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0편 (30/45)
그러면서도 그는 입가에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백설공주의 가는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후훗, 대단한걸.' 여천후는 실소를 흘리며 그녀를 침상 위에 눕혔다. 일순,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 '……!' 백설공주는 입술을 떼어 내며 여천후의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음탕한 계집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렇죠?"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여천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려는 순결하고 아름다워." "정말?" 백설공주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고개를 치켜들며 물었다. '허……!' 여천후는 변심막측한 백설공주의 행동에 실소를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뭉클 사랑스러움이 솟아 나왔다. "당신은 정말 예뻐요. 미려가 꿈에도 그리던 그런 분이걸요. 그렇지만……." 백설공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언니를 먼저 알면 나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을 거예요. 그래서……."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하는 정인에게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심(女心)은 고금을 막론하고 매한가지였다. 백설공주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작은 여심은 자혜공주라는 또 다른 여인으로 인하여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옥(玉)이라도 그보다 더 좋은 옥이 옆에 있으면 빛이 바래지듯, 백설공주 주미려는 그것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여천후는 작은 요정을 살짝 보듬어 안았다. "미려, 꽃(花)에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 모란(牧蘭)은 아름다운 반면 향기가 없고, 매화(梅花)는 설중화(雪中花)답게 고고하고, 국화(菊花)는 군자(君子)의 도리가 담겨 있지. 또한 난초(蘭草)는 은은하면서도 여려. 미려도 아름다워. 미려 말대로 천고의 색한(色漢)인 이 여천후가 한눈에 반한 정돈걸." 어느 새 백설공주는 여천후를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미려가 아름다워?"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초롱거리며 묻는 백설공주. 그녀의 탐스런 가슴을 쓰다듬던 여천후는 일순,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정말 이쁘… 흠!" 재차 물으려던 백설공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우악스런 여천후의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여리고 부드러운 앵두 입술을 덮쳤기 때문이다. "읍!" 백설공주의 봉긋한 가슴은 사내의 손에서 이지러지고, 그녀의 막힌 입술에서는 야릇한 기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백설공주 주미려는 생애 최초로 파과의 아픔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악- 아파!" "으음……!" 여인은 악기(樂器)였다. 아름다우며 귀여운 악기. 만들어져 최초로 악사(樂士)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처음엔 거칠고 탁한 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여천후라는 명인(名人)의 손에서 다듬어지자, 거친 탁음은 곧 부드럽고 아름다운 교음으로 바뀐다. "아아, 당신!" 어느덧 작은 사슴은 우람한 사내의 품에 영사처럼 휘감긴다. 그녀의 작은 입술에서는 끝없는 애욕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밖은 살랑거리는 미풍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 밤에 한 송이 꽃이 화려하게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 * * * 달도 구름을 이불 삼아 고요히 잠들어 있는 깊은 밤이었다. 자금성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둥- 둥- 둥-! 밤하늘을 타고 흐르는 축시(丑時)를 알리는 소고(少鼓)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천봉각(天鳳閣). 자금쌍미려 중 둘째인 백설공주 주미려의 거소였다. 귀엽고 활달한 그녀의 성품에 맞게 아담한 천봉각은 소담스런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문득 하나의 백영이 천봉각을 빠져 나와 화원으로 내려서는 모습이 보였다. "까딱하면 잠들 뻔했는걸." 미소를 머금으며 월야에 서 있는 백영은 다름아닌 여천후였다. 