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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3편 (3/64)

2026-09-24 21:22:51 조회 19
"개방귀 뀌는 소리 하고 있네! 천하에 개방귀 소리 잘하는 사람이 몇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 밤 여기에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황약사와 일속 대사의 무술 실력으로 보아 가까이 에서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는 건 물론이고 낙엽만 져도 당장 알련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굵게 뻗친 곁가지에 사람 하나가 비스듬히 걸치고 누워 그들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루한 옷에다 헝클어진 머리에는 지푸라기들이 붙어 있고 몸에서는 역한 냄새까지 풍겼다. 그는 원숭이처럼 나뭇가지 위에 앉아 둘을 향해 소리쳤다. "천하와 바보 둘이 웬일로 여기까지 왔소? 황약사가 제 자랑밖에 모른다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아우? 제딴에 고고한 척하지만 염불이나 아는 중과 마주앉아 서로 칭찬하느라고 입에 침이 마르는군……. 한편에서는 대리 단씨네 '일양지'가 천하 무적이라 추켜올리고, 다른 한편에선 황 도주의 무술이야말로 천하 제일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허 참! 나 기가 막혀. 다행히 나 같은 거렁뱅 이 귀에 들렸으니 망정이지, 영웅들 귀에 들어갔다면 그 꼴이 어쨌겠소?" "아니, 대관절 당신은 누군데 그런 험담을 하는 거요?" 자존심이 강한 황약사는 누추한 거렁뱅이가 자기와 일속 대사를 조소하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다. 하지만 거렁뱅이는 황약사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잠을 자는데 말이오, 코 한 번 안 골고 잠이 푹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냄새가 나서……." "냄새라니? 여태껏 앉아 있어도 우리는 아무 냄새도 못 맡았는데." 일속 대사가 이상하여 묻자 거렁뱅이는 좋아라고 크게 웃어댔다. "핫하하, 냄새를 못 맡았다고? 핫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원래 제 방귀 구린 줄은 모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난 둘이 마주앉아서 너 한 번 나 한 번 개방귀를 뀌는 통에 구려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거든……. 핫하하!" 황약사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거렁뱅이 녀석, 그따위 소리 말고 냉큼 내려와!" 거렁뱅이는 서슴지 않고 황약사와 일속 대사 앞에 뛰어내렸다. "화상 한 사람과 속인 하나, 이렇게 둘만 앉아서야 재미가 덜하지 않소? 이런 데는 나 같은 거렁뱅이까지 끼어야 재미가 무진한 법이오." 이 거렁뱅이가 범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경탄하고 있던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한동안 말없이 거렁뱅이의 모습만 훑어 보았다. 서른 안팎의 젊은 거지였다. 겉모양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거짓 없고 소탈한 인간인 듯싶었다. "할 일이 없으면 집에서 술 먹고 잠이나 잘 것이지, 이런 후미진 곳에 앉아 나발들을 불고 있으니 미친 사람들 취급을 당하잖소?" 황약사는 잠자코 있었고 일속 대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건넸다. "당신은 우리에게 미치광이라지만 우리가 보기엔 당신이 미친 것 같으니, 안개같이 몽롱한 세상사 시비곡절을 어떻게 밝히겠소?" 그러자 거렁뱅이는 그따위 선문답(禪問答)은 하기 싫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설교는 그만두시오! 난 그런 절간의 넋두리는 딱 질색이오. 백마는 말이 아니라느니, 세상 모든 것이 공허하다느니, 그런 허튼 소리는 딱 질색이란 말이오."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서로 눈길을 나누었다. 두 사람 다 이 거렁뱅이가 범상한 인간이 아니고 무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짐작하면서도 개방( 幇 ; 거지 무리) 중에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 거지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한창 흥이 올랐던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흥이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거렁뱅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아이고, 그 잘난 자화자찬을 누가 듣고 싶다고 이 밤중에 떠들어? 난 날이 저물자 입궁하여 황제 폐하께서 잡수시던 진수성찬을 잔뜩 먹고 왔소. 주육으로 배가 부르면 단잠에 빠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당신들이 와서 떠드는 통에 깨어나서 이렇게 뛰어내린 거요. 뭐, 당신들과 한담이나 하자고 나섰는 줄 아오? 