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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44편 (44/45)

2026-09-24 08:59:34 조회 13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새로 결성될 중원수호연맹은 중원무림의 유일한 태양이 될 것이오. 취옥성도 중원수호연맹의 예하로 배속되어 새로운 중원맹주에게 명령을 받게 될 것이외다. 이 모든 것은 취옥성주이신 취옥여왕께서 공언한 사실입니다." 이어 그는 조용히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일문종사의 신분을 지닌 분은 새로이 결성될 중원수호연맹의 신임맹주를 추천할 권한을 가지게 되오이다. 개인적으로 참석하신 분은 다섯 명의 연명(連名)으로 추천을 하십시오. 단, 취옥성에 소속되어 있는 문파나 무인은 제외하고서 말이외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전히 서 있던 철각비천신 동방휘가 안색을 찌푸리며 회의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중원무림에서 가장 강했던 여섯 개의 문파는 취옥성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들을 제외하고 무슨 일을 할 것이며, 취옥성의 삼류무인(三流武人)이라도 중원무림계에선 일류고수(一流高手)인데… 그들을 빼고 나면 어디에 인재가 있단 말인가?"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주변의 인사들 여럿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철각비천신 동방휘의 지적은 사실 옳았다. 취옥성을 제외한다는 것은 장기(將棋)를 두면서 차포(車包)를 떼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천마노조 목리극의 어조엔 변화가 없었다. "취옥여왕님의 확고한 의지가 계셨소. 취옥성의 모든 것은 새로이 선출된 중원맹주에게 예속될 것이라 하셨소!" "제길, 도대체 인물이 있어야 선출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오? 사자(獅子)를 어찌 여우(狐)가 부릴 수 있겠는가 말이외다." 철각비천신 동방휘는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사자는 취옥성과 그 가신(家臣)들이었고, 여우란 이 자리에 있는 군호(群豪)들을 가리키는 말임에도 장내는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묵직한 한 사람의 음성이 장내를 울린 것은……. "아니, 한 사람이 있소이다. 이 자리에도 사자가… 그것도 능히 고독한 사자의 제왕(帝王)이 계심을 잊지 마시오." 모든 이의 시선이 말을 꺼낸 묵포장년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다름아닌 구룡대표국의 국주인 무적표황 백무결이었다. "중원무림을 지탱해 온 하늘이 무너진 지금, 새로운 풍운무림(風雲武林)의 지존(至尊)이 될 만한 사람은 역시 새롭게 떠오른 태양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오? 본인은 중원수호맹연주로서 황금서생 여공자를 추천하는 바이오." 무적표황 백무결은 점점 열기를 고조시키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이미 중원상계(中原商界)의 대부(代父)로서 중원경영(中原經營)의 대계(大計)를 이룩한 분이시면서 무공 또한 전대 취옥성주이셨던 취옥대검호 백리장천 어른에 뒤지지 않는 종사(宗師)의 반열에 들어 계심을 이 백모의 두 눈으로 목격한 바이오." 백무결은 좌중을 둘러보며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표국을 하는 관계로 천하의 정보에 관해선 구룡대표국이 중원제일이라는 것을 여러분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이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사상천비계가 여공자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소이다. 누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소? 가장 중요한 점은 앉아서 혈통(血統)으로 위업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위대함을 지닌 분이시란 말씀이오." "옳소! 백국주의 말대로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소이다. 사천무림(四川武林)을 대표하여 사천당가(四川唐家)를 이끌고 있는 본인 당비(唐飛)도 황금서생 여천후 공자를 추천하는 바이오." 각종의 암기술(暗器術)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 온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독존(千手毒尊) 당비는 별호 그대로 천 개의 손을 지녔다고 알려진 중원제일의 암기술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군웅들 중 몇몇은 천수독존 당비를 추천하려고 마음먹고 있기도 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인(賢人)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륜이 너무 어린데다가 출신내력도 불분명한데, 그런 인물로 중원무림을 대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부족이 아닐지?" 