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2편 (32/45)
"호황밀병은 태조이신 홍무제 이후 대대로 일 인만이 알게 되어 죽음에 임박해서야 후인을 정하게 되었어요. 소녀는 삼대밀주(三代密主)예요." 자혜공주의 긴 얘기가 끝나자, 여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래요. 하지만 본 주인이 나타나셨으니, 소녀는 이만 손을 떼야겠군요." 자혜공주는 약간 섭섭한 눈치였다. 한데, 여천후는 빙긋 짓궂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자혜누님, 폐하를 뵙고 오셨지요?" 그의 말에, 자혜공주의 옥용으로 붉은 홍운이 내리깔렸다. "어흠! 이만하면 자혜누님의 낭군감으로 손색이 없지요? 하긴 나 같은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찾아다녀도 없지. 암!" "킥!" 자혜공주는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자화자찬도 저만하면 천하제일인데…….' 묵룡천도황을 비롯한 천병군단도 실소를 흘렸다. 문득, 여천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지요?" "사실 삼 년 전, 소녀는 황궁서고에 들어왔다가 이상한 말소리를 듣고 수색하던 중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한데, 그 때 소녀 또한 정신을 잃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이곳으로 올 줄 알고 달려오셨군요. 낭군이 행여나 다칠세라?" 여천후의 농담 어린 말에 자혜공주는 살짝 눈을 흘겼다. "당신은 정말……." "나는 정말 잘생겼지!" "……!" 좌중의 인물들은 아예 어이가 없었다. 여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순음지기를 잃고 기력이 탈진되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음정염시가 눈에 들어왔다. "흠! 비록 죽어 있는 강시지만 요긴하게 쓰일 것 같은데… 그렇지! 저들의 극혈사음무가 내 몸에 있고, 초혼사사섭령술을 쓴다면……." 여천후는 염시들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 "……?" 좌중의 인물들이 의아해 할 때였다. 우우우웅……! 돌연, 여천후의 전신에서 섬뜩한 청광이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사자(死者)의 호곡성인 양 귀기스러운 사음이 흘러나오고, 그와 동시에 여천후의 신형에서 음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유계(幽界)의 제황으로서 명한다. 너희들의 주인이 부르노니, 일어나라!" 오행불사기(五行不死氣)! 만상(萬象)의 오행(五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희대의 기공(奇功)이었다. 지하에 깔려 있는 음기가 여천후의 몸을 거쳐 음정염시들의 체내로 들어가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으… 으… 음……." 염시들은 돌연 눈을 번쩍 뜨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순간, 자혜공주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어맛!" "요물 덩어리들이군." 묵룡천도황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우우우……!" 염시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천후의 면전에 부복하고 있었다. 출렁이는 현란한 나신들. '됐다! 이들의 심령을 완전히 제압했다. 혼사사섭령술 없이도 이들을 부릴 수 있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여천후는 청광을 거두었다. 이어, 그는 빙긋 웃으며 신형을 돌렸다. "하핫! 자혜누님이 이들을 맡아 주십시오. 곁에 두시면 아마 누구도 누님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예? 저들을 소녀가요?" 자혜공주는 불만스레 반문했다. "천년제국에서 만든 염시로 그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다시 황궁을 넘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여천후의 말에 자혜공주는 흠칫했다. "그럼 이들의 배후가 있단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대원제국(大元帝國)의 후예들의 다시금 중원정복을 꾀하고 있습니다." "대원제국의 후예가?"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긴장의 빛을 띠었다. "변황에서 죽음의 하늘이라 일컫는 천년제국이 대원의 후예였다니……." 묵룡천도황은 침음성을 삼켰다. 천년제국! 신비에 가려져 있는 신비세력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감히 대원의 후예가 중원을 넘보다니?" 자혜공주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 또한 중원인이자, 황손의 여인이기에……. 천년제국! 