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29편 (29/45)
머저리 같은 놈들! 본제국이 아무리 강해도 육합수호천황가와 사상천비계를 함께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강시를 재련한 것이고, 명황실(明皇室)을 먼저 손에 넣어 무림과 황실을 격돌케 하라는 계책도 자혜공주라는 계집에게 들켜… 그것도 본좌가 간신히 무마시켰기에 망정이니." 천년지존의 두 안(眼)에서 으스스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흑영들은 아예 코를 땅바닥에 박고 있었다. "천뇌마종(天腦魔宗), 나서라!" 천년지존의 일갈에 맨 앞의 흑영이 무릎 걸음으로 주춤주춤 앞으로 나섰다. "존명!" 왜소한 체구에 머리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위인이었다. "본좌가 외유중일 때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하거늘, 와 보면 항시 불만스럽다!" 천년지존의 싸늘한 말에 천뇌마종이라 불린 대두노괴는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존이시여, 이미 변황은 본제국의 손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초원의 모란왕부와 북해의 빙하천맹(氷河天盟)이 본천에 굴복했으며, 서장의 홍황전륜사와도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다만……." "다만?" "파사국에서의 혈십자교를 흡수하는 것과 천년화강시의 건은 흑룡왕(黑龍王)께서 너무 성급하시어 그만……." "흑룡왕 때문이라 이 말이지……?" "……!" 천뇌마종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천년지존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츠츠츳-! 엄청난 패도력(覇道力)이 밀물처럼 퍼져 오며 장내를 뒤덮었다. "좋다! 지금까지의 실패는 눈감아 주겠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천뇌마종은 또다시 바짝 긴장했다. "이후, 한 번만이라도 더 실패한다면 그 때는 그대를……." 사람의 마음을 점점 위축되게 만들고 있었다. 지상매괴지계(指桑罵傀之計)!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슬며시 경고를 가한다면? 그 다음에 바짝 공포심을 심어 주면 아래 사람은 완전히 굴복하게 된다. 극도로 교묘한 심리술이었다. "죽이겠다." 웃으며 조용히 말을 끝맺는다. "존명! 목숨을 다하여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아예 이마가 깨어져 피가 튀도록 바닥에 오체투지하는 천뇌마종이었다. "후후!" 흡족한 듯 미소를 터뜨리며 천년지존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명을 내리겠다. 황금장원과 황금서생이란 인물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라. 그 때문에 본제국의 유지가 어려울 정도이니까." "존명!" "그리고 황제의 거동이 심상치 않다. 예의 주시하도록!"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지존!" "명심하라! 본제국의 염원은 중원을 발밑에 깔고 나아가 위대하신 철목진 대칸(大汗)께서 이루신 변황과 서역을 포용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육합수호천황가를 갈가리 찢어 죽이고, 사상천비계를 굴복시켜 초유의 천년군림제국(千年君臨帝國)을 건설하는 것이다. 크하하핫!" 우우우우웅……! 쿠쿠쿠-! 저 가공할 아수라의 광소를 끝으로 천년지존의 모습은 사라졌다. 천년제국. 변황인들에게 죽음의 하늘로 군림하는 마세! 그들의 말이면 곧 법(法)이었다. 그 몽고대제국의 후예들이 다시금 제국의 야망에 불타 있는 것이다.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대혈세의 전란 속에 사상초유의 무림왕국을 꿈꾸는 효웅(梟雄)이 웅크린 곳은 천년제국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 * * * "부마, 어서 오게!" 영락제는 백의인형을 반갑게 맞았다. 자금성, 북경 최고의 중심지이자 만인 위에 군림하는 황제의 거소로 찾아든 백의미청년이 있었다. 이미 연락을 받은 듯, 금의위(錦衣衛)들은 그를 천룡대전(天龍大殿)으로 안내했다. 그를 황제에게 인도한 궁녀(宮女)는 까무라칠 듯이 놀랐다. 영락제! 평소에 근엄하고 별로 말이 없던 그였다. 한데, 찾아온 미청년을 보는 순간 반색을 하며 맞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부마라니? "장인어른께서는 밤새 무고하셨습니까?" 황제와 허물 없이 부마와 장인으로 통하고 있었다. "밤새 별고는… 자, 들어오게." 영락제는 여천후의 손을 이끌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설아(雪兒)야, 이리 와… 이리……." 소녀였다. 십사오 세쯤 됐을까? 만화(萬花)가 개화(開花)해 현란한 화향(花香)에 싸여 있는 화원(花園)이었다. 