴컴하고 후미진 구석에 몸을 숨기고 백타산장 안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주시했다. 구양봉은 커다란 방 근처까지 다가갔다. 방안에 등불빛이 환했으므로 그는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빠끔히 뚫어 놓고 방안을 훔쳐보았다. 바로 이 방에 난쟁이 백타산군이 있었다. 난쟁이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서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콩콩 뜀질도 하고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기도 했다. 뜀질을 할 때면 천장까지 솟아올랐다가 다시 의자 위에 떨어져 내리기도 했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기도 했다. 팽이처럼 몸뚱이를 돌릴 때는 어찌나 빨리 도는지 몸뚱이는커녕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문득 멈추어 두 눈을 부릅뜨고 앞에 있는 사람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난쟁이 앞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사막에서 구양봉과 모용쟁을 잡아죽이려 했던 사막의 사걸이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난쟁이 앞에서 두 손을 공손히 드리우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가 가르침을 받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