어둠 속에서 천하를 좀먹어 들어가는 그들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나갑시다!" 여천후와 일행은 떠났다. 그리고 천륜을 도외시하고 음습한 귀기 서린 황궁서고의 지하에 전설된 음모의 대지는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깨어진 음모와 함께……. 3권에서 계속됩니다 제목: 풍운무림 제3권 (전3권) 지은이: 사후명 - 차례 - 제18장 향수(鄕愁) 제19장 최후(最後)의 영웅(英雄) 제20장 철혈패황(鐵血覇皇)의 후예(後裔) 제21장 중원무림(中原武林)의 하늘 제22장 천년독황(千年毒皇)의 신위(神威) 제23장 악마(惡魔)의 대지(大地) 제24장 성영천불계(聖靈天佛界)의 비사(秘事) 제25장 서장무림(西藏武林)의 복수행(復讐行) 제26장 전설(傳說)의 대지(大地) 천궁설빙계(天弓雪氷界) 제27장 취옥성(翠玉城)의 음모(陰謀) 제28장 고금무적(古今無敵)의 힘, 십룡파천무(十龍破天舞) 제29장 대단원(大團圓) 제18장 향수(鄕愁) 쿠쿠쿠-! 대중원 십팔만 리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자금성, 중원대륙의 지배자인 황제가 기거하는 곳에서 천년제국이 저지른 가공할 만행. 의협지사들은 분분히 외쳤다. - 천년제국을 찾아 붕괴시켜라! 하지만 오리무중(五里霧中)일 뿐이었다. 천년제국의 실체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아울러 황금서생! 이 이름은 밤하늘의 북두성(北斗星)처럼 빛났다. 그는 유림(儒林) 최대의 성역인 백학청송림 육 관문을 한나절 만에 통과하고, 황실 최고의 보물인 자금쌍벽려를 한꺼번에 취한 기린아였다. 또한 단신으로 천년제국의 음모를 분쇄시킨 대영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 또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와 동시에 황금장원의 상권은 노도처럼 중원을 휩쓸었으니……. * * * * 중원팔대거상(中原八大巨商)! 고대 중국에서 주요 거래되는 물품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비단(緋緞), 차(茶), 곡물(穀物), 골동품(骨董品), 전장(錢莊), 마상(馬商), 보석(寶石)… 그리고 기루(妓樓)나 도박장(賭博場) 같은 오락업(娛樂業)이었다.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한데 어느 때인가부터 이 여덟 종이 서로서로 갈라져 하나의 단체로 흡수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당금에 이르러 중원팔대거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천금성(天金城). 비단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천예만기루(千藝萬妓樓). 일만의 천예를 지닌 꽃 같은 기녀들이 모여 있는 중원최대의 기루이다. 도박장도 겸하고 있었다. 만금궁(萬金宮). 가장 방대한 세력을 구축한 거상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즐겨 마시는 차를 독점 취급한다. 전 중원에 삼천 개소에 달하는 미향다래거(味香茶來居)를 운영하고 있었다. 천고보점(千古寶店). 수천 년 전의 고대유물로부터 원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고서와 골동품을 소장한 최대의 골동품상이었다. 적천금장(積天金莊). 중원최대의 전장이었다. 적천금장의 날인이 찍힌 전표는 중원뿐 아니라, 새외에서도 제일로 쳐 준다. 철마원(鐵馬院). 철마(鐵馬), 그렇게 불리울 수밖에 없었다. 천산의 비마(飛馬)와 몽고의 대완구, 서역의 비섬총 등… 절세의 신마(神馬)를, 특유의 교미술로 장점만을 타고난 철마로 키워 내는 철마원. 묵섬철비마(墨閃鐵飛馬)라 명칭된 이 말들은 하루 삼천 리를 쉬지 않고 달린다. 가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말이 철마원에는 수백 마리나 있었다. 사실, 구룡대표국이 그만한 신용을 얻는 데는 철마원의 철마들이 압도적인 공헌을 하고 있었다. 각 지역마다 천 리(里)로 나누어 묵섬철비마를 배치하여 쉴새없이 전 중원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철마원의 철마는 한 마리에 황금 일천 냥을 호가한다. 천보광(天寶鑛). 금(金), 은(銀), 옥(玉) 등… 중원의 주요 광맥(鑛脈)을 보유하고 있는 거상이었다. 보석류의 모든 거래는 천보광에 의해 이루어진다. 구주신농림(九州神農林). 천하의 곡물류를 완전 독점하는 농자(農者)들의 대부(代父)였다. 이들의 비위를 거스린다면 그의 사돈에 팔촌까지 죽어서도 곡식을 먹지 못하리라. 이들을 일컬어 중원팔대거상천이라 칭한다. 천금성, 천예만기루, 만금궁, 천고보점, 적천금장, 철마원, 천보광, 구주신농림. 각기 한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거상들이었다. 한데, 그들의 뿌리 밑둥지에서부터 갉아먹고 들어가는 신상권의 등장이 있었다. 그로 인해 중원상권의 판도는 크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황금장원! 일 년도 채 안 된 이들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전 중원을 잠식해 들어갔다. 