그따위 잡소리만 없었어도 지금 이 나으리는 한창 달게 잘 텐데……." 황약사는 비위가 거슬렸다. 새파랗게 젊은 거지 녀석이 누구 앞에서 나으리가 어쩌구저쩌구 떠들어? 황약사가 녀석의 버릇을 좀 고쳐 주겠다고 눈을 부릅뜨자 일속 대사가 눈짓으로 그를 막았다. 그리고는 점잖게 한마디 했다. "시주님, 그렇게 포식을 하셨다면 제자리에 올라가서 다시 주무시는 게 좋겠소이다. 나와 황 시주는 상관 마시고." 거지는 또 한 번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야 좋지요. 떠들 사람은 떠들고 잠잘 분은 잠자고. 이젠 무슨 허튼소리를 해도 이 나으리는 상관 않고 잠만 잘 테니까." 그는 땅 위에 네 활개를 뻗고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금방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달빛은 아름답고 바람은 맑고 신선했다. 일속 대사와 황약사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일속 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 도주께선 아직 우리 불가에 입적하지 않았으나 내가 보기엔 조만간 불가의 사람이 될 거외다. 오늘 이 달 밝고 바람 잔 고요한 밤에 선법이나 담론해 보면 어떨까요?" 황약사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낮에 무술로 이길 수 없었으니, 이 화상이 이제 와서 불가의 학식으로 날 이겨 보려는 속셈이군 그래, 내가 선법을 담론하면 질 줄 아는가?' 이처럼 그는 일속 대사의 뜻을 오해하고 있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가 오기가 대단하고 승부 근성이 강하여 임안에서 사람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부처의 마음으로 그의 인애지심(仁愛之心)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화도에서 처음 나온 황약사는 일속 대사의 고심(苦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와 겨루어 볼 생각만 잔뜩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사께 그런 흥이 계시다면 저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황약사는 껄껄 웃으며 말하긴 했으나 내심 근심이 없지 않았다. 그 역시 불가의 학문을 연구하기는 했지만 불가에 입적한 중은 아니요, 도를 닦은 고승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일속 대사 같은 고승을 정말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도화도에서 온 황약사가 아니냐.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 임기응변을 해서라도 이겨야지. 암, 이겨야 하고말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일속 대사가 말을 꺼냈으니 먼저 제목을 내야 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의 눈에 열기가 번득이는 것을 보고 그의 가슴에 승부욕이 불붙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도화도, 온 섬은 도화 천지 봄이면 유화무인 (有花無人)인지 무화유인(無花有人)인지 일속 대사가 불경에 대하여 말할 줄 알았던 황약사는 그가 도화도에 관한 시를 읊자 은근히 기뻤다. '일속 대사가 불경을 논하자고 하면 혹시 내가 질 수도 있겠지만, 매일 절간에서 삼재칠계(三齋七戒)나 하는 화상이 도화도를 논의하려는 데야 내가 질 수 없지.' 황약사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고 점잖게 화답했다. 도화도는 해마다 의구하고 사람도 해마다 춘풍이로세. 일속 대사가 황약사에게 말하려는 뜻은, 인생이 꿈 같으니 무슨 일이나 너그럽게 처사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재앙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화답하는 뜻은 온통 자신에 관련되는 일이었다. 벙어리 노복 몇을 거느리고 꽃에 파묻힌 채 도화도에서만 살아온 황약사는 사람들의 그윽한 정취나 인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 일속 대사의 시를 듣자 불쑥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길에 나에게도 예쁜 홍안의 지기가 생기는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일속 대사에게 드러낼 수는 없어서 퍼뜩 떠오른 생각을 스쳐 보내었다. 일속 대사는 그런 황약사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황약사, 그대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 이 여행에서 어여쁜 홍안의 지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번 중원길이 순조롭지 못할지라도 기쁜 일이 생길 것이다.' 일속 대사는 이렇게 축원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서서히 또 시를 읊었다. 하늘이 내려 준 명(命) 어이 이리 짧은가 검은 머리로 이 세상 하직하고 한 가지 고통 끝나기도 전에 새 재앙이 덮치누나 아침 이슬 햇빛에 사라지듯 그 밝던 햇빛 저녁이면 사라지듯 쫓아가도 쫓아가도 붙잡지 못하고 애절한 마음 이를 데 없어 하늘 바라보니 높고 끝없는데 이 한을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하랴. 