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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5편 (35/45)

2026-09-24 08:59:34 조회 15
극마혈종이 번쩍 손을 쳐들며 외쳤다. "출(出)!" 그러자 시커먼 묵기류가 독사처럼 장내를 휘감으며 퍼져 올랐다. 나후황예는 오만하게 코웃음쳤다. "흥! 이런 것 따위로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 천라대천풍(天羅大天風)!" 콰쾅-! 지축이 뒤흔들리는 폭음이 장내를 강타했다. 그러나 백사전의 백오십여 사도고수들은 진세를 이루며 돌진해 들어 나후황예의 공세를 교묘하게 와해시켰다. "혈광천하(血光天下)!" 뒤이어 백팔나한진이 압박해 옴과 동시에, 백여 명의 거한들이 지축을 흔들며 돌진해 왔다. "불령검멸(不靈劒滅)!" "철사자의 힘을 보여라!" 쿵- 쿵-! 경천동지의 대격돌! 나후황예의 무위는 가히 가공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인간이었다. 특히나 여인이 아닌가? 초수가 거듭될수록 그녀는 불리한 상태로 몰리게 되었다. 천불전을 제외한 나머지 삼 전의 고수들은 나후황예의 치부를 집중적으로 공략해 왔다. 나후황예는 수치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런 파렴치한 자들! 천라파천무(天羅破天舞)!" 그녀의 일신에서 화려한 자광(紫光)이 폭출됐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는 마음을 평정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분노한 나후황예는 공력하는 것이 둔화되며 점점 기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계집이 지쳐 간다!" "저 희멀건 몸뚱이를 한 번 벗겨 봤으면……." 삼 전(殿)의 인물들은 그녀를 공격하면서 온갖 음담패설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나후황예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녀가 그러면 그럴수록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쯧쯧,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사내 망신은 저 놈들이 다 시키는군." 한소리 낭랑한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그에 뒤이어 수백 개의 범종(梵鐘)이 한꺼번에 울리는 듯한 굉량한 음성이 뒤따랐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자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오백여 명이 한꺼번에 덤비다니." 사 전의 부전주들은 이 갑작스런 상황에 경악했다. "엇!" "지척에 이르도록 몰랐다니……." 그들은 일제히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송림 사이로 두 인영이 천천히 장내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천후와 나패웅이었다. 여천후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한심하군. 저런 인간들도 남자란 말인가?" "저 땡초 중놈부터 죽여 없애야 합니다. 감히 색(色)을 밝히다니!" 나패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들의 비웃음에 사 전의 부전주들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격노했다. "마령천살대! 저 놈들부터 죽여라!" 극마혈종은 천마전의 초강고수들에게 명령했다. 나패웅도 쌍부를 비껴 들었다. "주인님! 보고만 계십시오. 단번에 박살내고 말겠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요 쥐방울만한 놈들! 철혈파천풍!" 그의 가공할 일 장이 작렬한 순간, 마령천살대의 인물들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짓뭉개져 퉁겨져 나가고 말았다. 퍼퍼퍽-! "크아악!" "으악!" 실로 어마어마한 거력이었다. 어육이 되어 널브러지는 시신들……. 이미 진식은 깨진 후였다. 고금제일력사 철혈패황 나웅천의 절기를 이은 나패웅이었다. 거기다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육 성(成) 수준의 철혈패황신공을 여천후의 도움으로 십 성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부웅-! 그의 손에서 철혈쌍천부가 날 때마다 마령천살대의 마인들은 어육이 되어 날아갔다. "크아악!" "캐액!" 이미 오십여 명이 철부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었다. 붕- 부웅-! 풍차 돌아가듯 날아가는 철혈쌍천부에 닿기도 전, 전신이 으스러져 버린다. 극마혈종은 수족 같은 수하들이 죽어 널브러지자,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저, 곰 같은 녀석이……." 그의 신형이 퉁겨져 나갔다. "죽어랏! 마라혈폭참(魔羅血爆斬)!" 가공할 혈강이 폭출되며 장력은 그대로 나패웅의 등판을 작렬했다. "흐흐, 제깐 놈이 별 수… 어엇!" 