황금서생, 이 이름은 질투와 분노의 대상을 떠나서 중원 상인들에겐 경외의 황금신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 * * * 여천후는 전신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뭇 여인들에게 꼬집히고 말았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 그가 또 다른 여인을 데리고 온 데서 여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급기야는 여천후의 잠자리는 때아닌 찬서리만 깔리게 되었다. 한 달간 접근 금지령! 제아무리 천하를 흔드는 황금서생일지라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여인들의 마음이었다. 여천후는 철저히 따돌리면서도 오히려 자금쌍벽려와는 그렇게 친해질 수가 없었다. 물론, 자금쌍벽려도 그녀들에게 동조해 여천후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금전(黃金殿). 내궁에서 쫓겨난 여천후가 임시로 기거하는 곳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은밀한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하를 발칵 뒤집어엎을……. 화원. 수만 종의 기화들이 한껏 방향을 내뿜으며 교태를 부린다. 야월(夜月) 밑에 살랑이는 춘풍을 받으며 화원 한가운데 서 있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짙은 고독감이 배여 있다. 시리도록 슬픈 고독감이……. 누군가? 팔짱을 끼고 고즈넉이 야월을 응시하는 이 사람은? 여천후, 바로 그였다. 한데, 이 야밤에 어찌 쓸쓸히 짙은 고독을 흩뿌리며 홀로 서 있는가? 문득 묵묵히 서서 야월을 응시하던 여천후의 입에서 씁쓸한 여운이 남긴 고소가 흘렀다. "여자만 밝히는 위인이라? 이 여천후가 고작 그런 인물로밖엔 보이지 않았던가?" 여천후는 걸음을 옮겼다. "모르리라. 누가 알랴? 이 내 마음 속에 흐르는 고충을……." 그의 마음 속을 대변이라도 하듯, 발걸음 소리마저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 윽……! 화원의 꽃을 한 송이 꺾어 들어 향기를 한껏 흡입했다. 폐부로 스며드는 화향. "한 송이 꽃도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거늘, 이 내 몸은 어이하여 부평초같이 헤매이는가?" 여천후는 시선을 올렸다. 이지러진 편월(片月). 그 안으로 환히 떠오르는 환영이 있었다. 한없이 아름답고 가이 없이 푸근하고 자애로운 모상(母像)이었다. 엄마! 천후는 이 나이가 되어도 보고 싶어요. 황금누란국, 천후의 고향으로 가고 싶어요. 운명에 이끌리어 나왔으나, 천후에게 아무리 많은 여인들이 있으나, 천후는 이 짙은 고독을 떨쳐 버릴 수 없어요. 그들이 노리는 것은 천하패업. 옥황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그들의 힘은 천하를 뒤덮고도 남을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더군요. 그러한 천년제국이 독아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전설의 사상천비계와 육합수호천황가! 하지만 그것들보다 천년제국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황금누란국이라고 하더군요. 천하를 뒤엎을 재력을 갖추고 있는 나의 고향. 지금 중원팔대거상에는 기이한 압력이 들어오고 있어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상권이 무너지고 있어요. 그리고 열흘 전에 핏빛 혈첩(血帖)이 날아들었어요. 본 장원을 비롯한 중원팔대거상에 날아든 혈첩의 내용은 모두 굴복하라는 것이더군요. 황금누란국의 상권을 격파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유로이 놓아 주겠다고요. 거절하면 죽음만이 있다나요. 기한은 바로 오늘. 지금 본 장원엔 중원팔대거상이 모두 모여 있어요. 황금누란국! 나의 고향을 괴멸시키려는 간악한 무리들을 천후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어요. 이제부턴 육합수호천황가를 모두 끌어모아야겠어요. 엄마! 반드시…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반드시 천후의 고향을 찾을 거예요. 그 동안의 외로움을 떨구고자 천후는 엄마의 며느리들을 많이 거느렸어요. 모두 좋은 여인들이지요. 이제부턴 과거의 슬픔 같은 것은 잊어 버리겠어요. 천후에게 조그마한 야망이 생겼어요. 조금 광오할지 모르지만 천하를 내 발 밑에 두겠어요. 그리고 내 발로 황금누란국을 접수하러 갈 거예요. 엄마는 아직 제 시녀예요. 그 동안 아버지에서 밀린 빚도 받아 낼 거예요. 물론 이자도 받아야겠지요? 슬픔이 가득한 여천후의 독백. 그의 눈가에서는 아련한 그리움이 어려 있었다. 유난히 따스했던 어머니의 정을 아직도 가슴 속에서 떨쳐 버리지 못했다. 주위에 친인(親人) 하나 없는 고독감을 웃음으로 흘려 버리는 여천후의 고충을 남들은 알지 못했다. 한데, 그런 여천후를 이슬 머금은 눈망울로 주시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천후, 불쌍한 사람.' 구르는 이슬 방울도 느끼지 못하고 서글한 눈으로 주시하는 여인이 있었다. 