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6편 (36/45)
<악마혈왕(惡魔血王)이 탄생(誕生)… 오천 악마혈(五千惡魔血)이 잠들도다. 지옥(地獄)이 재현될 때 지옥혈천하(地獄血天下)… 악마(惡魔)의 피가 뿜어지며 지옥계(地獄界)가 열리리라!> 또한 혈비가 떠받들고 있는 아수라상(阿修羅像)의 상단엔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피칠을 한 듯한 다섯 개의 고대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세 치 깊이로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혈정지옥계(血井地獄界)> 혈정지옥계! 그렇다면 이곳이 그 악마(惡魔)의 절지(絶地)란 말인가? 팔백 년 전, 만상천유자의 천유기화록에 실려 있던 악마의 전설은 사실이었단 말인가? 우우우우……! 마치 악마의 울부짖음 같은 귀성(鬼聲)이 갱도(坑道)에서 울려 퍼졌다. 그에 뒤이어 혈갱을 에워싼 혈무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뭉클… 뭉클……! 어느 순간이었을까? 추리릿-! 혈갱의 안으로부터 한 줄기 혈광(血光)이 번뜩이는가 싶었다. 꽈꽈꽝-! 거대한 혈비가 순식간에 박살나 버렸다. "우우우우……! 혈갱을 에워싼 혈무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심장을 찢어발길 듯한 악마의 호곡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섬뜩한 혈영(血影)이 혈무를 뚫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크카카캇! 이제 삼천 년(年)의 저주(詛呪)가 풀렸다!" 자세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피무지개(血霧) 같은 혈인(血人)은 잔인한 살기를 뿜어 냈다. "기다려라! 앞으로 십 일 후, 지옥의 형제들이 천년금제(千年禁制)를 풀고 출도하리라! 천하는 이제 아수라의 마혈로 씻기우리라! 크카카캇!" 이게 무슨 말인가? 혈정지옥계, 그 악마의 전설이 드디어 출현한단 말인가? 이곳은 묘강의 한 절지였다. * * *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암흑(暗黑)의 바다(海)였다. 쏴아아아아-! 폭우(暴雨)가 온 바다를 미친 듯이 휩쓸고 있었다. 꽈르르릉-! 노도(怒濤)와 해일(海溢)로 광란하는 하늘과 바다! 번- 쩍-! 시퍼런 섬뢰 한 줄기가 천공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겼다. 순간, 섬뢰(閃雷)의 불빛으로 인해 하나의 휘황한 물체가 바다 위에 드러났다. 그것은 하나의 궁궐(宮闕)이었다. 어지간한 크기의 섬(島)보다도 더욱 큰, 방원 일천 장은 훨씬 더 되는 궁궐은 전체가 수정(水晶)으로 이루어진 거대무비한 수정궁궐(水晶宮闕)이었다. 그런 성루의 편액엔 네 개의 문자가 유려하게 씌어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령천해궁(黑靈天海宮)> 어둠의 바다를 지배하는 암흑해계(暗黑海界)의 지배자가 사는 어둠의 성역(聖域)이 바로 이곳이었다. 전설(傳說)과 신화(神話)가 탄생하기 이전에 있었던 설화(說話)의 세계에서 존재해 있던 어둠의 바다(黑海)……. 그렇다면 이곳이 사상천비계(四象天秘界) 중의 하나인 흑령해계(黑靈海界)였단 말인가? 성루의 꼭대기를 보라!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을 드러낸 전라(全裸)의 여인 하나가 폭우 속에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엄청난 파도와 거센 폭우마저도 그녀의 십 장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고 모조리 퉁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십 세 가량 되었을까? 그녀의 얼굴에서는 빙기(氷氣)가 서릿발처럼 풍겨 나왔고, 갈색의 피부는 농염함으로 터져 버릴 듯했다. 일순, 그녀의 입에서 지극히 요사(妖邪)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이제 삼천 년의 계율(戒律)은 깨졌다." 무슨 말인가? "흑령해천무(黑靈海天舞)는 한 달 후면 완성된다! 이제 흑령해계의 힘은 사해(四海)와 오호(五湖)는 물론이고, 구주(九州)와 팔황(八荒)을 뒤덮으리라!" 터질 듯한 갈색의 유방을 크게 출렁거리면서 알몸의 나녀(裸女)는 광오하게 교성을 터뜨렸다. 잔잔하긴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엄청난 내공(內攻)이 실려 있는 듯, 광란하는 폭풍우를 뚫고 선명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천하에 만일 본녀를 꺾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본해(本海)의 모든 힘을 줄 것이다! 그런 사내가 없다면 천하를 여인왕국(女人王國)으로 만들 것이다!" 광오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허풍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그야말로 대해(大海)의 자연스러움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남해의 절지에 자리잡고 있는 흑령해계였다. * * * * 휘이이이잉-! 