득의의 괴소를 흘리던 극마혈종은 곧이어 헛바람을 삼킨다. 보라! 극마혈종의 장강을 정통으로 맞은 나패웅. "어? 웬 파리 새끼가 사람을 무나?" 간지럽다는 듯 긁적이는 나패웅의 행동에 극마혈종은 아예 어이가 없었다. "이… 인간도 아니다!" 주춤주춤 자신도 모르게 극마혈종은 뒷걸음질쳤다. "요 파리 같은 놈이 뒤에서 암습을 해?" 나패웅이 다가서자, 주춤 밀려 나던 극마혈종은 나패웅의 조소 어린 말에 두 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급기야 이미 이성을 상실한 극마혈종은 그대로 나패웅에게 전 공력을 쏟아 부었다. "이 곰 같은 녀석이… 마겁천파공(魔劫天破功)!" "탄(彈)!" 나패웅의 벽력 같은 폭갈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이승을 떠나는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십여 장 밖으로 퉁겨져 바닥에 처박히는 극마혈종의 몸뚱이였다. "제깐 놈이 날 때리고도 성할 것 같아?" 나패웅은 배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철혈패황신공의 탄자결(彈字訣)! 오는 공력을 배로 증가시켜 되돌려보내는 초절기공을 펼쳤던 것이다. "저… 저럴 수가?" 나머지 삼 인은 경악실색하고 말았다. 그들 중에도 극마혈종을 단 일 장에 즉사시킬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저런 초강고수가 현 무림에 있었다니…….' 성검무후 나후황예의 옥용에도 가벼운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주인님, 어떻습니까?" 나패웅은 득의하여 어깨를 으쓱하며 여천후를 돌아보았다. "패웅, 다 좋은데 힘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그렇게 몰인정하게 패는 것이 아니란다." 여천후가 나패웅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 말에 삼 전주는 오공(五孔)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분노하고 말았다. "불… 불쌍한 아이들?" "육시를 할 놈들!" "뒈져랏!" 세 명의 부전주 중 비사왕이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을 토하며 나패웅에게 덮쳐 들었다. 가공스러운 철혈마강이 일어 장내를 휩쓸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위세였다. "우헤헤! 얼마든지 두들겨 주마!" 그렇지만 싸움하기를 밥 먹기보다 더 좋아하는 나패웅이 피할 까닭이 없었다. 그는 철도끼로 하늘을 가르며 비사왕에게 맞서 떠올랐다. 그런데……. "뒈져랏, 계집!" 천겁사령이 관전중인 나후황예에게 빛살같이 핏빛 강기를 그어 내어 암습을 가했다. 흡사 뇌전이 작렬하는 듯한 빠른 기습이었다. 그렇지만 나후황예가 누구인가? "오랏!" 나후황예의 손이 뒤집히며 상상불허의 기쾌한 일 장이 허공에 작렬하였다. 퍼엉-! "크윽! 이, 이런……." 굉음과 함께 천겁사령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나후황예의 장력에 실린 천라강살(天羅 殺)에 가격당한 것이었다. 나후황예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무서운 기세로 손가락을 그어 내었다. 순간, 흡사 무지개 같은 청남색 지풍(指風)이 허공을 갈랐다. "아, 안 돼! 캐에엑!" 퍼- 억! 천겁사령은 두 손을 내쳤다가 이마가 수박인 듯 바스러져 뒤로 나뒹굴었다. "부전주!" 그 모습에 혜오대선사가 참담히 외치며 떠올라 나후황예를 향해 덮쳐 갔다. 그 때였다. "잠깐, 대사!" 여천후가 유령인 듯 신형을 흐트려 혜오대선사를 가로막았다. "시주는?" 혜오대선사는 여천후의 몸에서 일어나는 무형기도에 흠칫하며 몸을 세웠다. "여천후라는 졸부외다. 드릴 말씀이 있소." "황금서생 여시주란 말이오?" 혜오대선사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가 중원제일거부 황금서생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혜오대선사는 침중한 신색으로 합장했다. "아미타불… 시주, 방해하지 마십시오. 중원은 어느 일 인이나 일개 조직의 것일 수 없소이다. 중원은 무림인의 것이어야 하고, 나후 여시주에게 살수를 써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오." 혜오대선사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그러나 물러설 여천후가 아니었다. "이유는 어찌 되었던 좋습니다. 하지만 대사는 불승의 몸으로 어찌 아녀자를 해하려 하시오?" "아미타불… 사존이신 영허대선사께서 내리신 명이외다. 비켜 주시오!" 혜오대선사는 아주 괴로운 표정이 되어 합장했다. "용서하시오!" 여천후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 모습에 혜오대선사의 백미가 부르르 떨렸다. "할 수 없구료. 노납을 원망치 마시오. 아미타불……." 돌연, 혜오대선사의 합장한 주위로 찬란한 금빛 서기가 구름같이 일어났다. 그것은 악기(惡氣)를 무력화시키는 지극히 강력하고 웅장한 항마지력을 담고 있었다. "반야대라금강력(盤若大羅金剛力)!" 콰- 앙! 순간, 태산의 무게를 지닌 거창한 역도(力道)가 폭포가 쏟아지듯이 여천후를 휩쓸어 왔다. 일시에 찬란한 금광(金光)이 백 장을 뒤덮었다. "과연 소림절기!" 