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45편 (45/45)

2026-09-24 08:59:34 조회 15
퐁- 퐁-!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한 점의 빛도 없는 동굴(洞窟) 안이었다. 거대한 백색(白色)의 종유석(鐘乳石)이 중앙에 자리해 있어,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유석의 밑엔 작은 연못(池)이 자리해 있었는데,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연못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사람이 들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를 불에 그을려 놓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옷자락은 갈가리 찢겨져 피부에 뒤섞인 채로 다져져 있는 사람의 팔다리는 물론이고, 얼굴조차 철저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또한 물에 퉁퉁 불어 살점이 흐느적거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완벽하게 죽은 시체였을 뿐이었다. 퐁- 퐁-! 백색의 종유석 끝에서 떨구어지는 하얀 액체(液體)는 그런 시체의 몸 위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번져 가고 있었다. 연못 물의 색깔도 역시 종유석과 같은 하얀 유액(乳液)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곳에서 은은한 향기(香氣)가 피어 오르고 있지 않은가? 한 모금이라도 들이마신다면 체내의 모든 더러운 기운을 씻어 내 버릴 정도로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그윽한 향취(香臭)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각이 흘렀을까? 모래시계의 흐름이 멈춰져 있는 듯한 정적과 고요함만이 자리한 이곳에서 최초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이 죽은 시체였다. 시커멓게 타 들어갔던 피부가 점차 아물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흰 백색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는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못에서도 마찬가지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더니 가속되어 갔다. 희뿌연 유액으로 가득 차 있던 연못 물이 돌연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새하얀 수증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그 백무(白霧)는 시체의 전신을 휘어감았다. 휘류류… 류……!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백색 안개는 시체의 전신모공을 통해 스며들었다. 연못의 바닥이 드러난 것은 일 각여 만의 일이었다. 드러난 시체, 아니 이젠 시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연못에 떠 있던 몸이 바닥에 닿으며 반듯이 눕혀진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백옥(白玉) 덩어리를 통채로 조각해 놓은 듯 반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였다. 스스스……! 유령(幽靈)과도 같았다. 아니,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조용히 암흑의 일 각에서 빠져 나와 서 있는 열 명의 인물이 보였다. 팔남이녀(八男二女), 여덟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보면서 단순히 열(十)이라는 숫자만으로 결정짓기에는 무언가 중대한 오류가 생길 것이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가히 태산(泰山)이었고, 하늘이었으며, 대해(大海)였다. 그 중 가장 중앙에 있는 청의노인(靑衣老人)의 가슴에는 시퍼런 번개의 문양이 수놓여져 있었다. 잔잔한 눈이었지만 한 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일 장(丈)씩 뻗어 나오는 뇌광(雷光)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그의 모발(毛髮) 또한, 짙푸른 벽발(碧髮)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는 뇌인(雷人)이었다. "본좌 천뢰도황(天雷刀皇) 뇌강(雷剛)이 사백 년을 살아온 이유가 있었어. 오늘이 지나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하거늘, 연자(緣者)가 찾아들다니… 확실히 하늘의 뜻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의 말소리는 조용 조용했지만 동굴의 내부를 울리는 엄청난 음파(音波)는 벽 전체에 균열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천뢰도황 뇌강! 무림에 적(籍)을 둔 무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 이름은 알고 있었다. 고금십대무황(古今十大武皇)이라고 일컫는 가장 위대한 승부사(勝負師) 열 명 중 서열 일좌(一座)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최강의 대무황(大武皇)! 그런데 설마, 그가 살아 있단 말인가? 그가 은거한 지는 어언 삼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백 세가 넘은 상태였다. 지금의 나이는 당연히 사백 세(歲)를 상회한다는 얘긴데……. "놈, 우리들의 주식이던 공청석유(空淸石油)마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흡수해 버렸군." 천뢰도황 뇌강은 연못에 누워 있는 백색인간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공청석유(空淸石油). 