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4편 (14/64)

2026-09-24 21:22:51 조회 19
'형님은 어물어물 넘기는 일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그러나 그는 늘 형님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그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형님이 모용쟁에게 임안에서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모용쟁을 자기가 임안에서 데려온 여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구양봉은 속으로 우스우면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우악스러운 여인이 날 끌고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런 일인데, 날 따라 임안에서 이렇게 먼 사막까지 따라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뜻밖에도 모용쟁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둘째 도련님을 따라 임안에서 오는 길이 아니라 백타산 마을에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에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구양적은 모용쟁의 신색을 다시 살펴보고 나서야 갑자기 크게 깨달았다. '백타산군 임일천이 변태적인 인간이라더니 그게 참말이었군! 그는 여인과 보물을 밀실에 저장해 두는 걸 업으로 삼는다던데……. 이처럼 예쁜 여인이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그제야 사막의 사걸이 바로 이 모용쟁 때문에 동생을 죽이려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는 속으로 구양봉을 나무랐다. '둘째야, 임안에 갔으면 변화한 거리나 보고 오면 그만이지 하필이면 강호지사(江湖之士)의 행색으로 남의 일에 참견할 건 뭐란 말이냐? 우린 백타산 마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어찌 백타산군과 원수를 맺으려 했느냐? 네가 이 아가씨를 백타산 마을로 데려가면 더 시끄러운 일이 생긴다는 걸 왜 생각지 못하느냐?'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는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낭자께서 범의 아가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만도 예삿일이 아니었소. 내 생각엔 날이 밝기 전에 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 뜻밖의 말에 구양봉과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모용쟁은 구양적이 사막의 사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강호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감한 행동에 감동하여 저도 모르게 경모의 감정이 솟구쳤었다. 그런데 구양적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임일천과 시비가 벌어질까 봐 못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용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갑해져서 서러운 듯이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그럼 구양 대협(大俠)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면서, 소녀는 그만 떠나겠습니다." 구양봉은 그녀가 말 한마디 불쑥 던지고는 몸을 돌려 떠나가는 것을 보자 소리쳐 불렀다. "안 돼! 돌아오시오!" 모용쟁은 몸을 홱 돌려 구양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흥! 아무려면 도련님께서 나와 함께 임안까지 갈 작정은 아니겠지요?"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저렇게 지독한 여자에게는 '강 동쪽의 사자가 울부짖네'라는 옛시인들의 시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멍청인지 너한테 장가드는 날이면 그야말로 사자 한 마리를 데리고 사는 셈이지. 날마다 귀가 아프게 울부짖을 텐데 누가 그런 고생을 사서 한담? 뭐? 나더러 같이 임안에 가겠느냐구?' 그러나 형님을 만나 기분이 좋은 그는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아가씬 떠나기 전에 할 일이 한 가지 있소." 모용쟁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저더러 뭘 하라는 거예요?" 구양봉이 대답했다. "가기 전에 내 눈에 들어간 모래들을 꺼내 주어야겠소!" 모용쟁은 그가 이런 말을 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으므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구양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동생과 이 아가씨가 생소한 사이 같기도 하고 익숙한 사이 같기도 하여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보아하니 모용쟁은 구양봉의 말을 듣고 아주 난처해 하는 게 분명하므로 큰소리로 말했다. "봉아, 그거라면 내가 씻어 줄 테니 이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라!" 