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4편 (4/64)
그러나 그럴수록 구양봉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구양봉에게 말했다. "구양 선생의 주옥 같은 말씀에 제 가슴이 다 후련합니다. 소생과 함께 이 취원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구양봉은 통쾌하게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소인의 말을 탓하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함께 이 취원을 돌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요. 그럼 가 봅시다." 구양봉은 황약사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황약사가 수평을 혼내 주고 일속 대사와 겨루던 그 자리에 그도 있었던 것이다. 취원 이사사의 거처에 들어가니 단청을 새긴 들보와 기둥, 수놓은 비단으로 드리운 휘장, 그리고 주보옥기(珠寶玉器)들이 그 사치와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상 위에는 옥으로 정교하게 만든 아름다운 머리 장식품들이 있었다. 정성들여 가지런히 진열한 품이 마치 금방 일어난 미인은 봄빛 무르익은 들로 나가고 없고, 미인의 향기로운 체취만 남아 떠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름다운 머리 장식품들을 보던 구양봉은 부지중에 큰소리로 탄식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휘종 황제처럼 살면 무슨 여한이 있으랴." 그 소리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사뭇 놀란 얼굴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경은 구양봉과 달랐다. 휘종 황제는 이사사와 치정을 벌인 방탕한 황제였다. 몇 대를 훑어봐도 휘종같이 음탕한 황제는 없었다. 일국의 황제로서 미인 후궁들도 몇백은 있었을 텐데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기생 이사사에게 내왕하는 비밀 통로까지 만들었다니 그야말로 천하에 보기 드문 음탕한 황제가 아닌가. 이런 황당한 황제가 있으니 송의 두 황제가 금에 잡혀 가는 수치스러운 일이 생겼으며, 금에게 송의 금수강산을 빼앗긴 것이다. 비록 입으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백성들 모두가 이렇게 휘종 황제를 욕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휘종 황제를 부러워하는 소리를 했으니 사람들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구양봉은 마음대로 떠벌렸다. "황 형, 황 형도 황제가 되면 휘종처럼 마음껏 재미를 볼 게 아니오? 다른 바보 황제들처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종일 상소장들을 보고 공문을 결재하느라 고생할 게 뭐요? 한평생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늙어 빠지는 황제라면 난 시켜 줘도 안 하겠소." 황약사 역시 구양봉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구양봉을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무공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일 듯하는 것을 느끼며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과연 고견이오. 소생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황약사는 슬그머니 구양봉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교묘하게 접근시키면서 돌연 내력을 썼다. 이 느닷없는 공격을 받은 구양봉은 단번에 저만큼 밀려갔다. "황 형, 왜 이러는 거요?" 구양봉은 소리쳤다. 황약사는 내심 우스웠다. 구양봉은 무공이 전혀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고수라면 즉각 반응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의 내력을 막아 버릴 것이 아닌가? 구양봉은 황약사를 바라보며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 형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내가 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미안하오. 취원 구경에 정신을 팔다 그만 실수를 했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구양봉은 눈을 껌벅거리며 황약사를 바라볼 뿐 더 말이 없었다. 취원을 돌아보고 나서 그들은 혜인루(慧人樓)라는 주루를 찾아 갔다. 혜인루라고 이름하였으니 이 주루에 올라 술을 먹는 사람은 모두 총명한 사람이어야 할 터인데, 주루의 손님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고주망태가 된 취객 몇이 여기저기 쓰러져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고 지껄여 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 곳에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 하나가 술친구 서넛을 데리고 개구리 세기 장난 을 하고 있었다. 