일속 대사와 초면이었는데도 황약사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내심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낭랑하게 읊는 시를 들으니 자연 마음이 처량하고 구슬퍼졌다. 그 애절한 시구는 한동안 황약사의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이 일속 대사도 인생에 역경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그러니 저렇듯 감개가 많지. 나마저 공연히 마음이 구슬퍼지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황약사는 솟구치는 애수를 누르지 못하여 끝내 눈물을 흘렸다. "황 도주께서도 동감이신 모양입니다 그려." 일속 대사가 탄식을 했다. "대사께서 읊으신 시에 동감을 했습니다. 심중에 북받쳐 오르는 애수를 누를 길이 없어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군요." 황약사의 구슬픈 목소리에 일속 대사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감회에 젖은 황약사는 옥으로 만든 퉁소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상념에 젖었다. 티없이 맑은 백옥으로 만든 그 옥소는 참으로 보기 드문 보물이었다. "황 도주님, 이왕 꺼내셨으니 옥소 소리나 좀 들려 주시오." 일속 대사가 요청했다. 황약사는 대답 없이 옥소를 입에 가져갔다. 옥소 소리가 밝고 조용하게 흘러 나오다가 점차 구성지게 울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폭풍우가 쏟아지고 격랑이 솟구치듯 세차졌고, 때로는 인생의 무한한 고뇌를 하소연하듯 애처롭고 침울하게 울렸다. 일속 대사는 그 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앉아 있었다. 옥소를 부는 황약사의 눈앞에는 자기의 태를 묻은 땅 도화도가 떠올랐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땅, 아버님의 시신이 묻혀 있는 땅, 그곳에서 그와 어머니는 벙어리 노복들과 더불어 무술을 익히며 살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다음에도 그는 10년을 도화도에서 살아왔다. 이 10년 동안 그는 바다의 조수를 바라보며 옥소를 불고 무술을 익혔다. 그는 이미 천하에 드문 고수가 되었건만 그래도 무술을 닦고 또 닦았다. 마치 자신이 사는 보람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황약사의 눈앞에 매일 올라가 경공(經功)과 검술을 닦던 탄지봉이 떠오르더니 이어 부모님의 산소를 모신 청음동도 떠올랐다. 그곳에 올라 온종일 돌처럼 앉아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조수 소리만 듣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녹죽림과 시검지도 보였다. 72식 난화불혈수를 그는 녹죽림에서 익혔다. 황약사는 날아 떨어지는 무수한 대잎으로 그만의 절세신기(絶世神技)를 닦으며, 시검지 에 서서 바다를 향해 긴 고함을 내지르곤 했다. 고함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서로 호응하면서 멀리멀리 비껴 가곤 했다. 이럴때면 그의 벙어리 노복들은 감히 그 앞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가 고함을 내지르면 가까이 있는 벙어리 노복들의 귀에서 피가 나오곤 했는데, 고함소리에 더 힘을 넣었다면 그들은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벙어리 노복들은 중원에서 큰 죄를 지어서 그의 부친이 데리고 온 자들로, 지금은 도화도의 식구들이었다. 지금 옥소를 부는 황약사의 눈앞에는 이런 도화도의 사람들, 도화도의 일들이 삼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퉁소를 그치니 일속 대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황 도주님은 향수에 젖어 버리셨군요. 황 도주님은 일속(一俗)이 아니라 다념(多念)이라고 해야 알맞겠습니다." "글쎄요, 내가 이 중원에 무얼 하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약사의 대답에 일속대사는 다시 한 번 준수하게 생긴 그를 바라보고는 '제법 큰 인물이다!' 하고 감탄했다. "소승이 보건대 장차 황 도주께 기쁜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황약사는 귀가 솔깃해졌다. '일속 대사가 말하는 기쁜 일이란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러나 황약사는 궁금증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와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그즈음 달빛이 빛을 잃어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황약사는 일속 대사가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바둑을 두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일속 대사가 두면 나도 두지. 내가 못 둘 이유가 있나? 반드시 일속 대사를 이겨야지.' 황약사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속 대사는 손가락으로 땅에다 바둑판을 그렸다. 