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9편 (39/45)
그의 신형이 집어삼켜지듯 삽시에 혈무 속으로 사라졌다. 혈갱은 엄청나게 깊었다. 끝없는 피안개(血霧)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 근 삼백 장 이상을 내려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혈무의 회오리치는 기세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강렬해졌고, 어느 순간 전신피부를 갈가리 찢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강풍이 솟구쳐 올라왔다. 여천후는 혼신의 공력을 다 사용해서야 강풍을 뚫고 하강(下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려 오백여 장을 내려왔을 때, 드디어 희미하게 바닥의 윤곽이 보였다. "잠종무영천환류(潛踵無影千幻流)!" 둥실-! 여천후의 신형이 허공에서 우뚝 섰다. 이어 그는 새털처럼 가볍고 느리게 떨어져 내려 비로소 바닥에 착지했다. 잠종무영천환류! 공기의 흐름을 따라 부유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를 가볍게 만드는 가루라성존의 신법절학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오백여 장 하강해 온 가속도를 감당해낸 것이다. "……!" 여천후는 호흡을 가다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짙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여천후의 초인적인 안력은 이내 우측 석벽에 뚫려 있는 하나의 동혈(洞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곳이다!' 여천후는 지체하지 않고 동혈 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파아- 앗-! "이런 지저세계(地底世界)가 있다니?" 동혈을 모두 통과한 여천후는 경악이 서린 탄성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혈 밖에는 그야말로 거대한 지하분지(地下盆地)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근 십만 평에 달하는 면적에 칙칙한 회색 하늘. 분지 한복판에는 한 채의 거대한 성곽(城郭)이 우뚝 솟아 있었고, 성채 사방을 둘러싼 채 수많은 가옥들이 오밀조밀하게 몰려 있었다. 저주(詛呪)의 마인세계(魔人世界), 혈정지옥계!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제23장 악마(惡魔)의 대지(大地) 성채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은 보통 중원의 마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보통 사람이었고, 문 밖을 기웃거리는 아낙네나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그저 평범해 보였다. 단지 이상한 점이라면 낯선 여천후를 보고도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천후는 의혹을 느끼며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고 십여 장 정도 앞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피비린내!' 아이들 쪽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 왔던 것이다. 아이들은 칼과 갈고리 종류의 흉기를 나누어 든 채 뭔가를 자르고 있었다. 푸- 욱! 촤아아아-! 솟구쳐 오르는 피분수가 얼핏 보였다. 의아하게 아이들을 주시하던 여천후. '토끼라도 잡…….' 한순간 그의 안색이 대변했다. 보라! 아이들 중 하나가 움켜쥐어 들어올린 시뻘건 물체를. "헤헤, 이게 바로 심장이라는 거로구나!" "으응? 그렇게 생겼구나?" 끔찍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움켜쥐고 아이들은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아이들 사이에는 여인의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이미 사지(四肢)가 토막나 하나의 고깃덩이로 화해 있는 시체였다. 잘려진 팔다리는 선혈과 흙이 범벅된 채 근처에서 뒹굴고 있었고, 동체의 젖가슴 한쪽도 무참히 베어져 있었다. 그것은 한 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쳇! 잘라 내니까 별로 안 크잖아?" 여천후는 그만 소름이 오싹 끼쳤다. '시체 해부!' 그렇다. 아이들의 행위는 바로 시체 해부였다. "헤헤, 그러니까 갈비뼈는 전부 열두 개로구나." "와아! 내장은 길기도 하다!" "응? 돼지 간(肝)이나 사람 간이나 똑같네!" 도대체 인간이 할 짓인가? 더구나 불과 십이삼 세 정도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건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여천후는 구역질이 치밀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때였다. "호호! 못 보던 오빤데?" 한 소녀가 다가와 빤히 얼굴을 디밀었다. 열서너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제법 예쁜 얼굴을 지닌 소녀였다. 