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1편 (31/45)
그의 눈앞엔 십구 세 가량의 미청년이 서 있었다. 하얀 백의를 차려 입은, 여인보다 아름다운 여천후였다. 그의 눈가로는 한기 어린 살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감히 황궁에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다니! 백 번 죽여도 시원찮을 늙은이로다!" "늙은이? 이… 쥐방울만한 애송이가!" 처음엔 아예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은 분노로 바뀌고, 어느덧 분노는 주체할 수 없는 살심으로 변했다. "뒈져라- 유령혈파참(幽靈血破斬)!" 푸화악-! 유령사제의 신형에서 일순 가공할 혈기류가 폭출되더니, 여천후의 전신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숨쉬기조차 곤란할 정도로 매캐한 피 내음과 썩은 시체 냄새가 아울러 따라오고 있었다. 여천후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늙은이, 이것을 보겠소?" 화르르르르-! 그의 손가락에 어리는 현란한 불꽃. "천화신강의 변형인 화룡지(火龍指)라는 것인데… 타앗-!" 쩌렁한 여천후의 대갈이 터지며 일직선으로 뻗어 가는 화강지에 닿은 혈기류는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크흑! 이, 이럴 수가!" 어깻죽지를 쥐고 오 장 밖으로 퉁겨져 나간 유령사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신 신음을 발했다. 그러면서도……. '노부의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면……?' 늙은 생강이 맵다고 했듯이 유령사제는 두 눈을 혈호로 돌렸다. "우우! 일어나라! 나는 너희들의 신! 일어나라, 일어나라……!" 인간의 심혼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유령의 호곡성이 터져 나왔다. 순간, 혈호가 광란하기 시작했다. 부르르르르……! 그와 아울러, 혈관의 뚜껑들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하며 일제히 손들이 나온다. 끼이이- 끼익-! 하얀 실핏줄마저 드러나보일 정도로 투명한 여인의 교수였다. 이어, 드러나는 여체를 보라! 저것을 어찌 인간이 감당하랴? 둔부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만이 중요한 부분을 가렸을 뿐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백팔 명의 나녀(裸女)들이었다. 음정염시! 하늘마저도 침을 흘리며 덤비게 할 수 있다는 파천의 요물들이 그 신비를 드러낸 것이다. 제17장 공포(恐怖)의 염시(艶屍) 혈관을 박차고 흐느적거리며 다가서는 음정염시들의 자태는 가히 폭발적인 염색을 흩뿌렸다. "우우! 나는 너희들의 주인이다. 저 애송이의 피를 말려라. 욕망의 심판을 내릴지어다." 유령사제의 입에서는 연신 섬뜩한 죽음의 저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청광이 일렁인다. 그러자 백팔 나녀들이 알아들었다는 듯 요악스런 요소(妖笑)를 터뜨리며 여천후를 감싸기 시작했다. "호호호!" "까르르!" 일순, 여천후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헉!" 뜻밖의 눈요기 거리에 싱글거리던 그의 표정에는 어느덧 열기가 어려 있었다. '이럴 수가? 점점 내공이 흩어진다. 이, 이러면…….' 초절륜의 정력을 가지고 있는 여천후마저 백팔 나녀의 한 가닥 웃음 소리에 심혼이 진탕되며 가슴 밑바닥에 엄청난 열류가 치솟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호호호!" "까르르!" 너울너울 나비가 꽃잎을 탐하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는 풍염한 유방, 둔부까지 내려온 치렁한 흑발이 흔들거릴 때마다 여인의 신비림이 드러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살짝 포개졌다 활짝 벌어지는 대리석 옥주의 현란함은 또 어떤가? "헉! 헉!" 어느 새 여천후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입에서는 거친 야성의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옆에 서서 음정염시를 부르고 있는 유령사제는 득의에 찬 웃음을 머금었다. "제까짓 놈이 그러면 그렇지!" 유령사제는 더욱 백팔 나녀를 재촉했다. "저승의 제황으로서 명하노니, 너희들의 제물로써 저 놈을 죽여라!" 그의 말에 답하듯 나녀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흐흐흥!" "호호호!" 염기 어린 교소가 사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백팔 나녀는 서로 짝을 지어 흐느적거렸다. 상대의 젖가슴을 간질이고, 여인의 비밀지문을 서로가 문지른다. "하아아……!" "흐으응……!" 앵두 같은 입술에서는 연신 숨 넘어가는 교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헉헉!" 그와 비례하여 여천후는 더욱 타올랐다. 찌이익……! 급기야 그는 자신의 백의를 사정없이 뜯어 버렸다. 음정염시! 