백설공주와 한창 달콤한 육체의 밀어를 속삭이던 그가 도둑고양이같이 빠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여천후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혜공주가 완쾌되었다는 소식이 퍼진 이상, 그녀를 독살하려던 무리들이 가만 있을 리 없지. 미려 때문에 늦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 잠시 천봉각을 주시하던 여천후는 재차 신형을 날렸다. * * * * 천향전(天香殿). 지금도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삼 년 전에는 그야말로 무릉도원과도 같았던 별원이었다. 자혜공주 주자혜가 기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앓아 누운 뒤로 점차 원래의 미학(美學)은 퇴색되어 가기만 했다. 그래도 본연의 고고함이 물씬 배여 있기는 했다. 문득, 한 줄기 백영이 연기처럼 천향전으로 스며들었다. 스스슥……! 실내(室內). 여인의 규방인 듯 고아하며 단조로웠다. 한 곳엔 침상이 있고, 그 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미녀 하나가 보였다. 월광의 금하가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여인의 전신을 감싼다. 금빛 달무리에 휘감겨 조용히 잠들어 있는 자혜공주 주자혜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촤르르-! 가벼이 주렴을 헤치고 백의미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재빨리 장내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여천후는 침상 가로 걸어갔다. 일순, 그는 눈부심을 느끼며 절로 눈을 감아 버렸다. 분홍빛 나삼 사이로 드러나는 희미한 여체의 곡선은 달무리를 받아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추녀도 월광을 받으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는데, 하물며 천고의 절색미녀가 요요(妖妖)로운 자태로 달무리 속에 금무지개를 피우니 어느 누가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말 요물단지로군.' 내심 경탄하던 여천후는 일순 두 눈에 기광을 번뜩였다. '왔군!' 여천후는 정신을 추스리며 재빨리 잠들어 있는 자혜공주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 손을 내뻗었다. '분심이체비령술이면 타인의 환영(幻影)을 실체와 똑같이 만들 수 있지.' 휘류류류-! 보라! 어느 새 침상 위는 또 다른 자혜공주가 그대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분심이체비령술! 천하제일의 환인(幻人)이라는 가루라성존이 남긴 천고의 기환술이었다. 자신은 물론, 타인의 분영도 실체와 조금도 다름없이 만들어 내는 환술을 펼친 것이다. 여천후는 자혜공주를 안고는 신형을 그대로 암흑 속에 묻어 버렸다. 천환몽몽술(天幻夢夢術). 실체를 숨기고 자연에 동화되는 신비술이다. 지척에 있어도 타인이 알아보지 못한다. 여천후가 막 어둠 속으로 신형을 묻었을 때였다. 돌연, 세 명의 검은 복면인들이 인기척도 없이 미세한 파공음만을 내며 실내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빨리 해치우자!" "계집, 그냥 편안히 죽을 것이지. 그 의생 나부랭이 때문이다. 그 놈도 죽여 버려야지!" 으시시한 살광을 뿜어 내며 흑의복면인들은 침상 가로 다가갔다. "그냥 죽이기엔 아까운 계집이다. 쩝!" 그들의 눈가로 음탕한 색광이 번뜩였다. 굶주린 야수의 눈빛! 좌측의 기골이 장대한 복면인이 짙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손을 저었다. "본좌도 그러고 싶지만 할 수 없다. 빨리 이 계집을 처치하고 떠나야 한다." "대형, 어디 이만한 계집이 흔한 줄 아슈?" "그래도 목숨보다는 덜 아깝지! 자, 빨리!" 장대한 복면인의 독촉에 나머지 두 흑의인은 투덜거리며 품 속에서 자그마한 옥병을 꺼냈다. 청광이 감도는 푸르스름한 옥병이었다. "쩝! 그냥 녹여 버리기엔 좀……." 연신 아깝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가운데의 흑의인은 옥병의 마개를 뽑았다. 이어, 그 자는 재빨리 옥병을 기울였다. 푸스스슥……!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는가? 옥병에서 흘러나오는 푸른색의 액체가 자혜공주의 환영(幻影)에 닿자마자 꺼지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실체와 조금도 다름없는 눈속임이 아닌 천고의 기환술로 만들어진 환영마저 녹여 버리는 극악한 독액의 위력에 어둠 속의 여천후는 치를 떨었다.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 천하게 알다니!' 흑의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보고 있던 여천후의 눈가로 섬뜩한 살광이 뻗어 나왔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여천후는 움찔했다. "……!" 가슴에 안긴 여체에서 부르르 경련이 이는 것이 아닌가? 여천후는 눈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가련히 떨고 있는 흰 사슴과도 같은 여인. 