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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27편 (27/45)

2026-09-24 08:59:34 조회 15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끼면서도 주체는 용맹을 떨치며 원제국을 무너뜨렸다. 그 대가는 북평(北平)을 근거지로 한 연왕(燕王)으로의 봉왕(封王)이었다. 홍무제는 수당시대(隋唐時代)의 황실권(皇室權)이 가벼워져, 유사시 황제가 고립(孤立)되는 것을 우려하여 아들과 종친(宗親)들을 대거 봉지(封地)를 주고 번왕(藩王)으로 임명하여 새외변방(塞外邊方)을 방어토록 했다. 유사시 황권이 위협받을 시에는 번왕이 중원의 황실을 지켜 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황태자였던 주표가 병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자, 그 아들인 주윤문(朱允汶)을 황태손(皇太孫)으로 삼았다. 태조 홍무제의 사후(死後), 십육 세(歲)에 불과한 주윤문이 보위에 오르니 이대황제(二代皇帝)인 혜제(惠帝)였다. 혜제는 인유(仁柔)하고 착하였지만 영단(英斷)이 부족했다. 즉위 후, 혜제는 동궁(東宮) 때부터 자신을 받들어 온 제태(齊泰)와 황자등(黃子燈)을 측근으로 두고 대유학자(大儒學者)인 방효유(方孝孺)를 중임하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으나, 혜제를 받드는 중신(重臣)들이 창업(創業)부터 전선(戰線)을 누빈 황제의 숙부(叔父)들을 잠재적인 적대세력(敵對勢力)으로 간주한 것이 심각한 문제로 비화(飛火)될 줄은 그들도 깨닫지 못했다. 삭번(削藩)의 의론(議論).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번왕(藩王)의 봉지(封地)를 대폭적으로 축소시키고, 번왕의 권한마저 폐지시켜야만 황권(皇權)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탁상공론(卓上空論)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가를 망각한, 그야말로 기름 앞에서 불장난을 하는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고 있음이니……. 준마(駿馬)를 타고 활(弓)과 창(槍)이 나부끼는 전장을 누비며 황야(荒野)를 질타하던 황숙(皇叔)들과 유약한 황제와 책상 앞에 앉아 논리(論理)만을 설파하던 학자들이 어찌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다른 번왕(藩王)이 속속 무너짐을 보고 있던 연왕 주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건문원년(建文元年) 칠월에 제태와 황자등과 같은 난신(亂臣)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병(兵)을 일으켰다. 정난(靖難)의 변(變). 그로부터 삼 년간의 전화(戰禍)가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오가며 일어났다. 건문 삼 년(建文三年)에 이르러 연왕군(燕王軍)의 공격에 궁궐(宮闕)이 불타 오르고 혜제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앉아서 당하기보다는 쳐서 빼앗는 철혈기(鐵血氣)를 지닌 황제는 전란의 와중에 강성해진 북원의 잔당들을 다섯 차례에 걸쳐 깨끗히 소탕해 버리기도 했다. 대명제국의 역사 속에서 드물게 보는 현군(賢君)으로 칭송받는 영락제이긴 했지만, 그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은 그토록이나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난의 변을 일으킬 당시, 사실상 그에게 승산이 있다고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개 번왕과 대명제국 전체와의 싸움은 누가 보더라도 바위에 부딪쳐 가는 계란(鷄卵)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달랐다. 만상천유(萬象天儒) 헌원문! 백학청송림의 주인으로서, 홍무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천하유림의 지존. 그는 연왕이었던 주체를 도와 주었다. 정난의 변이 성공한 가장 큰 공로는 사실상 만상천유 헌원문에게 있었다. "후후, 황제의 권력이 무슨 소용이랴? 황실의 반도들도 척멸치 못하고 공주(公主)의 생사(生死)도 어쩌지 못하거늘." 영락제는 씁쓸하게 고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이끌어 준 황사 만상천유 헌원문이 있었다. 그의 노안에는 안스러움이 역력했다. '아오, 노사의 충정을…….' 영락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한데, 초유로 천문육대관문을 한 나절 만에 통과한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짐이 좀 볼 수 있겠소?" 그의 말에 헌원문은 빙긋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냈으니, 곧 당도할 것입니다." "그래, 어떤 사람이기에 노사께서도 풀지 못한 난관을 넘었소?" 헌원문의 노안으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단 일 주야 만에 천문육관을 모두 돌파하다니, 노신은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렇듯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밖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공자를 모셔 왔습니다." 이어, 방문과 함께 주렴이 걷혀지며 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십구 세 정도의 백의미공자는 바로 세인들이 고금제일대문성이란 칭호를 붙여 준 황금서생 여천후였다. "……!" "……!" 