일컬어 무가지보(無價之寶). 황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상최고의 보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억겁(億劫)에 이르는 대지(大地)의 정기(精氣)를 쥐어짜 천 년에 한 방울만 생성된다는 대지영액(大地靈液)이 바로 공청석유였다. 범인(凡人)이 한 방울만 복용한다 해도 무병장수(無病長壽)해 죽을 때까지 청춘(靑春)을 유지할 수 있다. 만일 무림인이라면 내공이 일 갑자(甲子)가 상승되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극고한 내공과 선도(仙道)를 익힌 사람이 공청석유를 복용하여 살아간다면 삼백 년을 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고금십대무황(古今十大武皇). 천뢰도황 뇌강, 대해왕 종리후, 태양천신 천륭극, 천년마야 단우천, 철혈패황 나웅천, 천혜성후 위지문혜, 천수나한 당천화, 혈염요니 화요, 살인지존 무흔영, 북천제후 냉천. 그들 전설 속의 초인(超人)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연못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조용히 손을 내뻗었다. 고오오오……! 열 가지의 신비로운 서기(瑞氣)가 그들의 장심(掌心)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십색십광채(十色十光彩)는 각기 거창한 용(龍)의 모습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그 순간 천뢰도황 뇌강의 입에서 웅혼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우주(宇宙)에서 가장 강한 힘은 천뢰(天雷)! 그대에게 주노라! 뇌룡천뢰기(雷龍天雷氣)!" 콰- 우우웅-! 시퍼런 뇌룡기(雷龍氣)가 백색인간의 몸을 덮쳐 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대해(大海)의 힘! 해룡천수기(海龍天水氣)를 주마!" "태양(太陽)의 정기를 주마! 화룡태양기(火龍太陽氣)!" "천마(天魔)의 힘! 마룡흑천기(魔龍黑天氣)!" "철혈(鐵血)의 패력(覇力)! 철룡묵패기(鐵龍墨覇氣)!" "성령(聖靈)의 기운! 성룡천성기(聖龍天聖氣)예요." "천독(天毒)의 힘! 독룡파천기(毒龍破天氣)!" "호호호! 하늘마저 홀려 버릴 수 있는 요룡혈요기(妖龍血妖氣)라면 그 어떤 사람도 이지를 상실할 거예요." "살인(殺人)의 도(道)! 살룡극살기(殺龍極殺氣)!"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 빙룡천빙기(氷龍天氷氣)!" 콰- 우우우웅-! 열 마리의 용(龍)이 연이어 백색인간의 몸을 강타하면서 문신(文身)같이 찍혀 버렸다. 가슴과 배와 허벅지와 목, 그것만이 아니라 몸이 뒤집어지며 등과 엉덩이와 종아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몸엔 십룡문신(十龍文身)이 선명하게 어우러지며 찍혀졌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와 승천할 것같이 생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기(生氣)가 돌아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얼굴이 홍조를 일으키며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살아 있단 말인가?' 여천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져 어리둥절해 하였다. 묵철마강시에게 도륙되는 군웅들을 구하려 전장으로 뛰어든 찰나,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여천후는 온몸의 피부가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면서 혈맥(血脈)이 모조리 끊어져 버렸다. 거의 사체(死體)가 되어 버린 여천후의 몸은 폭발의 중심부에 있었기에 튕겨져 나가지 않고, 분출(噴出)해 오른 지하수맥(地下水脈)에 휩쓸려 들어가 동해(東海)로까지 흘러나갔던 것이다. 부유(浮游)하던 여천후의 몸은 해류(海流)에 휩쓸려 가다가 흑선사사와류해 속으로 빠져들었다. 필사(必死)의 죽음에서 부활(復活)한 여천후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몸 안에서 휘돌고 있음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헛허! 진정 헌앙한 풍모를 지닌 청년이로군." 천뢰도황 뇌강의 인자한 음성이 들려 왔다. 혈염요니 화요는 안타까운 신색으로 한숨을 내쉰다. "우화등선을 포기할까 봐. 저런 기막힌 동생과 하룻밤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분들은……!' 의아함은 곧 놀라움으로 바뀌다가 이내 극도의 경악(驚愕)으로 증폭되었다. 그가 어찌 느끼지 못하겠는가? "우리는 옛날에 고금십대무황이라고 불렀던 사람이니라." 천뢰도황 뇌강의 말은 여천후를 기절시킬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고금십대천황이시라면… 벌써 삼백 년 전에……?" "의문이 있을 줄 안다." 천뢰도황 뇌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고금십대무황에 속한 열 명의 초인(超人)들도 본질적으로는 무인(武人)이었다. 끝없이 강해지고픈 욕망과 아울러 남과 비교해 보고 싶은 대투혼(大鬪魂)을 그들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고금십대무황은 동해(東海)의 무인고도(無人孤島)에서 비무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사자(獅子)와 대호(大虎)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격돌이 벌어지고 승리자가 탄생하긴 했지만, 그들은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거기에다 그들의 엄청난 무공 때문에 무인고도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속절없이 부상당한 몸으로 나무 조각에 기대어 흘러가던 그들은 흑선사사와류해로 휩쓸려들고 말았다. 십 인은 거기서 최초로 힘을 합쳤다.