광풍과 폭설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설국(雪國)이었다. 희마랍아대산(希馬拉阿大山:히말라야 산맥)의 애불륵사봉(埃拂勒査峯:에베레스트봉)! 지상(地上)에 그보다 높은 산은 없었다. 번- 쩍! 휘황찬란한 빛줄기가 폭설(暴雪)을 뚫고 수천 장 높이로 치솟았다. 몸서리쳐지도록 눈부신 칠채색(七彩色)의 무지개(霞)였다. 이백 장 높이의 깍아지른 듯한 단애(斷崖)가 보였다. 유리(琉璃)같이 매끄러운 빙벽(氷壁) 속에 뚫린 얼음 동굴(氷洞)로부터 일곱 색깔의 칠 색(色) 무지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칠채색 무지개를 두 발로 딛고 허공에 둥실 떠 있는 한 중년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신에서 산악처럼 뻗어 나는 장중무비한 기도는 서릿발 같은 극한적인 빙기(氷氣)와 어울리는 극고의 패도적인 기운이었다. 그런 중년인의 두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불을 토했다. 한데, 그 눈빛 또한 일곱 가지의 색채를 발산시키고 있었다. "이제 천궁설빙계(天弓雪氷界)는 중원천하로 군림(君臨)의 발걸음을 옮기리라!" 웅혼한 외침이 폭설(暴雪)을 갈랐다. "벽라파천궁(后霓破天弓)! 그것도 본좌를 어쩌지 못한다! 천하에 누가 천궁설빙계의 힘을 막을 것인가? 크하하핫!" 중년인은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리다가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칠채천폭탄기(七彩天爆彈氣)!" 웅혼한 사자후(獅子吼)와 함께 그는 양 손을 쭉 내뻗었다. 고오오오-! 찬란한 칠채색의 강기가 백 장 가량 떨어진 맞은편 얼음산(氷山)을 향해 폭출되었다. 꽈꽈꽈- 꽝-! 건너편 빙산은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흔적도 없이 무너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 엄청난 위력을 어찌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크하하핫! 이제 본좌를 거부하는 반대세력을 제거해 버리고 천하대정복(天下大征服)에 나설 것이다!" 폭설 속에서 그의 광소는 몸서리치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상천비계! 그 가운데 성령천불계(聖靈天佛界)를 제외한 세 개의 힘이 용트림을 시작했다. 만상천유자는 천유기사록에 써 놓았었다. <사상천비계 중 단 하나라도 나타나는 날, 천하에는 고금미증유의 대혈겁이 휘몰아치리라!> 그런데 사상천비계 중의 세 곳이 동시에 출현한 것이다. * * * * 취옥여왕 나후빙연. 그녀는 암울한 시선을 천공(天空)에 던지고 있었다. 심신은 허약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두뇌를 지닌 여인이었다. 무서운 지혜로 취옥사전의 역모를 분쇄해 버린 그녀의 안색은 지금 몹시 어두워 보였다. "우려했던 것이 나타나고 있어." 그녀의 시선은 서천(西天)을 향하고 있었다. "얼음(氷)과 지옥(地獄)과 바다(海)의 삼성좌(三星座)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상천비계의 준동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그녀의 음성 또한 몹시 침중했다.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때가 아니다. 육합수호천황가과 변황칠대천, 또한 취옥육전의 일도 완절히 무마된 것은 아니니……." 그녀의 얼굴에는 고심의 빛이 역력했다. "더구나 그 계집은 도망쳤다. 동영살예단의 여인자(女忍者)." 나직한 한숨이 토해졌다. "조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천하는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으니……." 나후빙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방 안으로 돌렸다. * * * * 서천목산(西天目山)의 중턱을 휘감고서 백만 평 대지 위에 오연히 우뚝 솟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있었다. 취옥성(翠玉城). 중원무림의 하늘! 천중육패천이 육 전(殿)을 이루고 구대봉공인 취옥구대천공이 아홉 방위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 등의 정문삼백이십파(正門三百二十派)와 십대마천(十大魔天) 등 마문이백사십오파(魔文二百四十五派), 사문일백십육파(邪門一百十六派)와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 그리고 장강구룡문(長江九龍門)과 오호수룡맹(五湖手龍盟) 등의 수계문파(水界門派)였다. 고금유일의 막강한 세력을 보유했고, 휘하 무사만도 무려 오십만을 헤아리는 초강 무인집단인 취옥성이었다. 일륜(日輪). 장엄한 태양이 취옥성에 드리우고 있는 시각이었다. 두 인물이 취옥성의 입구에 나타났다. 일남일녀(一男一女)는 여천후와 나후황예였다. 두 사람은 일견 다정한 연인(戀人) 사이처럼 보였다. 나후황예는 여천후를 힐끗 건너다 보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저 기생오라비 같은 사내가 점점 좋아지니… 어맛! 내가 무슨 생각을?' 