문득 여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교수를 가슴에 대고 물기 머금은 눈망울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려화누님." 나직한 여천후의 말에 철려화는 그대로 여천후의 가슴에 안겨 버렸다. "흑! 당신이 그렇게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여인은 철려화였다. 여천후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며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려화누님은 쓸데 없는 말을 들었구료. 하지만 천후는 중원의 일만 마무리지으면 고향으로 갈 거야." 여천후는 두 손으로 철려화의 얼굴을 받쳐 올렸다.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운 옥용이었다. 여천후는 그녀의 눈가에 번진 물길을 닦아내며 조용히 웃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북방(北方)의 장인어른을 뵈어야겠어." 그의 말에 철려화는 부르르 교구를 떨었다. '아버님…….' 초원제왕(草原帝王) 철군악! 북방의 제왕인 모란왕부의 부주! 아울러 새북태양십삼천(塞北太陽十三天)의 총맹주이기도 한 철려화의 부친! 천년제국의 암계에 빠져 실권을 상실한 그에게 생각이 미치자, 철려화는 가슴이 쓰렸다. 그러나 그녀는 믿었다. '그래, 이분이 가면 아버님도 구출될 수 있을 거야.' 여천후를 어려서부터 보살펴 온 그녀였기에 누구보다도 여천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초인(超人)! 그것이 철려화가 여천후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문득 여천후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크고 포근한 여인의 가슴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철려화는 거부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여천후는 유난히 그녀의 가슴을 탐했다. 어머니와도 같은 철려화의 아늑한 가슴에 파묻혀 하루 종일 지낸 적도 있었다. '천첩은 당신 거예요.' 여천후는 그녀의 유실(乳實)을 간질이며 씩 웃었다. "누님의 가슴은 정말 좋아. 한데, 다른 여자들은 모두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려화누님은 왜 여길 나왔지?" 한 달간의 접근 금지령으로 동맹(同盟)을 결성한 여인들에 대한 불만과, 그와는 반대로 철려화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진하게 배여 있는 물음이었다. 철려화는 짤랑한 교소를 흘리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 "동생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거예요.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음!" 여천후는 멋적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하긴, 좀 많긴 해." "후훗……!" 철려화는 실소를 머금으며 어이없어 했다.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은 거예요." 그녀의 따끔한 일침에도 불구하고 여천후는 그저 미소를 머금으며 철려화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막 여인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침입할 찰나였다. "안 돼요. 할아버지께서 부르세요." 철려화는 그의 손을 잡으며 옷을 여미었다. "쳇! 꼭 중요할 때마다……." 영 못마땅한 듯 검미를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여천후를 철려화는 정겨운 눈길로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할아버니께서 급하신 일이라고 빨리 오시래요." 그녀의 말에 여천후는 신형을 돌리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려화누님, 이따가 내 방으로 살짝 와!" "예……." 철려화는 살포시 홍운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밤에 방으로 오라는 진의가 과연 무엇일까? '감히 하늘 같은 지아비에게 접근 금지령? 어디 두고 봐라. 누가 몸이 다나?' 여천후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신형을 날렸다. 제19장 최후(最後)의 영웅(英雄) 황금전엔 구 인(人)이 모여 있었다. 만일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안다면 결코 천하가 조용하지 못할 것이다. 말 한마디로 중원을 움직이는 사람들. 우선 상석에는 예의 옥황노야 사파륭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좌우로 동석해 있는 팔 인의 신분은 다음과 같았다. 