술에 흠뻑 취한 탓에 혀가 꼬부라져서 내뱉는 소리가 웅왈웅왈 개구리 소리처럼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두 눈을 개구리처럼 부릅뜨고 '개구리 세기'를 한다고 야단이었다. "개구리 하나 입 하나, 눈 두 개에 다리 넷, 풍덩 소리 한 번에 물 속으로 뛰어든다. 개구리 둘 입 둘, 눈 네 개에 다리 여덟 개, 풍덩풍덩 물에 뛰어든다. 개구리 셋 입 셋……, 개구리 셋이면 눈이 몇 개지?" 그러자 고주망태가 된 취객들이 멋대로 지껄였다. "개구리 세 마리면 눈이 다섯 개." "다섯 개? 왜 다섯 개냐?" "개구리 한 마리는 외눈이니 다섯 개지. 하하하!" 그러자 다른 자가 말했다. "틀려, 틀리다니까. 개구리 세 마리면 눈이 일곱 개야. 믿지 못하겠으면 이걸 봐. 이 놈 개구리도 눈이 하나, 둘……." 그는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제 술 동무들의 눈을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취태만상이었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껄껄 웃었다. "틀림없는 술 미치광이들인데 혜인(慧人)이 뭔가, 혜인이……." 그런데 그 말을 취객들이 들었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뭘 하는 것들인데 그따위 소리야! 그래, 우리가 혜인이 아니면 네가 혜인이란 말이냐?" 그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두 사람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황약사가 손만 한번 들면 그들은 무리로 쓰러지고 말 것이지만 그는 가만 있었다. 구양봉의 솜씨를 좀 구경하려는 속셈이었다. 어쩌면 구양봉이 자기 무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이번 기회에 구양봉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취객들이 치고 박는 대상은 황약사와 구양봉 둘이었으나 황약사는 잘 피했으므로 얻어맞는 사람은 구양봉뿐이었다. "이것들이 왜 이러나, 이 미친 놈들아!" 구양봉은 팔뚝을 마구 내저으며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취객들은 구양봉과 황약사를 두드려 패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약사는 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므로 취객들의 주먹이나 발길이 그의 몸에 부딪치면 얼음에 부딪쳐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 같아, 그들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제대로 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에게 가해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은 그렇지 않았다. 살갗이 툭툭 터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해 구양봉은 아우성을 쳤다. "개자식들! 왜 죄 없는 사람한테 이 지랄들이야!" 구양봉은 소리를 지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술 밑천을 다 긁어 내어 마구 치고 박았다. 하지만 구양봉의 무술이라야 별로 신통한 것이 못 되었으므로 상대방의 급소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러자 험상궂게 생긴 작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 내가 본때 좀 보여 줘야겠다." 그가 후닥닥 달려들더니 구양봉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 주먹이 얼마나 셌던지 구양봉은 그만 "으악!" 하고 쓰러져 버렸다. "날 죽여라, 이 놈아! 차라리 날 죽여!"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알고! 이 놈아, 개구리 세 마리 눈이 몇이냐?" 놈들은 정말 구양봉을 죽일 듯이 덤벼들어 주먹들을 휘둘렀다. "개자식들, 네 에미 눈깔이 일곱 개다." 구양봉은 얻어맞으면서도 욕을 퍼부었다. "이 놈, 네 에미 눈깔이 일곱 개라고 해라. 눈깔이 일곱 개면 칠목(七目) 승냥이다. 네 에미가 칠목 승냥이지." 험상궂게 생긴 자가 눈알을 번득이며 구양봉에게 을러댔다. 그 말에 취객들은 껄껄 웃으며 재차 달려들었다. 술집 주인은 마음이 다급했으나 자기 재주로는 싸움을 말릴 수가 없으므로 그저 한켠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제발 이러지들 말라고 애원을 했다. 이윽고 취객들도 어지간히 맥이 빠졌고 황약사와 구양봉도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엉망이었다. 취객들은 기고만장하여 마지막으로 따져 물었다. "항복할래? 안 할래?" "항복? 항복은 무슨 개떡 같은 항복이냐? 네 놈을 박살내고 말테다." 구양봉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을 한 번 날리니 구양봉은 그만 허깨비같이 나뒹굴며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만 연발했다. 황약사는 구양봉이 당하는 꼴이 은근히 재미있었다. 그는 갑자기 공손하게 취객들에게 읍을 했다. "소생 황약사는 동해 도화도 사람이올시다. 