꽈- 꽝! 휘황찬란한 오색강기의 폭풍이 일어났다. "크윽!" 굉음 속에서 혜오대선사는 피를 토하며 십여 장을 퉁겨 나갔다. "저럴 수가?" "……!" 군웅들의 안색이 홱 변했다. 혜오대선사. 취옥육전 중 천불전의 부전주이며 당금 소림사의 달마원주(達摩院主)를 맡고 있는 소림제이고수(少林第二高手)가 아닌가? 지금 장내에서 가장 강한 고수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런 혜오대선사가 여천후의 일격(一擊)조차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아미타불……!" 혜오대선사를 수행한 백팔 나한승들이 그 즉시 여천후를 에워쌌다. 그들은 각기 삼 갑자 이상의 공력을 지닌 고수자들이며, 그들이 펼친 진세는 저 무적의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이었다. "아미타불… 불령천하(佛靈天下)!" "불법무변(佛法無邊)- 제행무상(諸行無上)!" 고오오오……! 사자후가 천지를 뒤흔들며 가공할 암경이 불광(佛光)에 실려 여천후를 눌러 왔다. 드디어 백팔나한대진이 발동된 것이다. 그러나 여천후는 대갈일성과 함께 우수(右手)를 들어 전면에 대고 도끼로 내리치듯 찍어 내렸다. "철혈파천황(鐵血破天荒)!" 철혈파천황! 철혈철경상의 최강절학이 펼쳐진 것이다. "끄악!" "크으! 아미타불……!" 가공할 철혈강력이 백팔대나한진의 일각을 강타하여 십여 명의 나한승(羅漢僧)을 날려 보냈다. 그것으로 백팔나한진은 즉시 와해되고 말았다. 무적이라던 백팔나한대진의 파진(破陣)은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세존(世尊)의 뜻이란 말인가? 아미타불……." 혜오대선사는 창백한 신색으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돌아가자!" 혜오대선사는 만감이 서린 시선으로 여천후를 바라보며 신형을 떠올렸다. "……!" "……!" 그 뒤를 백팔 나한승들이 참담한 표정으로 날아올랐다. "다시는 무림에 발을 디디지 않으리라!" 혜오대선사의 침통한 사자후와 함께 그의 신형은 이내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인간도 아니다!" "우리도 후퇴(後退)하자!" 우두머리를 잃은 천사혈영대의 마졸들도 사색이 되어 분분히 달아났다. 장내에는 사자철림 휘하의 거인군단인 일백 철혈군(鐵血軍)만이 남았다. 그들은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두 명의 곰 같은 거한들이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나패웅과 비사왕이었다. 하나같이 일 장이 넘는 거구의 덩치들인데, 그들의 싸움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어지간한 비사왕도 나패웅에게 밀려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순간, 북을 두드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콰- 쾅! "크윽!" 나패웅의 일 권에 가슴을 가격당한 비사왕의 거구가 큰 대자로 나뒹군 것이다. "크으! 내가… 패하다니!" 비사왕은 참담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이내 나패웅 앞에 넙죽 엎드렸다. "빌어먹을! 대형(大兄), 절 받으시오!" "대형?" 돌연한 사태에 나패웅은 어리둥절했다. "소제 비사왕은 소제를 이기는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지 오래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비사왕이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어느 사이엔가 사자철림의 수하들도 비사왕의 뒤에 부복해 있었다. "그것 참……!" 나패웅은 난처한 표정이 되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엄숙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를 동생으로 받아 주지. 어차피 나도 사자철림 사람이니까!" 그렇다. 나패웅은 바로 전대의 사자철림주인 철사자 나천무의 유복자(遺腹子)가 아니던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사왕은 두 눈을 뒤룩거리며 나패웅을 올려다보았다. 나패웅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철사자란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예엣?" 비사왕과 일백 철혈군의 안색이 홱 변했다. "소, 소성주이십니까?" "아아, 저분은 바로……." "소성주!" 쿵- 쿵-! 비사왕 등은 이내 이마를 땅에 찍으며 오체복지하였다. 그들은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나패웅의 거구가 사자철림의 후예라는 더할 수 없는 증거가 되지 않는가? '드디어 뿌리를 찾았군! 녀석…….' 여천후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패웅과 거인군단을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이봐, 너는 누구냐?" 아주 강하고 날카로운 여인의 금속성이 여천후의 귓전을 때렸다. 바로 나후황예의 목소리였다. "이봐?" 