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고금십대무황의 전력을 다한 합공(合功)은 대자연의 힘마저 이겨낼 수 있었다. 심해(深海)의 동굴을 발견한 것은 천운(天運)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공청석유마저 발견한 것은 진정 하늘의 기연(奇緣)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치유하긴 했지만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선도(仙道)를 수련하며 삼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 그들은 우화등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죽은 시체 같은 여천후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공청석유의 가공할 영기(靈氣)는 여천후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가장 큰 힘은 바로……. "네 몸엔 우리 고금십대무황이 사백 년간 수련한 십 룡(龍)의 정화(精華)가 깃들어 있다. 삼백 년 전의 우리 열 명의 모든 힘을 합친 것과 같은 위력이 있을 것이다." 천뢰도황 뇌강의 말에 여천후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고금십대무황이 하나가 된 힘! "십룡파천무(十龍破天舞)라고 이름지었다." 십룡파천무(十龍破天舞)! 열 마리의 용이 하늘을 부수며 춤을 추노니, 무엇이든 부수고 어떤 것이라도 박살낼 수 있었다. 십룡파천무의 운용구결을 알려 준 천뢰도황 뇌강은 숙연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화등선할 때가 되었다. 너는 십룡파천무를 연성한 후 암흑해동(暗黑海洞)을 빠져 나가 소용돌이에 몸을 실어라. 그러면 신화 하나를 보게 될 것이다." "신화라면……?" "사상천비계 중 흑령해계(黑靈海界)가 흑선사사와류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단 말이다. 부수든지 거두든지는 네 맘대로 하는데……." 혈염요니 화요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흑령해계의 해주(海主)는 어린 계집아이다. 해왕후(海王后) 하예령(河藝玲)이란 아인데, 아주 이쁘지. 너와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있을 것이야. 그저 여자란 강한 남자가 한 번 꾹 눌러 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천후를 말꼬리를 흐리며 싱글거렸다. "제가 보건데, 요니(妖尼) 누님께서는 숫처녀이심이 분명하신 것 같은데… 어찌 그런 비극을 자초하셨습니까?" "나보다 강한 사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숨 쉬듯 말하며 그녀는 천뢰도황 뇌강을 곁눈질했다. "도황(刀皇)이 원했다면 슬쩍 져주고 처녀(處女)를 바칠 마음이 있었는데, 저 사람은 무공밖에 모르는 쑥맥이니……." "호오! 요니께서 노부에게 그런 사랑을 품고 있었단 말씀이오? 노부는 요니를 사랑했지만 워낙 주변머리가 없어 거절을 당할까 마음이 쓰여 그 욕망의 불길을 잡느라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한 것이라오." "하하하하!" "호호호!" 동굴 안에는 화기애애한 웃음 소리가 넘쳐 흘렀다. 제29장 대단원(大團圓) 천년제국(千年帝國). 그 이름은 공포의 해일로 중원무림을 휩쓸었다. 태산에서 중원무림의 정기가 으스러진 후, 취옥성을 상대할 무인이나 집단은 아예 없었다. 그렇지만 빛줄기는 다른 곳에서 불어 오고 있었으니……. 자금성(紫禁城). 대명제국의 심장부에서 새로운 풍운(風雲)이 일고 있었다. 방원 오십 장은 됨직한 대전(大殿)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여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지만, 무덤에 서 있는 듯한 음울함이 무겁게 장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자혜공주 주자혜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먼저 가신 선부(先婦)의 복수와 중원의 평화를 위해 소첩은 그분을 따르신 여러분을 모시고 천년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녀의 옷은 화려한 비단옷이 아니라, 하얀 소복(素服)이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수십 명의 여인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있었다. "타협이나 흥정은 없습니다! 천년제국이 멸망하든지, 아니면 우리 중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을 때에야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아주 차가운 음성이었지만 슬픔이 절절이 배어 흐르는 그녀의 말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굳은 결의를 다졌다. 면면(面面)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우선 사파륭의 모습이 보였다. 나나와 철려화의 뒤로 보이는 오십 명의 여인들은 아예 파아란 독기를 줄기줄기 뿜어 내고 있었다. 천라오천불은 천궁설빙계의 주인인 천궁설화 소상아와 함께였다. 벽라공주는 파사국 최강의 바라대성람의 바라대성존 곁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서천혈맹을 이끌고 온 백사노차 타파람의 왜소한 체구도 보였다. 마라천독존 혁천광은 실신한 혁미미를 안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쪽 옆엔 사자철림을 평정하고 취옥성에서 탈퇴한 후, 새로운 사자철림의 종사로 등극한 철사지존(鐵獅至尊) 나패웅이 거구에 어울리게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위엄을 보이고 있는 일단의 중인들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자혜의 봉목엔 깊은 신뢰가 담뿍 담겨져 있었다. "육합수호천황가의 가주들께서 와 준 데 대해 소녀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구주종횡가, 만상비천가, 장미화가, 수룡천수가, 천병신기가, 무영천살가. 