섬은 비록 황량하나 금이 많이 나지요. 여러분께서 소생의 안면을 봐서 저 구양 동생을 용서해 준다면 가지고 온 금을 모두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황약사가 금을 갖고 있다는 말에 취객들은 술이 번쩍 깼다.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너희들 목숨은 살려 주지. 그러나 이 나으리를 속였다간 이 주먹에 네 놈들 목숨이 남아 있지 못할 줄 알렷다!" 누군가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에 황약사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척하며 굽신거렸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 명에 죽지 못해 환장해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 말에 취객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술판에 뒹굴다가 병신같은 놈들을 실컷 패주고 횡재까지 했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는가? 속에서는 웃음이 끓어올랐으나 험상궂게 생긴 자는 짐짓 사나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잔말 말고 금을 이리 내놔. 금만 주면 살려 주겠다." '더러운 놈들, 어디 죽어 봐라. 저승에 가서도 이 황약사 소리만 들으면 벌벌 떨게 만들어 놓을 테니.' 속으로는 이렇게 벼르면서도 황약사는 무서워 오금을 못 쓰는 것처럼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더 맞으면 목숨이 끊어진다구요. 그저 우리 두 사람 입에 풀칠이나 하게 한 조각만 남겨 주시면 됩니다." 금을 내놓기도 전에 조금만 남겨 달라고 애걸하는 꼴만 보아도 거짓은 아니겠다 싶어 취객들은 그만한 사정을 보아 주기로 했다. "그럼 요만큼 남겨 주겠다." 그들은 황약사의 품에 지닌 금덩어리가 이미 자기 것이 된 것처럼 벌써 선심을 썼다. 황약사는 손을 후들후들 떨며 보따리를 펼쳤다. 목을 늘이고 들여다보던 취객들은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다. 보따리에는 정말 금엽자(金葉子)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이 혜인루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금을 본 취객들은 가슴이 뛰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험상궂은 자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가만있거라!" 취객들은 흠칫 놀라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험상궂은 사나이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우리가 심하게 다루었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우리가 자네들 금을 빼앗을 수야 없지. 우린 강도가 아니니까, 싸움 끝에 정이 든다는데,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얘기나 하며 우정을 쌓는 게 어떻겠나." 황약사는 이 험상궂은 사나이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노형과 교분을 갖는 영광을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일견여고(一見如故)라는 말도 있잖나. 만나고 보니 친구인데 뭘 그리 고마워 하는가? 자, 어서 가세." 그런 다음 험상궂은 사내는 그의 일행에게 눈짓을 보냈다. 취객들은 그 뜻을 알아채고 둘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구양봉은 황약사가 그렇게 선선히 금을 내줄 위인이 아니라는 것과 놈들에게 당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끌려갔다. 그들은 두 사람을 끌고 마차에 올랐다. "빨리 성문을 벗어나라."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며 마부에게 소리쳤다. 말이 뛰기 시작하자 마차는 금방 성문을 벗어나더니 이윽고 한적한 교외로 나갔다. "됐어, 됐어. 여기가 조용하구나. 내려라." 모두들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본 황약사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집도 한 채 없고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멀리 호수 위에 떠 있는 돛단배 몇 척뿐이었다.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마차가 멀리 사라지자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떨거지들도 좋다고 히히덕거렸다. "그 금을 이리 내라." 험상궂게 생긴 자가 본색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제기랄, 다 가져가요." 황약사가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자 취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앞을 다투어 금을 손에 쥔 놈들 중에는 그것을 급히 품에 넣는 자도 있었고 입에 넣고 깨물어 보는 자도 있었다. "이 자식들, 못 내려놔?"