비뚤어지는 줄이 하나도 없이 가로 세로 척척 그어 나가는 품이 대단히 익숙한 솜씨였다. "두어 볼까요?" 바둑판을 그린 일속 대사는 황약사와 함께 각기 팔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위를 향해 펼치고는, 마치 물 속에서 무엇을 건져내는 모양을 했다. 그러자 일속 대사와 황약사의 손에 각각 잡히는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들을 바둑판 앞에 내려놓았다. 일속 대사가 쥔 것은 나뭇가지였는데 잔 토막들로 잘려져서 임시 바둑알로 쓸 만했다. 그리고 황약사가 내놓은 것은 나뭇잎이었는데 그것 역시 바둑알만큼씩 조각나 있었다. 둘은 물론 내력을 쓴 것이었다. 달빛이 어두워 바둑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들은 바둑알을 놓았다. 속으로 헤아리고 가늠하면서 두는 이른바 맹기(盲棋)였다. 얼마를 이렇게 바둑을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쪽 하늘에 새벽빛이 어리기 시작했으나 그들 둘은 여전히 바둑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자던 거렁뱅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정말 미쳤군! 올빼미같이 한 잠도 안 자고 이따위 짓만 하기요? 이까짓 바둑이 점잖은 놀음인 줄 아시오? 구린내도 아주 몹쓸 구린내가 나는 짓인데." 거렁뱅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바둑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은 제 바둑 수를 생각하느라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거렁뱅이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또 한마디 뱉었다. "황제의 밥을 차리는 어선방(御膳房)에 가면 맛좋은 성찬들이 그득하다오. 우리 함께 가 보겠소?" 그래도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여전히 바둑판만 내려다보며 거렁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거렁뱅이는 발을 탕탕 구르며 외쳤다. "망측도 하지! 세상에 이따위 기괴망측한 인간들이 다 있담? 천하에 둘도 없는 진수성찬인데 먹을 생각을 안 하다니?" 거렁뱅이가 별의별 소리를 해도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귀머거리가 된 듯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여전히 바둑판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제기랄! 속에서 불이 나 죽겠네." 거렁뱅이는 발을 마구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번개같이 손을 뻗어 바둑판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어디 또 바둑을 둬 봐. 이거 벨이 꼬여 살겠나. 잘들 놀아 보란 말이야!"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바둑판이 흩어지자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황약사가 물었다. "대사께서 어제 밤에 읊은 자건의 시는 무슨 뜻입니까?" 황약사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범속하지 않은 일속 대사가 딸의 죽음을 애달파 하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읊은 데는 심상찮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속 대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황약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황약사도 더 묻지 않았다. "황 도주님, 이젠 소승도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앞으로 만날 날이 꼭 있을 겁니다." 일속 대사는 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날아올랐다. 넓은 소맷자락이 공중에 날리더니 눈 깜짝할 새에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남은 황약사는 임안 시내를 며칠 돌아다녔다. 하루는 경성의 취원(翠苑)을 찾아갔다. 그곳은 지난날 송나라의 명기 이사사(李師師)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밤이면 휘종(徵宗)이 이리 통하는 지하 통로로 나와 이사사를 만나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오는 구경꾼들의 탄식만 자아낼 뿐이었다. 휘종은 비록 혼용한 임금이었지만 그림과 서예만은 천하에 보기 드문 솜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새를 그리는 솜씨와 수금체(瘦金體) 법서(法書)는 실로 천하의 명화, 명필이었다. 명기 이사사의 거처에 휘종의 그림과 글이 몇 폭 있었는데, 그 중에도 <학명구천도(鶴鳴丸天圖)>는 보는 사람의 절찬을 자아내게 했다. 금빛이 휘황한 황궁과 그 위를 구성지게 울며 날아오르는 백학들. 그로 하여 황궁이 더욱 깊이 있고 위엄 있게 보여 그 그림을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림의 변두리에는 도종(道宗) 황제 가 친필로 쓴 제사(題詞)가 있었다. 