천금성주 만상금하(萬商金霞) 관필영(關必英), 만금궁주 혈면금적왕(血面金積王) 단리승(段里丞), 천예만기루주 천예서시(千藝西施) 하화운(河花雲), 적천금장주 금천대후(金天大侯) 궁유성(弓流星), 철마원주 천리비마영(千里飛馬影) 악천비(岳天飛), 천보광주 금령보군(金靈寶君) 좌세천(左世穿), 구주신농림주 천농존(天農尊) 화후영(華厚榮), 천고보점주 천고노야(千古老爺) 야래향(夜來香). 중원천지를 발칵 뒤집을 일이 아닌가? 평소 왕래조차 안 하던 거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 황금장원에……. 중원천하에 거칠 것이 없다던 거부들의 안색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 빠져 있는 이들의 눈가에 일순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덧 안개같이 스며 들어와 상좌에 앉은 백의미청년(白衣美靑年)을 본 것이다. 사파륭은 곁에 앉은 여천후를 보자,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좌중에게 말했다. "이 애가 황금서생이오!" - 이 애가 황금서생이오! 이 시대 최고의 신비인이 베일을 벗고 나섰을 때 중원팔대거상은 할 말을 잃었다. '저렇듯 젊은 사람이?' '과연!' 처음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점차 느꼈다. 아무 말도 않고 앉아 있는 젊은 거룡의 위용. 그것은 이내 그들의 마음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마음을 짓누르는 엄청난 대자연의 호연지기가 펼쳐져 여천후를 태산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의 황금동공에 어린 칠색의 무지개빛은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미 어떤 묵계가 있었던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오 인(人)이 있었다. "삼가 횡금서생을 뵈오이다." "이 시간부터 황금서생의 명에 목숨을 바치오리다." 무릎을 꿇는 오 인의 눈가에는 한결같이 경외지감이 어려 있었다. "천년제국의 혈첩을 받고 왔으나, 결코 우리를 거둘 인물은 없다고 생각해서 황금서생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소문보다 더하다." '저럴 수가? 태산보다 더욱 장중하다. 노부 평생 노부가 스스로를 이토록 보잘것 없게 느껴 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로다.' 꿇어앉은 오 인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열흘 전의 일이다. 중원팔대거상 앞으로 날아온 혈첩 여덟 장엔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본 제국은 천하패업의 대열에 귀하의 참여를 원하오. 귀하들이 상업을 크게 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황금누란국이라는 거대상권 때문이라는 것을 아오. 그들을 격멸시키는 데 본 제국과 협조해 주었으면 하오. 거부하시지 않으리라 믿소. 열흘 후, 본천에 협조한다는 뜻으로 흑기(黑旗)를 성루에 매달아 놓으시오. 천갈무형지독의 해약(解藥)과 아울러 황금누란국을 궤멸시키는 데 필요한 원군을 보내 드리겠소. 물론 본 제국에 협조하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며, 목적 달성시는 중원뿐 아니라 천하의 상권을 그대들에게 이양할 것이오. 천년제국주 인(印)> 언뜻 보면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무심코 그것을 읽어 본 거상들은 눈앞이 노래졌다. 중원팔대거상의 머리맡에 놓여진 천갈무형지독(天蝎無形之毒).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의 독이었다. 오직 전설상의 원세쌍천종 중 독종 살황대독후만이 사용했고, 그 가공할 성분에 살황대독후도 다시 만들지 않아 절전되었다는 절독이 아닌가? 해약이 없다고 알려진 극독. 냄새만 맡아도 한 달마다 주기적으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쳐야 하며, 일 년 후에는 전신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극독. 흑천혈첩(黑天血帖)이란 혈첩은 중원팔대거상 외에 황금장원에도 날아들었다. 내용은 동일했다. 그렇지만 공자 앞에서 문자(文字) 쓰기 아닌가? 이미 살황대독후와 약종의 양대절기를 완전히 습득한 여천후에겐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여천후를 분노케 만들었다. 황금누란국!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은 기름에 불을 붙이는 말이나 다름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구주종횡가주인 옥황노야 사파륭을 만나 천년제국의 파멸을 부탁받았고, 지금은 자신의 아내가 된 자금쌍벽려의 부황인 영락제의 간절한 소망으로 호국대천군(護國大天軍)이란,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인물을 척살할 수 있는 대권까지 부여받았다. 그래도 그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가 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