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꽥 소리를 내질렀다. 그 바람에 움찔 놀란 떨거지들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그 금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래도 당신 마음이 좋군요. 남들은 금을 보자 욕심이 동해서 야단인데 노형은 진짜 군자군요. 소생은 진짜로 탄복했습니다." 황약사가 기뻐하는 꼴을 보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그를 비웃었다. '이 바보야, 남들은 물욕이 동해서 그러지만 난 살기가 동해서 그런다. 소문이 나기 전에 네 놈들 둘을 죽이고 볼 일이다. 금이야 이젠 떼어 논 당상이니 날아가지야 않겠지.' 득의양양해진 놈은 또 너털웃음을 웃었다. "난 물욕이 아니라 살기가 동해서 그런다. 이 놈들, 어디 내 손에 죽어 봐라." "이……이러지 마십쇼. 제발 이러지 마세요. 금을 몽땅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 주세요. 절대 고발은 안 할게요. 경조윤(京兆尹)한테도 지휘사(指揮使)한테도 고발을 안 할게요. 난 당신들을 몰라요……. 당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난 기억도 못해요." 황약사가 벌벌 떨며 이런 소리를 하자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와 그의 떨거지들은 더욱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놈 말하는 꼴 좀 보게. 어디다가 고발해야 한다는 것도 빤히 아는 걸 보니 놔 두면 제꺼덕 고발할 놈이군 그래. 당장 죽여 버려야지.'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난 자넬 죽여야겠네. 고발은 놔 두었다가 염라부에 가서 하게." 험상궂게 생긴 놈은 대뜸 시퍼런 칼을 들더니 두 사람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황약사는 언뜻 구양봉을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구양봉은 태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무술이 있어 저러는 건가? 무공이 높지 않으면 저렇듯 침착할 수가 없지. 나야 물론 두려울 것이 없지만 구양봉도 그렇단 말인가? 그럼 내가 구양봉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어쨌든 구양봉도 이번엔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황약사가 소리쳤다. "잠깐!" "왜 소리쳐? 소리친다고 살려 줄 줄 아느냐?" "한 가지 요청이 있습니다. 저 사람을 먼저 죽이시오. 그 다음에 내가 죽겠소." "그럼 그러지. 금을 내놓은 공을 봐서 네 놈은 조금 있다가 죽이고 우선 저 놈부터 요절을 내자."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구양봉의 머리에 칼을 내리치려 들었다. 만약 구양봉에게 무공이 없으면 영락없이 머리가 쪼개질 판이었다. 황약사는 손에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구양봉이 움직이든가 놈의 칼이 구양봉의 머리 위에 내리쳐지는 찰나에 손을 써서 그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구양봉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라도 있느냐?" 구양봉이 험상궂은 자를 보고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금을 가졌지요?" "금이야 저 녀석이 내놨지." "그러니 저 사람 보따리에 금이 없었다면 이런 변이 생겼겠어요? 금이 없었다면 당신이 우리를 죽일 생각은 안 했을걸요." 구양봉의 말에 누군가 말했다. "금만 지니지 않았다면야 너희 같은 놈들은 비린내가 나서도 칼을 안 대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그런 헛일을 하겠느냐!" "저 사람의 금이 이런 판국을 만들었으니 저 사람부터 죽이는 것이 이치에 맞잖아요. 저 금만 없었다면 난 고작해야 매나 몇 대 맞고 끝났을 텐데, 재수 없게 곁달아 죽게 되었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에 가도 난 애매하게 죽은 원귀가 될 거라구요. 그렇잖아요? 먼저 죽을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구요." 취객들은 그 말을 듣고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가 돌연 늠름하게 외쳤다. "그래, 정말 나를 죽일 셈이냐?" "그렇다. 네 놈도 죽일 테다!" 험상궂은 자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황약사에게 덤벼들었다. 그 순간 황약사의 손길이 한 번 번뜩하더니 험상궂은 자는 소리도 미처 못 지르고 종이조각처럼 날아가 호숫물에 풍덩 머리를 처박았다. 그 뒤로는 호수의 파문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취객들은 걸려도 대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황약사가 손길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놈들은 차례로 호숫물에 머리를 박았다. 