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2편 (12/64)
그런데 그들 일행 네 사람이 구양봉과 여인이 숨어 있는 곳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외쳤다. "큰형, 우리 여기서 잠시 쉽시다. 컴컴해서 걷기도 힘드니 여기서 쉬다가 내일 해가 뜨거들랑 떠납시다." 이어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하는 소리도 들렸다. "오빠, 어둔 밤중에 사람 찾기도 쉽지 않으니 좀 쉬고 가지요. 우리가 벌써 그 년을 따라잡았는지도 모를 일 아니에요?" 큰형이라고 불린 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모두들 지쳤으니까 좀 쉬도록 하자." 구양봉이 겨우 눈을 뜨고 보니 달빛 아래 네 사람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구양봉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팔베개를 한 채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네 사람은 네모꼴 모양으로 누워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머리를 안쪽에 두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여인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온몸을 구양봉의 품에 맡기고 기대 왔다. 그녀는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을 생각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구양봉의 손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구양봉은 방금 전까지도 사나운 기세로 펄펄 뛰던 여인이 자기 품에 안겨 머리도 들지 못하는 것을 보자 슬그머니 우스웠다. '이제야 여자다운 맛이 조금 나는군 그래!' 구양봉은 머리가 한결 맑아졌으므로 묶인 자국이 선명한 팔뚝을 만지며 네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었다. 지척에 누워 있는 탓에 말소리가 매우 똑똑히 들렸다. 여인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매우 길었다. 그러자 여러 사형(師兄)들이 묻는 것이었다. "사매, 한밤중에 웬 한숨이야?" 여인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 여잘 붙잡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잘 붙잡지 못하면 우리가 호된 꾸중을 들을 텐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여러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큰형이라 불리는 목소리의 임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옥문 사매, 네 마음은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제자들이 사부님의 일을 막을 수 있나? 게다가 사부님은 가련하단 말이야……." 이 말을 하면서 그는 감정이 격해지는지 목이 메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구양봉은 이 네 사람이 백타산군 임일천(任一天)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큰형이라는 사람은 '사막의 독수리'로서 어거풍(於去風)이라 불렸고, 쉰 듯한 목소리의 사내는 회인만도(回人彎刀) 마혁(馬赫)이었으며, 여인은 서역에서 이름난 미인 쌍검(雙劒) 옥문(玉雯)이라 불렸고, 줄곧 침묵을 지키는 나머지 한 사람은 쌍환(雙環) 기노(祁怒)였다. 그들 네 사람은 10여 년 동안이나 서역을 종횡해 온 사걸(四傑)이고, 그들의 사부는 뱀을 지휘하여 황약사와 대적하던 난쟁이 임일천이었다. 그는 보통 사내들처럼 여인을 가까이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질이 점점 비정상적으로 변해 갔다. 그는 밖을 나돌아다니며 예쁜 여인들을 납치해다가 온갖 모욕을 주고 참기 어려운 형벌을 가했다. 그는 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암(靜庵) 사원의 제자 모용쟁(慕容箏)을 납치했던 것 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모용쟁을 보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녀와 맞붙어 싸웠다. 어린 모용쟁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므 로 두 합도 못 싸우고 붙잡혔던 것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모용쟁을 볼수록 그녀에게 끌리고 가슴에 기쁨이 일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검은 머리는 폭포같이 드리웠고 머리에 가려진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했으며, 두 눈은 기쁨에 넘친 것 같기도 하고 애수가 흐 르는 것 같기도 하여 형용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으니 말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백타산군이 된 이래 두 가지 일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나는 미녀 수집이고 다른 하나는 골동품 수집이었다. 그는 여자를 보는 눈도 남과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용모와 자태, 피부색을 보았으나 그가 여자를 보는 눈은 정말 특별했다. 