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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41편 (41/45)

2026-09-24 08:59:34 조회 12
노구에도 불구하고 정기에 찬 두 눈은 아직도 왕성한 기력을 대변해 주었다. 백사노타 타파람. 서장제일의 거상(巨商)으로 칠 년 전, 타클라마칸 사막의 사해상진에서 여천후에게 밑천을 털렸던 인물이었다. 그의 노구가 전율하듯 떨려 온다. "네가 정말… 그 어린아이였단 말이냐?" 그는 격동으로 인해 말조차 제대로 잇질 못했다. 빙그레 미소짓는 미청년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당연히 미청년은 여천후였다. 그도 역시 감격에 찬 표정을 지은 채 백사노타 타파람에게 다가섰다. "난쟁이 할아버지! 그 동안 무고하셨습니까?" 타파람은 기쁨에 찬 대소를 터뜨리며 여천후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와하핫! 진정 그 꼬마였구나!" 아니, 그는 오히려 여천후 품에 폭삭 안긴 셈이 되었다. "전에는 저와 비슷했는데, 이제는 더욱 작아지셨습니다." 여천후는 그를 내려다보며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타파람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사늙은이는 잘 있느냐?" 옥황노야 사파륭을 말함이리라.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거, 반갑지 못한 소식이군.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타파람은 여천후의 손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장식의 대청 가운데 십여 명이 좌정해 있었다. 상석에는 타파람과 여천후가 앉았다. 여천후와 그간의 얘기를 들은 타파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준 관음성모불상이 성령천불계의 신물이었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성령천불계는 절맥(絶脈)된 셈이 아니냐?" "천라오천불이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맥을 잇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한데, 서장의 홍황전륜사(紅黃轉輪寺)가 혹시 겁륜혈황의 세력이 아닌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오십 년 전……." 타파람은 턱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홍황전륜사. 변황칠대천 중의 하나인 서장밀교의 총본산이었다. 그렇지만 백 년 이전까지만 해도 홍황전륜사는 서장무림의 하늘이 되지는 못했었다. 대원제국(大元帝國)의 막강한 후원을 등에 업은 라마교의 총본산인 포달랍궁의 위세에 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포달랍궁의 중원지부인 태양사원의 선봉부대로 전락하는 비참한 신세였던 것이다. 오십 년 전에 이르러 상황은 변했다. 서장무림에 정사쌍불(正邪雙佛)이라는 신비승려들이 출현했다. 절대마불(絶代魔佛), 절정천불(絶頂天佛). 이들은 각기 그 추구하는 바가 상극이었다. 절대마불은 죽음의 사신으로, 절정천불은 활불로서 각각 위명을 떨쳤다. 한데,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정사쌍불 두 사람은 기가 막히게도 동일인물이었던 것이다. 서장무림은 그 한 사람에 의해 완전히 농락당한 셈이었다. 전륜혈법왕(轉輪血法王)! 그가 바로 정사쌍불의 정체였다. 그는 절대마불로서 자신의 적을 제거한 것이며, 절정천불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수하를 끌어들인 것이다. 실로 교묘한 술책이 아닐 수 없었다. 서장무림의 밀교승려들은 분개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거대한 세력을 배경으로 삼은 상태였다. 홍황전륜사! 그로부터 그 세력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 올랐다. 과거엔 유명무실했던 존재였지만 포달랍궁마저 일거에 병탄시키며 명실상부한 서장무림의 하늘로 올라선 것이었다. 여천후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륜혈법왕! 그 자가 성령천불계의 반도임에 틀림없겠군요!" 타파람은 침중한 안색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좌중을 가리켰다. "나를 비롯하여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그 전륜혈법왕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좌중의 인물들은 전륜혈법왕의 이름이 나오자, 일제히 살광(殺光)을 뿜어 냈다. 타파람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전륜혈법왕! 그 자는 자신을 거역하는 모든 문파를 가차없이 멸문시켰다. 무려 이백사십 개에 달하는 문파가 참화를 입었다. 이에 그 수뇌급들이 모여 하나의 결사조직을 창건했다. 서천혈맹(西天血盟)! 여기에 있는 열 명이 그 서천혈맹의 최고 수뇌진이다." "서천혈맹?" 여천후는 눈빛을 반짝였다. 타파람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는 홍황전륜사의 궤멸을 모색중에 있다." "저도 한몫 할 기회를 주시렵니까" 여천후는 대뜸 참가 의향을 밝혔다. "너도?" 