고금 이래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가공할 염시의 위력! 극고의 초인 수련을 거친 여천후마저 이럴 정도라면? 보인다. 나녀의 숨결에 광기 어린 숨을 토하며 광란하는 중원천하가 확연히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여천후는 탄탄한 근육과 매끄러운 피부를 드러낸 채 서 있었다. 그는 범인(凡人)과는 달랐다. 눈은 튀어 나올 듯 충열되어 있고, 전신혈관은 터져 버릴 듯이 팽창돼 있어도 처음의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실수다! 저들을 처음부터 부수어 버리는 건데…….' 가물거리는 이성을 붙잡으며 여천후는 최대한 심력을 일으켰다. 그러나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가공할 열류에 점차 무너져 가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과의 싸움. 어느 새 여천후의 악다문 입술이 터져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번의 방심, 상대를 경시하여 얻어진 결과로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때 백팔 나녀들은 연신 교음을 발하며 여천후에게로 다가들었다. "흐으응……!" "하아아……!" 눈앞에까지 다가왔다가는 재빨리 물러나고, 풍염한 유방을 문지르다간 희멀건 허벅지를 활짝 벌린다. 곧이어 긴 머리결을 풀어 여인의 신비문(神秘門)을 감추더니만 또다시 활짝 걷어올린다. 그것은 처절한 유혹의 물결이었다. 여천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손 안 가득히 들어오는 매끄러운 육봉의 감촉. 그것으로 여천후의 신형은 무너졌다. "헉헉!" 그의 손은 쉴새없이 나녀들 교구 곳곳을 헤집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가고 있다!' 여천후의 정신력은 급기야 무너지는가? 어느 새 그의 신형은 나녀의 몸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흐으응!" 한 나녀는 꽃뱀같이 모요천후의 전신을 얽어맸다. '몸(身)… 마음(心)!' 여천후는 처절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피! 그 때였다. '그… 그렇다!' 여천후는 꺼져 가는 심화(心火)를 끌어올리며 한 줄기 영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과 마음, 둘을 분리시킨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그러나 여천후는 질끈 눈을 감았다. '분심이체비령결! 그것밖에 없다.' 그런 중에도 그의 입은 달콤한 꽃잎에 황홀해 있었으며, 손은 여인의 신비지문을 더듬고 있었다. '공즉색(空卽色), 색즉공(色卽空)… 유(有)는 무(無)이고, 무에서 허(虛)로… 모든 것은 공(空)이다.' 끊임없이 뇌리를 스쳤다 사라지는 심오한 구결을 여천후는 계속해서 암송했다. 일순, 여천후의 전신에서 새하얀 백무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 낮은 소성과 함께 빛살같이 솟구치는 희끄무레한 빛이 보였다. 슈웃-! 창졸간에 일어난 일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천장 속의 혈무 속에 감춰진 환영(幻影)은 점차 하나로 합일됐다. 여천후가 아닌가? 분명 바닥에는 발정난 수캐마냥 여인을 탐하는 여천후가 있었다. 한데, 허공 중에 부유하는 또 하나의 여천후는 무엇이란 말인가? 분심이체비령결! 천하최강의 기환술을 펼친 것이다. 내공과는 상관없이 체내의 기로써 운용되는 기환술. 몸과 마음을 원하는 대로 분리시킬 수 있는 신비지술이었던 것이다. "흐으응!" "하아……!" 뜨거운 열기를 토하며 뒤엉키는 나녀들… 자신들을 탐하는 사내가 환영, 또 다른 여천후임을 아는 여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유령사제, 그는 욕정 어린 눈빛으로 연신 괴소를 터뜨렸다. "노부조차 맛을 못 본 계집들이거늘, 하지만 저 놈의 내공을 흡취하여 다시 본좌가 그것을 취한다면 노부의 내공은 가일층 진보하리라." 이어 그는 청광을 더욱 짙게 발하며 주문을 외웠다. "유계의 제황으로서 명하노니, 환희마라극음무(歡喜魔羅極淫霧)를 펼쳐라!" 그의 말이 끝나자, 나녀군에 변화가 일었다. 휘류류류-! 혈기류! 나녀들의 신형에서 핏물 같은 혈무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여천후를 비롯해 삼십여 장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나녀들의 사음무(邪淫舞)! 보통 여인보다 십 배의 순음지기를 가진, 재질이 뛰어난 여인들이 극음의 지하에서 인혈을 흡취하면 그야말로 경세의 극음지기를 얻는다. 극혈사음무에 닿으면 아무리 절륜한 양강을 지닌 남아라도 절로 양기를 잃고 탈진해서 죽는다. 바람 빠진 고무공같이……. 한데, 그것도 한둘이 아닌 백팔 인에 달하는 여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극혈사음무라면? 생각지도 말자. '조금만 늦었으면 뼈도 못 추릴 뻔했군' 허공 중에 비상하는 여천후는 내심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어 그의 눈길이 돌려지며, 가공할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한쪽에 물러서 있는 유령사제가 눈에 띈 것이다. "네놈이 감히 천후를 건드려? 