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8편 (38/45)
"앞으로 한 달 후, 지옥제(地獄祭)가 끝나고 지옥마야(地獄魔爺)께서 출관하신다." 혈명마신은 마라천독존 혁천광을 직시하며 광기 어린 웃음을 이어 갔다. "그래서 우리가 왔다. 이곳을 미리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으라는 명을 받들기 위해! 크하핫! 그리고 한 달 후부터 천하에 군림하는 것이다!"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낮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막대한 공력이 실려 있었다. 마라천독존 혁천광은 내부의 혈기가 진탕됨을 느끼고 안색이 더욱 침중해졌다. '가공할 공력이다! 나로서도 상대 못할 고수자이거늘… 한낱 수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옥마야라는 자는 도대체……?' 생각만 해도 섬뜩한 전율이 등골을 서늘하게 스쳐 갔다. 그렇지만 그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좋다! 내 한 몸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네놈부터 없애 주겠다!" "네놈이 본좌를?" 혈영마신은 같잖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순간, 마라천독존 혁천광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방자한! 마라독령기(魔羅毒靈氣)!" 파츠츠츠츳-! 섬뜩한 녹색의 독강이 분수처럼 뿜어 나갔다. "ㅋ, 제법이다만 어림없다! 혈마류(血魔流)!" 정면으로 부딪치는 혈영마신의 가공할 혈광기류! 콰- 쾅-! 천붕지열(天崩地裂)의 대폭음이 터져 올랐다. 격돌의 결과는 즉시 드러났다. "윽!"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서너 걸음 물러서서 간신히 신형을 세우는 인물은 마라천독존 혁천광이었다. 그의 안색은 삽시간에 핏기를 잃고 있었다. 그에 반면, 혈영마신은 옷자락 일부가 약간 녹아 내렸을 뿐이었다. "확실히 제법이구나! 어디 이번엔 이걸 받아 보거라! 혈천류(血天流)!" 콰르르르-! 마치 돌개바람과도 같은 수천 가닥의 혈광이 휘돌며 혈영마신의 전신에서 폭사되었다. 마라천독존 혁천광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경직되었고, 그는 남아 있는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천독파천황(天毒破天荒)!" 츠- 파파파팟-! 마라독천궁의 최고 최후의 절학이 펼쳐졌다. 콰콰- 쾅-! 최초의 격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폭음이 진동하며, 허공의 기류가 근 백여 장 방원을 장악하며 무섭게 회오리쳤다. 동시에 두 마디의 짧은 신음성이 일어났다. "크윽!" "으음!" 혈영마신, 오륙 보를 물러선 그는 낭패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신에 피어 오르던 혈기가 현저히 엷어져 있었고, 그의 좌수(左手)는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일순, 그는 미련 없이 자신의 왼손을 잘라 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잘려져 지면에 뒹군 팔뚝은 곧 한 줌 핏물로 녹아 흘렀다. 가공할 독공의 위력이었다. 마라천독존 혁천광은 더욱 비참했다. "크으윽!" 그는 전신이 걸레 조각같이 찢겨진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북의 등껍질같이 균열된 그의 피부 사이로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감히 본좌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가장 처참하게 죽여 주마!" 혈영마신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살기를 뿜어 내며 느릿느릿 혁천광에게 다가섰다. 혁천광의 눈빛에 체념이 감돌았다. '내 대에서 마라독천궁이 멸망하는가? 미미… 미미야!' 혁천광은 고통스럽게 눈을 내리감았다. 혈영마신의 씹어 뱉는 듯한 살기 어린 음성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죽어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랏!" 허공 일각에서 천둥처럼 울리는 사자후(獅子吼)가 있었다. 한 가닥의 광선(光線)을 방불케 하는 백색강기가 대기를 가르며 혈영마신에게로 쏘아져 왔다. 믿을 수 없도록 빠른 속도였고,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강력한 기세였다. "웃! 웬 놈이냐?" 혈영마신은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키며 퉁겨지듯 신형을 뽑아 냈다. 콰- 쾅-! 강기가 작렬된 지면에 근 일 장여의 구덩이가 생기며 어지러운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흙먼지 사이로 크고 작은 두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일남일녀는 바로 미미를 대동한 여천후였다. 미미는 내려서자마자 대경실색하여 마라천독존 혁천광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미미냐?" 걸레 조각 같은 육신을 간신히 가누며 한 줄기 생기를 번뜩이는 마라천독존 혁천광의 눈가로는 반가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미미야, 어서… 혈천독왕묘(血天毒王猫)를!" "예, 할아버지." 