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11편 (11/64)
고향을 떠올리자 그는 밤낮으로 그리던 형님이 생각나면서 어쩐지 몹시 긴장되었다. 마을을 떠난 지 오래 되었으므로 그는 그 사이에 마을이 많이 변했을까봐 퍽 걱정되었다. 게다가 여인이 저주를 퍼붓는 바람에 그 속에 혹시 형님도 끼여 있을까봐 더욱 두려웠다. "아가씬 백타산 마을에서 떠나 오는 길이오?" 여인은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어떻게 백타산 마을을 알지요?" 구양봉은 천성대로 정직하게 대답했다. "난 그 마을 사람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더니 몸을 발딱 일으켜 구양봉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냅다 발로 차서 그를 쓰러뜨렸다. 구양봉은 영문도 모른 채 뺨을 맞고 발길에 차이자 다급히 외쳤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는 거요?" 여인은 눈물을 뚝뚝 떨구더니 목이 메어 말했다. "당신…… 당신…… 정말 백타산 마을 사람이에요?" 구양봉은 사람 좋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그렇소." 여인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이 여인이 화풀이로 독한 말을 내뱉는 줄 알고 내심 우스웠다. 이토록 예쁜 여인이 말끝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런데 여인은 토굴 안을 뒤져 끈을 한 오라기 찾아내더니 구양봉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더 이상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방글방글 웃는 품이 교태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표독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손뼉까지 치면서 깔깔 웃어댔다. "좋아요. 당신부터 시작해서 난 백타산 마을 사람을 하나 죽인 셈 치겠어요!" 구양봉은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백타산 마을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그만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당황한 그는 생각에 잠겼다. '부끄러운 일이다. 임안에서 고향까지 갖은 고생을 겪으며 겨우 돌아왔는데 형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막의 토굴집에서 생면부지의 여인 손에 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여인은 품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는 단도를 꺼내더니 예리한 칼끝으로 구양봉의 얼굴을 살살 그어 댔다. "당신네 백타산 마을엔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난 당신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본시 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가씬 정말 예쁘게 생겼구려." 여인은 구양봉을 죽일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뜻밖의 말을 듣자 손에 단도를 쥔 채 멍한 얼굴이 되었다. 구양봉은 이 기회를 타서 또 지껄였다. "아가씬 맘씨도 곱고 칼도 잘 쓰는데 이 밧줄이 좋지 않군! 나도 밧줄에 묶여 있으니 좋지 않고!" 구양봉의 말에 여인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이제 곧 황천에 갈 사람이 우스갯소리만 연발하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여인은 정신을 차리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잔말 말아요!" 구양봉은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 이죽거렸다. "아가씨 옷차림이 좀 남루하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되는군요. 워낙 예쁘니까 무슨 옷을 입어도 상관없소. '옷자락 날리고 정겨운 눈매 뜻깊네'란 옛사람의 시구도 못 들었소? 말 그대로 옷의 아름다움은 소매에 있고 사람의 마음은 눈길에서 읽을 수 있다는 뜻이오. 아가씨 같은 미인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소? 아가씬 손에 칼을 쥐고 입으론 끔찍한 말을 하고 있지만, 눈에 살기가 없으니 사람은 못 죽일 거요." 여인은 한참이나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걸 어떻게 알죠?" 구양봉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미 해가 높이 떴으므로 여인은 구양봉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스라한 사막을 총총히 걷기 시작했다. 10여 보나 걸었을까? 여인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구양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부턴 당신이 앞서 걸어요. 만약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이 단도에 찔려 죽을 줄 알아요." 구양봉은 여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체 망망한 사막이므로 큰길은 보이지도 않았고, 간혹 어지러운 발자국들과 짐승들의 자취, 그리고 이따금 풀포기가 눈에 띌 뿐, 인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구양봉은 길을 알아보고 나서 속으로 연방 욕을 해댔다. 여인이 그를 끌고 가는 길은 임안으로 통하는 옛길이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일이 참 더럽게 꼬여 간다고 생각했다. '중원에서부터 갖은 고생을 겪으며 이제 겨우 사막에 도착했는데 다시 임안으로 되돌아가다니,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여인에게 간절히 사정했다. "예쁜 아가씨, 제발 선심을 베풀어 날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게 해 주시오.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 여인은 가볍게 코웃음쳤다. "당신이 가 버리면 이 망망한 사막을 어떻게 나 혼자 지나가겠어요? 여자 혼자 가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당신이 나한테 미안하지 않겠어요?" 그 말을 듣고 구양봉은 여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입으로는 독한 말을 퍼부어 대지만 마음은 상냥한 여인이었구나!' 구양봉은 제꺽 대답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아가씨를 중원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혼자 가자면 적적할 뿐더러 어려움이 많을 테니 말이오." 