그 사이에 한 마리의 새끼 백록(白鹿)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궁장미소녀는 살금살금 새끼 백록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백록의 목을 껴안은 순간, 놀란 새끼 백록은 재빨리 궁장소녀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씨! 너, 자꾸 도망갈래?" 궁장미소녀는 아미를 치켜세우며 앙증맞은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세속의 번뇌를 일순간에 씻어 주리만큼 천진무구한 옥용을 소유한 미소녀였다. 해맑은 피부에 인형처럼 깜직한 용모, 피부는 뼛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흑진주 같은 두 눈망울은 추수같이 깨끗하고, 입술은 주사를 바른 듯 붉었다. 그러나 비록 나이는 어렸어도 일신엔 감히 범접키 어려운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난초(蘭草)의 청순함과 수선화(水仙花)의 담백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소녀였다. 그녀는 몰랐다. 자신을 흐뭇한, 정감 어린 미소로 주시하고 있는 두 쌍의 눈이 있음을……. "저 말괄량이가 바로 미려(美麗)일세." 영락제가 따스한 눈빛을 뾰로통해 있는 소녀의 귀여운 자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그렇군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천진함과 아울러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으니, 자랑할 만하시군요." 백설공주 주미려! 당년 십오 세로, 황궁의 고관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지독한 말괄량이 공주였다. 나이 오십이 다 된 영락제에겐 마지막으로 얻은 공주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는 황제의 침실로 마구 들어와 영락제와 황후 사이에서 잠을 잤던 유일한 공주이기도 했다. 황제마저도 그녀라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실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소녀였다. 그녀는 새끼 백록을 쫓아오다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곧 영락제를 발견한 백설공주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아바마마!" "허! 다 큰 계집애가 아직도 이러니……." 영락제는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부마, 이 애가 바로 미려일세. 지독한 말괄량이… 윽!" 대소를 터뜨리며 말하던 영락제의 안색이 일순 시커멓게 변했다. 백설공주가 지그시 그의 허리를 꼬집은 탓이리라. "흥! 아바마마, 뭐라고요? 부마?" 뾰로통하여 샐쭉이던 백설공주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여천후는 미미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포권했다. "나는 여천후라 하오, 공주." 순간. "아! 아바마마가 어제 소녀의 배필을 구하셨다고 하시더니 당신이었군요." 백설공주는 깜찍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천후의 주위를 뺑뺑 돌며 그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어 갔다. "흠! 얼굴은 그만하면 됐고 키도 훤칠하니, 그 정도면 봐줄 만하고……." 여천후와 영락제는 어이가 없었다. 특히 여천후의 표정은 떫은 감을 입 안에 가득 베어 문 듯,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그만하면 봐줄 만하다?' 그가 이렇게 기가 막혀 있는 중에도……. "한 가지 흠이 있단 말이야. 너무 잘 생겼어. 꼭 기생 오라비 같애." '윽! 기생오라비?' "당신, 바람둥이죠?" 여천후가 끙끙대든 말든 백설공주는 그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며 묻는다. "바람둥이?" 여천후는 아예 넋을 잃었다. 그런데……. "좋아요. 아바마마가 보증을 섰으니, 당신한테 시집가기로 하겠어요." 아주 큰 선심을 쓴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천후는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소생을 어여삐 보아 주시다니 금생의 영광이로소이다, 공주." 그의 아부에 백설공주는 콧등을 찡그렸다. "남자가 그렇게 아부를 하면 못 써요. 하긴 내가 좀 아깝긴 하지만……." '아부? 아까워?' 여천후의 주가가 폭락되는 순간이었다. 영락제는 두 사람의 행동에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 때, 백설공주는 시신을 휙 돌리며 영락제를 쳐다보았다. '이크! 저 말괄량이가…….' 그가 내심 공포에 질릴 때였다. "흥! 아바마마는 무엇이 좋아서 그렇게 웃죠? 바람둥이에 기생 오라비 같은 남편감을 골라 주곤. 만일……." '만일?' "저 사람이 나를 구박하면 아바마마는 평생 시달릴 줄 알아요!" 빗대어 말하는 협박! 영락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부마는 틀림없이 너를 귀여워해 줄 거다. 그렇지 않은가, 부마?" 