미미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었다. 핏빛 고양이(血猫)! 웬만한 늑대(狼) 정도 크기의 거대한 혈묘(血猫) 떼였다. 혈천독왕묘! 혈천묘왕(血天猫王)과 혈왕대호(血王大虎)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야수(野獸)의 제왕(帝王)이었다. 게다가 마라독천궁의 비전대법으로 도검불침의 신체와 가공할 혈독지기(血毒之氣)를 보유한, 이른바 마라독천궁의 수호영수(守護靈獸)들이었다. 그 놈들은 미미라는 이 소녀만이 부릴 수 있는 듯했다. "모조리 죽여!" 미미의 입에서 매서운 교갈이 터져 나왔다. 캬오오-! 수만 마리의 혈천독왕묘들이 온 사방을 새카맣게 메우며 혈영인들을 향해 덮쳐 들었다. 그 기세는 실로 사납고 맹렬했다. "크악!" "악! 내 팔!" 혈영인들 몇 명이 경황중에 나뒹굴었다. 혈천독왕묘의 입에 물린 부위는 삽시간에 시커멓게 썩어들어갔으며, 발톱이 할퀴어진 부분엔 검은 피고름이 번져 갔다. 그렇지만 혈영인들의 무공은 막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혈류살천공(血流殺天功)!" "이 고양이 새끼들이 어디서?" 곧 자세를 가다듬고 더욱 가공할 혈강으로 전신을 감싸자, 혈천독왕묘들은 쉽사리 강기막을 뚫지 못했다. 그래도 혈천독왕묘 덕분에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인 도살극에서 제법 팽팽한 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죽어 가는 쪽은 마라독천궁 궁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으아악!" "크아악!" 혈영마신은 혈천독왕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여천후를 향해 무시무시한 살광을 폭사했다. "네놈은 누구냐?" 여천후는 마라천독존 혁천광을 치료하고 있다가 천천히 눈길을 들었다. "혈정지옥계에서 왔다고 들었다. 맞느냐?" "감히 본계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네놈의 죽을 죄가 한 가지 더 늘었다. 뒈져랏!" 한 팔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혈영마신의 혈강은 여전히 강력했다. 여천후는 빙그레 미소를 피어 올렸다. 그것은 살기 어린 미소였다.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찾아가던 길이었지."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공에 극성이 되는 절학이 있지. 가루라성령광(金翅鳥聖靈光)!" 고오오오-! 태양이 지상으로 내려왔는가? 여천후의 전신에서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서기(瑞氣)가 쏟아져 나왔다. 찰나, 심장까지 토해 내는 듯 처절한 비명성이 뒤를 이었다. "크아아악!" 보라! 혈영마신이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십여 장 밖으로 퉁겨져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혈영마신은 흙투성이가 되도록 지면을 구르다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일으킴과 동시, 그는 목줄기를 마구 쥐어뜯으며 미친 듯 울부짖는 것이었다. "끄아아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폭풍 같은 전율이 그의 전신을 한 차례 꿰뚫더니 곧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고 말았다. 즉사(卽死)였다. 한데 다음 순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발생했다. 파스스스-! 그의 장대한 몸집 전체가 한 움큼의 재로 화해 스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가루라성령광! 그렇다. 바라대성람의 초대주지인 가루라성존이 남긴 극사성령기(剋邪聖靈氣)가 뿜어진 것이다. 마공을 지닌 마인에게 더욱 강렬하게 작용하며, 일단 쏘이면 체내의 마기(魔氣)가 전소(全燒)되어 버린다던가? "……." 여천후는 공력을 거두며 전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시산혈해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혈영인들은 이백여 명이 죽었을 뿐, 아직도 삼백 명 이상이 남아 날뛰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마라독천궁의 궁도들은 근 천여 명이 시체로 뒹굴고 있는 상태였다. 혈천독왕묘 역시 거의 반수가 고깃덩어리로 화해 있었다. 여천후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혈강마공(血剛魔功)! 도검불침의 신체를 만들고 혈강에 닿으면 무엇이든 부서지는 전설의 마공을 한낱 졸개들이 익히고 있다니?' 여천후는 뭔가 결단의 빛을 번뜩였다. 그는 마라천독존 혁천광을 보살피고 있는 미미에게 무거운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미미, 혈묘와 궁도들을 모두 물러서게 해라." "……!" 미미는 의혹을 담은 눈길로 여천후를 올려다보았다. 여천후의 태도와 어조에서 왠지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을 느낀 그녀는 무턱대고 즉시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라독천궁의 궁도들은 급급히 전권을 빠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수십 명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갔다. "으아악!" "크흑!" 