우려의 목소리를 던진 사람은 나이 팔순이 넘은 동정어옹(洞庭漁翁) 육성천(陸星天)이었다. 일평생을 동정호에서 낚시로 소일하던 은거기인으로서, 십 년 전 동정호를 공포로 휩쓸던 혈해방(血海幇)의 오백여 수적(水賊)을 대나무 낚싯대 하나로 동정호에 수장(水葬)시키면서 그의 무위(武威)가 알려졌었다. 여하튼 삼 각여에 걸쳐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다. 하지만 어느덧 대세(大勢)는 가늠되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천후가 나직이 한 마디를 던졌다. "쯧쯧,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계시군." 그러자 장내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천마노조 목리극이 여천후를 직시하며 물음을 던졌다. "무슨 말씀이오, 여공자?" "취옥성이 진정으로 중원무림을 수호(守護)할 의사가 있다면 전력을 기울여 변황무림과 일전(一戰)을 벌일 일이지, 뭐하러 꼬리를 말고 있겠소? 정말 힘이 없어 중원수호의 임무를 포기하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려 한다면 고개를 조아리고 이 자리에 나와 있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어찌 그런 말을……." 여천후는 천마노조 목리극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럼 새로 선출된 중원맹주가 취옥성으로 취옥여왕을 알현하러 가야 한단 말씀이오?" "그건……." 천마노조 목리극은 할 말을 잃었다. "한 가지가 분명해졌군. 취옥성은 중원무림을 수호할 의지도, 권좌(權座)를 내놓을 마음도 없단 말이지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 기인십원로의 눈가로 싸늘한 한광(寒光)이 일어났다. "견우미견양(見牛未見羊)이라는 말을 아시오?" 문득 여천후는 천수독존 당비를 돌아보며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소(牛)는 보되, 양(羊)은 보지 못한다는 말씀이신데……." 당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천후의 얼굴로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취옥성의 힘은 강하오. 지난 백 년간 중원무림은 약화되었고, 취옥성은 점점 강대해졌소이다. 물론, 중원무림 전체와 싸울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들과 추종세력을 제외한다면 아마 중원무림은 취옥성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오." 여천후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었다. 무명선옹(無名仙翁)이라는 신비노인은 지금까지 호수처럼 잔잔한 눈빛으로 조용히 장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천후와 무명선옹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엷은 미소를 떠올리는 여천후의 얼굴을 보는 무명선옹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설마, 눈치를 채고 있단 말인가?' 뜻 모를 중얼거림이 그의 마음에서 흐르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강하게 그런 느낌을 부인했다. '그럴 리가 없어. 사상천비계에 죽거나, 아니면 최소한 올해는 중원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저 자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확실히 나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기는 하다.' 무명선옹의 눈빛은 어느 새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마음의 동요가 진정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여천후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용환면술(易容幻面術)이라는 것이 사람의 얼굴과 신체를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속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소이다. 무엇인지 아시오?" 여천후의 눈길은 여전히 무명선옹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눈(眼)으로 보이는 마음의 창(心窓)은 그 사람의 본질(本質)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외다. 장사꾼이 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그것을 볼 수 있어야만 진정한 대상인(大商人)이 될 수 있으니,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눈을 가지는 데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소.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건 간에 내 눈에는 그 사람의 원래 모습이 보인다는 말이지. 이제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소, 취옥여왕(翠玉女王)?" "무, 무슨 말씀이오?" "이 자리에 취옥성주가 있단 말인가?" 