타파람은 기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덥석 여천후의 손을 쥐었다. "고맙다. 사실 승산은 삼 할에 불과했는데, 네가 도와 준다면 오 할의 승산을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어조는 다분히 흥분에 차 있었다. '승산은 십 할로 보아도 좋겠지요.' 여천후는 내심 그 정도까지 자신감을 가졌다. 칠 년 만의 상봉은 단순한 만남이 아닌 힘의 결합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악(惡)을 제어하는 거대한 장벽으로서……. 제25장 서장무림(西藏武林)의 복수행(復讐行) 태양이 지고 난 자리를 뒤덮는 어둠의 장막은 서장(西藏)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짙은 야색(夜色)은 하늘과 땅을 일색으로 물들어 놓았다. 산 중턱에서 어둠을 밀어 내는 혈광(血光)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 거대한 혈광은 선명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사찰(大寺刹)이 아닌가? 핏빛으로 빛나는 사찰……. 홍황전륜사(紅黃轉輪寺). 그렇다. 이 피의 대사찰이 바로 서장무림(西藏武林)을 일통(一統)한 절대마세(絶代魔勢)의 총본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밤의 정적(靜寂)을 뚫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하나, 둘… 열… 그 숫자는 상상을 불허하리만큼 급속도로 불어났다. 족히 오천 명이 넘는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재편(再編)하기까지 불과 삼 각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들은 이내 홍황전륜사의 지척에까지 이르렀다. 선두엔 여천후와 타파람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서천혈맹의 고수들이 아닌가? 홍황전륜사의 마세에 의해 멸문(滅門)된 서장무림의 이백사십오 개 문파의 생존자들이 모여 이룩한 서천혈맹의 수뇌들이었던 것이다. 여천후는 기환술법(奇幻術法)이 가미된 은밀한 경공으로 홍황전륜사의 경계지역까지 들어왔다. '기습에 방해되는 자들을 제거해야 우리측 피해가 적다.' 타파람과 오천 명의 서천혈맹 결사대는 숨을 죽이며 홍황전륜사의 경계지역으로 스며든 여천후의 신호를 기다렸다. 여전히 심장을 압박하는 정적만이 대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여천후는 무엇을 하는지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타파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천후의 능력이라면 홍황전륜사의 외곽 방어망을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그 때였다.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홍황전륜사의 정문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타파람은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쳐 오르며 힘차게 외쳤다. "복수(復讐)의 날이 왔다!" 오천 명의 결사대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와아!" "홍황전륜사를 분쇄하라!" "악마승(惡魔僧)들을 죽여라!" 콰콰- 쾅-! 단숨에 홍황전륜사 안으로 뛰어든 오천 결사대는 홍황전륜사의 마승들을 상대로 대혼전을 전개했다. 적시(適時)의 기습과 쌓였던 원한의 폭발, 그리고 계산된 합격술(合擊術)로 인해 서천혈맹의 오천 결사대는 상당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일 대 일(一對一)이라면 서천혈맹의 무사들은 홍황전륜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천후는 서천혈맹의 무사들에게 사 인(人)이 합공(合功)하는 사상연환진세(四象連環陣勢)를 전수해 주었다. 결과는 기습과 함께 대성공이었다. 홍황전륜사의 마승들은 느닷없는 기습을 당하자, 집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황급히 뛰어나오다가 한 명 한 명이 서천혈맹의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변변한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 갔다. "아악!" "크아악!" 무수한 비명이 핏물과 함께 야천(夜天)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야말로 피의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죽음은 꼬리를 문 채 대혼전을 참혹한 혈전(血戰)으로 휘몰아 갔다. 처절한 혈투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오 인(人)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천라오천불(天羅五天佛)이었다. 광불(狂佛)은 미친 광인(狂人)의 몸부림 같은 기괴한 방식으로 홍황전륜사의 마승들을 상대해 갔다. "히야오!" 