머리는 반드시 검은데다가 어깨까지 드리우지 않으면 구름발처럼 높이 틀어 얹어야 좋아했으며, 머 리결이 부드러워야 좋아했다. 얼굴 모양도 보름달처럼 둥실하되 너무 긴 얼굴도, 너무 동그란 얼굴도 좋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팔뚝, 손가락, 심지어는 발까지 보는 것이었다. 발을 보는 안목도 매우 높아서, 발가락이 가늘고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며 종아리는 미끈하면서도 윤기가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여자를 까다롭게 가리는 것은 그 미인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골동품처럼 밀실에 저장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 는 여자들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모용쟁을 납치해 온 그는 그녀의 옷을 벗겨 탁자 위에 누이고 칠도대혈(七道大穴)을 눌러 입을 벌려도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 다음 하인들을 물러가게 하고는 탁자 옆에 높은 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렇게 해야 그의 눈높이가 모용쟁의 눈높이와 비슷했던 것이다. 그는 흡족한 기분으로 모용쟁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은 칠흑같이 새까맣고 흑 백이 선명한 두 눈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살짝 휘어진 눈썹은 멀리서 바라본 산봉우리 같았고, 상큼한 콧마루는 화를 내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모용쟁의 팔을 꺼내 그 작은 손으로 관상용 옥을 매만지듯 어루만졌는데, 쯧쯧 하고 혀를 차는 품이 사내의 욕정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모용쟁은 꼼짝없이 누워 분이 치밀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추악한 난쟁이 같으니라구!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 그 음탕한 손으로 날 만져? 두고 봐라. 내 손에 칼이 잡히는 날엔…….' 난쟁이 임일천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앞뒤 좌우로 모용쟁을 꼼꼼히 감상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했다. 꿈에 산을 유람하니 기이한 봉우리 어찌 한눈에 알랴 찾지 말라, 그 기상 여기 어두운 구석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그가 몸을 구부려 발을 만지자,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었는데도 간지러워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난쟁이는 머리를 흔들며 또 감탄했다. "미인이 길을 걸을 땐 사뿐사뿐, 미풍만 불어도 날려 갈 듯한 자태로 걷는데 그게 왜인지 아느냐?" 그는 모용쟁의 발가락을 매만지며 계속 말했다. "미인의 발이 너무 가냘퍼서 바람도 못 이겨내기 때문이야." 모용쟁은 그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인 그녀가 마음에 그리는 왕자는 귀밑머리를 멋지게 드리우고 영준하기 이를 데 없는 미남자였다. 키가 개 만큼밖에 안 되는 난쟁이가 그녀의 앞뒤를 부산히 돌아다니며 마음대로 주무르고 만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모용쟁은 임일천이 체구는 비록 작지만 여느 사내들처럼 여인을 능욕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절망스럽고 암담한 맘으로 이 난쟁이 손에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일천은 그녀를 요리조리 매만지며 감상하더니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이젠 널 놔줄 때가 됐단 말이야." 그는 조그만 손을 내밀어 모용쟁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모용쟁이 비록 그의 팔에 안기기는 했지만 난쟁이보다 몸집도 크고 훨씬 무거웠다. 하지만 난쟁이는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안은 채 몸을 휙 날려 땅에 사뿐 뛰어내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모용쟁 역시 아무런 흔들림을 느끼지 않았다. 난쟁이는 한 손으로 모용쟁을 받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뚜껑이 열리자 모용쟁은 깔짝 놀랐다. 이 상자는 겉으로 볼 땐 보통 상자와 똑같았는데 뚜껑을 열어젖히니 그 안은 보통 상자와 아주 달랐다. 상자의 사면에 숨쉴 공기 구멍이 나있었고 상자 안에는 크고 작은 구리 거울들이 튼튼하게 박혀 있어 그 안이 매우 밝았다. 상자 안의 여섯 면에는 큼직한 야광주가 꽂혀 있었고 양끝에 푹신한 베개가 놓여 있었다. 난쟁이가 우쭐한 어조로 말했다. "이 상자 괜찮지?"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모용쟁을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 그 상자를 의자 위에 올린 뒤 의자째 치켜 들고는 우쭐우쭐 걸어갔다. 침대 옆에 이르자 그는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잘 테니까 임자도 자라구. 내일 다시 보자! 좋지?" 난쟁이는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닫고는 침대에 뛰어올랐다. 