글은 그림을 돋보이게 하고 그림은 글을 돋보이게 했다. 황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장탄식을 터뜨렸다. "손님께선 무슨 탄식을 그렇게 하시오?" 누군가 옆에서 말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찬 게 범상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돌아보니 그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했다. 가죽으로 만든 쭈글쭈글한 옷을 입었는데 더운 날씨에 입고 다니느라 한 쪽 어깨를 드러내 놓고 있어 이역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 입은 긴 속옷도 횐색에 아무 무늬도 없는 것이 역시 오랑캐 복색이었고, 발에 신고 있는 가죽장화도 무겁고 둔하게 생긴 것으로 보아 오랑캐 장화가 틀림없었다. 그는 고집스럽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길로 황약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약사는 이 사람이 분명 경성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경성 사람이라면 적대감부터 앞서는 그였으므로 이역 사람을 만나니 자연 호감이 느껴졌다. 황약사는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 황제께서 글도 명필이고 그림도 훌륭하니 아예 글이나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지내는 것이 황제로 계시는 것보다 더 좋았을 걸, 공연히 황제 노릇을 하신 게 안타까워 탄식한 거요." "정사를 잘못 보는 황제가 퇴위하여 서예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소? 제위에 있으면서 정사는 되는대로 보고, 시간이 남으니 글씨도 늘고 그림도 늘어 명필이 되었을 뿐이지요. 세인들은 저 황제께서 붓글씨와 그림에 능함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제위에 앉았기에 글씨와 그림에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 말에 황약사는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이 대번 좋아졌다. 중원이라는 이 장룡와호지지(藏龍臥虎之地)에서 어제는 천외기인(天外奇人) 같은 일속 대사를 만나더니 오늘은 언변이 범상치 않은 이역 사람을 또 만났지 않는가? 황약사는 동해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보니 지금까지 가졌던 자기의 견식이 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느낌이 더해졌다. 일속 대사와 눈앞의 이 이역 사 람만 해도 자기보다 무술이 약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이 사람은 용맹할 뿐만 아니라 오기도 제법 있어 보였다. 황약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원래 예의 같은 것을 가볍게 보는 사람이었다. 선현 성인의 글을 수없이 본 그였다. 도화도에서 심심풀이로 책을 읽다가 '성인의 말도 엉터리구나' 라고 적은 쪽지를 책에 끼워 두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같은지라 불현듯 친구로 사귀고 싶어 가까이 다가서며 읍을 했다. "선생께서도 여기서 휘종 황제의 그림을 관람하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여기 서 있겠소. 황제질은 잘 못했지만 글씨와 그림이 그만하면 제법인데다가 미녀와 풍류를 즐겼으니, 사람이 세상에 한번 나서 그렇게 살아 보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껄껄 웃어댔다. 호방하고 거리낌없는 웃음이었다. 황약사는 그 말과 태도에 이 인간이 심성이 바르지 않은 사파(邪派)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황약사는 무엇보다 겉과 속이 다른 군자들을 더럽게 보는 소탈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그다지 큰 반감은 가지지 않았다. 황약사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의 주옥 같은 말씀을 들으니 깨우치는 바가 많은데, 선생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경성엔 무슨 용건이 계십니까?" "나는 이역 사람입니다. 서역(西城) 백타산(白陀山) 아래 사는 평민으로 이름은 구양봉(歐陽鋒)이라고 합니다." 백타산 사람이라는 말에 황약사는 적이 놀랐다. 서역에 한 파의 무공이 있는데 그 술수가 신비하고 교묘하기 그지없어 중원 무림이 모두 혀를 내두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 사파(邪派)의 무술이 극히 음험하고 악독하여 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구양봉이라는 사람이 무림의 인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사파의 고수란 말인가? 황약사는 이 사람과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고향을 떠나 임안에 당도하자마자 일속 대사를 만난 그는 중원 무림을 얕잡아 보지 않게 되었는데, 오늘 구양봉을 대하니 더욱 그를 경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