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2편 (2/64)

2026-09-24 21:22:51 조회 20
선조들이 금군과 싸우던 이야기는 흥이 나서 잘하면서 왜 장방창(張邦昌)이 금을 도와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한 이야기는 못하오? 송의 두 황제가 금에 잡혀간 이야기는 왜 못하오? 진회, 나여(羅汝), 집만이(輯萬俟) 같은 작자들 일은 왜 말 못하오? 수백만 인구를 가진 송이 해마다 금의 오랑캐에게 금은 보석을 공납하면서 신하를 자칭하고 남의 아황제(兒皇帝)질이나 하는 수치스려운 일은 왜 말 못하오? 이런 일들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하면서 케케묵은 옛일이나 이야기하고 있으니 어디 들을 맛이 있소?" 그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약사의 말이 끝나자 수평은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어제치더니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네 이 놈! 잘난 체하지 마라! 네 놈이 궁궐 뇌옥의 원귀가 되고 싶은 게로구나!" 그러면서 수평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수평이 내리친 곳이 움푹 꺼졌는데 그 색깔이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질겁한 것은 물론이고 무공을 좀 아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저 탁자가 꺼져 들어간 것 좀 봐. 수평의 무술이 여간내기가 아닌걸. 저 손바닥이 젊은 서생의 몸에 떨어지면 아까운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지!' 하지만 황약사는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마치 그의 무예가 범상치 않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수평을 덤덤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타들어간 탁자를 슬슬 만지면서 수평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나으리께선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왜 죄 없는 탁자에다 공연한 행패를 부리나?" 그런데 황약사가 슬슬 문지르는 사이에 탁자는 어느새 꺼져 들어갔던 자리가 다시 평평하게 돋아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어이쿠! 저 봐, 저 탁자 좀 보라구!" 누군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탁자는 수평의 손바닥에 맞아 꺼져 들어갔던 자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원래 모양대로 평평해져 있었다. 황약사가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평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자였다면 황약사가 보인 이 솜씨가 상승(上乘)의 내공(內功)이며 현묘한 장법(掌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냉큼 뺑소니쳤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 많은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수평은 그런 인간이 못 되었다. 궁궐 안에서 위세 부리며 호의호식만 하던 이 자는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이치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황 약사가 그런 솜씨를 보이자 금방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이 놈, 네 놈이 감히 나에게 도전하는 거냐?" 교만과 횡포가 몸에 밴 수평은 노기 충천하여 다짜고짜 손바닥으로 황약사를 내리쳤다. 그래도 황약사는 그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수평은 단매에 황약사를 쳐죽이고 싶었지만 야담 장소에서 살인이 나면 어지간히 시끄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을 혼찌검이나 좀 내주고 명줄기는 놔두기로 하고 6, 7분의 역도(力道)만 손바닥에 넣었는데, 그 힘만도 워낙 엄청나서 주위 사람들 얼굴이 다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옆 사람들은 부지중에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피해 버리고 싸움 을 말릴 엄두도 못 내었다. 수평의 무공도 보통은 아니었다. 철사장법의 정수를 터득하여 그 동작이 대단히 영민하고 변화 역시 교묘했다. 누군가 이 무공을 알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게 "사람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수평은 더욱 콧대가 높아졌다. 오늘 사람들이 철장 수평의 솜씨를 보았으니 내일이면 온 경성 바닥에 소문이 뜨르르할 것이다. 이 황약사란 녀석을 혼내는 것은 녀석이 감히 황제에게 불손한 말을 던지고 조정을 비방한 탓이니, 싸움에 명분이 서고 자신도 위풍이 서는 일 아닌가. 수평은 더욱 득의양양해서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황약사를 단번에 쳐죽일 듯 내리치는 그 일 장은 흉맹하기 짝이 없었다. 