한참 동안 뒤척거리다가 그는 다시 물었다. "상자 안이 침침할 거야! 그지?" 모용쟁은 이제 증오심이 사그라들고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상자 안은 촛불을 켠 방보다 훨씬 밝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피곤하여 곧 잠이 들었다. 한창 달콤한 잠에 빠져 일던 그녀는 상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한참이 지나자 상자 밖이 점점 훤해 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막힌 혈(穴)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임일천의 혈법이 너무나 괴이한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젠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맥을 놓고 있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 만 밖에서 상자를 들고 있던 사람이 힘이 약해서 떨어뜨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자가 널 보는데 나라고 왜 널 못 보겠느냐? 하지만 성인들은 도둑질도 양심적으로 하라고 했으니까, 널 구해 주기로 했다. 내가 뚜껑을 열어 줄 테니 이제 옷을 입는 게 어때?" 모용쟁은 그 말을 듣고 밖에 있는 사람이 상자와 함께 자기를 훔쳐 온 도둑이란 사실을 알았다. 처음엔 기뻐 어쩔 줄 몰랐지만 승냥이를 피하고 나니 범을 만난 꼴이 될까봐 두려웠다. 이 사람이 중얼대는 말만 들어 봐도 나쁜 사람 같아 더욱 의심이 갔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고 상자 뚜껑이 덜컹 열리는가 싶더니 금방 뚜껑이 닫혔다. '아이쿠! 벼락 같은 솜씨로구나!' 그 사람이 또 말했다. "옷은 방금 상자 안에 넣었어. 입고 안 입는 건 네 마음이지만, 내가 너라면 얼른 입을 거야. 다 큰 계집애가 옷을 그렇게 홀랑 벗고 나오면 감기 들기 십상이지." 모용쟁은 속으로 아우성을 쳤다. '이 멍청한 놈은 내가 지금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알고 있으니 어쩌지?' 그 사람이 또 말했다. "네가 움직이지 못할까봐 걱정이냐? 나올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모용쟁이 깜짝 놀라 몸을 움직여 보니 과연 몸이 움직여졌다. 그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모용쟁이 황급히 옷을 주워 입은 다음 뚜껑을 힘껏 밀어 보니 쉽게 열렸다. 모용쟁은 곧 상자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귀신이라도 만났단 말인가? 다시 몸을 돌려 상자 안을 들여다본 모용쟁은 더욱 놀랐다. 상자안에 튼튼히 박혀 있던 10여 개의 야광주와 크고 작은 청동 거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눈앞에는 뚜껑이 활짝 열린 상자뿐이었다. 모용쟁이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큰형이라고 불린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가 스승의 뜻을 거역하면 죄가 되는 거야. 게다가 사부님의 일은 우리와 큰 관계도 없으니 사부님이 사람을 찾아 오라고 하면 찾아다 드리면 될 게 아닌가? 공연히 맞서다간 된통 욕이나 보게 된다구!" 나머지 세 사람 모두 그 말에 수긍했다. 옥문이 탄식을 했다. "사람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 넷이 나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잖아요. 모용쟁을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부근에 있어야 하는데 아직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자꾸 시간을 끌다간 백 타산으로 돌아가기도 어렵게 될 텐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 만도 마혁이 큰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이 찾아 오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야지! 찾지 못하면 사부님은 화를 낼 거요!" 여러 사람은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구양봉은 그제야 줄곧 자기 가슴에 칼을 대고 위협을 하던 여인이 바로 도망쳐 나온 모용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날 그토록 잔인하게 대한 것은 임일천에게 능욕을 당한 보복으로 그런 것이었구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자가 여인과 골동품들을 수집해서 밀실에 저장해 둔다던데……. 이 아가씨는 산군에게 납치당했다가 도망치는 중이었군 그래!' 구양봉이 머리를 숙여 내려다보니 모용쟁의 아리따운 눈이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활랑거렸다. 그때 만도 마혁이 입을 열었다. "사형, 나 소피 좀 보고 오겠소!" 말을 마치자 그는 곧 몸을 일으켜 구양봉과 모용쟁이 숨은 곳으로 걸어왔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눈을 뻔히 뜨고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만도 마혁이 모래언덕에 올라서는 걸 보고 구양봉은 일이 더럽게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빛이 어렴풋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마혁과 몇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보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과연 만도 마혁이 급히 외쳤다. "큰형, 여기 사람이 있소!" 