자혜공주는 어느 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자신의 환영이 녹아 없어지는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면 아무리 지혜로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보았다. 자신을 안고 있으면서 자신의 환영이 녹아 드는 것을 보고 극도의 분노에 몸을 떠는 미남자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사건의 경위를 능히 추측해 낼 수 있는 지혜가 그녀에겐 있었으니까. "……!" "……!" 두 젊은 용봉(龍鳳)의 눈이 마주치며 불꽃이 일었다. 그것은 운명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기남아(奇男兒)와, 천년제일황녀(千年第一皇女)인 자혜공주 주자혜의 만남은……. 여천후는 짐짓 어깨를 추스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공주, 미안하지만 잠시만 참으시오. 저 놈들이 나가면 그 때 사죄를 할 테니까요." 장난스런 그의 전음에 자혜공주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가자. 자혜공주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우리의 일도 차질 없이 계속될 것이고." 장대한 흑의인이 득의의 괴소를 흘리며 신형을 날렸다.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장내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다. "괘씸한 놈들! 감히 내 아내를 독살시키려 해?" 여천후는 투덜거리며 다시금 암흑 속에서 걸어나왔다. '아내?' 여인은 섬세하다. 자혜공주가 여천후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여천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자혜공주의 강렬한 눈길에 여천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 "아무리 봐도 미남이지 않습니까? 나만한 신랑감은 어디 가서도 못 구한다고요. 험!" "킥!" 여천후의 억지 섞인 궤변에 자혜공주는 콧등을 찡그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삼 년간의 잠에 빠져 있던 자혜공주였으나, 그녀는 전혀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것은 여천후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삼 년(年)의 세월을 잃어 버린 여인의 심적 고통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해 주기 위한……. "후훗, 천후는 여복도 많아. 공주누님같이 이쁜 각시를 아내로 두게 됐으니 말이야. 남편이 아내를 안고 있는 것은 흉이 될 수 없지." 여천후가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자혜공주는 흠칫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내의 품이 아닌가? "저를 그만 내려 주세요." 자혜공주는 모기 울음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 때 여천후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혜공주를 바라보았다. "아차! 그 놈들이 도망갔지. 빨리 쫓아가야겠는걸." "……!" 그녀가 뭐라고 막 말을 할 찰나였다. "갔다 와서 야단맞을께요, 공주누님!" 모종의 웃음을 짓더니, 여천후는 돌연 그녀의 입술을 훔쳐 버렸다. "읍!" 자혜공주가 기겁을 하여 그를 떠밀어 버리려고 팔을 뻗었으나, 여천후의 신형은 어느 새 실내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럼, 놈들을 쫓아가겠습니다. 폐하께 가 보도록 하십시오." "……!" 자혜공주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친 그녀인지라 머리가 멍해져 버렸다. "내가 그의 아내?" 그녀의 옥용에 사르륵 홍운이 일었다. 강하게 뇌리를 스며드는 여천후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순식간에 도둑당한 입술을 교수로 쓰다듬었다. "왠지 밉지 않은 사람이야." 자혜공주는 멍하니 여천후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다가 문득 싸늘히 안색을 굳혔다. "감히 황궁 내에서 모반을 꾀해? 본 공주가 모르면 몰라도 안 이상 가만 두지 않으리라!" 싸늘한 한기(寒氣)가 풀풀 날린다. 그녀는 교구를 돌리며 걸어나갔다. "천병신기가의 위력을 보여 주리라. 개구장이 장군님도 그곳으로 간 듯하니." 싸늘한 여인의 교음에 월야(月夜)마저도 얼어붙었다. 물찬 제비가 성하(盛夏)의 강물에 흩뿌려진 금가루(金粉)를 스치고 날 듯, 자혜공주 주자혜는 날렵한 몸동작으로 장내를 떠났다. 설마, 그녀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으응? 이 놈들이 대체 무슨 심산으로 자꾸만 내성(內城)으로 들어가지?" 신형을 날리며 귀를 쫑긋하던 여천후의 얼굴로 언뜻 의혹이 떠올랐다. 살인자들이 바깥으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세 흑의인들은 오히려 자금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점차 자금성의 금역(禁域)으로……. 휘익-! 어둠 속에서 서 있던 무성한 잎이 달린 나뭇가지 위로 날아 내리는 백영이 있었다. 