산고양이처럼 번들거리는 눈빛만 아니라면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운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녀의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오는 말! "오빠, 멋지게 생겼네! 나랑 극락(極樂) 구경할래?" '극락 구경?' "극락 구경 몰라? 저기 저런 것 말이야!" 소녀는 손가락을 뻗어 길 한쪽을 가리켰다. 무의식중에 소녀의 손길을 따라간 여천후는 부지불식간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암수 두 마리의 개가 있었던 것이다. 암수가 붙어 있으니 하고 있는 행위란 너무도 뻔한 일……. '이런……!' 여천후는 무섭게 굳어져 다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소녀의 조그마한 몸매에서 발산되는 뇌살적인 염기(艶氣)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중추신경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는 요악(妖惡)스런 요기(妖氣)였다. 불과 십삼 세의 소녀에게 어찌 이렇게 요염한 미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구제불능이군.' 여천후는 소녀의 혼혈을 제압해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마을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넋을 잃고 말았다. 과연 인간이 사는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해도 된단 말인가? 푸줏간에는 인육(人肉)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주루(酒樓)에선 인혈주(人血酒)를 팔았다. 한 여인이 수십 명의 사내에게 강간(强姦)당하는가 하면, 반대로 수십 명의 여인이 한 사내를 겁탈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두가 백주 대낮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살인(殺人), 방화(防火), 강간(强姦)이 이곳에선 오히려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여천후는 진정으로 분노하고 말았다. "만약 이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무림뿐만 아니라, 중원대륙 전체가 하루 아침에 쑥대밭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어린아이들조차 가공할 마공을 연성하고 있다. 최소한 무림 이류의 수준.' 여천후는 마을을 끝까지 둘러본 후 폭풍처럼 일어나는 살심을 억누르며 수 차례 심호흡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는 고뇌하며 마을 외곽을 서성거렸다. 둥- 둥- 둥-! 갑자기 성채 내부에서 둔중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회색빛 하늘에 연쇄적인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퍼퍼- 펑-! 순간, 마을의 전 인원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미친 듯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와아! 지옥제(地獄祭)가 실시된다." "와아아!" "지옥제다! 가자!" 그들은 원인 모를 기쁨에 겨워 날뛰며, 해일처럼 성문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여천후는 영문을 몰랐으나 일단 인파(人波)에 휩쓸려 갔다. 성내의 거대한 광장 한복판에 높다란 핏빛 누대(血臺)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는 일신에 진한 빛깔의 혈포(血袍)를 걸치고 실로 공포스러운 마기를 전신으로 뿜어 내는 노인이 단정히 좌정하고 있었다.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자, 광장에 운집한 군웅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一去手一投足)을 주시했다. 혈포노인은 마기가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음산한 음성을 토했다. "지금부터 지옥제를 시작하겠노라! 그리고 지옥제가 끝나는 날, 우리 모두 지상으로 나갈 것이니라!" 그 말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군웅들의 입에서 솟구쳤다. "와아아!" "지옥혈법종(地獄血法宗)이시여!" "혈정지옥계 만세!" 함성은 혈포노인이 양 손을 허공으로 내뻗는 순간, 급격히 가라앉았다. "시작하라!" 혈포노인은 누대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명했다. 누대 아래엔 열 명의 나녀(裸女)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경국경성(傾國傾城)의 미색을 지닌 미녀(美女)들이었다. 십오 세에서 십칠 세 사이의 신선하기 이를 데 없는 육체를 지닌 여인들의 알몸은 그야말로 싱그럽기 이를 데 없었다. 삶은 계란(鷄卵)의 껍질을 갓 벗겨 낸 듯한 희고 뽀얀 피부에, 탐스럽기 이를 데 없는 유방과 은밀한 곳에 자리한 보송한 체모(體毛)의 물결은 그야말로 소담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들은 혈포노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각기 한 자루씩의 혈비(血匕)를 집어 올렸다. "지옥혈법종이시여! 