황약사는 수평과 맞서지 않고 좌우로 피하기만 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해에서 온 저 도화도 사람이 필시 횡액을 당하고 말지. 수평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적어도 중상은 입을 텐데 이걸 어떡하지. 아무래도 수평이란 자가 황약사를 그냥 놔주지는 않을텐데…….' 수평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위풍을 떨쳐 볼 생각으로 연달아 큰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 맹공을 가했다. 황약사는 마당 구석까지 물러나서 이제는 더 물러설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원체 넓지 않은 집안에 둘러서 있는 구경꾼까지 많아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황약사는 수평을 보고 갑자기 히죽 웃었다. "이젠 화를 좀 삭일 때가 되었지 않느냐? 네가 여태까지 지랄발광을 했지만 난 손 한 번 쓰지 않고 피하기만 했으니 그만하면 화풀이는 했을 것 아니냐? 더 이상 재롱 떨지 마라. 난 이만 가 볼테니." 황약사의 입에서 이죽거리는 말이 나오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이 황약사의 무공이 수평을 앞선다는 것을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수평이 철사장으로 그토록 야단했어도 여지껏 황약사의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한 것이다.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더니 정말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수평에게도 그것은 분 명 자기를 비웃는 웃음이었다. 여태껏 우쭐거리며 덤벼들었어도 황약사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으니, 솜씨를 뽐내기는커녕 황약사의 발꿈치에도 못 미친다고 남들이 웃고 있는 것 아닌가? 평소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멋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수평에게 임안성 백성들은 내심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그런 그가 조롱당하는 꼴을 보자 모두들 삼복염천에 얼음을 삼킨 듯 속이 시원해졌고, 그래 서 쾌재의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황약사가 수평을 혼찌검 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때 퍽! 하고 주먹으로 바가지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황약사가 수평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 순간 수평의 얼굴이 새까맣게 질렸다. "윽!" 수평은 가슴이 콱 막히면서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시뻘건 핏덩이가 왈칵 쏟아질 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바라보는 수평의 눈빛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녀석의 무공이 이렇듯 고강하다니! 도대체 어느 문파의 전인(傳人)이란 말인가? 동해 도화도가 도대체 어디에…….' 입안에 찬 피를 가까스로 삼킨 수평은 맥빠진 목소리로 몇 마디 뱉었다. "귀하의 무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절륜하여 나는……." 그러다가 수평은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시뻘건 피를 연이어 토하는 수평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아주 중한 내상을 입었다고 놀라워했다. '동해 도화도에서 온 이 젊은 서생은 틀림없이 세상 밖에서 온 사람인 게야. 손 한 번 쓰지 않고 수평의 철사장을 요리조리 피하는 재간도 그렇고, 손길 한 번 번뜩 날리니 저 유명한 대도시위가 피를 토하잖아. 두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누가 이 일을 곧이들을까?' 사람들은 내심 경탄했다. 이제 여기 더 있어 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한 수평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빠져 나갔다. 사람들도 중상을 입은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런데 수평이 문 어귀까지 갔을 때 황약사가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게 섰거라!" 수평이 흠칫하여 멈춰 서니 노여움이 삭지 않은 황약사가 언성을 높여 물었다. "어서 말 못하겠느냐? 대송(大宋) 사람이 바보나, 아니냐?" 수평은 황약사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를 향하여 한 발자국 성큼 내디디며 호통쳤다. "어리석은 황제에게 빌붙어 약한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놈! 네 놈을 일 장에 쳐죽이고 말 테다." 그가 손을 번쩍 치켜 드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수평 대도시위께서 돌아가시겠다니 황 시주(施主)께서는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한 번 실수는 석가모니도 하신다는데 속세의 범인이야 더 말할 게 있습니까?" 이런 싸움판에 나서서 참견한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뛰어난 무공이 없으면 누가 감히 이 싸움판에 끼여들겠는가? 