순식간에 일이 끝나고 넓은 들판엔 황약사와 구양봉만 남았다. "서역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의 무술은 주먹질 한 번이나 발길질 한 번이면 사람 목숨을 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 황 형의 무공을 눈으로 보고서야 그것을 믿게 되었소." 구양봉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나 먼저 죽이라고 했소?" 황약사의 기색이 험악했다. 구양봉의 대답이 조금만 시원치 않아도 대번에 그를 죽여 버릴 기세였다. 구양봉 하나 죽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손 한 번 움직여 혈도를 막아 버리고 호수에 처넣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놈들 손에 죽을 황 형이 아니어서 그랬소." "만일 놈들이 나를 죽였다면 어쩔 뻔했소?" "나도 따라서 죽었겠지요." 황약사는 마음이 꿈틀했다. '보통 인물이 아니군.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무술을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두각을 나타낼 인물임에 틀림이 없어. 어쩔까? 아예 여기서 죽여 버려?' 그런데 구양봉이 황약사를 보고 갑자기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소?" "그렇소. 당신을 죽여야 내가 살인범으로 쫓기지 않지." 느릿느릿한 황약사의 말에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예사스럽게 대꾸했다. "누군가 황 형이 천하의 영웅이라고 한다면 나는 즉시 반대할 것이오." "그건 왜 그렇소." "그렇게 여러 번 내 무술을 시험해 보려고 한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나에게 무공이 있으면 놈들이 내 털끝 하나 못 다치게 했지, 수치스럽게 얻어맞았겠소? 장차 나도 무술을 배우면 꼭 황 형과 겨루어 보고야 말겠소." 구양봉을 바라보던 황약사가 화를 내기는커녕 갑자기 껄껄 웃어댔다. "구 형, 그 꼴 참 좋군." 그러자 구양봉도 황약사를 보고 박장대소했다. "황 형 몰골은 다른 줄 아우?" 구양봉은 두 눈이 감길 정도로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황약사가 보이지 않았다. 호수와 들판은 보였으나 사람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호수는 잠잠했다. 물 위에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황약사가 손길 한 번 움직이는 바람에 모두 수중고혼이 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면 황약사처럼 살아야지. 그래야 사내 대장부지." 구양봉은 주먹을 움켜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천하 무쌍의 무술을 익히고 말 테다. 두고 보자, 황약사. 언젠가 너와 자웅을 겨루어 볼 테니!" 제3장 황궁의 어선방 황약사와 헤어진 구양봉은 혼자 임안성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무술이 신통치 않아 다른 사람과 옥신각신하는 일을 조심하게 된 그는 임안성이나 실컷 구경하고 나서 백타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형님에게 무술을 배울 작정이었다. 거리에서 구양봉은 젊은 거지 하나를 보았다. 젊은 거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운이 딱딱 맞아 꽤 재미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맛있는 술 즐겁게 먹고 돈 생기면 고기를 먹고, 돈을 벌어 논밭을 사고, 예쁜 계집종 무리로 거느리세. 아둥바둥 살아 봤자 팔다리 뻗고 덜커덕 숨넘어 가면 남는 것은 한뿐이네……." 이 거지가 범속한 인간이 아닌 성싶어 구양봉은 다가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흥겹소? 말끝마다 먹고 마시는 소리뿐이니, 그래, 사람이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이오?" 거렁뱅이는 구양봉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천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좋단 말인가?" "내가 득세하면 우선 태깔 고운 계집부터 얻어다가 시중들게 할 참이오. 먹고 마시는 일보다 이게 더 급하고 재미 좋은 일이지." 그리고 구양봉은 껄껄 웃었다. 거지는 그의 대답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구양봉이라 하오." 그러자 거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름은 틀렸어. 구양봉이 뭔가? 지금 구양수(歐暘修)란 사람이 아주 유명한데, 그 이름이 얼마나 좋은가? 아예 이름을 구양수로 고치게." "구양수? 그 이름이 뭐 좋소? 구양수란 사람이 나보다 나은 구석이라도 있단 말씀이오?" 거지는 그 말에 한동안 의아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가 구양수보다 낫단 말인가?" "내가 구양수만 못한 것이 뭐요? 구양수가 고작해야 책 몇 권에 시 몇 수 쓴데다가 벼슬 며칠 더한 것뿐이지 않소." 구양봉은 얼굴을 쳐들고 껄껄 웃었다. "그래. 자네는 무술을 좀 아는가?" 거렁뱅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구양봉은 대답이 궁해졌다. 구양봉은 사람들이 무술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