혈천독왕묘 역시 충실히 명령을 받들어 기쾌하게 뒤로 물러서자 장내에는 삼백여 명의 혈영인들만이 남았다. 그 순간이었다. "타앗-!" 일성 폭갈과 동시에 여천후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치솟아 올랐다. "살황천독강(薩荒天毒 )!" 허공 한복판에 떠오른 여천후의 전신에서 부챗살 같은 녹광(綠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고오오오-! 그것은 감동적일 만큼 장엄한 광경이었다. 다음 순간 연출되는 광경은 아예 마라독천궁 궁도들의 넋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보라! 삼백여 혈영인들에게 녹광이 뒤덮이는가 싶자, 삼백여 명 전원이 그대로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푸스스스-! 비명도 없었다. 녹광에 휩싸이기가 무섭게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바닥엔 질펀한 육수(肉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질식할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라독천궁 인물들은 아연실색한 채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저, 저… 저럴 수가?" "독신(毒神)이시다!" 다른 인물들은 그저 경악성을 토할 뿐이었지만, 혁천광은 달랐다. "살황천독강!" 마라천독존 혁천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일어섰다. 엄청난 격동이 그의 노안에서 일렁거렸다. 그는 알아본 것이다. 원세쌍천종 중 독종 살황대독후의 진산절학임을……. 살황대독후는 바로 독문의 신(神)이요, 조사(祖師)가 아니던가? "천년독황(千年毒皇)이시여!" 혁천광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본 마라독천궁 궁도들 역시, 격동으로 몸을 떨며 일제히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천년독황의 현신(現身)이시다!" "독문제일지존(毒門第一至尊)이시여!" 쿵- 쿵- 쿵-! 두 손을 바닥에 대고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최대의 경외감이 서린 음성으로 합창을 토하는 마라천독궁의 궁도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여천후는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급히 혁천광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혁천광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더더욱 정중한 태도로 지면에 몸을 밀착시키는 것이었다. "살황대독후, 그분은 독문의 시조이십니다. 독문에 적을 둔 자, 그분의 진전을 이은 천년독황께 경배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외다!" 천년독황! 이른바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의 탄생(誕生)이었다. * * * * 마라독천궁! 변황칠대천 중 독천(毒天)의 이름으로 군림하는 묘강의 패자였다. 그들은 혈정지옥계의 공격 앞에 멸망의 비운을 맞이할 찰나, 천년독황의 현신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전화(戰禍)는 가고, 다시금 안정을 뒤찾았다. 여천후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지존이자, 구세주로서 결론지어졌다. 독신전(毒神殿). 태상궁주인 마라천독존 혁천광의 거처였다. 마라독천궁의 절대금지로 설정되어 있는 이곳의 거실에 오 인(人)이 원탁(圓卓)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여천후와 마라천독존 혁천광과 혁미미였다. 그리고 위맹한 기도의 중년무인과 사십대의 아름다운 미부가 자리해 있었다. "이 애들이 제 아들 놈과 며느리외다." 혁천광이 중년부부를 가리키며 정중히 소개했다. 그러자 중년부부는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예를 취해 보였다. "소인, 혁천위(赫天尉)! 천년독황을 뵈오이다." 독룡존(毒龍尊) 혁천위! 마라독천궁의 당대궁주이며, 혁미미의 부친이 되는 인물이었다. 혁미미는 왠지 샐쭉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흥! 아버님마저 허리를 숙이면 난 어떡하란 말이야? 씨이!" 앙큼한 여심(女心)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듯해 보였다. 독룡존 혁천위는 그녀의 내심에는 아랑곳없이 더욱 어조가 공손해졌다. "천년독황께서 마라독천궁을 구해 주셨습니다. 뭐라 감사해야 될지……." "듣기 민망합니다. 소생은 우연히 살황대독후의 진전을 이었을 뿐이오." 여천후는 담담히 미소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어 그는 약간 심각해진 기색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혈정지옥계에서 왜 귀궁을 습격했는지 아시오?" "본궁을 전초기지로 삼아 천하를 공략하겠다는 야심이겠지요. 혈영마신이라는 자가 그렇게 말했소이다!" "……!" 