소녀들을 제물로 바치나이다!" 그녀들은 지체 없이 혈비를 자신의 가슴에 쑤셔 박는 것이 아닌가? 신음성 한 점 없고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정작 경악할 일은 그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서걱- 서걱-! 보라! 가슴을 동그렇게 도려 내 심장을 끄집어 내는 그녀들의 가공할 행동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옥마야의 탄생을 위하여!" "혈정지옥계의 지존께 위대한 영광을!" 도대체 이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자신의 심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저토록 태연하게 말할 수 있다니? 바깥 세상에 나가 이 사실을 얘기한다면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릴 불가사의한 괴사(怪事)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 군중 틈에 섞여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천후의 분노는 마침내 극에 달했다.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마인들이다. 이들을 절대로 지상(地上)으로 내보내선 안 된다. 모조리 죽여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군웅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헤치며 광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우선 혈정지옥계주를 찾자! 지옥혈법종이라는 자는 우두머리가 아니다!' 군웅들은 의식에 정신이 팔려 아무도 그가 광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 혈정지옥계의 밤은 회색빛 하늘이 조금 검어졌을 뿐, 지상과 같이 어둡지는 않았다. 천악전(天惡殿). 혈정지옥계의 제이인자(第二人者)인 지옥혈법종의 거처였다. 온통 핏빛 일색으로 지어진 거대한 전각이었다. 이곳으로 안개가 스며들듯, 한 줄기 환영(幻影)이 뭉쳐졌다. 여천후였다. "노형님께 감사드려야겠군. 잠종무영천환류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잠종무영천환류! 빛처럼 빠르고 구름처럼 유유하기도 하며, 안개같이 형체 없이도 사용되는 기환신법(奇幻身法)이 그것이었다. 여천후는 바로 그것을 사용하여 반 나절 동안 혈정지옥계의 내실을 탐지해 냈다. "현재 혈정지옥계주는 폐관중이다. 이인자인 지옥혈법종이 대리(代理)를 맡고 있다." 알아 낸 사실은 많았다. 우선 혈정지옥계의 편제(編制)였다. 혈정지옥계의 지존인 지옥마야(地獄魔爺)! 그를 정점으로 다음 서열로는 지옥삼혈마(地獄三血魔)라는 이름의 삼 인(人)이 있었다. 지옥혈법종, 혈영마신, 지옥마후(地獄魔后). 그 아래로 십대 지옥혈신(地獄血神)과, 삼십육 지옥마군(地獄魔君)과, 백팔 지옥천마단(地獄天魔團)이 포진해 있는 상태였다. 혈영마신이 이끄는 오백 지옥혈영대, 지옥혈법종 휘하의 일천 지옥군림혈단(地獄君臨血團), 지옥마후의 일천 지옥나찰대(地獄羅刹隊), 그리고 오백 구의 지옥혈마강시(地獄血魔疆屍)들이 하부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가히 가공무비할 진용이었다. 마기(魔氣)가 골수까지 스며든 극악한 마인들은 개개인이 하나같이 절세고수들이었다. 그 중 빙산(氷山)의 일 각(角)에 불과한 오백 지옥혈영대만으로 변황칠대천의 하나인 마라독천궁을 궤멸시킬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더욱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단 말이다!' 여천후는 천악전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곧 유령처럼 그 내부로 스며 들어갔다. 천악전 내의 한 칸 밀실(密室). 혈옥석(血玉石)으로 만들어진 석탁(石卓)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지옥혈법종과 혈가사(血袈裟)를 걸친 정체불명의 노승이었다. 그들은 지금 뭔가 의기투합한 것이 있는 듯 득의의 웃음을 주고 받고 있었다. "드디어 시기가 도래했소." "그렇소. 천년제국에서 활동을 개시하면 본사는 그들 요구대로 일단 중원에 진출할 것이오." "천년제국 조무래기들이 감히 천하를 넘보다니?" "잘 됐지 않소? 일단 놈들에게 이용당하는 척해 주고, 결정적인 시기에 역으로 놈들을 이용하면… 흐흐흐!" 혈포노승은 누구인가? 전신에서 발산하는 기도가 지옥혈법종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푸른 벽안(碧眼)을 지니고 있는 걸로 보아 중원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년제국을 멸망시키면 천하는 이등분(二等分)으로 나눠지는 거요. 크카카캇" 지옥혈법종은 생각할수록 통쾌한 듯 광소를 터뜨렸다. "그렇소이다. 홍황전륜사(紅黃轉輪寺)와 혈정지옥계가 힘을 합치면 천하에 거칠 것이 뭐 있겠소?" 홍황전륜사. 변황칠대천 중 서장무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서장밀교의 본산이었다. 