사람들이 바라보니 그 말을 한 사람은 뜻밖에도 젊은 중이었다. 불그레한 얼굴이 번듯하고 준수하게 생겼는데, 얼핏 보면 용맹이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극히 평온한 표정이 속세를 초탈한 고승의 자태가 분명했다. 황약사도 첫눈에 이 중이 범속하지 않다는 걸 알아보고 싸늘하게 웃었다. "고승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동해 도화도의 무공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황약사같이 젊은 무림대종사(武林大宗師)가 무림 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전진교의 젊은 진인(眞人) 왕중양과 대리의 단씨 집안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왕중양은 무공 못지않게 명성도 대단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금의 공격에 반격했으나 애석하게도 하늘이 그 뜻을 돕지 않아 성사를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강호에 나서지 않고 종남산(終南山)에서 전진교만을 꾸려 가고 있었다. 대리의 단씨 세가는 몇 대를 내려오면서 부유한 대리국(大理國)을 건설한 황족들인데, 그들의 무공이 강호에서 하나의 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일양지공(一陽指功)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일파절학(一派絶學)이었다. 이외에 서역(西城)의 백타산(白陀山)에도 독특한 무공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들의 무공은 비정비사(非正非邪), 역정역사(亦正亦邪)로 신묘하고 강력하기가 대리의 단씨나 전진교의 왕중양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승은 동해에 도화도라는 섬이 있는 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강호의 사람들이 이 동해 도화도를 모두 알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요. 그것은 물론 도화도에 황약사라는 시주님이 계시는 까닭이구요." 스님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여러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황약사가 수평을 불러 세워 단매에 쳐죽이려는 판인데 이 중은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수평을 도와 황약사를 잡으려면 잔말 말고 자웅을 겨루어 볼 일이지, 무슨 말이 저리 많은가? 황약사의 무공에 겁을 먹은 건가, 아니면 남의 비위나 맞춰 주고 밥벌이 하는 자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중의 말을 들은 황약사는 얼굴에 희색을 띄우더니 공손한 태도로 중에게 읍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말씀 고맙습니다. 황약사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중도 공손한 자세로 얼른 답례하고는 웃었다. "소승의 말은 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정이오니, 도주(島主)께서는 부디 자중하시고 보통 사람과 견식을 달리하십시오." 그 말에 황약사가 대뜸 불쾌한 빛을 띠었다. "대사께서는 소생이 세상에서 두 가지 일을 제일 싫어한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황약사가 코웃음을 치며 하는 말에 중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읍을 했다. "귀담아들어 보겠습니다." 황약사는 싸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은 평생 도화도라는 섬에서만 살아 견식이 없지만 두 가지 인종을 제일 미워하지요. 하나는 가식 많은 글쟁이들입니다. 이자들은 말은 번지르르하나 공명과 녹봉을 탐내 앞을 다투어 관아에 빌붙고 아첨하며 양심을 팔아먹지요. 소생은 이런 인종을 평생 미워하기에, 만나는 족족 죽여 버려 다시는 그런 자들이 사모관대를 뽐내면서 성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리라 결심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종은 가짜 도학을 떠벌리는 위군자들인데 그들 모두 오입쟁이들 아니면 도적 놈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점잔을 빼고, 모두가 악한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순한 체하고 다니니, 공자왈 맹자왈이나 외우면서 사람들을 홀려먹는 그런 개종자들을 보면 속에서 방망이가 치밀어 견디지를 못합니다. 몇백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따위 이학(理學)쟁이들을 눈으로 보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때 태어나 원수 같아도 보아야 하니 속이 뒤집혀 살 수가 있어야지요. 그저 보는 족족 단매에 쳐죽여 몽땅 꺼져 버리게 했으면 속이 개운하겠습니다." 그 말에 중은 껄껄 웃었다. "도주의 성미가 시원시원하여 좋습니다. 하지만 도주의 말씀대로라면 함부로 살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따위 인간들은 죽여 없애야지요. 