좌중은 느닷없는 여천후의 말에 크게 술렁거렸다. 그 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발생했다. "호호호! 과연 천하제일의 대상인(大商人)다운 안목을 지니셨군요. 황금의 손(黃金手)만이 아니라, 황금의 눈(黃金眼)을 지녔음도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무명선옹의 입에서 늙수그레한 노인의 음성이 아니라, 청아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의 옥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와 아울러 무명선옹의 용모가 변하기 시작했다. 하얗던 은빛 수염(銀髥)이 사라지고, 쭈글쭈글했던 주름살이 팽팽하게 펴진다. 그러면서 신체(身體)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우선 칠 척(尺)에 달하던 신장이 거의 한 자나 줄어들었다. 근육질도 풀어지면서 피부가 하얘지더니, 어느새 팽팽한 탄력이 흐르기 시작한다. 가장 큰 변화는 가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탐스럽게 솟구쳐 오르는 가슴의 융기는 삽시간에 앞섶을 밀어 내며 팽창되었다. "헉! 저, 저……!" "취옥여왕이다!" "어떻게……?" 좌중의 시선은 의혹과 불신에 차오르고 종내엔 경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랬다. 분명 무명선옹이라는 신비노인이 있던 자리엔 한 명의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절세적인 미모(美貌)를 지닌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유난히 투명한 피부와 야리야리한 몸매는 무공을 익힌 무녀(武女)라기보다는 병상(病床)에서 갓 일어난 듯, 애처롭기 그지없어서 보호본능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녀는 바로 취옥여왕 나후빙연이었다. "뼈의 구조와 피부색마저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천면기골환신술(千面奇骨幻身術). 이제까지 알려진 무림최고의 역용환술이지만 그것을 펼치기 위해선 최소한 육 갑자(甲子)의 내공이 필요하기에, 천면음마(千面淫魔)도 창안만 했지 완벽하게 펼치진 못했었지." 여천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설명하고 있었다. 천면음마 화무종(華無淙)은 삼백 년 전의 천하제일색마(天下第一色魔)였다. 그는 원래 추괴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와 오 척 단구에, 팔은 원숭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긴 기괴한 기형(奇形)의 몸을 지녔기에 장성해서도 결혼은커녕 여자들에게서 온갖 모멸과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기가 온 것은 열여덟 살 무렵이었다. 산에서 나름대로 고독(孤獨)을 씹으며 살아가고 있던 그는 산책을 하다가 소나기가 쏟아지자, 우연히 비를 피한 고동(古洞)에서 한 권의 고서(古書)를 습득하기에 이르렀다. 환면성형경(幻面成形經)이라는 것으로 그 내용은 얼굴을 뜯어 고칠 수 있는 성형의술서(成形醫術書)였다. 그 마지막 장(章)에는 막대한 내공력을 사용하여 얼굴의 근육과 피부를 바꾸는 천환미안공(千幻美顔功)이라는 것이 수록되어 있었다. 추괴한 용모와 기형스런 신체 때문에 어려서부터 사람과 놀기보다는 책과 자연을 벗하고 살아온 그의 두뇌는 비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환면성형경을 더욱 발전시켜 얼굴과 체형(體形)마저 완벽하게 바꿀 수 있는 천면기골환신술이라는 것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무림엔 반안(潘顔)이나 송옥(宋玉) 같은 전설적인 미남자(美男子)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의 절세기남아(絶世奇男兒)가 출현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역용환신술이긴 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은 완벽한 변신을 하기 위해선 엄청난 내공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취옥여왕 나후빙연은 무공을 모른다고 소문나지 않았던가? 여천후가 보았을 때도 분명히 그녀는 내공이 일 푼도 없는 병약한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절대무후(絶代武后)의 엄청난 신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취옥여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아홉 명의 노복(老僕)들께서도 본 모습을 보이시는 게 어떠신지?" 여천후의 말에 기인구원로는 움찔하더니, 취옥여왕 나후빙연을 바라보았다. 나후빙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인구원로의 모습이 동시에 일변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헉! 취라구대천공?" 중인들은 놀라다 못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대의 은거한 기인(奇人)들인 줄로만 알았던 기인구원로는 취옥구대천공이 변신해 있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좌중은 죽음의 공동묘지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정적을 깨뜨린 것은 나후빙연이었다. "대단하시군요, 황금서생?" 