모용쟁은 속으로 구양봉을 욕했다. '뭐, 모래를 꺼내 달라구? 널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라, 이 바보야! 그때 내가 검으로 한 번만 찔렀다면 네가 지금 그렇게 살아 있을 줄 알아?' 그러나 모용쟁도 이제는 변고를 겪을 만큼 겪어 보았으므로 얼마간 조심성이 생겼다. '구양적이 옆에 있으니 계속 뻗대다간 이대로 빠져 나가기도 힘들 게 아닌가? 차라리 구양봉의 말에 응하는 척하다가 몸을 빼도 늦지 않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모용쟁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요! 제가 눈을 씻어 드리지요!" 모용쟁은 구양봉을 살며시 끌어당겨 먼 곳으로 데려갔다. 그 다음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손을 내밀어 섬섬옥수로 꽃송이를 꺾듯이 식지와 엄지로 구양봉의 눈꺼풀을 뒤집는데 그 모양이 실로 정겹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손으로 눈꺼풀을 뒤집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지 마세요! 당신 형님만 없으면 내가 칼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당신은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 버릴 거라구요." 한창 아름다운 상념에 빠져 흐뭇해 하던 구양봉은 모용쟁의 가시박힌 말에 기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러나 그 역시 지지 않고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아가씨가 밧줄로 날 묶어 놓은 것만 해도 큰 죄인데 모래를 뿌려 내 눈을 못 뜨게 만들었으니 죄가 더욱 커졌소. 아가씬 조만간 대가를 치러야 할걸!" 모용쟁이 속삭이듯이 대꾸했다. "당신은 구양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니 당당한 사내 대장부 아니에요? 그런데도 형님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훌쩍거리니 그래, 아녀자들과 다를 게 뭐가 있어요?" 그녀는 온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구양봉과 입씨름하고 있었으므로 먼 곳에 있는 구양적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마 저 여자가 의협심이 강한 둘째에게 반해 버린 모양이야! 그렇다면 저 여자를 쫓아 버리려 한 나의 언행이 너무 모질지 않은가?' 이 순간 모용쟁이 얼굴에 웃음을 담은 채 입으로는 악랄한 말만 골라 퍼붓고 있음을 구양적이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는가? 구양봉은 비록 무예는 몰랐으나 담은 보통이 넘게 큰 사람이니 모용쟁의 한두 마디 위협에 겁을 집어먹을 리가 없었다. 그 역시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속삭이듯 말했다. "모용쟁이라……. 그 이름 참 듣기 좋구먼. 전부터 강남 모용 가문 규수들의 자색이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모용 가문 아가씨들은 무예에도 능하고 얼굴도 예뻐서 사람마다 부러워할 만하오!" 모용쟁도 젊은 아가씨인지라 칭찬해 주는 말을 듣자 속으로 흐뭇하고 뽐내고도 싶었다. '이 사람이 재주는 신통찮지만 꿀 발린 소리는 참 잘하거든! 상대방이 이렇게 추어주는데 계속 눈살을 찌푸리고 냉대할 수야 없지!' 그녀는 짐짓 구양봉의 말에 취한 듯한 태를 냈다. 그러자 구양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아가씨에게 배울 게 있소!" 모용쟁도 웃으며 대답했다.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모용 가문의 두 가지 재주는 실로 절묘하기 그지없소. 한 가지는 바로 밧줄로 동여매는 것인데 이것은 '정견몽요(情牽夢繞 ; 정으로 끌고 꿈으로 묶는다는 뜻)'라 할 수 있지! 다른 한 가지는 모래알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는 건데, 이것은 '연인의 눈에서 모래가 나오게 한다(情人眼里出沙子)'고 할 수 있지! 내 말이 맞지 않소?" 그 말에는 모용쟁도 참을 수 없어서 훗 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멀리서 바라보는 구양적은 적이 놀랐다. 동생과 모용쟁이란 아가씨가 눈이 맞은 게 확실해 보였던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한 쌍의 금슬 좋은 원앙새 같았다. 모용쟁은 입으로는 혹독한 말들을 내뱉었지만 손으로는 구양봉의 눈꺼풀을 뒤집어 입김을 훅 불어서 모래알을 불어 날렸다. "이젠 됐지요?" 모용쟁이 물었다. 난생 처음으로 한 여인과 이토록 가까이 있어 본 구양봉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져서 더는 경박한 언사를 던질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가까이 다가온 구양적은 이 두 사람이 정이 철철 넘치는 눈길을 주고받는 모양을 보고는 자기의 추측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과연 내 짐작이 맞구나.' 모용쟁이 말했다. "구양 도련님, 이젠 가도 되겠지요?" 구양봉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황망히 대답했다. "그, 그럼……. 가도 되고말고요!" 모용쟁은 가볍게 웃고 단도를 줍더니 두 사람에게 읍을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구양적이 소리쳐 불었다. "아가씨, 잠깐만!" 모용쟁은 멈춰 섰지만 몸은 돌리지 않은 채 차디찬 어조로 물었다. "이번엔 무슨 말씀이지요?" 