두 사람… 대륙의 지배자인 영락제와 황금의 제왕(帝王)이요, 후세에 고금제일무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불꽃 같은 안광(眼光)이 뜨겁게 어우러든다. 길을 달리하여 만난 최고인들. 두 영웅의 가슴으로부터 알 수 없는 열류가 뜨겁게 치솟아 오른다. 인간(人間)에겐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운명을 그저 앉아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달랐다. 영락제와 여천후! 그들은 자신을 비껴 가는 운명의 여신(女神)을 강제로 붙잡아 자신의 길을 밝히도록 하는 운명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물론, 운명의 여신을 붙잡는 부분은 달랐다. 영락제는 도망가는 운명의 여신의 목덜미를 완강한 손으로 낚아채 우악스럽게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여천후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운명의 여신을 가로막고는 유혹의 손길로 탐스런 젖가슴을 부여잡아 이끌었다. 운명! 새로운 시작이었다. * * * * 천문제일관(天文第一關). 가장 기초적인 관문이었다. 하지만 도대체가 말도 안 되었다. 만 권(卷)에 달하는 고서(古書). 그 하나하나의 오의(奧意)를 깨달으려면 범인(凡人)은 십 년(年)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껍데기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한 내용을 담은 기서(奇書)들이었다. 한데, 그런 것을 한 권도 아닌 일만 권이나 한 달 만에 탐독하고 시험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천후는 오직 한 권만을 보았을 뿐이다. 제일관의 일만 권 고서 목록(目錄)을 보고는 그대로 나와 버렸다. 시험? 물론, 시험관에서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천문제이관(天文第二關). 만보관(萬寶關)이라고 불리웠다. 수많은 인세에 보기 드문 보물(寶物)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곳에 들기 전, 한 가지 보물을 선택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선비는 모름지기 이재(理財)에 밝으면 안 되는 법이라는 것을 깨우쳐야만 했다. 만일, 허락했다 해도 한 가지라도 손대면 그것으로 탈락이었다. 물론, 여천후는 예외였다. 그가 자란 황금누란국에서 보아 온 보물과, 그가 벌어 놓은 것만으로도 만보관에 있는 최고의 보물은 그의 눈에 들지 못했다. 가질 것이 없어서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문제삼관(天文第三關). 색관(色關)이었다. 끝없는 욕정이 치솟아 오르는 인간 본연의 욕구를 갈망시키게 한다. 무릇, 선비라면 색에 현혹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그곳엔 폭혈음혼초(爆血淫魂草)라는 최음향이 피워져 있었고, 환락미염몽진(歡樂美艶夢陣)이라는 쾌락의 환상진세가 펼쳐져 있었다. 환상의 미인을 쫓다가 몽정(夢精)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삼 각 이내에 무념무아무심(無念無我無心)의 상태로 빠져 나온다면 합격이었다. 천문제사관(天文第四關). 제자백가총론관(諸子百家叢論關)이라 부른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걸쳐 나타났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있다. 유가(儒家)를 비롯하여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묵가(墨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법가(法家)…….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일가(一家)를 이룬 제자백가였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와 학문이 제각기 틀릴진데, 천문제사관은 그것을 하나로 합일(合一)시켜 자신의 사상(思想)을 구술해야만 한다. 천문제오관(天文第五關). 가공무비할 인관(忍關)이었다.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무한한 심적고통을 주어 극기해야만 하는 정신수련의 관문. 천문제육관(天文第六關). 육합지존실이라 명명된 불과 두 평 크기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의 사방(四方)과 천지(天地)에는 각각 하나씩의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었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으로는 주작(朱雀), 현무(玄武), 백호(白虎), 청룡(靑龍)이 어우러진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월야낙성도(月夜落星圖)가 있으며, 바닥은 아수라지옥(阿修羅地獄)의 처참한 유황불꽃이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 생생하다. 여천후, 그는 이곳에서 최초로 천외천(天外天)의 의미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는 느꼈다. 벽면의 그림들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아니나다를까? 돈다(旋). 우주가 회전하고 청룡이 노호한다. 주작이 달려들고, 백호가 태산을 부순다. 수천, 수만 개의 유성군(流星群)이 일시에 쏟아지며 달려들었다. 아수라계의 귀곡성이 심혼(心魂)을 얼어붙게 만든다. 천지가 개벽(開闢)하는가? 지옥의 악마가 유계(幽界)를 버렸는가? 