그는 육탄돌격으로 마승들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불강지체(佛剛之體)를 이룬 그의 몸은 열 겹의 호신강기를 두른 것보다 더욱 강력한 반탄기(反彈氣)를 뿜어 내며 적의 공세를 무력화(無力化)시켰고, 그의 사지(四肢)는 어지간한 도검(刀劍)보다 강인하고 훌륭한 병기(兵器)였다. 퍼퍼- 퍽-! 일거수(一擧手)에 마승들의 머리통이 깨진 수박처럼 으깨지며 터져 오르고, 일투족(一投足)에 마승들은 뱃가죽이 북(鼓)처럼 터져 나가며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날아갔다. 광불은 심지어 머리로 들이받아 상대를 박살내기까지 했다. 음양불(陰陽佛)의 싸움 방식은 아주 조용했다. 그는 단지 좌장(左掌)과 우장(右掌)을 번갈아 내뻗을 뿐이었다. "아미타불… 타 죽은 중생은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가고, 얼어 죽는 영혼(靈魂)은 팔한지옥(八寒地獄)이 포근하게 맞이해 줄 것이다." 화르르-! 쩌쩌- 쩡-! 그는 극양(極陽)과 극음지기(極陰之氣)를 동시에 격출해 내며 조용한 불호를 되뇌이고 있었다. "아악!" "크아악!" 적중된 마승들은 형체도 없이 숯덩이가 되던가, 아니면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실로 가공할 음양불공(陰陽佛功)이 아닐 수 없었다. 뇌불(雷佛)은 뇌정천불강(雷霆天佛 )으로 하늘과 땅을 번갯불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야불(夜佛)은 그림자 없는 도깨비(夜魅) 같은 신비로운 밤의 신법으로 마승들 사이를 누비며 지풍(脂風)을 연이어 격출시켰다. 그야말로 고도(高度)의 경지에 이른 살인기술(殺人技術)이 아닐 수 없었다. 홍황전륜사의 마승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혈(死穴)이 관통되어 픽픽 쓰러져 갔다. 패불(覇佛)은 초인적인 신력(神力)으로 마승들을 공깃돌처럼 날려 버렸다. 퍼퍼퍼- 펑-! "중(僧)도 지옥에 갈 수 있음을 인식시켜 주리라!" 분홍빛 일색의 화려한 침실은 온통 도색(桃色)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음란한 분위기에 어울릴 만큼 실내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넓다란 침상 위엔 피칠을 한 듯 붉은 혈면(血面)을 지닌 노승(老僧)이 두 비구니(比丘尼)를 상대로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헉… 헉……!" "아아, 흐응……!" 끈끈한 비음을 발하며 일남이녀(一男二女)는 서로의 알몸을 탐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혈면노승은 두 여승을 번갈아 품에 안으며 갖은 자세로 농락해 갔다. 그의 기교는 두 여승을 동시에 상대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극락(極樂)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느냐?" "흐응! 대장로님!" "소첩도 어서……." 세 남녀는 그야말로 한몸처럼 뒤엉켰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연회(宴會)는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열락(悅樂)과 쾌락(快樂)의 이중주(二重奏)는 돌연히 깨져 버리고 말았다. 콰앙-! 침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흑의가사(黑衣袈裟)를 걸친 법승(法僧)이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대장로님!" 혈면노승(血面老僧)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흑불왕(黑佛王)! 감히 어딜 함부로 들어오느냐?" "대장로님! 적도들이… 크흑!" 흑불왕이라는 법호를 지닌 흑의법승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풀썩 쓰러졌다. 문 밖에서 들어서는 여천후를 보자, 혈면노승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웬 놈이냐?" "그대가 전륜혈법왕(轉輪血法王)인가? 설마, 이 따위 짓이나 하고 있는 놈이 일문의 종주라는 전륜혈법왕은 아니겠지?" 여천후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말 못할 위압감을 느끼며 기회를 엿보던 혈면노승은 기습적으로 쌍장(雙掌)을 내질렀다. "죽어랏, 애송이!" 콰- 릉-! 엄청난 혈강기류가 소용돌이처럼 뻗어 나와 여천후의 전신을 휩쓸어 왔다. "탄(彈)!" 여천후는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오른쪽 소매를 휘저었다. 반탄수강(反彈袖 )이라는 것으로, 소맷자락에 내공을 주입시켜 무형(無形)의 방패(干)를 형성하는 기술(奇術)이었다. 그것은 부딪친 상대의 내공이 두 배 이상 안 되면 공격력이 고스란히 반탄되어 공격자에게로 되돌아가도록 한다. 콰- 쾅-!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침실의 지붕과 벽이 무너져 버렸다. "크흑!" 혈면노승은 너무도 막강한 반탄력에 밀려 삼 장이나 튕겨 날아갔다.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으! 전륜혈법왕께서… 이 원수를 갚을 것……." 혈면노승은 썩은 짚단처럼 고꾸라졌다. 홍황전륜사의 대장로 신분으로서는 너무도 어이없는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여천후는 경풍에 날려 오 장 밖으로 나둥그러진 두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륜혈법왕은 어디 있느냐?" 