여천후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 나후황예를 돌아보았다. 저렇게 앵두같이 아름다운 입에서 사내보다 거칠고 패기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쯧,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 계집인가? 계집의 목소리가 사내보다 험하다니." 여천후는 혀를 끌끌 찼다. 순간, 성검무후 나후황예의 옥용이 불에 달군 쇠같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 무어라고? 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무후(天下第一武后)인 그녀가 언제 여천후같이 불경스런 사내를 대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죽어랏!" 꽈- 앙! 나후황예의 교수에서 뇌전인 듯한 강기가 작렬했다. "쯧쯧, 이거 그냥 두면 큰일 낼 계집 아닌가?" 여천후의 신형이 안개같이 흐려지며 동시에 나후황예의 뺨에 불꽃이 튀었다. 짜악-! "악!" 나후황예는 비명을 지르고 뺨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여천후의 손이 그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네, 네가 감히!" 나후황예는 폭발할 듯이 노해 여천후를 덮쳐 가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여천후의 한 마디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날뛰면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아 주겠다!" "……!" 나후황예는 안색이 하얗게 변하더니, 분노로 교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발가벗겨… 매단다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녀의 무공은 결코 여천후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천후의 말대로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력하게 뇌리를 스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다시 만날 때는 좀 더 얌전한 계집이 되어 있기를 바라 마지않겠소!" 씨익……! 여천후는 음산하게 웃으며 허공으로 훌훌 날아올랐다. "볼 만하겠는데? 옷 벗고 거꾸로 매… 이크!" 키득키득 웃던 나패웅은 찔끔하였다. 가공할 나후황예의 시선이 그를 노려본 것이다. "……!" "헤헤, 아… 아닙니다. 제가 뭐 꼭……." 나패웅은 황망히 손을 저으며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 그 때, 멀리서 여천후의 음성이 들려 왔다. "패웅, 무엇 하고 있느냐?" "예예! 갑니다, 가요!" 쿵- 쿵- 쿵-! 나패웅은 길게 대답하며 성난 코끼리같이 지축을 울리며 여천후가 간 쪽으로 달려갔다. "소성주님!" 그 뒤를 비사왕과 일백 철혈군이 급급히 뒤따라 달려갔다. "……!" 마치 산(山)이 움직이듯 거인군단이 사라지고, 장내에는 나후황예만 남았다. 그녀의 시선은 묘하게 이지러진 채 여천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천후라고 했지?" 나후황예의 붉은 입술이 꼬옥 깨물려졌다. "나쁜 자식, 다음에 만나면 정말 가만 두지 않겠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신형을 떠올렸다. 과연 그녀의 뜻대로 될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었다. 제21장 중원무림(中原武林)의 하늘 취옥지존각(翠玉至尊閣). 중원무림의 지존인 취옥여왕 나후빙연의 거처였다. 이곳에서 결정되고 포고(布告)되는 한 마디는 곧 전 중원무림의 거부할 수 없는 율법(律法)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인 이곳엔 지금 섬뜩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일견(一見)하기에도 수십 명의 인영(人影)들이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은신해 있었다. 한데, 그들의 선두에 있는 사 인(人)은 바로 취옥육전(翠玉六殿)의 전주(殿主)들이 아닌가? 천마신군 마극천, 백의사신 사우, 사자천공 나거웅, 영허대천불. 과거 천중육패천이라 불리던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 잠혈전과 요령전을 제외한 사대전주가 무슨 까닭으로 어둠 속에 은신한 채 취옥지존각을 노려보고 있단 말인가? 문득 천마신군 마극천의 입에서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크ㅋ, 반 각 후에 공격한다." 백의사신 사우는 우려의 기색을 나타냈다. "정말 그 계집이 성공할 것 같소?" "걱정 마시오! 그녀는 동영살예단(東瀛殺藝團)의 최고 인자(忍者)요. 더욱이 무영천살가의 맥(脈)을 이은 계집이니, 솜씨는 최고요." "황금 천 관(貫)이 허공에 뜨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사자천공 나거웅이 끼여들었다. 영허대천불은 고뇌의 표정으로 묵직한 불호성을 흘려 냈다. "아미타불……." 그 때 천마신군이 외치듯 부르짖었다. "반 각이 지났소! 공격합시다!" 