더구나 아무 죄 없는 여인들을 염시로 만들다니." 슷-! 여천후는 지면으로 날아내렸다. "흐흐, 빨리 끝내라. 본좌가 미칠 지경이다." 유령사제는 혈무로 뒤덮힌 광장을 주시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늙은이가 몸이 달았군." 싸늘한 조소가 그의 뒷등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헉!" 유령사제는 절로 헛바람을 삼켰다. "너… 너는… 네가… 어떻게……." 인간이 놀람의 극에 달하면 할 말을 못한다.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사시나무 떨 듯 신형을 가누지 못하는 유령사제. 백팔 음정염시의 가운데에 묻혀 열락에 양기를 뿜어 내고 있을 여천후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유령사제가 혼비백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여천후는 웃음을 거두었다. "묻겠다! 어디 소속인가?"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공포가 사위를 뒤덮었다. "으으, 사술……." 주춤주춤 유령사제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어디서 귀신 같은 놈이 나타났단 말인가? 도저히 내 적수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일순 데구르르 굴렀다. '밖으로 유인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체하면서 그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일 마장쯤 남았을까? '흐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가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돌연, 밖에서 들려 오는 일단의 비명 소리가 있었다. "크아악-!" "적이다! 크악!" 그 때였다. 휘익-! 한 명의 흑의인이 들어서며 유령사제 앞에 널브러졌다. "사제, 강적이 나타났습니다. 어서……." 흑의인은 핏물을 토하며 띄엄띄엄 말을 늘어놓다가 그대로 고개를 꺾어 버렸다. 유령사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 어떤 놈이?" 경악과 분노가 범벅이 되어 부르르 신형을 떠는 그와 마찬가지로 여천후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번지고 있었다. '누가 또 쳐들어왔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유령사제의 정면으로 걸어갔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의 소속은?" "으으……!" 유령사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신음을 발했다. '이젠 틀렸다! 밖에도 강적… 그렇다면?' 일순, 그의 눈가로 청광이 이글거렸다. 이미 틀려졌다고 판단한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죽어랏! 유령혈천공(幽靈血天功)!" 일성 대갈과 아울러, 가공할 혈강이 빗살같이 폭출되며 사위를 혈광으로 뒤덮었다. 파츠츠츳-! "최후의 발악인가?" 푸화악-! 혈광을 밀어 내며 퍼져 나가는 오색강기! "크아악-!" 유령사제는 핏물을 토하며 십여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끄으으……!" 괴로운 듯 신음을 발하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나를 보아라!" 재빨리 다가선 여천후의 말에 유령사제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사(邪)의 제왕(帝王)! 너는… 나의 종이다." 순간, 여천후의 입에서 섬뜩한 사음(邪音)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가로는 핏빛 혈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신에서는 푸르스름한 귀린이 일렁이고… 유계(幽界)의 아수라와 같은 몰골이었다. 유령사제의 동공이 썩은 물고기의 눈알같이 흐트러졌다. 아울러 유령사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나는 당신의 종복입니다. 죽음의 제황이시여!" 대체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것은 간단했다. 초혼사사섭령술(招魂邪邪攝靈術)! 가루라성존이 남긴 괴이막측한 사술로 인간의 심성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다. 한번 걸려들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죽어서도 심령을 제압당하는 신비지술. "너의 소속은?" 여천후의 물음이 던져지자, 유령사제의 눈가로 갈등의 빛이 어렸다. "너의 소속은 어디인가?" 여천후는 더욱 내공을 끌어올리며 다그쳤다. 그러자……. "나는 천년제국의 천시당주(天屍堂主)… 우욱!" 유령사제는 힘겹게 말하다가 급기야는 핏물을 토하고 말았다. 심령이 제압된 상태에서도 천년제국이란 이름은 그에게 무한한 공포를 던져 주고 있었다. "역시 천년제국이었군." 여천후는 침음성을 삼키며 대법을 풀었다. 