여인은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구양봉을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꿀 발린 말을 잘하는 사내로군요. '사내가 말이 많으면 여자한테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말이 있는데, 당신 같은 사내를 두고 한 말 같아요. 나쁜 놈들과 맞닥뜨리면 난 그들에게 당신을 먼저 죽이라고 할 것이고,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나면 당신에게 먹을 것이나 물을 구해 오라고 할 거예요. 만약 음식을 찾지 못해서 정 배가 고프면 이 비수로 당신의 허벅다리에서 살점을 베어 낼 것이고, 갈증을 풀 길이 없으면 당신의 혈관을 끊어 피를 마실 거예요." 구양봉은 눈이 등잔만해지고 입이 헤 벌어져서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망망한 사막에 보이는 거라곤 모래뿐이었다. 바람을 타고 모래가 휙휙 날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모래바람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걷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여인은 칼을 구양봉의 등에 대고 그를 협박하면서 걸었지만, 나중에는 칼을 집어 넣고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모래가 심하게 휘날렸다. 여 인은 연신 헐떡거리면서 걸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구양봉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급히 외쳤다. "거기 서요! 멈추란 말이에요!" 구양봉은 멈춰 서서 그녀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여인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가슴에 칼을 대고 말했다. "당신……, 도망가려고 했지요?" 구양봉은 히죽 웃고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봐요! 이렇게 끝없는 사막에서 뛰면 어디로 뛰겠소?" 여인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흥, 도망쳐 보라지! 당신이 백 보를 앞섰다 해도 내가 뿌린 단도에 머리가 잘려 나갈걸!" 구양봉은 그녀가 횐소리를 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날 죽이지 않는 편이 나을 거요. 내가 죽으면 누가 아가씨와 동무해서 걷겠소?" 여인은 구양봉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우스갯소리를 지껄이자 그만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그를 겨누던 칼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뜨렸다. 여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진짜 정인군자일까? 아니면 교활한 놈일까? 겉으로 봐선 무척 부드러운 사람 같아. 한 번도 날 욕한 적도 없고. 만약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죄를 받아 내세에 태어나서도 고통을 당할 거야.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동행하면서 우스갯소리까지 주고받는 처지니 부부간이라 해도 사람들이 믿을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을 하다가 여인은 사막을 벗어나는 즉시 사나이를 죽여 버리기로 작정했다. 구양봉은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녀가 서슬이 퍼랬다가 다시 평화로워지는 등 금방금방 기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사를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악의를 품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만 마음이 약한 탓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심으로 한탄했다. '이 아가씬 어디서 큰 모욕을 당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이같이 행동할 리가 없지! 이 여인은 날 죽이려는 생각을 품다가도 차마 손을 대기를 두려워하는 거야. 이 점만 봐도 이 여인은 아직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해.' 구양봉이 물었다. "아가씨는 이름이 뭐요?" 여인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그건 뭐하러 묻는 거예요?" 여인의 날카로운 소리에 구양봉이 대답했다. "난 이제 아가씨 손에 죽게 된 몸이오. 그런데 지옥에 가서 귀신이 나더러 '누가 널 죽였느냐?'고 물으면 '어떤 아가씨가 죽였습니다' 하고 대답하란 말이오? 그러면 귀신은 날 멍청이라고 비웃을텐데, 이런 난감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여인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 생각엔 자신이 무엇인 것 같아요? 당신은 바로 멍청이고 바보예요. 내가 당신을 죽이면 이 세상에 바보가 한 사람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사내에게 기만당하는 불쌍한 여인도 한 명쯤 줄어들 것 아니에요?" 구양봉은 이 여인이 이토록 사내들을 증오하는 데 대해 내심 놀라면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제7장 사막의 밤 냉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사막의 밤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이지러진 달이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구불구불 기복을 이룬 사막은 어찌 보면 뱀 같기도 하고 코끼리같기도 했다. 반 조각밖에 안 남은 달이 뿜는 냉기 때문인지 사막의 밤은 한없이 고요하고 차가웠다. 두 사람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각각 자리를 잡고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안절부절못했다. 얼굴을 구양봉 쪽으로 돌리고 누우면 그가 자는 모습을 볼까봐 두려웠고, 등을 돌리고 누우면 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달아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망망한 사막에서 그가 도망간다면 날고 뛰는 재주가 있어도 붙잡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얼굴에 침울한 기색을 띤 채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그 사정을 알아채고 여인에게 말했다. "이 큰 사막에 우리 둘뿐인데 그렇게 체면 차릴 것 없소, 아가씨.