세 사람은 몸을 일으켜 화살같이 달려왔다. 구양봉과 모용쟁도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애썼다. 구양봉이 모용쟁을 도와 일으키려 했으나 모용쟁이 그의 뺨을 갈기며 부르짖었다. "사내들이란 좋은 물건짝이 하나도 없어! 당신을 죽여 버릴 테야!" 모용쟁의 얼굴을 알아본 네 사람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큰형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가씬 걸음이 몹시 빠르군. 우리가 아가씰 찾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몰라!" 모용쟁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난쟁이의 개들인 모양인데 날 찾아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한켠에 서 있던 만도 마혁이 말했다. "요 놈의 계집애,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도 되는 줄 아니?" 모용쟁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욕설을 퍼부었다. "욕뿐인 줄 아느냐? 네 놈들을 다 죽여 버리지 못하면 내 분이 안 풀릴 거다!" 말을 마치자 모용쟁은 단도 잡은 손을 획획 내두르면서 만도 마혁에게 달려들었다. 만도 마혁은 깜짝 놀라서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는데, 그가 피하자 칼이 더욱 빨리 육박해 왔다. 그는 번개같이 날아드는 칼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물러서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고래고래 소리쳤다. "큰형, 아무래도 이 년을 죽여야겠소!" 모용쟁을 빙 둘러싸고 서 있던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는데 큰형이란 사람이 소리쳤다. "사부님와 보배를 상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털끝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는 걸 사부님이 아시는 날엔 경을 쳐!" 만도 마혁은 펄펄 뛰며 소리쳤다. "이 년이 날 죽이려 든단 말이오! 이 년을 못 죽인다니 분통이 터져 죽겠소! 분해 죽겠단 말이오!" 그는 모용쟁을 칼로 찌르지는 못하고 이리저리 막고 피하기만 했다. 모용쟁은 그가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리자 칼을 더욱 빨리 휘두르며 일심으로 그를 죽이려 들었다. 몇 합 싸운 후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만도 마혁의 팔뚝이 모용쟁의 칼에 찔렸다. 단도가 매우 예리한지라 검이 팔뚝을 슬쩍 스쳤을 뿐인데도 가죽과 살이 뭉청 떨어져 나갔다. 그는 너무 아파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그러자 구경만 하던 세 사람 모두 모용쟁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큰 사형이란 자는 조용히 서서 모용쟁이 칼 쓰는 모양을 지켜 볼 뿐 진짜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둘째도 침착한 눈길로 지켜 보다가 모용쟁이 앞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번개같이 몸을 돌려 그녀의 길을 막곤 했다. 보아하니 그들 두 사람은 여자와 싸우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손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만 도 마혁은 모용쟁이 하도 악착스럽게 달려드는 통에 온몸에 식은땀이 밸 정도로 바빴다. 실상 그의 무예 실력으로 모용쟁쯤은 얼마든지 누를 수 있지만 그녀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니 피하기만 하다가 당한 것이다. 그래도 몇 번은 화가 솟구쳐 주먹을 심하게 다루려 했지만 그때마다 큰 사형이 제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칼로는 상대방을 찌를 수 없는데 상대방의 칼은 수시 로 자기를 죽이려 드니 온몸에 땀이 밸 수밖에. 한켠에 있던 옥문이 웃으며 말했다. "모용쟁, 아가씬 사부님의 보배니까 우리를 따라 순순히 돌아가기만 하면 사부님이 아가씰 박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렇게 사서 고생할 필요 있어요?" 모용쟁은 이 말을 듣자 분이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너의 사부님이라고? 그자는 한 마리 개에 불과해. 서지도 못하는 난쟁이 개란 말이다. 오라, 이제 보니 너야말로 그 개의 보배인 모양이구나." 이 말은 옥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사부를 욕할 때 자기까지 함께 욕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으므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건방진 년, 네까짓 게 뭔데 그렇게 콧대를 세우는 거냐? 넌 우리 사부님이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가 심심할 때 꺼내 보는 노리개야! 