그러자 썩은 고목이 무너지듯 유령사제의 깡마른 신형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문득 여천후는 시선을 돌렸다. 여인… 성스러움과 만인을 은연중에 압도하는 기질을 갖춘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자혜공주 주자혜,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뒤로는 삼백에 달하는 금빛 무복을 걸진 장한들이 늘어서 있었다. 자혜공주의 눈에는 곤혹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늘어서 있는 장한들의 눈도 한결같이 휘둥그래 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라! 한쪽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쓰러져 있는 백팔 명의 나녀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색한으로서의 여천후가 있었다. 그리고 유령사제 앞에 오연히 서 있는 또 하나의 여천후. 어찌 한 인간이 둘일 수 있으랴? "쩝!" 여천후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신형을 돌렸다. 음정염시… 그녀들이 가공할 염시이긴 하나, 혼백 없는 껍질에다 자신들의 모든 기력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었으니 어찌 쓰러지지 않겠는가? 극혈사음무! 그것은 상대방의 양기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분출되는 것이다. 게다가 염시를 조종하는 유령사제마저 혼절해 있으니, 급기야 기력이 탈진하여 모든 신경이 정지해 버린 것이다. 여천후는 나녀군 사이로 신형을 옮겼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도저히 벌어지기 힘든 일이 나타났다. 스르르르……! 두 사람의 여천후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환영처럼 두 여천후가 하나로 되어 버린 것이다. "어찌 저럴 수가?" 자혜공주는 불신 어린 봉목으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나녀군의 사이를 뚫어질 듯 주시했다. 여인의 나신을 바라보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경악실색! 오히려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한편, 다시 본체로 돌아온 여천후는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이, 이것은……?' 혈관을 꿰뚫을 듯이 휘몰아치는 강기! 극혈사음무! 극음의 정화가 그의 체내에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여천후는 전신이 파손될 것 같은 고통에 혼절해 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황급히 가부좌를 틀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심공도 이것을 다스리지 못한다! 오직 기환대능력으로만 잠재울 수 있다.' 무려 백팔 명에 달하는 여인들의 순음지기를 한몸에 지니고도 신체가 파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여천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기환대능력! 여타의 무공과는 다른 대자연공만이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본신의 내공과는 상관없는 만상의 기(氣) 속에 극혈사음무는 잠자기 시작했다. 여천후의 전신은 입정한 부처와도 같았다. 쿠쿠쿠쿠-! 아울러 굉렬한 뇌음이 그의 신형에서 흘러나왔다. 기환대공력에 의해 잠재된 극혈사음무는 몇 갑자(甲子)라 지칭할 수 없을 만큼 가공할 극음지기(極陰之氣)였다. 만일 그것을 본신의 내공과 융합시킬 수 있다면? 생각하지도 말자. 그 파천황의 무위를 어느 누가 일 초 반 수라도 받아낼 수 있겠는가? "당신… 인간인가요?" 여천후가 정신을 차린 후 자혜공주가 기이한 동물을 보듯 빤히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내가 인간이냐고?' 여천후의 안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쩌랴? 범인(凡人)은 백 번 죽어도 알지 못할 괴이한 일을 벌여 놓았으니… 여천후는 할 말이 없었다. 기껏 한다는 소리. "이따 밤에 봐요. 인간인지 요물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퉁명스런 여천후의 말에 자혜공주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 선 장한들은 포복절도할 지경이었다. 밤에 알 수 있다고? 문득 여천후는 늘어선 장한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데, 어떻게 이곳에 왔습니까? 또 저들은?" 자혜공주는 그제서야 정신을 추스리며 한 백포노인을 불렀다. 구름 같은 흑염을 배꼽까지 드리운 관운장 같은 칠순 노인이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기형도(奇形刀)를 들고 있었다. 자루는 오 척에 달하고 날이 이 척(尺), 날의 두께는 이 푼, 무게만도 수백 근은 나갈 성싶은 묵룡언월도(墨龍偃月刀)였다. 