혼자서 사르르 목덜미를 붉히고 있는 성검무후(聖劒武后) 나후황예였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있어 사내들이란 막말로 말해서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겨지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오직 무공의 높고 낮음으로 서열을 가리는 비정무림(非情武林) 속에서 그녀는 자신보다 무공이 강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떼거지로 덤벼드는 사내답지 못한 자들만 보아 왔던 그녀의 눈에 난생 처음으로 여천후는 진정한 강함과 강인한 사나이의 혼(魂)을 보여 준 유일한 남자였다. 함께 취옥성으로 오는 동안, 나후황예는 점점 더 여천후에게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여천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나후황예는 급히 안색을 회복하며 대꾸했다. "흥! 상관 말아!" '쯧쯧, 남자로 태어났으면 딱 알맞겠군.' 여천후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 때, 나후황예가 외쳤다. "저곳을 봐!" "……?" 여천후의 시선에 취옥성의 웅장한 모습이 비쳐 들었다. "과연!" "빨리 와!" 나후황예는 급히 여천후를 재촉했다. "무후, 어서 오십시오!" 취옥성의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은 일제히 외치며 부복했다. 나후황예는 호성무사(護城武士)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람같이 안으로 달려갔다. 꽝-! 문을 부서져라 걷어차며 나후황예는 대전으로 뛰어들었다. "언니!" "어멋?" 태사의에 앉아 있던 나후빙연은 놀람의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눈썹을 좁히며 그녀를 질책했다. "다 큰 계집아이가 이렇게 촐싹대니, 누가 널 데려가겠느냐?" "흥! 누가 시집간대?" "저, 말버릇!" 입으로는 꾸중하면서도 나후빙연의 눈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취옥구대천공은 노안에 흐뭇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허허, 둘째 아가씨! 노신들은 보이지 않나 보군요." 천마대공이 짐짓 서운한 듯 말하자, 나후황예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미안, 할아버지들도 안녕!" '도무지 종잡을 수 없군. 저럴 때는 꼭 재롱부리는 천진한 소녀 같으니.' 여천후는 내심 실소를 흘렸다. 나후빙연은 여천후에게 눈길을 돌렸다. "누가 오셨느냐?" "참! 기생오라비, 들어와." 나후황예가 여천후를 돌아보며 외쳤다. '끄응!' "또 그런 말버릇!" 나후빙연은 질책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천후는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소생은 여천후라 하오, 성주!" "호호! 여공자셨군요? 미거한 소녀가 취옥성를 맡고 있는 나후빙연이에요."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교환했다. 일순, 두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과연 비범한 여인이다! 능히 천하를 다스릴 재량이 있는 재목이다.' 여천후는 감탄했다. 그렇지만 이 순간 나후빙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라운 인물! 처음엔 그저 뛰어난 기재라 여겼더니, 보면 볼수록 저 기개와 웅풍은 마치 천하를 담을 대기(大器)가 아닌가?' 나후빙연의 눈빛 깊숙이 알 수 없는 기광이 일렁거렸다. "여공자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 진정 반갑군요. 한데, 저 말괄량이와는 어떤……." "흥!" 여천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후황예의 콧바람이 먼저 날았다. "흥! 내가 한참 신나게 몰아붙일 때 백마(白馬)의 기사(騎士)라도 되는 양 나타났어요. 그래도 날 도와 준 셈이니, 뭔가 나도 도와 주려고 데려왔지만 볼수록 꼭 기생오라비같이 생겨 가지고……." "언제나 철이 들까? 여공자, 미안해요. 워낙 철없이 자란 아이라서……." "아니외다." 여천후가 밝게 웃음을 터뜨리자, 나후황예는 또 콧바람을 날렸다. "흥! 돈벌레가 뭐가 잘났다고?" "돈벌레라니?" "저 사람이 바로 황금서생이라구요." "응?" 나후빙연의 아미가 살짝 치켜떠졌다. "중원상계의 신화적인 인물인 황금서생이 바로 여공자이셨군요?" "아……!" 취옥구대천공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능히 소주(少主)와 버금갈 만한 인재로다.' '중원에 저런 인물이 있었다니…….' 여천후는 나직이 웃었다. "후후, 과장된 소문이오. 어찌 취옥성의 지존후(至尊后)이신 취옥여왕을 따를 수 있겠소이까." "소녀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요." 나후빙연도 마주 웃었다. "어쨌든 오늘은 여공자를 주빈(主賓)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마음껏 취흥을 즐기시지요." "좋소이다." "역시 솔직담백하고 쾌활한 성격이시군요.