화제(話題)가 여천후에게 돌려진다. "예, 그렇… 습니다." 여천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아주 죽이 척척 맞는구만. 내가 장가를 가는 것인지, 상전을 모시게 되는 건지 모르겠군.'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어쩌랴? 황제가 묻는데, 단호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한데, 그런 중에도 여천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백설공주 주미려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조금도 거스름이 없이 자연스럽기만 했다. 또한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지고, 절로 웃음을 머금게 만들었다. "흥!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짓지 말아요. 괜히 마음이 이상해지잖아요." 여천후의 얼굴 표정을 가지고도 득달하는 백설공주 주미려였다. 그녀는 주위를 뱅뱅 도는 새하얀 아기 설록(雪鹿)이 보이자, 곧 쌍심지를 돋우며 신형을 퉁겼다. "설아, 이리와. 바람둥이! 이따가 봐요." 그녀는 손을 흔들고는 백록의 뒤를 쫓았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순진한 내음이 꽃향기를 타고 화원으로 퍼져 갔다. "허……!" 영락제는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이, 저리 버릇이 없어서야." "천만에요. 오히려 공주의 순수함이 마음에 듭니다. 구김살 없고 활달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만드니까요." 여천후는 멀어져 가는 백설공주의 귀여운 자태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말괄량이가 마음에 든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영락제의 얼굴에도 한 줄기 정감의 빛이 어려 있었다. "가세." 이윽고 영락제는 여천후를 재촉하며 화원을 지나갔다. * * * * 여인(女人), 고귀하고 성결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비단 금침에 싸여 잠들어 있는 미녀. 옥용은 만년설이 뒤덮인 듯 차갑게 굳어 있으나, 살포시 내리감은 눈과 아울러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삼 장 이내로는 뼈가 시릴 듯한 한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미녀였다. 문득, 그녀의 좌우를 차단하고 있던 주렴이 양 옆으로 갈라지며 두 인영이 들어섰다. 촤르르르……! 침중한 안색의 영락제와 여천후였다. 영락제는 안스러운 눈빛으로 침상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 애가 자혜일세." 암울한 분위기가 장내를 무겁게 침잠시킨다. "삼 년 전, 그렇게도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이가 황궁서고(皇宮書庫)에서 이 지경이 되어 발견되었네. 그렇게도 몸을 생각하라 일렀건만 책을 무던히도 좋아하더니……." 영락제는 무척이나 그녀를 총애한 듯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자혜공주 주자혜! 황궁제일미인이자 가장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십이 세로, 어려서부터 영락제를 유난히 따랐었다. 여천후는 운명의 끈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마치 숙명적인 그 어떤 것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음을……. 여인보다 아름답고 준수미려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 여천후의 눈가에는 은은한 장난기와 아울러 고집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여천후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도도한 듯하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성스럽기조차 하는가 하면, 이율배반적으로 나의 가슴을 끓게 만드는 폭발적인 염기(艶氣)가 어려 있다. 저 얼음의 장막을 거둔다면?' 완미(完美)랄까? 그도 아니면 백치미(白痴美)와도 상통했다. 긴 속눈썹이 고요히 닫혀 있는 자혜공주의 자태는 이 순간 눈부신 햇살같이 여천후의 두 눈을 파고들었다. 이제껏 수많은 여인을 봐 왔으나, 진정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여천후는 서서히 자혜공주에게로 다가갔다. "……!" 영락제는 여천후의 행동에 의아해 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을 벗어났다. '빙극천음지신이라… 그렇다면…….' 여천후는 품에서 하나의 옥갑을 꺼내 들었다. 딸깍-! 옥갑이 열리자, 수백 개의 금침(金針)이 드러났다. 짐승의 털보다 더욱 가늘고 짧은 금침들이었다. '천신화강을 일으켜 빙극천음지신을 파괴하고 대라성령침(大羅聖靈針)으로 굳어진 세혈(細穴)을 뚫고 독기를 태워 버려야겠구나.' 