여천후는 가볍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별 말씀을. 내겐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이한 눈이 있었기에 알아본 것이었소이다." 여천후의 황금동공(黃金瞳孔)이 신비롭게 반짝였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여천후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시했다. "취옥성은 백 년간 중원무림의 하늘로 군림해 왔으며, 중원무림에서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상최강의 집단이오. 취옥여왕은 그런 취옥성의 지존후(至尊后)이고, 말 한 마디면 천하의 무인(武人)들이 달려와 오체복지(五體伏地)하며 명령을 충실히 따를 것이오. 더욱이 무공을 모른다고 알려졌던 취옥여왕께서 엄청난 무공을 지닌…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 더더욱 충성을 다할 텐데, 이런 장난을 하는 이유가 뭐요?" "꽤나 말이 많으시군요?" "이해할 수 없는 여자를 보면 대체로 그렇소. 궁금증을 풀어 주겠소? 변황사패천을 부수지 않고 이런 장난을 치는 이유를 말이오." "간단해요. 변황사패천을 끌어들인 것은 저예요. 내가 내 팔을 자를 수야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변황무림이… 그대의 수족(手足)이라고?" 일순, 여천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그의 뇌리로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변황유랑(邊荒流浪)……. '대초원의 모란왕부를 제압하고, 변황의 상계(商界)를 노리고, 천축(天竺)과 서장무림(西藏武林)을 장악하려 한 집단이라면……?'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천년제국(千年帝國)?"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여천후는 망연히 취옥여왕 나후빙연을 바라보았다. "알아 냈군요, 내 정체를……." 나후빙연은 조용하면서도 그윽한 음성으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원제국(元帝國)의 마지막 황제(皇帝)이신 순제(順帝)의 손자이셨던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께서 일어나셨지만 주원장에게 포어아해(捕漁兒海:현(現) 외몽고(外蒙古)와 중원의 접경지역에 있는 패아지(貝兒池)를 일컬음)에서 분패하신 후, 당대에서의 중원 수복을 포기하셨지요. 대신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어요. 장남(長男)을 몽고대제국(蒙古大帝國)을 건국하신 징기스칸 테무진 시조님이 안장되신 초원혼총(草原魂 塚)으로 보내 무공을 연마하게 하셨지요. 순제의 오대손(五代孫)이신 곤첩목아(坤帖木兒)에 이르러 반역자 귀립적(鬼立赤)에게 모살당하면서 위대한 몽고혼은 단절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때는 이미 중원무림에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었지요. 몽고대제국의 마지막 영광을 지키던 태양사원을 무너뜨리며 등장한 중원의 수호신, 취옥대검호 나후장천이라는 분은 태양대칸(太陽大汗) 철장천(鐵長天)! 나는 그분의 직전혈 통을 이은 태양칸후(太陽汗后) 철빙연(鐵氷娟)이죠." 좌중의 인물들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역사의 이면에 숨어 있었던 비사(秘事)는 너무도 거대한 해일로 중원무림을 잠식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때가 온 거예요. 변황무림의 팔 할이 제국에 천년충성(千年忠誠)을 맹세했으며, 취옥성은 철저하게 지난 백 년간 몽고혼으로 무장되었어요." "중원무림의 파멸을 원하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죠. 대명황실(大明皇室)을 무너뜨리고 무림과 황실을 명실상부하게 일통(一統)시킨 천년군림대제국(千年君臨大帝國)을 세우는 것이 목표의 끝이죠." "과식을 하면 체한다는 진리를 모르는군?" 여천후는 좌중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듯 조용하게 말했다. "그대와 취옥구대천공이 있다 해도 이 자리에 있는 중원혼(中原魂)을 상대할 정도는 아닐 텐데?" "호호! 모든 준비는 이미 갖춰 놓았지요." 싸늘한 살기가 감도는 웃음을 흘리는 나후빙연, 아니 철빙연의 입가엔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크아악!" "아아악!" 밖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이 자리에 모인 군웅들이 이끌고 온 자파의 정예들이 죽어 가고 있는 소리였다. 도합 천 명(名)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중원무림의 마지막 남은 정화(精華)였다. 중원무림의 일천 강자(强者)들은 능히 취옥성과도 일전을 벌일 만큼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응집되어 있었다. 그런데……. "강시( 屍)다!" 사천당문의 가주인 천수독존 당비는 몸을 부르르 떨며 신형을 멈추었다. 천 명의 군웅을 무차별 휩쓸어 가고 있는 삼백 명 정도의 묵인(墨人)들이 있었다. 