여천후는 숨을 죽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서야 나타난 세 흑의인은 조심스레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흑의인들 중 장대한 흑의인이 조심스레 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꽃들이 방향(芳香)을 내뿜는 사이로 몇 개의 정원석(庭園石)이 박혀 있었다. 흑의인은 그 중 가장 큰 일 장 크기의 검은 바위를 살짝 밀쳤다. 그그그긍-! 순간, 둔탁한 쇠음이 들리며 바위가 한쪽으로 밀려났다. 자금성의 내성에 이런 장치가 있을 줄이야? 세 흑의인은 일시에 드러난 암동(暗洞)으로 사라졌다. 그그긍-! 다시금 암석이 원래의 위치로 이동하는 찰나였다. 쉬익-! 섬전 같은 백선(白線)이 빨려들 듯 암동 속으로 사라졌다. 쿵-! 그와 동시에, 천 근 무게의 정원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과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암동은 장정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캄캄한 암흑이었지만 그 정도는 웬만한 무림 고수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황궁에 이런 비밀통로를 만들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떤 자들이지?' 흑의인을 따라 오십 장을 날아온 여천후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금성철벽 같은 자금성 내에서 황제의 딸인 공주를 거리낌없이 독살하는가 하면, 황궁의 지하에 이런 밀도를 건설하는 신비무리들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십여 장 밖에 한 줄기 빛무리가 새어 들어왔다. 막 암동의 끝에 다다른 여천후는 그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라! 흑의인들은 막 문을 열어젖히며 다른 석도(石道)로 들어가고 있었다. 무려 수백만 권에 달하는 책(冊)들이 질서정연하게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문득 여천후의 머리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황궁서고!' 황궁서고(皇宮書庫). 고래로부터 당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기진벽서와 무림에서 절전되었다고 알려진 절세비급들이 수장되어 있는 곳이다. 천하를 알고자 하는 문인들이나, 혹은 천하의 무공광들이 꿈에도 그리는 곳이 바로 황궁서고였다. 황제나 혹은, 황제의 친혈육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밀처이기도 했다. 여천후의 신형이 일순 안개와도 같이 흩어졌다. 스스스……! * * * * 온통 암흑 일색(暗黑一色)의 실내(室內)였다. 뭉클… 뭉클……! 죽음의 내음만이 사자(死者)의 세계인 양 칙칙하게 깔려 있었다. 검은 휘장에 검은 탁자, 그리고 검은 옷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걸친 흑의인이 보였다. 죽은 자의 귀린(鬼燐)과도 같은 푸르스름한 인광(燐光)이 섬뜩하도록 무심한 눈이었다. 마치 목내이(木乃伊:미이라)를 연상시키듯 비쩍 마른 체구의 흑포노인이었다. 그의 앞에는 세 흑의인이 도열해 있었다. 문득 날카로운 쇳소리가 섞인 낮은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결과는?" 세 흑의인 중 장대한 체구의 인영이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혔다. "예! 흔적도 없이 녹여 버렸습니다, 사제(死帝)!" 우렁찬 그의 말에 사제라 불리운 흑포노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쉬어라." "예, 그럼!" 세 흑의인은 공손히 허리를 조아리며 신형을 날렸다. '사제?' 어둠 속에 숨어 대화를 엿듣던 여천후의 눈가로 언뜻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 때 흑포노인이 깡마른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고 계집애가 죽었으니, 본 제국의 일을 아는 화근 덩어리는 없겠지?" 중얼거리던 그는 걸음을 옮기며 휘장을 젖혀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그림자 속에 한 인영이 숨어 따라오고 있음을……. '이것은 수십 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다.' 여천후는 점점 경악 속에 빠지고 말았다. 황궁서고의 지하에는 오백에 달하는 신비인들이 들끓었으며, 그들은 모두 사제(死帝)라 칭하는 흑포괴인의 명령을 받고 있는 듯했다. 지하광장의 규모는 단시일에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일천 평이 넘는 수많은 동굴과 기관장치는 가히 용담호혈(龍潭虎穴)이었다. "사제, 어서 오십시오." 시커먼 철문 앞에 서 있던 두 흑의장한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와 아울러, 한 치 두께의 철문이 거친 탁음을 발하며 위로 올라갔다. 쿠르르르-! 아수라지옥계의 입구인가? 휘류류류류류-! 시뻘건 혈기류가 소용돌이를 형성하며 휘몰아치는 동굴이었다. 흑포노인은 주저 없이 동부 안으로 들어섰다. 화르르르-! 열화지옥(烈火地獄)도 이보단 못하리라. 허공엔 가득 핏빛 혈무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바닥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혈(人血)! 