구양적이 말했다. "방금 아가씨가 백타산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난 아가씨의 용기에 무척 탄복했소. 내가 아가씨에게 혼자 길을 떠나라고 했는데 너무 무심했던 것 같소. 아가씨가 혼자 사막을 걷자면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괜찮다면 우리 집에 며칠 묵다가 중원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려 함께 떠나는 게 어떻겠소?" 그의 말에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형님은 일처리에 몹시 신중하여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절대 걷어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형님은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단정해서 모용쟁에게 이처럼 살갑게 대해 주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사막에서 하루내 원수처럼 아웅다웅 싸움만 했지 다른 감정은 조금도 없는데……. 구양봉이 입을 열려는 순간 모용쟁이 꾀꼬리 같은 목소 리로 앞질러 대답했다. "그래 주신다면 구양 도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겠어요!" 모용쟁으로서는 내심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구양적이 옆에 있으면 임일천도 날 붙잡기 어렵겠지. 이 사막에서 나 혼자 천리를 도망간들 백타산군의 천하라 몸을 빼기 어려울게 아닌가? 옛사람들이 '천난만험, 막약적담(千難萬險, 莫若敵膽)'이라고 했듯이,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가도 적의 심장 속에 움츠리고 있는 것보다 못한 것이니, 백타산 마을에 숨어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할 거야.' 모용쟁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전 오래 전부터 구양 대협님께 경모의 정을 품어 왔답니다. 그렇지만 제가 댁에 묵게 되면 구양 대협께 시끄러운 일이 생길 텐데 그 일을 어찌합니까?" 구양적이 그 걱정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용쟁의 말을 듣자 오히려 호기가 치밀었다. '서역의 제일 실력자인 내가 어찌 임일천이 무서워 우물쭈물하는 꼴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이른 구양적은 점잖게 말했다. "아가씬 걱정 마시오. 이 서역에선 나 구양적이 첫째가는 인물이니 임일천이 내 목숨을 빼앗자 해도 쉬운 일이 아니오!" 모용쟁은 바로 이 대답을 기다렸던 것이다. 구양적이 내 뒤를 봐준다면야 무서울 것이 뭐람? 그녀는 몹시 기뻤지만 입으로는 딴전을 부렸다. "구양 대협님, 그래도 조심스럽게 처사하셔야 해요! 백타산 마을이 산군의 지반이라서 당신이 비록 그의 관할 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 해도 토주(土主)와의 관계를 섣불리 처리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와 완전히 사이가 벌어진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없지요." 모용쟁의 말 속에 자기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가득 담긴 것 같아 구양적은 내심 아주 감동했다. '아녀자도 이렇듯 날 걱정하는데 사내 대장부가 여인 하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러고서야 어찌 서역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으리? 나와 산군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지만 이번에 그가 기어이 이 연약한 여인을 욕보이려 든다면 난 반드시 보호해 주어야 할 거야.' 구양적은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냉랭하게 물었다. "모용 아가씨, 그렇다면 아가씨가 날 믿지 못한다는 말씀이오?" 모용쟁은 속으로 구양적의 심사를 더 이상 돋우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구양씨 댁에 몸을 의탁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구양적의 힘에 의지하여 백타산군 수하의 사람들에 대처하자는 것인데 구양적의 미움을 사서야 될 말인가? 모용쟁은 방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구양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녀로선 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구양봉은 일이 잘못 꼬여 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 보면 사내가 둘이나 있으면서 이 넓은 사막에 여자를 혼자 내보낸다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모용쟁이 자기 집에 묵게 되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구양적은 구양봉과 의논하지도 않고 자기 혼자 이 일을 매듭지어 버렸다. 구양적은 동생을 키우다시피 한 사람이었으므로 동생이 형의 생각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구양봉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은 여전했다. 형이 우선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동생 역시 모든 것을 형님한테 의지하면 머리 아플 일이 없어서 좋았다. 