가장 신비로운 여섯 개의 가문이 천칠백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우선은 취옥성의 지부(支部)부터 박살내야만 합니다. 소녀는 여러분이 일거에 출동하여 취옥성이 설치해 놓은 칠십칠 개의 취옥성 지부를 박살내고, 그 여세를 몰아 취옥성의 본성에 집결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입니다." 주자혜의 말에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었기에 누구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안 좋아. 나는 거꾸로 모든 힘을 기울여 취옥성 본성을 박살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사이였을까? 대전의 입구에 기댄 채 조용히 웃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의 옆에는 마치 어둠의 여신과도 같은 칙칙한 분위기를 지녔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흑의미녀(黑衣美女)가 질린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신……!" "어떻게……?" 좌중의 모든 시선엔 불신(不信)과 회의(懷疑), 경악의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장 나중엔 복받쳐오르는 거대한 환희의 불꽃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이놈, 살아 있었구나." 사파륭의 노안에 서린 주름살이 격렬하게 떨렸다. "천후!" "후랑!" 나나와 백설공주는 미친 듯이 달려와 여천후에게 몸을 던졌다. 여천후는 두 여인을 힘차게 안아 들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여기 이 여자는 흑령해계의 주인인 해왕후 하예령이라는 분이오." 평소라면 아마 여천후는 여인들의 질투 어린 눈빛에 모골이 송연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여천후가 백 명의 첩을 새로 거느리고 왔다 한들 여인들은 용서해 줄 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 * * * 취옥성은 중원무림의 힘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전력을 중원 전역으로 분산시켰다. 취옥성엔 오직 변황사패천의 힘만이 남아 있었다. 그곳으로 여천후는 단숨에 진격해 갔다. 승패(勝敗)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취옥구대천공은 아주 철저하게 농락당한 채 비참하게 죽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한들 사상천비계와 육합수호천황가의 종사들에 비교한다면 조족지혈이 아닌가? 성검무후 나후황예가 나타난 것은 변황사패천의 세력이 완전히 궤멸된 후였다. 그녀 뒤에는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수백 명의 죄수 복장을 한 죄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태산에서 중원수호연맹을 결성하려고 모였던 중원무림의 정예 중 살아남은 사람들이에요. 언니는 뇌옥에 가둬 두고 인질로 삼으려 했는데……." "왜, 풀어 준 것이오?" 여천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후황예는 먹장구름이 깔려 있는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저는 몰랐어요. 내 핏줄이 중원이 아니라, 몽고족이었다는 것을… 나는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자랐어요. 중원은 나의 어머니나 다름없었는데……." 그녀는 처연한 눈길로 여천후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강하고 멋있는 당신을… 하지만 나는 중원인들에겐 원수이겠죠?" "천년제국엔 반역자이겠고!" 여천후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갈 데가 없겠군?" 나후황예는 고개를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한테 시집오지 그래? 아마 백 번째 첩(妾)의 자리는 비어 있을걸."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중원인은 아니라구. 내 고향은 타클라마칸 사막이야. 황금누란국이란 곳이지. 나는 거기서 살 거야." "그럼 받아 주시겠어요?" 나후황예는 수줍게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전부터 번뇌혈봉황 요화란 누님과 황예의 젖가슴 중 누구 것이 큰지 무지 궁금했었다구." 허락했다. 어느 누가 이의를 달 수 있겠는가? * * * * 팔십만 명친건흥군(明親建興軍). 대명제국 최강의 대군단이 일시에 북방으로 진격했다. 그 선두에 여천후와 그를 추종하는 무림세력이 함께 진격하면서 천년제국의 야망은 철저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후일 알려진 이야기로는 취옥여왕 나후빙연은 여천후에게 무공으로 패하자, 자결하려고 혀를 깨물었다고 했다. 여천후는 그녀를 제지한 후 따졌다고 한다. - 이봐! 입이 두 개 달렸다고 이구이언(二口二言)을 하냐? 전에 그랬잖아? 너를 이기는 남자가 있다면 천 번째 첩이라고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내가 이겼지? 여천후는 나후빙연이 백한 번째의 첩이 되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백 명의 첩만을 얻겠다고 공언했었기 때문이다. 황금누란국의 국왕인 황금왕(黃金王) 여운상은 여천후가 귀가한 후부턴 아예 부인인 황금여왕(黃金女王) 아라화와 동침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백한 명의 며느리가 줄줄이 출산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