발바닥에 질퍽거리는 피가 혈무(血霧)를 일으키며 끓어오른다. 동부의 크기는 백여 장에 달할 정도로 넓었다. 그런 동부의 중앙, 혈호(血湖)라고 불러도 좋을 핏빛 혈무가 휘감겨 있고 인혈로 채워진 핏물이 가득 고여 있는 연못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백팔 개에 달하는 핏빛 관(血棺)이 둥실 떠 있었다.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는 혈기류는 끊임없이 혈관의 주위를 맴돌며 혈관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참혹했다. 이것을 어찌 인세에 존재하는 현세(現世)라 하겠는가? 더구나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의 지하에서 이런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니……. "귀여운 것들! 본좌 유령사제(幽靈死帝)의 노력 덕분에 내일이면 본좌를 즐겁게 해 주겠지? 음정염시를 본좌가 직접 만들 수 있었다니…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군." 중얼거리는 깡마른 흑포노인, 청광이 감도는 그의 눈은 혈호의 가운데 떠 있는 혈관에 박혀 있었다. 지극히 음탕한 눈길로……. 도대체 혈관에 무엇이 있기에? 한데, 음정염시! 아무리 철석 같은 남자라도 홀려 버리고 만다. 그리고 급기야는 전신내공을 몽땅 빼앗기고 죽어 가는 그 가공할 염시가 아닌가? 더구나 유령사제! 무림의 원로들은 기억한다. 삼 갑자 전(前), 한 강시 같은 사인(死人)이 나타나 죽은 시신에 혼(魂)을 불어넣어 무림을 발칵 뒤엎어 놓은 사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달리 적수가 없었다. 죽은 자는 몽땅 그의 말을 따르니, 조상의 시체와 싸울 수야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령사제라는 이름만을 얻고 신비롭게 실종되었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음정염시라는 가공할 강시를 제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무림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저 자가 유령사제란 말인가?' 어둠의 혈무 속에 숨어 천환몽몽술로 몸을 감춘 여천후는 경악실색하고 말았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년제국의 짓거리였군. 음정염시를 만들다니… 그것도 황궁에서.'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황제가 있는 자금성에서 이런 강시가 제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리라. 여천후 자신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령사제는 득의로운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채 쇳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황궁서고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지. 더구나 노부의 무공증진에도 도움을 줄 절세비급들이 즐비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뿐인가? 멍청한 황제들이 내버려 두는 영약(靈藥)들이 부지기수인데다가……." 그의 눈가로 음탕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에서 진상되어 오는 계집들 중 고르고 골라서 음정염시를 제련하니… 크하하핫!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웃었다.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자금성은 천하권력의 중심지였다. 황궁서고는 그런 자금성 내에서도 최대의 금지(禁地)인 곳이다.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천하의 기진벽서와 새외이역에서 진상되어 오는 영물, 영약들이 즐비했다. 한데, 그런 이곳에서 천하를 뒤엎을 대사가 착착 지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다가 황제의 후궁으로 바쳐진 여인들을 골라서 염시를 만든다고 했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태연히 해내고 있는 인물이 유령사제였다. 그는 천천히 혈호로 다가갔다. "유령혈황사령술(幽靈血荒死靈術)을 펼치고 본좌의 피를 뿌린다면 저 귀여운 것들은 노부의 말에 사족을 못 쓰지. 크흐흐!" '그래, 맘 놓고 웃어라. 곧 죽을 놈이니까!' 여천후는 살심을 굳혔다. "어서 깨어나라! 본좌가 죽어서나마 너희들을 기쁘게 해 줄 테니까." 유령사제의 욕망(慾望)에 들뜬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어지간히 더러운 놈이군. 시간(屍姦)까지 하겠다구?" 느닷없이 들려 오는 싸늘한 음성이 있었다. "허헉-!" 유령사제는 절로 헛바람을 삼키며 팽이처럼 신형을 회전시켰다. "너, 너는?" 그는 아예 어이가 없었다. '저 조그만 꼬마놈이 본좌의 일 장 이내에 들어오도록 몰랐다니?' 이백오십 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유령사제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