순간, 여천후의 전신에서 가공할 화염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천신화강! 지상최고의 극양절공이 시전된 것이다. 빙막(氷幕)과 화기(火氣)의 격돌. 화르르르……! 극(極)과 극의 부딪침은 현란한 불똥을 발산시켰다. 푸시시……! 점차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빙막은 차츰 엷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빙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현란한 금광(金光)이 유성처럼 자혜공주의 옷을 꿰뚫고 사라졌다. '이 때다! 대라만상회혼금침술(大羅萬象廻魂金針術)!' 이어, 여천후의 일갈과 아울러 휘황한 오색의 서기(瑞氣)가 실내를 뒤덮기 시작했다. "오행불사연!" 천수약종과 살황대독후가 만들어 낸 신비의 오행정기! 끊임없이 운행하며 상생(相生), 상극(相剋)이 조화를 이루어 한 줌의 숨결만 있어도 살아남는 오행불사연이 펼쳐졌던 것이다. 천신화강에 의해 깨어진 빙막 사이로 자혜공주의 전신에 세혈을 뚫고 들어가 막힌 경맥을 파괴하며 흘러드는 대라성령침. 그 뒤로 오행불사연이 밀물처럼 파고들어 그녀의 전신세맥(細脈)을 세혈(洗血)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오행불사연은 실내의 공기를 용권풍처럼 휘말고, 자혜공주의 전신은 파도를 만난 조각패처럼 일렁인다.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까? "후우-!" 여천후의 신형에 서린 오색기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절세 내공을 지닌 여천후라 해도 쉬운 일은 아닌 듯, 그의 얼굴에도 구슬 같은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닦을 여유조차 없었다. "천수회인공(千手廻引功)!" 여천후는 일성대갈과 아울러 좌수를 뻗었다. 순간 수백, 수천 개의 금광이 자혜공주의 신형으로부터 빠져 나온 여천후의 손 안으로 흡입되었다. 츠츠츠츠츄……! 천수회인공! 천수약종의 독문대법으로, 각기 다른 흡인력으로 물체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치지지직-! 돌연, 누워 있는 자혜공주의 자의를 비롯하여 이불과 침상마저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독혈(毒血)! 극빙독천사의 가공할 독액이 시커먼 피와 아울러 자혜공주의 전신모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천후는 황급히 가부좌를 틀었다. '천독무라면 저것을 능히 나의 체내로 넣으리라.' 내심 중얼거리며 여천후는 쌍장을 뻗었다. 휘류류-! 그러자, 여천후의 전신에 짙은 녹광이 일렁이며 방원 십 장을 뒤덮었다. 치지치직- 화르르르-! 가공할 독무(毒霧)의 와선류(渦旋流)를 따라 극빙독천사의 독액이 여천후의 모공으로 스며들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천후의 전신에 어린 녹광은 점점 짙어져 가더니, 급기야 푸른 청광으로 돌변했다. 천독무! 고금최강의 독공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녹령파천무(綠靈破天霧)와 청살만독공(靑殺萬毒功), 무영쇄심류(無影碎心流)라 하거니와……. 오행동부에서 여천후는 녹령파천무까지밖엔 연성을 못했었다. 한데, 극빙독천사란 희대의 독액에 의해 그의 독공은 한 단계 위로 올라섰다. 살황대독후와 같은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무영쇄심류! 아직 무림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무런 내음도 색깔도 없이 공기를 타고 시술자가 원하는 대로 살상할 수 있는 파천독공이 그것이었다. 독의 대조종이라 일컬어지는 살황대독후도 이런 경지까진 이르지 못했었다. 시퍼런 칼날같이 일렁이던 청광은 여천후의 전신 모공을 타고 빨려 들어갔다. "휴!" 이윽고 여천후는 땀방울을 씻어 내리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이다! 으응……?" 기쁜 듯이 환호를 지르던 여천후의 눈길이 일순 기광을 발했다. 그는 못 볼 것을 본 것이다. 자혜공주 주자혜. 독혈에 옷과 이불 등이 녹아 버려 완전한 나신으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십전지미(十全之美)의 팔등신(八等身)이 거기 있었다. 고르게 기복이 올라오는 가슴. 푸른빛은 사라지고 대신 희디흰 우유빛 윤기가 감도는 탐스럽기 그지없는 유방이었다. 인간의 원초적 모정을 느끼게 하는 아늑함이 물씬 배어 있다. 뿐인가? 앙증맞은 배꼽의 주위는 군살 없이 늘씬하게 빠져 있고, 그 밑으로는 급격히 풍만해지는 둔부의 유려한 곡선이 아름다웠다. 그 사이로 부드러운 잔디밭이 깔려 있는 신비림은 또 어떤가?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폭발적인 염기와 아울러 감히 범접 못할 성스러움이 배어 있는 여체(女體).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넋을 잃고 자혜공주의 나신을 감상하고 있던 여천후는 문득 정신을 추스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잠들어 있는 자혜공주의 나신에 덮어 주고는 신형을 돌렸다. 그의 얼굴엔 풋풋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훗! 