내 말이 틀리냐?" 모용쟁은 이 말을 듣자 너무 분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놈들을 한둘쯤 죽이지 않고서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구나. 한데 이 네 놈이 다 실력이 만만치 않아. 이 여자와 만도라는 놈과 격투를 벌여도 힘에 부치는데, 저쪽 두 사람까지 함께 덤벼들면 내 목숨은 끝장난 셈이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손에 쥔 칼을 더욱 날카롭게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구양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우리 백타산 마을 체면이 저들 사제간에 의해 여지없이 똥칠을 한 셈이 되었구나! 저들은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는데다 임일천이란 자는 여인들을 납치해서 보석처럼 상자 속에 감추어 둔다니, 여인을 어찌 이처럼 노리개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천하에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구양봉은 곧 외쳤다. "당장 멈추시오! 내 말 좀 들어 보란 말이오!" 사람들은 그 소리에 손을 멈추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자 구양봉이 침착하게 말했다. "난 사두장(蛇頭枕) 구양적의 동생이오." 네 사람 모두 흠칫 놀랐다. 이 사막에서 활개를 치고 사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사두장 구양적이었던 것이다. 사두장 구양적은 괴이한 사람이라 평소에는 문 밖을 나서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성미가 포악하여 그를 건드린 자는 백타산 마을에 발붙일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이 바로 책벌레 구양봉이구먼?" 구양봉은 그가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 기뻐서 얼른 대답했다. "맞소, 내가 바로 구양봉이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쌀쌀하게 물었다. "당신 형님 이름만 대면 우리 네 형제가 벌벌 떨 줄 알았나?" 구양봉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으므로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오! 난 다만 여러분과 함께 이 불쌍한 낭자가 살길을 찾아 도망치도록 놓아주자고 의논해 보려는 것뿐이오."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정말 구양적의 동생인 모양이구나. 만약 우리가 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그 마귀에게 들통나는 날이면 후환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우린 지금 모용쟁을 잡아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 구양봉을 건드릴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하군.' 그들 중 쌍검 옥문이 머리가 빨리 도는 편이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구양봉에게 말했다. "구양 도련님, 당신이 우리 사부님의 여인을 꼬드겨서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어요. 돌아가서 사부님께 잘 말씀드리면 그분도 용서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이 여자를 데려가도록 길을 비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구양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뜻은 변할 수 없소. 당신들도 피와 살을 가졌다면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당신들 사부님이 하는 일들이 모두 인간의 도에 어긋난 짓들인데,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걸게 뭐요?"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큰소리로 반박했다. "허튼소리 하지 마시오! 당신이 뭔데 우리 사부님을 모욕하는 거요? 당신 형님의 면목을 봐서 그냥 놔 두지만 계속 우리 사부님을 욕되게 하는 말을 지껄이면 그땐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구양봉도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의 이름을 여러 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형 구양적은 원래 혼자 움직이길 좋아하여 그들 네 사람과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설사 그들이 형과 교분이 있다 하더라도 사부의 명령을 어기고 이 여인을 놓아줄 리는 없는 것이다. 이제 사정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아차린 구양봉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심 자기의 무술이 약한 것을 한탄했다. 만약 이 자리에 형님이 있었다면 그들 네 형제는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얌전히 서 있던 쌍검 옥문이 갑자기 말했다. "큰오빠, 내 생각엔 우리가 구양적이란 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