세 사람은 함께 백타산 마을로 돌아왔다. 백타산 마을 동쪽에 두 채의 자그만 초가집이 있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세워져 있는 이 두 채의 작은 집에 백타산 마을의 유명한 인물들인 구양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문무가 뛰어났으므로 백타산 마을에서는 물론이고 전 서역에서도 소문나 있었다. 이 자그마한 초가집에서 그들 형제가 늙은 몸종 구씨 할멈과 나이 어린 계집종 가시와 함께 살고 있었다. 구양적은 집에 들어서자 구씨 할멈과 가시를 불러 모용쟁과 대면시켰다. 두 여인은 인사하러 나왔다가 모용쟁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큰 도련님과 작은 도련님은 복도 많으시지! 어디서 저렇게 예쁜 색시를 데려왔을까?' 그들은 온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모용쟁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시간이 왜 흘렀다. 하루는 두 사람이 구양적을 만나러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서역에서 뛰어난 무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대장밀종(大藏密宗 ; 티베트의 라마교를 뜻함)의 실력자로서 서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영지상인(靈智上人)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북, 산서 일대에서 꽤나 이름난 사나운 비적으로 천수인도(千手人屠)라 불리는 팽연호(彭連虎)였다. 두 사람 모두 구양 적 형제와 나이가 비슷했는데, 일찍부터 구양적의 높은 명성을 흠모하던 나머지 그를 만나려고 먼길을 찾아온 것이다. 구양적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소개를 듣고나서 곧 자리를 권하고는 함께 강호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늦게 알게 된 것을 통탄하면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지상인이 말했다. "구양 대협께 한 가지 여쭤 볼 일이 있습니다." 구양적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든 사양하지 마십시오." "중원 무림에 큰일이 일어났다는데 구양 시주께선 아십니까?" "우리 형제는 이 백타산 마을에 은거하여 살아가는 형편이라 바깥 세계의 일에 대해서 거의 아는 일이 없습니다. 중원의 무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요?" 영지상인이 대답했다. "오래 전에 황상(黃裳)이라는 한 기인이 살고 있었지요. 휘종 황제 시절에 태어난 사람인데 휘종 황제의 정화년간(政和年間)에 황제로부터 천하의 기서(奇書)들을 찾아내어 다시 찍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들이 아주 많아 그 수가 5천 4백 82권에 달했고 만수도장(萬壽道藏)이라 불리었지요. 황상은 책을 찍는 일만 관리했는데, 혹여 책을 잘못 찍기라도 하면 황제가 죄를 물을 까봐 한 권씩 자세히 읽어 내려가는 중에 뜻밖에도 도학에 정통하게 되어 무공상승(武功上乘)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합니다. 그는 집에서 내공과 외공을 수련하여 무림의 실력자가 되었는데, 후에 책 두 권을 써냈다 합니다. 이 책이 《구음진경(九陰眞經)》인데 지금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의 손에 있답니다. 우리들 소견으로는 만일 구양 시주가 우리와 함께 왕중양을 찾아가 그 책을 내 놓으라고 하면 그가 우리 말을 따르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천하 무학(武學)의 비적(秘籍)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구음진경》을 얻게 된다면 말 그대로 천하를 누벼도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니, 두려울 게 없을 것 아닙니까?" 구양적은 구미가 동하는 듯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젊고 재능 있는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은 본디 무예가 뛰어났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음진경》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범에게 날개가 돋친 격이군요. 우리가 수중의 무학기서를 내놓으라 한들 그가 순순히 내놓겠소? 만일 그가 내놓지 않을 때에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한켠에 있던 천수인도 팽연호가 말했다. "그가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우리가 힘을 모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구양적도 비록 사악한 일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으므로, 팽연호가 입을 열자마자 사람을 죽인 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용맹한 점을 빼놓고는 아무 장점도 없으니 이런 사람과 함께 《구음진경》을 구하러 간다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야. 만일 왕중양이 책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다짜고짜 죽이려 들 테니, 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닌가? 