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하룻밤 편히 누워 지내는 게 좋을 거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칼을 구양봉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그만 지껄여요. 나한테 알랑거릴 필요 없다구요. 날 건드리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거예요." 구양봉은 구겨진 기분으로 생각했다. '내가 점잖게 대해 주니까 더욱 기세등등해서 악담을 퍼붓는군. 애써 생각해 줘도 고마움을 모르는 여자라니까! 원수지간도 아닌 나를 죽일 궁리만 하니, 미친 개가 아무나 물어뜯는 격이 아니고 뭔가?' 여인은 옆에 꼬부리고 누워 소르르 잠이 들었다. 기척도 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품이 정말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잠든 척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으스스 추운데다가 배까지 고파 잠들 수가 없었으므로 모래 위에 쓸쓸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데 저 여자는 잠이 올까?' 하지만 여인이 잠든 척하는데 말을 걸 수도 없어서 앉아서 멍하니 달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반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의 눈앞에 어느덧 고향 백타산 마을의 초가집들이며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연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임안에 있는 잔월화각정루(殘月畵閣亭樓)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감회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시흥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외로운 몸에 긴 옷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도 손에 든 책 아무런 쓸모가 없네 달 향해 읊조려도 꽃은 화답이 없고 오로지 달만이 내 마음 알아주네 글벌레 책만 읽어 세상 물정 모르나니 도처에서 칼 번뜩여 이 세상은 피못이 되는구나 이제라도 칠척 장검 이 손에 비껴 들고 온갖 요사한 무리들을 단칼에 요절 내리. 한창 시흥에 젖어 코허리가 시큰해지고 있는데 냉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구양봉을 비웃고 있었다. "말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글깨나 읽은 모양이군요. 먹물 좀 먹었다고 아는 척하는데, 난 당신 같은 사람이 질색이에요. 당신 같은 사내들은 칼부림질이나 하는 사내들보다 더 나빠요. 칼부림하는 사내들은 일시적인 혈기를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지만, 당신 같은 사내들은 군자인 척하고 살생은 하지 않지만 천하의 살인 백정들은 다 당신 같은 사람의 개라구요." 구양봉은 말문이 막혀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는 삽시에 흥이 사그라져서 속으로 이 여인을 원망했다. '정말 막돼먹은 계집이로군! 내가 달을 흠상하고 시를 읊조리는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풍아(鳳雅)한 멋은 눈곱만큼도 없이 밤낮 칼이나 꼬나들고 살기등등해서 사람 죽일 생각만 하다니……. 이런 여인과 어떻게 말이 통하겠어?' 구양봉은 입을 다물고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여인은 그가 잠자코 있자 캐물었다. "왜 말이 없죠?" 구양봉은 덤덤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책 몇 권 읽고 풍월 좀 할 줄 안다고 해서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묶인 몸으로 사막에서 혼자 감흥에 젖어 달을 보고 지절거리니 그 꼴 참 우습군요." 구양봉은 한탄했다. "아가씨도 책을 읽고 예절을 좀 배웠더라면 교양을 갖추었을 텐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아가씨가 시를 모르니 한적한 사막에서 월하천리(月下千里)를 내다보는 멋을 알 리가 있소?" 그러자 여인은 구양봉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와 글 읽는 선비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깍듯하게 말했다. "도련님이 읊으신 운율에 맞추어 저도 한 수 읊지요." 구양봉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여인이 맑은 음성으로 줄줄이 읊어 대는 시구에 귀를 기울였다. 구름에 가려진 이지러진 달 찬 향기를 뿜어 사막의 다정한 연인들을 비추어 주네 손에 비껴 쥔 작은 검 휘둘러 천하에 으시대는 무리들을 깡그리 요절 내리 인생의 길은 캄캄하고 험난하여 앞에서 기다리는 건 검과 포승줄뿐이라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외로운 혼은 보이지 않고 어이하여 이 세상엔 악독한 무리들만 득실거리는고. 시를 읊으면서 처량한 기색을 띠고 한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구양봉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달빛이나 사막마저 얼음처럼 차게 대하는 걸 보면 필시 큰 충격을 받은 게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처럼 상심할 수가 없지! 저렇게 예쁜 여인이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됐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여인은 얼굴에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앙칼지게 말했다. "이봐요. 당신이 잘난 척하며 읊조린 그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읊을 수 있어요!" 여인은 칼끝으로 모래를 툭 쳐서 구양봉의 얼굴에 뿌렸다. 온 얼굴에 모래를 뒤집어쓴 구양봉은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을 휘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갔단 말이오!" 하지만 손이 묶여 있어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목이 터지게 고함을 질렀지만 여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아까처럼 또 시를 읊어 봐요. 이번엔 '모래바람에 눈뜰 수가 없고 포승줄에 이내 몸 묶였네'하고 읊고 싶죠? 저런, 눈물까지 흘리는군요! 이봐요, 지금이야말로 시 읊기에 제일 좋은 때 아닌가요? 