그런 인간들을 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 소생의 큰 한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황 시주께선 도대체 어찌하여 여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거야 명백하지요. 안팎이 다르고 공로에 눈이 먼 궁내 대도시위 같은 자는 살려 둘 수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 말에 구경꾼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황약사가 수평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야 백 번 고소한 일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죽인다면 큰일이었다. 황약사가 타관 사람인데다가 눈꼴사나운 관리 나부랭이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불쌍해서 그를 동정하던 사람들은, 그가 수평을 기어코 죽여 버리려 하자 생각들이 달라졌다. '괘씸하군. 대도시위를 죽여 버리려면 얼른 죽여 버릴 것이지 공연히 다른 사람까지 걸고 들어갈 게 뭔가? 이학이 어떻다는 거야? 이학이란 당대의 대학문이니 사람마다 정성들여 배워야 할 바이고, 이학을 배워야 부부자자(父父予子) 군군신신(君君臣臣)을 아는데, 동해의 몽매한 일개 백성이 이 천하 제일의 학문을 도대체 뭘로 알고 헐뜯는가 말이다.' 그러나 중은 이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또 한 번 허허 웃고 말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저 사람을 한 번 용서해 주십시오." 황약사는 별로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화상(和尙)께서 소생의 성풀이를 좀 해주시겠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화상과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 말이었다. 황약사는 이 중의 무예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그러면서 황약사는 낮은 소리로 시를 읊었다. 도화꽃이 떨어지니 신검(神劍)이 날고 백해의 조수가 밀려드니 옥소 소리 구성지네. 무슨 시 구절을 읊는 것 같았지만 황약사는 도화도에 있는 자기 집 문 앞에 써붙인 주련(柱聯)을 읊은 것이었다. 순간, 황약사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손가락과 식지를 오무려 원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약간 펴 보였다. 그러자 황약사의 손은 한 떨기 난초처럼 보였는데 그 자태가 대단히 미묘했다. 황약사의 '난화불혈수(蘭淹佛穴手)'였다. 이는 황약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절기(絶技)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꽃을 접는 천수관음의 형상 같아 피식 웃기만 했을 뿐이지 황약사의 불혈공(佛穴功)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중은 황약사가 손을 쓰자 깜짝 놀라 번개처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는 어이쿠 소리를 지르고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시주께선 천하의 절학 72식(七十二式) 불지점화(佛指拈花)를 쓰고 계신 게 아니오?" 신명이 난 황약사는 대답도 없이 한바탕 솜씨부터 보였다.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한 그 동작들은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대사께서는 우리 도화도에 '난화불혈수'라는 절학의 무공이 있는 줄은 모르시는가 보군요." 그러면서 그는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고 중에게 덤벼들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황약사와 중의 무술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황약사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중은 손가락 하나를 슬며시 뻗쳐 들었다. 그런데 중의 흰 손가락이 척 가리키기만 하면 황약사의 '난화불혈수'는 단단한 금속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흠칫 멎곤 하여 도무지 제대로 재주를 부릴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잠깐 중을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대사님의 고강한 무예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대사님은 단씨네 일가시군요. 이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의 안색에는 그런 빛이 조금도 없었다. "오늘 소생은 단씨네 일양지(一陽指)를 보고 견문을 넓혔습니다." 황약사의 말에 화상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소승은 일찍부터 동해 도화도에 뛰어난 무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배를 부릴 줄 몰라 가지 못하여 도주와 사귈 인연을 못 가져 매우 유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임안에서 존안을 뵈니 이것 역시 소승의 복인가 합니다." 황약사는 웃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승과 다시 한 번 겨루어 보시겠소?" "대사께서 원하신다면 그러지요." 