이런 사람과 함께 일을 하다간 뒤가 좋지 않아!'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두 분의 뜻이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영지상인이 급히 물었다. "타당치 않은 점이 있으면 구양 대협께서 일깨워 주십시오." 구양적이 대답했다. "제가 전진교의 왕중양을 잘 알고 있는데 중원 무림에 그보다 실력이 나은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가 《구음진경》을 얻지 못했을 때에도 실력이 우리들이 비길 바가 못 되었는데 이제 《구음진경》까지 얻었으니 그의 무예가 엄청나게 늘었을 것 아닙니까? 그의 손에 이미 책이 들어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 불원천리 중원까지 찾아갔다가 남의 손에 죽는다면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지상인은 비록 출가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여전히 폭약같이 급한 사람이었으므로 큰소리로 외쳤다. "좋소이다! 우린 그를 죽이지 않고서도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소이다!" 구양적은 한탄했다. "그게 어디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만약 그의 《구음진경》이 순순히 대사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것은 소문처럼 훌륭한 책이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또 만약 그것이 참말로 천하의 기서라면 대사가 그를 찾아간다 해도 꼭 패하게 될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입니다." 영지상인은 말이 없었다. 그도 구양적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중원에 이러한 기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가슴 속에서 탐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니 그 기서를 수중에 넣지 않고는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양적의 말을 들어 보니 그는 자기들처럼 이 경서를 탐내는 것 같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즉시 구양적에게 읍하며 말했다. "구양 대협께서 힘을 쓰지 않겠다고 하시니 저희들은 이만 물러 가겠소이다!" 구양적이 말했다. "이렇게 급히 가실 필요야 있습니까?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다가 가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영지상인이 말했다. "구양 대협께서 중원에 가시지 않는데 저희들이 댁에 묵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일이 급하니 이만 떠나겠습니다." 두 사람은 읍을 하고 나서 떠나 버렸다. 제9장 얼음 동굴 속의 여인 구양적이 영지상인과 팽연호의 청을 거절한 뒤로 구양씨 집안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구양봉은 여전히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되겠다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벽 한쪽을 채운 책들을 마주하고 책 읽는 시늉을 했지만 생각은 딴 데로 굴러가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얼마 전에 그는 형에게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거듭 애원했지만, 형은 허락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이유도 말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임안에서 겪었던 일과 사막에서 모용쟁과 겪었던 일들을 돌이켜볼 때마다 그는 언제나 안절부절 못했다. 사람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손에 비껴 든 장검으로 은인께 보답하고 원수에게 복수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모용쟁은 그들 형제들과는 별로 말도 하지 않고 하녀들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그녀는 서둘러 길을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구양 형제도 이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가시와 구씨 할멈은 모용쟁을 좋아했고 내심 그녀를 구양 가문의 사람으로 생각하여 그녀한테 아주 곰살맞게 굴었다. 구양적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집에는 구양봉과 모용쟁, 그리고 구씨 할멈과 가시 네 사람이 남아 있었다. 구양봉은 심심한 터에 책 한 권을 들고 모용쟁을 찾아가 한담을 나누었다. 그들 집에 얹혀 사는 처지였으므로 모용쟁은 사막에서의 그날 밤처럼 구양봉에게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강남의 모용 세가(世家)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암(靜庵) 일파로부터 무예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사부(辭賦)에도 조예가 있었다. 사막에서 함께 지내던 날 밤에도 그녀가 구양봉을 놀려 주려고 시구로 응수를 했는데, 조금도 막힘 없이 술술 흘러 나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