그러자 백의사신의 두 눈에 가공할 살광이 서릿발처럼 번뜩였다. "취옥구대천공! 늙은이들이 감히 본좌들을 우롱했겠다?" 그를 비롯한 어둠 속의 인영들은 유령처럼 취옥지존각으로 스며들었다. * * * * 취옥지존각의 구층. 단조롭게 꾸며진 방 안이었다. 사방에는 서가(書架)가 둘러 있고, 가운데 침상 위에는 한 백의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파리하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은 바로 취옥여왕 나후빙연이 아닌가? 잠들어 있는 듯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그녀의 옥용 위에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덮쳐 들었다. 검은 그림자(黑影)였다. 창문을 뚫고 방 안으로 스며든 흑영은 약간 왜소한 체구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흑영은 두 눈에 기광을 뿜어 내며 침상 가로 소리 없이 다가섰다. 일 장 가량 접근했을 때였다. 파파팟-! 돌연, 흑영은 뾰족한 비명과 함께 퉁겨져 나갔다. "악!" 침상 주위엔 무형의 강기막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실패다!' 흑의인은 내심으로 부르짖으며 퉁기듯 창문으로 신형을 뽑았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파- 팟-! "우욱!" 흑의인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안으로 퉁겨져 나가 나뒹굴었다. 경악과 불신으로 뒤덮인 시선이 창문 쪽에 던져진 순간, 흑의인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취옥구대천공(翠玉九大天公)!" 보라! 언제 나타났는지, 흰 수염(白髥)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 네 명이 그곳에 조용히 서 있지 않은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취옥구대천공! 천마대공(天魔大公), 묵검천공(墨劒天公), 혈의사혼검(血衣邪魂劒), 철륜마라제(鐵輪魔羅帝), 환살마령(幻殺魔靈), 신궁제(神弓帝), 유성혈천도(流星血天刀), 철혈무황(鐵血武皇), 선풍천왕(旋風天王). 둘만 합치면 취옥대검호 나후장천조차 필승을 장담치 못한다는 초극의 고수들이 아닌가? 그들 중 네 명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네년은 누구냐?" 묵검천공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날아왔다. 순간, 흑의인의 한 손이 품속에서 움직이며 한 줄기 혈광이 번뜩였다. 퍼- 펑! "어헛! 천혈독탄(天血毒彈)!" 자욱한 혈무(血霧)가 실내를 뒤덮으면서 묵검천공의 경호성이 튀어 나왔다. 그 와중에 흑의인의 신형이 창문 밖으로 비쾌하게 쏘아져 나갔다. "네년이 감히 잔재주를 부려? 묵섬비(墨閃飛)!" 츄와앗-! 묵검천공의 손에서 빛줄기와도 같은 극쾌검(極快劒)이 폭사되었다. "악!" 피보라가 번지면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흑의인은 허공에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그 때 거대한 철궁(鐵弓)을 둘러멘 청포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노인은 취옥구대천공 중 서열 육 위의 자리에 올라 있는 신궁제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나후빙연을 향해 정중하게 외쳤다. "반도들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잘하셨어요." 나후빙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수고하셨어요. 그럼 마지막 준비를 하세요." "예!" 신궁제는 대답하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라!" 십여 명의 인영이 들어섰다. 그들은 바로 역천(逆天)을 꾀한 취옥사전주들인 천마신군을 비롯한 취옥사전의 고수들이 아닌가? 그들을 보는 나후빙연의 입가로 차갑기 이를 데 없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감쪽같군요. 그대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상시대로 활동하도록!" "존명!" 그들은 충실한 충성심이 담긴 눈길로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 대황지(大荒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적토(赤土)가 수십 리에 걸쳐져 있는 곳이다. 대황지의 가운데엔 모골이 섬뜩할 만큼 음사(陰邪)한 핏빛 기류가 감돌고 있는 곳이 있었다. 직경이 무려 십 장에 달하는 핏빛 구덩이(血坑)로부터 혈기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유황의 연기를 뿜어 내는 폭발 직전의 활화산(活火山)과도 같았다. 한데, 혈갱(血坑)의 옆을 보라! 그곳엔 하나의 거대한 혈비(血碑)가 세워져 있지 않은가? 무수한 세월의 풍화(風化)를 말해 주듯 깎여지고 지워진 글자들이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