황약사는 선뜻 대답했다. 사람들이 보니 중은 용맹하게 생겼으나 실은 점잖은 편이었고, 황약사는 문약한 선비 같았으나 오히려 예의가 부족한 편이었다. 이번엔 화상이 기어코 결판을 보자고 하는 양이 아무래도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구경꾼들은 생각했다. 둘은 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서로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친구들끼리 다정한 이야기나 나누듯이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번에도 황약사가 먼저 손을 쓰는데 역시 그 72식 난화불혈수였다. 그 솜씨가 얼마나 기묘한지 구경꾼들은 절로 찬탄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손이기에 저렇듯 뱅뱅 돌며 미인의 팔처럼 온갖 자태를 다 부리는 걸까? 그러자 상대편 역시 손가락을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는 그 손가락 하나로 황약사를 겨냥하여 찔러 왔다. 둘의 손은 서로 찌르고 막으며 수많은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살 기는 하나도 없고 아름다운 자태가 번뜩여 사람들을 반하게 만들었다.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둘이서 결사적으로 무술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손가락 장단을 하고 있다는 편이 더 적절할 성싶었다. 한 사람은 미인의 손가락처럼 희고 뾰족하여 보기 좋았고 한 사람은 동작이 다소 굼뜬 듯했으나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 한 동작이 끝나면 순식간에 다른 동작 으로 변하는데 손가락의 오고 감과 변화함이 마치 두 마리 용이 엇갈려 날고 두 개의 화살이 서로 마주 나는 듯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여러 가지 동작이 지나갔다. 황약사의 안색이 점점 더 침중해지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과연……." 그러자 중은 몸을 일으키며 호방하게 웃었다. "황 도주님, 천하의 무림이 이젠 동해에 도화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요. 그리고 악을 원수같이 미워하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합시다." 둘은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서로 허리를 굽혀 읍했다. "외람된 물음인지 모르겠으나 대사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황약사가 물었다. "존함이랄 게 있습니까? 소승은 대리에서 온 중이 확실하며, 일속(-俗)이 바로 소승의 이름이올시다." 중이 읍하며 대답하는 말에 황약사는 미소를 짓더니 좀 느린 어조로 읊었다. "불가의 일은 몇천 가지이고 그 변화도 몇만 가지이지만 나는 오직 일속(一俗)이로다." 그 사이에 수평은 언제 뺑소니쳤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구경꾼들 사이를 빠져 나와 거리로 나섰다. 제2장 어둠 속에서 바둑두기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서자 행인들이 놀란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중과 서생이 손을 잡고 넓은 임안 거리를 희희낙락 걸어가고 있으니 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한참 걷다가 한 주루(酒樓)로 들어갔다. 황약사는 큰소리로 심부름꾼을 불러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가져 오게 하여 일속 대사와 마시기 시작했다. 일속 대사도 소탈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인지라 황약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정오 무렵 주루에 앉은 두 사람은 야밤이 될 때까지 취하도록 마셔 댔다. 도화도 얘기가 나오자 황약사는 신명이 나서 떠들었다. 청음동(淸音洞)이 어떻고 녹죽림(綠竹林)이 어떻고 시검지(試劍池)는 여차여차하고 탄지봉(彈指峰)은 또 여차여차하고…….도화도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는 줄도 몰랐다. "황 도주님, 이젠 도화도 자랑은 그만하는 게 어떻소? 더 말씀하시면 이 일속이 이름을 바꿔야 하니 말이오." "이름을 바꾸다니요?" 황약사가 놀라는 기색으로 물으니 일속 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도화도가 그렇게 좋다니 소승의 마음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불일듯 하는구려. 그러니 속념이 더 많아질 게 아니오? 속념이 그렇듯 많으면 다속(多俗)이라고 해야지 어찌 일속(一俗)이라고 하겠습니까?" 둘은 함께 박장대소하고는 은자를 놓고 주루에서 나왔다. 주홍이 도도한 채 달빛이 흐르는 길을 걸어 산고개에 이른 그들은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인적이라곤 없는 울창한 숲에 푸르스름한 달빛과 이따금 스치는 맑은 바람뿐, 참으로 호젓한 밤이었다. "일속 대사님, 대리 단씨네 일양지를 보았으니 저로선 평생의 행운입니다." 황약사의 말이었다. "과찬입니다. 우리 대리의 일양지공이 어찌 도주님의 난화불혈수를 당해 내겠습니까?" 둘이 이렇듯 서로 겸손을 차리며 이야기를 하는데 느닷없이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