천후는 운이 좋은걸. 저런 미녀를 거저 얻었으니 말이야." "그… 그래, 어떻게 됐나?" 영락제는 문을 열고 피곤한 신색으로 나오는 여천후를 보자, 반색을 하며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는 제가 매일 안아 줘도 끄떡없을 테니까요." 여천후의 자신에 찬 말에 영락제는 대소를 터뜨리며 여천후의 손을 마주잡았다. "정말 고맙네. 이제야 황실에 웃음이 나오겠네. 으하하핫!이렇게 기쁜 날 어찌 취하지 않을 소냐! 자자, 가서 한바탕 취해 보세나. 오늘처럼 기쁜 날은 내 생전에 처음일세. 하하하!" "주책이십니다. 아, 이제 얼마나 사셨다고 생전 운운하십니까?" 여천후의 가벼운 핀잔에 영락제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기쁜 건 기쁜 거지. 자자, 가세!" "알겠습니다." 여천후는 영락제의 닥달에 쫓기듯 끌려갔다. 제16장 죽음의 관문(關門) "끄윽! 어, 취한다." 어두운 복도를 몹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취객(醉客)이 있었다. 술에 만취가 되어 두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사람은 다름아닌 여천후였다. 자금성이 떠나갈 듯한 대연회가 열린 것은 사시(巳時) 무렵부터였다. 황제를 비롯한 고관대작이 참석했고, 자혜공주 주자혜가 완쾌되었다는 사실이 공포되자 자금성은 완전히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황실어의(皇室禦醫)는 물론, 천하의 명의(名醫)들도 고치지 못한 자혜공주의 병을 고친 사람이 이십도 채 안 된 미청년이란 것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렇지만 정작 큰 놀라움은 그 다음이었다. 자금쌍벽려! 황제가 목숨처럼 아끼던 두 공주를 그 홍안의 미청년에게 모두 시집보내겠다고 선포하자, 사람들은 아예 넋을 잃었다. 특히 젊은 무장(武將)들과 문인(文人)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어쩌랴? 만인지상인 황제가 말하는데야……. 황실 사상 초유로 두 명의 공주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한 여천후에게 술잔이 쇄도하였음은 물론이었거니와, 그가 백학청송림의 육 관문을 돌파한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수많은 문인(文人)들이 몰려들었다. 문관들 중 당상관에 올라 있는 고관의 중추는 백학청송림을 나온 석학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시에 시작된 연회는 자시(子時)가 되어서야 끝났다. "끄윽, 너희들은 그만 가서 자거라!" 여천후는 좌우의 궁녀를 물리고 방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아무렇게나 침상 위로 몸을 던졌다. "어, 취한다. 끄윽!" 털썩-! "아얏!" 그런데 웬 뾰족한 교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으응? 누구……?" 여천후는 질겁을 하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누르면 어떻게 해요? 아파 죽겠잖아요!" 이불을 헤치고 나오는 귀여운 머리 하나가 있었다. 흑진주 같은 눈망울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백설공주가 어떻게?" 아미를 찡그리며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자금쌍려 중 백설공주 주미려였다. 그녀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여천후를 쏘아보았다. "흥! 파렴치한 색한 같으니!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일부러 그런 거죠? 내일 아바마마한테 다 이를 거야. 미려를 때렸다고." '때려? 색한?' 여천후는 쉴새없이 터져 나오는 백설공주의 말에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론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는 황급히 정신을 추스렸다. '내가 때렸다고 황제께 거짓말을 고한다면?' 끔찍해진다. 여천후는 최대한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공주, 정말 미안하구료. 내 사과하겠으니, 제발 폐하께는……." "킥!" 그가 한참 신중하게 달래는데, 난데없이 그의 귓가를 울리는 교성에 여천후는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백설공주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 교수로 입을 가리며 웃음짓고 있었던 것이다. "아바마마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죠? 좋아요!" 백설공주는 웃으며 교구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여천후는 경악실색하고 말았다. "윽! 이, 이런!" 탐스럽게 출렁이는 뽀얀 젖가슴을 본 순간, 그는 입이 막히고 말았다. 백설공주는 완전한 알몸이었던 것이다. 여천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