좌측의 유난히 커다란 유방을 지닌 비구니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겨우 대답했다. "중원으로 가셨사옵니다." "중원?" "예. 정예고수들을 이끌고 열흘 전에 중원을 향해 떠나셨사옵니다." 여천후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큰일났군!' 그의 신형은 어느 새 혈전장(血戰場)을 향해 날아갔다. "와아!" "홍황전륜사를 멸망시켰다!" 서천혈맹의 오천 결사대는 핏물을 디딘 채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미 대혈전은 종결된 상태였다. 홍황전륜사의 마승들은 태반이 도주하여 살 길을 찾았기에 서천혈맹은 예상 외로 손쉬운 승리를 얻게 된 것이다. 홍교와 황교를 통합하여 서장밀교(西藏密敎)의 하늘이 되었던 홍황전륜사였다. 그렇지만 라마교의 융성(隆盛)으로 그 힘은 허약해졌으며, 종내엔 라마교 총본산인 포달랍궁의 일개 하부조직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하는 역사를 아울러 지니고 있기도 했다. 중원대륙에 대명제국(大明帝國)의 깃발이 날리기 시작하면서부터 홍황전륜사에 빛이 비춰 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포달랍궁 고수들은 원제국(元帝國)의 요청으로 중원무림(中原武林)을 견제하고 있는 상태에서 홍황전륜사는 조용히 전력(戰力)을 빼내 서장무림으로 되돌아왔다. 포달랍궁의 중원전진기지(中原戰陣基地)인 태양사원이 박살난 직후, 그와 때를 같이하여 홍황전륜사는 포달랍궁을 기습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포달랍궁이 멸망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승리한 홍황전륜사의 피해도 극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태반의 중요인물들이 이번의 일전(一戰)에서 죽었고, 살아남은 인물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심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정사쌍불(正邪雙佛)이라는 신비승(神秘僧)이 출현하여 서장무림을 휘저을 때에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일순간 힘의 공백기를 맞이한 서장무림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 버렸고, 그 와중에 정사쌍불이 등장하면서 그의 추종자들은 삽시간에 홍황전륜사를 접수해 버리고 말았다. 정사쌍불이 전륜혈법왕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서장무림의 하늘로 등극한 것도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뭣이? 전륜혈법왕이 정예마승을 이끌고 중원으로 갔다고?" 타파람의 인상이 심하게 찌그러들었다. "어쩐지 너무 쉽더라니……." "저는 먼저 중원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여천후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가 보아라! 내 조만간 찾아가겠다." 타파람은 못내 섭섭한 기색으로 말하며, 그의 손을 힘껏 거머쥐었다. "그럼……!" 여천후는 동천(東天)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의 뒤로 핏물을 뒤집어쓴 천라오천불이 신속히 따랐다. 타파람은 여천후가 사라져 간 동천을 응시하며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중원에는 인물이 있건만, 서장에는 저 아이의 반이라도 따를 인재가 없으니……." * * * * 대중원에 몰아친 가공할 혈풍은 변황칠대천 중 네 곳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새북태양십삼천(塞北太陽十三天). 대초원(大草原)의 패자(覇者). 드디어 그들이 등격리(騰格里) 사막(砂漠)을 건너 열하(熱河)를 거쳐 하북(河北)으로 밀고 내려왔다. 무려 일만(一萬)의 태양철기군단(太陽鐵騎軍團)으로서……. 북천빙하맹(北天氷河盟). 천빙후(天氷后) 빙옥련(氷玉蓮)이 휘하의 일만 빙설인(氷雪人)을 이끌고 신강(新彊)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가 얼음으로 채워지고 대과벽(大戈壁)은 눈(雪)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홍황전륜사. 일만 명에 달하는 밀불마승(密佛魔僧)들은 청해(靑海)를 휘저으며 중원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서는 얼굴의 반쪽은 자애로운 활불(活佛)이고, 다른 반쪽은 지옥의 악귀나찰 같은 양면(兩面)을 지닌 괴승(怪僧)이 무차별 살수를 자행했다. 그의 이름은 전륜혈법왕이라 했거니와……. 동영살예단(東瀛殺藝團). 오천 명에 달하는 인자군단(忍者軍團)이 동해(東海)를 건너 절강(折江)과 강소(江蘇)를 죽음의 공포(恐怖) 속으로 몰아넣었다. 소리도 없이 밤이 어둠을 타고 스며드는 은밀한 죽음의 손길은 진정 전율스러운 것이었다. 대혈풍(大血風)! 중원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혈란(血亂)이 일어나 온통 피구름(血雲)으로 뒤덮였다. 중원무림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취옥성(翠玉城). 