수비(守備)는 아예 없고, 오직 눈앞에 보이는 상대를 죽이려는 살수(殺手)만을 전개하고 있는 묵인들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먹물을 부어 놓은 듯한 검은 피부에 무릎을 꼿꼿하게 편 채 날아다니는 그들의 눈엔 생기(生氣)가 보이지 않았다. "묵철마강시(墨鐵魔 屍)! 저 저주스런 마물(魔物)이 수백 구라니……." 암기술과 독술에 관한 한 중원제일인 사천당문의 가주인 당비는 한눈에 묵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묵철마강시! 내공이 오 갑자(甲子) 이상인 무림고수가 죽었을 때, 즉시 묵철녹(墨鐵碌)이라 불리는 묵강철(墨鋼鐵)이 녹슬어 생기는 철녹에 십 년간 담가 두면 철녹을 흡수하면서 금강불괴와도 같은 묵철강피(墨鐵剛皮)를 지니게 된다. 그것을 꺼내어 시체가 썩어 쌓이는 부시장독(腐屍獐毒)에 십 년간 놓아 두면 독기(毒氣)가 스며들어 독인(毒人)이 된다. 그 다음으로는 다시금 천 일(日) 동안 고대(古代)의 신비사교(神秘邪敎)인 축융교(祝融敎)의 비전주문술법(秘傳呪文術法)에 의해 인간의 피(血)를 매일같이 공급해 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묵철마강시는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검이 튕겨 나가는 몸을 지녔고, 손톱에 스치기만 해도 맞은 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독수(毒手)가 있었다. 고통이나 슬픔도 없으니, 무차별 살생을 자행하는 최강의 살인병기(殺人兵器)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두 눈을 동시에 꿰뚫어 버린다면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면에서 묵철마강시의 살수를 피해 정확히 양 눈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이 마물들이……!" 수하들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자, 각 파의 종사들은 살기를 띠며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상황은 삽시간에 호전(好轉)되었다. 반전(反轉)되지 못한 까닭은 숫적 열세 때문이었다. 묵철마강시는 삼백 구가 넘었으나 각 파의 종사들은 겨우 이백 명뿐이었다. 그들은 일 대 일(一對一)로 어울리며 동수를 유지했을 뿐이지, 서로를 단시간 내에 제압할 수 없었다. 남은 백여 구의 묵철마강시는 더욱 미쳐 날뛰었고, 무림군웅들은 속절없이 핏물에 쓰러져 갔다. "우……!" 웅혼한 장소성을 터뜨리며 여천후가 몸을 날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퍼퍼- 퍽:! 여천후의 쌍수(雙手)가 꼿꼿이 펴지며 비수(匕首)가 되어 묵철마강시의 양 눈을 후벼팠다. 순식간에 묵철마강시 십여 구가 박살나 버렸다. "호호! 이 때를 기다렸지." 취옥구대천공에 둘러싸여 전장을 지켜보던 나후빙연, 아니 철빙연의 섬연한 교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였다. 콰콰콰콰- 쾅-! 천붕지열(天崩地裂)!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갈가리 찢어발겨졌다. 엄청난 폭약(爆藥)이 터져 오르면서 주위 일천 장 이내는 활화산 같은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와룡봉(臥龍峯) 정상이 무너져 내렸다. "백만 근의 화약(火藥)이면 묵철마강시도 살아남지 못할 정도지." 허공에 둥실 뜬 채 멀어져 가는 철빙연의 봉목으로는 흡족한 기운이 역력했다. "황금서생만 아니었다면 굳이 폭약을 쓸 필요도 없었는데… 하지만 이젠 끝났어." 과연 끝난 것일까? 태산의 와룡봉이 정상에서 백 장이나 함몰되는 엄청난 폭발은 주위의 지형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느닷없이 와룡봉의 낮아진 정상에 연못(池)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도 폭발이 지하수맥(地下水脈)을 건드린 듯했다. 새로이 생겨난 방원 오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연못에는 혈루지(血淚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원무림의 마지막 혼(魂)을 삼켜 버린 죽음의 연못에선 시체 한 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제28장 고금무적(古今無敵)의 힘, 십룡파천무(十龍破天舞) 촤아아-! 동해(東海)의 창파(滄波)는 차가우면서도 온유했다. 하지만 어떤 한 곳만은 무서운 죽음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흑선사사와류해(黑旋死死渦流海).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는 죽음의 바다(死海)를 일컫는 말이었다. 동해의 최북단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는 어둠의 바다엔 사방 십 리(里)에 걸쳐 거대한 소용돌이가 사시사철 일어나고 있었다. 휩쓸리는 순간, 한 점의 빛도 없는 암흑의 해저(海底)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누구도, 그 무엇도 내부에 들어갔다가 빠져 나왔다는 역사는 전무(全無)했다. 허공 일천 장 위를 날던 갈매기조차 빨아들여 삼켜 버리고 마는 악마의 불귀해역(不歸海域)으로, 뱃사람들에게는 공포와 전율로 기억되는 어둠의 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