그 홍황전륜사가 혈정지옥계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그러나 마주앉은 이들의 내심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천하양분(天下兩分)? 꿈 깨라! 네놈들의 고기 맛을 보아 줄 테니!' '인간 같지도 않은 네놈들과 합작? 웃기지 마라! 일이 끝난 후엔… 흐흐!' 이런 것을 바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 하던가? 문득 혈포노승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그럼 법종만 믿고 가겠소이다." 지옥혈법종은 따라 일어서며 가볍게 목례했다. "멀리 나가지 못하오." "그럼." 혈포노승은 꺼지듯 밀실에서 사라졌다. "……!" 홀로 남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옥혈법종은 심중에 일어나는 흥분을 다스리려는 듯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내일이면 지존께서 출관하신다. 그 동안 지옥제일존(地獄第一尊)의 탄생이 없어 수천 년간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으나, 지존께서 드디어 악마지옥공(惡魔地獄功)을 완성하신다. 내일이면 금제를 푸는 것이다. 크카카캇!" 지옥혈법종은 환희 어린 광소를 끝없이 토해 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광소를 멈추며 안광에 미미한 의혹을 드러냈다. "선발대로 나간 혈영마신은 왜 소식이 없는 거야?" 바로 그 때였다. 그의 말을 받는 한소리 조용한 음성이 들려 온 것은……. "그것이 궁금한가?" 지옥혈법종은 대경실색했다. "헉! 누구냐?" 그는 섬전처럼 신형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한 사람을 보았다. 언제 어디로 해서 들어섰는가? 한 명의 수려한 미장부가 표표히 신형을 세우고 있었다. 여천후는 싸늘한 살소를 피어 물고 있었다. "지옥혈법종! 혈영마신은 바로 내 손에 죽었다." "뭐, 뭐라고?" 지옥혈법종의 안색에 잔뜩 혼란스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냐, 네놈은? 혈영마신이 네놈 손에 죽다니?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그보다……." 여천후는 안색을 굳히며 무시무시한 살광을 폭사했다. "지옥마야는 어디 있느냐?" "감히 지존의 존호를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뒈져랏!" 피피핑-! 지옥혈법종은 다짜고짜 섬광 같은 세 가닥 혈광지(血光指)를 폭사했다. 여천후는 가볍게 피해 내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벌주(罰酒)를 마셔야 입을 열겠느냐?" "이 방자한 놈! 잔재주 몇 수를 믿고 어디서 감히? 지옥대혈공(地獄大血功)!" 파츠츠츠-! 일순, 지옥혈법종의 전신에서 소름끼치는 혈광(血光)이 피어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여천후는 갑자기 일체의 모든 동작을 정지하며 눈을 부릅뜨는 것이 아닌가? "지옥혈법종, 내 눈을 보아라!" 일갈(一喝)! 한순간에 상대의 심령(心靈)을 바스러뜨리는 기묘한 힘을 함유하고 있었다. 동시에 여천후의 두 눈은 시퍼런 뇌광(雷光)을 뿜어 냈다. "헉! 사, 사술(邪術)?" 지옥혈법종은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렇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바로 벽력천뢰안(霹靂天雷眼)이 전개된 것이다. 지옥혈법종의 동공이 급격히 빛을 잃고 몽롱해졌다. "크으으-!" 여천후는 더욱 강렬한 벽력뇌광(霹靂雷光)을 폭사해 내며 입을 열었다. "지옥마야는 어디에 있느냐?" 지옥혈법종은 꿈결처럼 대답했다. "지옥혈부(地獄血府)……." "지옥혈부?" "동쪽으로 천 장 밖에 거대한 아수라상(阿修羅像)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이 지옥혈부입니다." "지옥마야는 혼자 있는가?" "삼십육 지옥마군이 호위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이제 가거라." 여천후는 냉정하게 말하며 눈의 벽력뇌기(霹靂雷氣)를 거두어 들였다. 순간, 지옥혈법종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 내며 퉁겨지듯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크아아악-!" 푸스스스……! 보라! 그의 전신이 새까만 재로 바스러져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실로 가공할 벽력천뢰안의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 여천후는 침중한 신색으로 그 잔해(殘骸)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손바닥으로 한 차례 얼굴을 문질렀다. 삽시간에 그의 얼굴이 지옥혈법종의 모습으로 변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편법을 쓸 수밖에 없군." 스슷-! 독백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진 그의 신형이 환영과도 같이 밀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 뭉클… 뭉클……! 지저세계의 외곽엔 오십 장 높이의 거대한 아수라상이 섬뜩한 혈무(血霧)를 꾸역꾸역 내뿜으며 서 있었다. 지옥혈부(地獄血府). 