여천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흐음! 그렇다면 선봉대만 나왔다는 얘기로군. 그것은 아직 혈정지옥계가 준비가 덜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그들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아시오?" "확실히 모르겠소이다." 혁천광은 혁천위 부부와 눈길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때 혁미미가 불쑥 나섰다. "나는 알아!" "어디지?" "공짜로는 안 돼요." 혁미미는 묘하게 눈을 빛내며 여천후를 올려다보았다. 혁천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미야, 무슨 말버릇이냐?" 여천후는 오히려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럼 살황대독후의 비급과 바꾸면 어떠냐?" 혁미미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예쁜 오빠, 최고다!" "아니, 그런 절세가보를?" 혁천광과 혁천위 부부는 아연 경악했다. "괜찮소. 사실 내겐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이오. 마라독천궁에선 귀중하게 쓰이겠지만." 여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혁미미에게 다시 물었다. "혈정지옥계가 어디 있지?" 혁미미는 입을 열려다 말고 두려운 듯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 아닌가? "서쪽 삼백 리 밖에 있는 귀혈평(鬼血坪)에……." "귀혈평!" "뭐라고?" 혁천광 등 삼 인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여천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귀혈평이 어디기에 그렇게들 놀라시오?" 혁천광이 역력한 공포지색을 드러내며 침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명 악마혈지(惡魔血地)라 부르는 곳이외다. 지난 수천 년 간 그곳에 들어선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소." 놀라운 일이었다. 마라천독존 혁천광이 누군가? 묘강의 절대자로서 이미 독종지신(毒宗之身)을 이룬 그마저 공포를 드러낼 정도라니……? "……?" "노부도 일전에 그곳에 가 보았소이다. 하지만 가공할 마기 때문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소. 도무지 인간이 살 곳 같지 않았는데……." 혁미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틀림없어요. 금아가 그러는데, 혈영인들이 그곳에서 나왔대요." "호오! 이 금개구리가 말도 할 줄 아는가?" "그럼요! 나랑은 친구예요." 혁미미는 품안의 금천독와를 자랑스럽게 다독였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금천독와는 기성을 내흘렸다. 꾸우우……! 마라천독존 혁천광이 긴장 어린 시선으로 여천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가시려는 것이오?" "그렇소." 순간, 혁미미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오빠, 거긴 악마가 나와! 가지 말아요!" "걱정 마라.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막진 못한다. 사상천비계라 할지라도." 여천후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잔잔한 어조였다. 그렇지만 그 속에선 단호한 결단과 당당한 장부의 호기가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도저히 만류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혁미미는 금세 눈물이 글썽해지고, 혁천광 등 삼 인은 침중한 기색으로 가만히 여천후의 수려한 윤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천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 떠나겠으니, 오늘 밤은 여기에서 쉬도록 해 주시겠소?" * * * * 삼경(三更)을 넘은 심야(深夜) 무렵이었다. "……." 여천후는 아직 잠을 못 이룬 채 침상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독신전 내의 한 칸 침실이었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실내의 희미한 황촉불이 약간 심각한 그의 얼굴에 음영(陰影)을 아로새겼다. 혈정지옥계의 실체가 가까워지자, 어쩔 수 없이 조금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선(善)한 사람도 일단 들어선 후엔 극악한 마인으로 화하고 만다는 혈정지옥계가 아닌가? 게다가 낮에 본 혈영인들의 무공은 실로 상상 외였다. '그만한 고수들이 대체 얼마나 있는 것일까? 더구나 혈정지옥계 우두머리의 무공은…….' 여천후의 눈빛이 침중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에 비례하여 그의 심중에는 불 같은 투지(鬪志)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차피 나의 생은 불가능에의 도전이었다. 더욱이…….' 문득 그의 시선에 엷은 살광이 일어났다. "천년제국 놈들을 궤멸시키는 포석이니……." 바로 그 때였다. "오빠, 들어가도 돼요?"