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라겠어요." "저, 역시……!" 여천후와 나후빙연은 마주 웃으며 내실로 들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후황예는 연신 코방귀를 날리고 있었다. "흥! 저까짓 돈벌레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 속 일각에서는 어느 새 강인한 철혈(鐵血)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태양 앞에서 녹아 내리는 빙산(氷山)처럼……. 중원의 가장 지혜로운 여인과 천하에서 가장 신비로운 사내는 만났다. 취옥여왕 나후빙연! 황금서생 여천후! 운명에 의해 만난 두 천룡(天龍)과 봉황(鳳凰)! 항차 대중원(大中原) 십팔만 리(里)를 질타하고, 풍운(風雲)으로 뒤흔들 이 시대의 두 주역은 이렇게 만난 것이다. 드르륵-! "어, 취한다." 여천후는 방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말술을 마신 듯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려한 그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인해 더욱 영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한데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여천후는 흠칫했다. 그의 눈가로 빠르게 한 줄기 기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털- 썩! 그는 침상으로 다가가 태연히 주저앉았다. 극히 태연한 신색이었으나 내심 그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 숨소리는 없으나 냄새가 난다. 죽음의 냄새가…….' 직감적으로 스치는 동물적인 영감(靈感)으로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살수(殺手)다! 나와 마찬가지로 지옥수련을 거친, 인간 한계에 도전한 살수의 냄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천후의 청각을 속이고 숨어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단 말인가? 여천후는 긴장하며 생각을 굴렸다. '숨소리도 없고,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체온 역시 실내의 온도와 똑같다. 단지 있다면 냄새뿐…….' 일순, 그의 두 눈에 한 줄기 이채가 스쳤다. '위(上)!' 생각보다 그의 행동이 앞섰다. 그는 섬전 같은 신법으로 대들보 위로 사뿐 올라섰다. 그 순간, 여천후는 흠칫했다. "……!" 어둠 속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손에 칼을 꽉 움켜쥔 채 웅크리고 있었다. 여천후는 조심스럽게 검은 인영(黑影)을 향해 다가섰다. 순간, 뾰족한 살음과 함께 흑의인이 돌발적으로 칼을 휘둘러 기습해 왔다. "죽엇!" "제법이군." 여천후는 가볍게 신형을 틀어 피하며 손을 뻗어 반격했다. "으음……!" 그러자 흑의인은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휘- 익! 여천후는 가볍게 손을 뻗어 떨어지는 흑의인의 완맥을 낚아챘다. 그 순간 여천후는 흠칫하고 말았다. 흑의인의 전신은 온통 난도질되어 있었으며, 핏물이 흘러 내리고 있지 않은가. 흑의인은 바로 나후빙연을 습격했던 그 살수가 분명했다. 여천후는 황급히 흑의인의 맥문을 짚어 보았다. "이럴 수가?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참고 반격까지 시도하다니……?" 그는 경악했다. '오장(五臟)이 파열되었고 전신의 심맥(心脈)이 끊어져 출혈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내 이목을 속이고 공격까지 해 오다니……!'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이 지독한 상황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굉장한 수련을 거친 친구로군. 누구지?" 그는 궁금증을 느끼며 흑의인의 복면을 벗겼다. 순간, 여천후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여자?" 복면을 벗기는 순간, 치렁한 흑발(黑髮)과 함께 파리한 안색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략 십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 윤곽에 그린 듯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여천후는 문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치료를 하자면 옷을 벗겨야 하는데……."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더 이상 생각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부욱-! 그는 결심한 듯 여인의 옷자락을 찢어 냈다. 여인자(女忍者)는 전신에 검상(劒傷)을 입어, 온몸에 거미줄 같은 검흔(劒痕)이 뒤덮인 채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여천후는 황급히 손을 움직여 지혈시켰다. 