아수라상의 이마에는 핏빛으로 섬뜩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쐐애- 액-! 한 줄기 혈영(血影)이 무서운 속도로 아수라상의 쩍 벌어진 입 속으로 날아들었다. 혈영은 바로 지옥혈법종으로 변신한 여천후였다. '이곳이 지옥혈부인가?' 여천후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수라상의 입 안은 장방형(長方形)의 석실이었고, 전면에는 검붉은 철문(鐵門)이 가로막고 있었다. 문득, 철문 안쪽에서 음침한 일갈이 터졌다. "누구냐?" "……!" 여천후는 스산히 눈을 빛내며 철문으로 다가섰다. '지옥혈부에는 삼십육 관(關)이 있고, 각 관문에 지옥혈법종 못지않은 강자들인 삼십육 지옥마군이 지키고 있다고 했겠다?' 그의 뇌리로 빠르게 생각이 스쳐갔다. "지옥번(地獄幡)의 이름으로 명한다! 열어라!" 여천후는 품 속에서 한 자루 핏빛의 혈기(血旗)를 꺼내 들며 외쳤다. 지옥번! 그것은 지옥혈부로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징표였다. 또한 그 혈마번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혈정지옥계의 제이인자인 지옥혈법종 한 명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 철문 안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마도 지옥번의 진가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번주(幡主)의 영을 받습니다!" 그그그- 긍-! 굉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안개가 피어 오르듯 섬뜩한 혈무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고, 언뜻 그 혈무에 은신해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번주, 무슨 일로… 컥!" 입을 열던 그 인물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언제였는지 지옥번이 그의 천돌혈(天突穴)을 관통해 있었던 것이다. "너… 너, 번주가 아니… 컥!" 쿠- 웅! 그 자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고목처럼 뒤로 넘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여천후는 날렵하게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삼십오 인, 자칫 방심하면 나라도 당할 삼십오 명의 초거마들과 죽음의 관문들이 저 안에 있다!' 여천후는 지옥혈부의 안쪽을 주시했다. 그곳에서는 가공할 사기와 죽음의 냄새가 뭉클뭉클 솟구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막지는 못하리라. 그 무엇도!' 여천후의 입가로 미소가 흩어지고, 그의 신형은 그 미소만큼이나 은밀하게 흩어져 지옥혈부로 날아들었다. 이곳은 죽음의 마역인 지옥혈부였다. 우우웅……! 뭉클… 뭉클……! 악마의 귀곡성과 섬뜩한 마기가 함께 어우러져 죽음의 귀기가 몰아치는 대전이었다. 대전의 중앙엔 핏빛의 혈단(血壇)이 자리잡고 있었다. 혈단 위엔 혈의노인이 좌정해 있었다. 전신으로 혈광기류가 휘감겨 있으며, 놀랍게도 그의 머리 위로는 섬뜩한 마기가 풍기는 아수라의 형상이 자리잡은 채 흔들렸다. 아직은 희미한 형상이었으나, 점차 선명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때 유령인 양 소리 없이 대전 안으로 여천후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의 시선은 빠르게 대전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막 혈단 위의 혈포노인에게 향하는 순간이었다. "아수라지옥천마공(阿修羅地獄天魔功)!" 여천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며, 대전 전체가 흔들리는 신음성이 터졌다. 아수라지옥천마공! 무림에 적(籍)을 둔 무인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로 인하여 심장이 멎고 말리라. 일천 명의 동남(童男)과 동녀(童女)의 생혈(生血), 일천 종의 독극물(毒極物)과 독천지기(毒天之氣). 그 모든 것을 흡수한 다음, 백 년의 세월 동안 마정지혈(魔精之血)에서 연성해야만 가능하다는 절대의 마공이 그것이었다. 저 까마득한 태고 이전(太古以前), 빛(光)과 어둠(暗)의 격돌이 있었다. 아수라(阿修羅)와 제석천(帝釋天)! 광명(光明)의 수호신(守護神)인 제석천인 거대한 빛의 그물인 인타라망(因陀羅網)으로 암흑의 지배자인 아수라를 포획하여 첨부주(尖府州) 아래 지옥계(地獄界)로 던져 버렸다. 아수라는 어둠의 지옥에서 악마(惡魔)의 마정(魔精)과 악인의 피(惡人血)로써 저주의 마공(魔功)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전해져 오는 아수라지옥천마공이라는 전설 같은 신화(神話)였다. 그 누구도 익히지 못했지만 익힐 수만 있다면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군림할 수 있는 전율스러운 역천마공(逆天魔功)이었다. "……!" 여천후는 너무도 상상 밖의 사태에 잠시 미동조차 없었다. 그 때였다. 번쩍-! 혈포노인이 돌연 두 눈을 떴다. 엄청난 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아직 구 성(成)의 단계… 지금이 기회다.' 여천후의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