백포노인의 가슴 부분에는 등천할 듯한 묵룡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로는 가공할 패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의검왕에 버금가는 절세고수가 황궁에 있었다니…….' 여천후의 눈가로 감탄지색이 어렸다. 마의검왕 호극충! 천병신기가의 천병삼천종의 일 인인 그와 버금가는 인물이 있다니? 그 때였다. 자혜공주는 백포노인을 주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분은 묵룡천도황(墨龍天刀皇)이라고 해요. 혹, 아실지 모르지만 천팔백 년 전의 육합수호천황가 중 천병신기가의 천병삼천종의 한 분이세요." 그녀의 소개에 백포노인은 묵묵히 군례를 취했다. 그녀의 말에 여천후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천병삼천종 중 무적도종의 후예란 말인가? 아연실색할 일이었다. 오백 년 전, 삼 파(派)로 갈라져 소식이 끊겼던 천병신기가였다. 그 중 수좌인 철혈검종의 후예인 마의검왕과 삼백삼십 삼 인의 천병신기군단을 보유하고 있는 여천후가 아닌가? 여천후는 문득 미소를 머금으며 묵룡천도황 앞으로 걸어갔다. "도황! 잠시 묵룡언월도를 빌려 주시겠소?" 다짜고짜 반 존대를 쓰자, 묵룡천도황의 노안에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자신의 애도(愛刀)를 내밀었다. "여기 있네." "고맙소이다. 잘 보시오." 여천후는 가볍게 묵룡언월도를 받아 들곤 수직으로 세웠다. 다음 순간, 여천후는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며 굉렬하게 도를 휘둘렀다. "묵룡파천황!" 파츠츠츠츠-! 섬렬한 도기와 아울러 수천 수만 마리의 묵룡이 장내를 가득 메우며 벽면을 강타했다. 쩌쩌쩡-! 일도양단(一刀兩斷)!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싶을 정도로 무려 십여 장 깊이로 벽이 쪼개졌다. "허억! 그… 그것은 오백 년 전, 무적천도종께서 남기신 도종절기!" 예의 주시하던 묵룡천도황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서… 설마, 천병대전(天兵大殿)에서 오신……." 그의 떨리는 말이 떨어지자, 주위에 늘어서 있던 천병신기가의 가솔들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지성을 발했다. "천병대전!" "천병신기가의 천년성지(千年聖地)가 열렸단 말인가?" 그들의 눈은 한 인간에게로 집중되었다. 가부를 묻는 눈길이었다. 그들 눈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부모를 잃은 천애고아가 다시금 부모의 품을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병신기가 초유로 천병관(天兵關)을 뚫었소." 그의 말에 묵룡천도황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천병지존을 뵈오이다!" "지존이시여!" "천병지존의 탄생이시다!" 삼백삼십삼 인의 천병군단은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으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 이것은……!' 자혜공주 주자혜는 불시간에 일어난 사태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된 일이야. 천병신기가는 아녀자가 다스릴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니…….' 여천후는 묵룡천도황을 일으켜 세웠다. "천병의 후예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소, 도황!" "하지만 지존께만은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후훗, 마의검왕만큼이나 고집이 세구료." "마의검왕?" "철혈검종의 후예요. 묵룡노인만큼이나 드세오." 여천후의 미소 어린 말에 묵룡천도황은 흠칫했다. "그럼 철혈검종마저도 거두셨습니까?" "그들은 가까운 곳에 있소. 한데……." 여천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황궁에 있소? 자혜공주와는 어떤 관계고?" 그 때 자혜공주가 살포시 다가오며 향내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제가 얘기하겠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얘기인 즉 이러했다. 사십 년 전, 명태조 홍무제는 한인부흥을 부르짖으며 몽고족을 북방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대원제국의 기마병도 강맹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하북(河北)의 태행산(太行山)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다. 그런 중에 홍무제는 한 산촌(山村)을 발견하게 되었다. 불과 삼백여 명에 달하는 소수인원만이 거주하는 촌락이었다. 그러나 홍무제는 그들이 예사 인물들이 아님을 알았고, 한 팔이 되어 주기를 청했다. 홍무제의 인품에 감화된 그들은 갑주를 입고 출전, 막대한 전공을 올렸다. 이후 그들이 천병신기가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고, 이들은 따로이 황실의 호황밀병(護皇密兵)으로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