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려 온 맑은 옥음이 있었다. '이 밤에 미미가?' 여천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들어오너라."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혁미미의 모습을 보고 여천후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미미, 네 옷차림이 그게 뭐지?" "어때서요? 멋있잖아요!" 혁미미는 과시하듯 빙그르르 한 바퀴 몸을 돌렸다. 화르르-! 옷자락이 황홀하게 펄럭였다. 과연 그것을 옷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전신의 굴곡이 훤히 다 내비치는 엷디엷은 나삼(裸衫)이었다. 남방의 당돌한 소녀는 어이없게도 육탄공세를 펼쳐 올 모양이었다. 나삼이 살갗에 스치는 미묘한 음향을 내며 그녀는 침상으로 다가왔다. "나, 오빠하고 같이 잘래." 하는 말 또한 해괴했다. 같이 자다니? "무슨 짓이냐, 미미? 어서 돌아가거라." 여천후는 정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멈칫 교구를 세운 혁미미는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이 아닌가? 실로 직선적이고 단순한 성격을 지닌 소녀는 감정의 변화 역시 급격스러운 듯했다. "미미가 보기 싫어?" "……?" 여천후는 난감했다. '무조건 윽박질렀다간 저 성격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고 받아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여천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미는 아름답다." "정말?" "하지만 미미는 너무 어려. 조금 더 크면 멋있는 신랑감이 나타날 거야." 그 말이 실수일 줄이야? 혁미미는 상큼 아미를 치켜뜨더니, 느닷없이 그나마 걸치고 있던 나삼마저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휘- 익! "봐! 내가 어려?" 어리지 않았다. 몽땅 드러나 버린 그녀의 육체는 어리기는커녕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탄력이 흘러 넘치는 갈색 피부와 터질 듯 팽팽히 솟아오른 두 젖가슴. 뿐인가? 매끄러운 두 다리가 갈라지는 삼각주(三角洲)에 무성히 돋아난 신비의 흑림(黑林)은 이미 촉촉한 습기마저 함유하고 있었다. "씨이, 보란 말이에요! 내가 어린가?" 그야말로 당돌의 극치였다. 여천후는 어이가 없다 못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 왔지만 그럴 사이도 없었다. "오빠!" 혁미미가 육탄돌격을 감행해 온 것이다. "그냥 같이 자기만 할 거란 말이야! 그럼 되잖아? 오빠 옆에서 그냥 자기만 하면?" 그냥 같이 자기만 한다면서 왜 이토록 뱀처럼 찰싹 감겨드는 것인가? '모르겠다!' 내심 그렇게 내뱉은 여천후는 침상으로 벌렁 드러누으며 밀착되어 있는 그녀의 나신을 번쩍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그래, 같이 자기만 하는 거다?" 글쎄,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남국소녀(南國少女)의 정열은 뜨겁디뜨겁고, 그 뜨거운 육체는 맨살로 맞닿아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시각은 밤이었다. 사내의 피를 쉬 뜨거워지게 하는 묘한 효력을 지니고 있는 어둠의 밤……. 그러나 이 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두 당사자 외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다음 날 아침 여천후를 배웅하는 혁미미의 모습이 너무도 애틋했다는 소문이 두고두고 마라독천궁 궁도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었다는 것밖에……. * * * * 죽음의 황무지였다. 잡초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핏빛 적토! 귀혈평! 일명, 악마혈지라 불리운다. 두려움을 모르는 묘강의 야만족들도 접근조차 극력 피하는 곳이며, 오직 공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이곳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여천후였다. "가공할 마기로군!"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며 걷던 여천후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긴장을 띤 그의 시선이 맞닿는 곳. 스스스……! 짙은 혈기류를 피어 올리는 하나의 핏빛 구덩이(血坑)가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 그곳이 바로 혈정지옥계의 입구였다. 사상천비계 중 지옥의 악마세(惡魔勢)이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악인(惡人)들이 모여 있다는 저주(詛呪)의 마인국(魔人國)! "……." 여천후는 호신강기를 극도로 끌어올려 마기에 대항하며 혈갱을 향해 다가섰다. 우우우……! 혈갱 속에서 귀곡성과도 같은 소름 끼치는 괴성(怪聲)이 울려 왔다. 혈갱의 밑바닥은 회오리치며 피어 오르는 혈무에 가려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후우!" 여천후는 한 차례 심호흡을 들이킨 후, 전신공력을 돋운 채 혈갱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