중원무림의 유일천(唯一天)! 드디어 취옥성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처절한 응징의 대반격이 개시되었다. 태행산(太行山)의 북방에서 새북태양십삼천과 천중육패천 중 이천(二天)인 사자철림(獅子鐵林)과, 소림백팔나한진(少林百八羅漢陣)과, 아미파(峨嵋派)의 구십구(九十九) 항마천불검진(降魔天佛劒陣)을 주축으로 한 천불성련(天佛聖聯)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하(南下)하는 북천빙하맹은 탑리목분지에서 백사련(白邪聯)과 격돌했다. 환사(幻邪)의 사술법(邪術法)은 빙설인(氷雪人)들의 눈을 어지럽히며 그들의 발걸음에 족쇄를 채워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서진(西進)하는 동영살예단의 오천 인자군단은 선하령에서 중원최강의 자객집단인 신비혈(神秘穴)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투는 사실상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처절한 비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장 처절한 암투(暗鬪)였다. 어둠의 지배자들이 싸우는 것이었기에……. 청해의 자단목하(紫檀木河)는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서장에서 밀려온 홍황전륜사와 중원으로의 진입을 저지하려는 천마성(天魔城)과 화루(花樓)의 공방전이었다. 처참했다. 대중원은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뒤덮이고 있었다. * * * * 이름 모를 산봉(山峯)이었다. 사위는 온통 공포스러운 흑무(黑霧)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 그 가운데에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섬뜩한 자광이 일렁이고 있었으며, 전신에서는 태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가공할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문득 그는 음침한 괴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싸워라, 변황과 중원! 어차피 제거할 것들이었다. 너희들끼리 싸워라! 호호호!" 음성은 여인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아름답고 미려한 옥음(玉音)을 지닌 여인은 어깨를 흔들며 요요(妖妖)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가시와도 같던 사상천비계! 육합수호천황가! 사상천비계는 여천후라는 놈에게 궤멸될 것이다. 그리고 그 놈 역시 죽을 것이다. 설사… 살아 돌아오더라도 죽일 계책이 마련되어 있다. 대원제국이 이룬 것보다 더욱 광대한 천하를 천년제국의 발 아래 두리라!" 파츠츠츠츳-! 그녀의 전신에 어려 있던 묵광(墨光)이 삽시간에 자욱한 안개가 일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가공할 마기가 물씬 사위를 휘감았다. 그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극렬한 마기류였다. 중원무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풍은 천년제국에서 조작된 것이란 말인가? 천하는 모르리라.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는 야망의 여인이 있음을……. 더구나 그녀는 여천후를 죽일 계획이 아닌가? * * * * 휘이이- 잉-! 엄청난 눈보라(雪風)가 폭풍(暴風)을 동반한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부신 백설(白雪)뿐이었다. 끝없는 은세계(銀世界)……. 이곳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희마랍아산(希馬拉亞山)의 애불륵사봉(埃拂勒査峯)이었다. 육 인(人)의 인물이 폭설 속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여천후와 천라오천불이었다. 여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오히려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었군!" 그 말에 광불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대성불, 죄송합니다." 듣고 있던 패불이 버럭 노성을 내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이 미친 놈! 그래, 이곳이 중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말이냐?" 그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 말에 뇌불이 혀를 차며 맞장구를 쳤다. "저 미친 놈의 말을 믿고 쫓아온 것이 잘못이지." "……!" 광불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여천후의 눈치만 슬금슬금 살폈다. 그 때 여천후가 소맷자락을 가볍게 떨쳤다. 그러자 오채예조 앵아가 바람같이 날아올랐다. "저 밥통! 길도 모르면서 길 안내를 한다고? 밥통! 머저리!" 앵아는 요란스럽게 재잘거리더니, 다시 여천후의 소맷자락으로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