여체(女體)는 비록 상처투성이였으나 그 몸매의 아름다움은 극치에 달해 있었다. 그렇지만 여천후는 여인의 알몸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품 속에서 금침(金針)이 든 옥갑(玉匣)과 하나의 옥병을 꺼냈다. 옥병 안에는 푸른색 알약이 들어 있었다. "구천환혼단(九泉還魂丹)이면 기력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알약을 꺼내 입으로 녹여 여인의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하군." 그는 구천환혼단을 여인의 입 안으로 흘려 넣어준 다음 빙긋 미소지었다. 이어, 그는 옥갑에서 수백 개의 금침을 꺼냈다. "회혼금침술(廻魂金針術)이면 오장(五臟)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고, 끊어진 심맥을 이을 수 있다." 다음 순간, 금침이 차례로 여천후의 손을 떠나 여인의 나신으로 날아가 박혔다. 파파- 팟-! 그렇게 일 각이 흐르고 나자, 신비로운 오행기류(五行氣流)가 여천후와 여인의 나신을 감쌌다. 스스스……! 동시에 말할 수 없이 그윽하고 향긋한 내음이 방 안을 진동했다. 다시 일 각이 흘렀다. 스스스……! 오행기류는 여천후의 전신으로 흡수되었다. 이어 여천후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여인의 몸에 꽂힌 금침들이 일제히 손 안으로 회수되었다. 드러나는 여인의 적나라한 알몸(裸身)! 아름다웠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빼어난 미태와 풍염하고 탄력 있는 몸매는 그야말로 천향국색(天香國色)이었다. 여천후는 절로 감탄성을 발했다. "진정 아름다운 몸이다." 그 때였다. 번쩍-! 죽은 듯 혼절해 있던 여인이 눈을 떴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여천후는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본의가 아니었소. 치료를 위해 할 수 없었소." "……." 여인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미 사태를 짐작한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나신을 가리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빨아들일 듯 신비롭고 유난히 까만 그녀의 동공은 황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절대무심안(絶代無心眼)이었다. 그녀의 음성 또한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천후는 그 눈을 본 순간 내심 중얼거렸다. '철저한 살수의 수련을 거쳤군.' 그는 생각을 지우며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여천후요. 낭자는 누구시오?" "비보요(美保代)! 오빠인 다까베 센주우로오(武部仙十郞)는 날 중원으로 보내면서 흑야화(黑夜花)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보요라는 동영 이름보다는 확실히 흑야화라는 이름이 어울리는군. 정말 낭자에게 꼭 알맞은 이름이오." 여천후의 찬사에도 흑야화는 아무 감정 없이 무심한 눈길로 여천후를 주시했다. "우리나라 여자는 알몸을 보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해요." 그 말에 여천후는 질겁했다. "그것은 치료를 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었소." 흑야화는 상관치 않고 말했다. "나는 인자십관(忍者十關) 중 오관(五關)을 익혔어요. 중원에 와서 치욕을 당했으니… 당신은 결정하셔야만 해요." "무엇을 말이오?" "당신이 죽든 내가 죽든, 둘 중의 하나를!" 여천후는 흠칫했다. 흑야화는 무심한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할일이 있어요. 동영으로 돌아가 십 관을 통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내 알몸을 보았어요." "그건……." 흑야화는 여천후의 말을 막으며 잘라 말했다. "오로(烏鷺:까마귀와 백로로서 바둑(碁)의 별칭임)를 둬요. 내가 지면 당신의 노예가 되겠어요. 대신, 당신이 지면 자결(自決)하세요." "자결을?" 여천후는 어이가 없었다. 흑야화는 막무가내였다. "우리나라 오로는 패(敗)하면 자결하는 것이 원칙이에요." "그럴 수 없소." 여천후는 흑야화의 뜻을 거절했다. 흑야화는 비장한 신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휙-! 그녀는 손을 뻗어 칼을 잡고는 이불을 젖혔다. 알몸이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망설임 없이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가는 것이 아닌가? "안 돼!" 여천후는 빠르게 흑야화의 완맥을 낚아챘다. 흑야화는 여전히 무심한 눈길로 여천후를 응시했다. "당신은 내 알몸을 보았어요. 나는 그 운명에 불복(不服)해요. 그럴려면 정당한 승부가 필요해요. 내가 정상적인 몸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무공으로 비무(比武)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