어서 읊어 봐요!"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기세등등하게 우쭐거리는 여인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꾹 다물고 더럽게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젠 당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군요. 이 큰 사막에 우리 두 사람뿐이니 만약 당신이……." 말은 맺지 않았으나 뜻은 명백했다. 그녀는 구양봉이 자기에게 더럽고 무례한 짓을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기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구양봉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당장 여인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누그러져서 더 이상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이같이 심약한 여인이 어찌 이처럼 괴팍스러울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씬 화를 낼 필요가 없소. 내가 아가씨를 보지 않는 게 소원이라면 보지 않으면 될 것 아니오?" 이제 구양봉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모래 때문에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모래는 여전히 씻기지 않았다. 어깨에 대고 눈을 비벼 보려 했지만 공연한 헛수고였다. 구양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이 포승줄 좀 끌러 주지 않겠소? 아무래도 눈에 들어간 모래를 손으로 꺼내야겠소." 여인은 들은 척도 않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앉았다. 구양봉은 그녀가 아무 기척이 없자 포승줄을 풀 생각을 버리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눈알이 몹시 아파서 눈을 뜰 수도 깜박거릴 수도 없었다. 어찌나 아픈지 그는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어느새 한밤중이 되었다. 구양봉이 막 선잠이 들려는데 사람들이 터벅터벅 모래를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봐서는 여러 사람인 듯했다. 조금 쉰 듯한 목소리의 사내가 말했다. "산군께서 그 년을 꼭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잡아다 대령할 수밖에." 한 여인이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산군이 그 년을 붙잡으라고 시켰는지, 아니면 오빠가 그 년을 백타산 마을로 끌고 가려고 하는지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사내는 이 말에 얼른 대꾸했다. "넌 왜 자꾸 날 놀려먹으려 드니 ? 난 그런 심보는 품은 적이 없어. 자꾸 그따위 허튼소리를 지껄이다가 산군이 듣는 날엔 큰코 다쳐!" 여인은 픽 웃고 나서 비꼬는 투로 말했다. "산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벌벌 떨어요? 보기만 하고 먹을 줄은 모르는걸요. 도대체 예쁜 여자들을 그렇게 많이 수집해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매일 붙잡아 온 여자들을 만져 보고 가지고 놀기만 하니……. 그 여자들이 너무 불쌍해요."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말했다. "형제들, 보기만 하고 먹을 줄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디 한 번 말해 보게나." 그 말에 사람들이 와 하고 웃자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됐네, 됐어! 더 묻지 말라구. 이 사매(師妹)는 바로 자넬 놓고 말한 거야! 자네야말로 보기만 하고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잖아!" "내가 왜 보기만 하고 먹을 줄 모른다는 거야." 그의 말투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사매라고 불리운 여자는 그가 화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놀려먹던 태도를 고쳐 어린애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셋째 오빠, 제 말은 오빠가 잘생겼단 뜻이에요!" "동생 눈에 내가 잘생겨 보여?" 다른 사내가 대꾸했다. "맞아! 사매의 말은 자네가 제일 번듯하다는 뜻이야. 용모는 번안(潘安) 같고 재주는 자건(子建) 같은 영준한 도련님이란 뜻이지!"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크게 웃음보를 터뜨렸다. 일동의 웃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모두들 번안과 자건을 들먹이는데, 번안이란 녀석이 어디 사는지 좀 알려 주게. 도대체 얼마나 잘생겼는지 이 눈으로 보게 말이야. 암만 잘생겨 봤자 눈 두 개에 입 하나, 귀 둘이 달렸겠지. 큰 형! 형님은 자건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에게 대체 무슨 재주가 있수? 자건이 그래 화염공(火焰功)을 아우, 오독신장(五毒神掌)이나 대력응조공(大力鷹爪功)을 아우? 그가 이것들을 안다 해 도 실력이 형님보다야 낫겠수?" 사람들은 그가 원래 말이 많고 끈질기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모두들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한참 귀를 기울여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 그의 품에 안겨 왔던 것이다. 구양봉이 입을 열려고 하자 여인은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모기 소리같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쉿, 소리 내지 말아요!" 공포에 질린 탓인지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인은 놀랍고 무서운 한편 부끄럽고 분이 치밀기도 하여 숨결이 가빠지고 있었다. 몸은 구양봉에게 기대고 있었지만 속으론 그가 여간 밉살스럽지 않았다. '멍청한 놈, 죽여 버리지 않았더니 결국 이용해 먹게 되는군. 미인이 절로 품에 와 안기니 입이 떡 벌어지게 되었지 뭘! 흥, 조만간에 칼로 네 놈의 얼굴을 오리고 혓바닥을 잘라 줄 테다! 그때 가서 어디 또 여자한테 꿀 발린 소리나 하며 혀를 놀리는지 두고 보자.' 그러나 여인은 소리를 내면 사람들에게 발각될까봐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모래바람을 피하려고 좀 우묵한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은신처가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