그 속에서 여천후는 점점 작아졌다. 대자연(大自然) 속에서 인간은 무능해지고, 전신은 날카로운 백호의 발톱에 갈가리 찢겨졌다. - 여천후! 네가 뭐냐? 너는 우주의 티끌(塵)에 불과하다! 여천후는 미칠 지경에 달했다. 천문제육관은 바로 심관(心關)이었다. 인간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마음의 관문! 그러나 그 속에 또 다른 하늘의 신비가 있음은 아무도 몰랐으니……. 집채만한 낙뢰가 여천후의 머리를 강타했다. 번쩍-! 순간, 뇌리를 스치는 영감(靈感)이 있었다. '그래, 인간이 어찌 대자연과 비길 수 있으랴? 나는 깃털조각에 불과하거늘… 순응하리라…….' 여천후는 보았다. 지옥의 겁화와 떨어지는 유성군 속에서 전설의 사대영물이 어우러지고 있음을. 그것은 대자연의 위대한 힘이었고, 태산이 압도되는 파천황(破天荒)의 대호연무(大浩然舞)였다. 대호연천황무(大浩然天皇舞)! 보보마다 제황의 장중함이 깃들고, 한 번의 눈길에 만인이 고개를 숙인다. 분노하면 대호연신광(大浩然神光)이 뻗어 만 근 거석을 박살내 버린다. 겉으로는 범인(凡人)과 아무런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어느 누구도 여천후의 눈을 마주볼 자, 천하에 없으리라. 단지, 기세만으로 천하가 굴복하리라. 여천후, 그는 대자연을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분노하면 곧 대폭풍이 천하를 광란으로 몰아넣고, 그의 한 번 눈길에 만상(萬象)이 앙복할 것이다. * * * * "……!" 영락제의 얼굴로 점점 경탄지색이 감돌았다. '본좌조차 주눅이 들게 하는 기도를 가진 인물이 있을 줄이야.' 철혈황제(鐵血皇帝) 영락제! 어느 누가 그 앞에서 고개라도 들 수 있으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난생 처음으로 위축감을 느꼈다. 여천후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대자연기도(大自然氣道)인 대호연천황무! 그가 펼치지 않더라도 이미 상대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게 된다. 만상천유 헌원문! 그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영락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형이 미미하게 떨리고 주체할 수 없는 격동에 파묻혀 있었다. 헌원문은 뚫어질 듯 여천후의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目)! 여천후의 눈은 전과는 달랐다. 그의 눈에 떠 있는 동공은 예전과 같이 황금의 눈이었다. 하지만 무저의 심유함과 아울러 황금의 동공을 자세히 보면 칠채무지개가 어려 있는 것이 아닌가? 기이한 일이었다. '믿지 않았거늘… 만상지존도화(萬象至尊圖畵)의 신비를 풀었다니.' 헌원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격동을 가라앉혔다. 이어, 헌원문은 온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여천후를 청한다. "헛허, 어서 오시게." 감탄하기는 여천후도 마찬가지였다. '예상은 했지만 범상한 인물들은 아니로군.' 그는 내심을 감추며 허리를 굽혔다. "삼가 미거한 백성이 폐하를 뵈옵니다." 순간, 영락제와 헌원문은 흠칫 하고 말았다. "……!" "……." "아니, 자네가 어찌 날 알아보는가? 이곳에 온 것은 비밀이었거늘." 영락제가 놀라자, 여천후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찌 천하의 제왕이신 폐하를 몰라보겠습니까?" "쩝!" 영락제는 입맛을 다셨다. '딴은 그렇지.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짐을 알아보았다고 해서…….' 한데, 여천후는 단지 목례만을 하곤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여천후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그는 중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황금누란국은 황금 위에 군림하는 대상신(大商神)의 위치에 있는 고로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또한, 여천후는 파사국의 부마이기도 하지 않은가? 만상천유 헌원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탄한다. '과연! 본가의 지존가주(至尊家主)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로다.' 그것은 영락제도 마찬가지였다. '천룡이로구만. 자혜(紫慧)의 배필로 손색이 없으련만…….' 여천후의 비범한 신태에 경탄하던 영락제는 문득 대소를 터뜨리며 헌원문에게 말했다. "하하핫! 노사, 이제까진 오 관을 통과한 사람에게 승상의 지위를 주었는데… 육 관을 돌파한 사람이 있으니, 어떤 관직을 주어야 하겠소?" "……!" 헌원문은 일순 난처한 빛을 띠었다. 천문육관문이 하도 어려워 각 관문의 통과자들은 요직에 등용되었다. 천문오관을 통과시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승상의 지위가 주어졌다. 도저히 천문육관은 통과하기가 불가능하기에 그런 것이었다. 헌원문 자신도 심마(心魔)에 빠져 피를 토하곤 물러나왔던 천문제육관이 아니던가? 관직에 승상보다 높은 자리는 없었다. 오직 황제뿐이었다. 그러니 헌원문이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그 때, 여천후는 좌중의 곤혹감을 일소시켜 버렸다. "소생은 관직엔 뜻이 없으니, 그런 고심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단지……." "단지?" "이곳에 오면 엄청난 미인을 주신다고 하기에 왔을 따름입니다." "미인?" 여천후의 말에 헌원문과 영락제는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소생은 황금장원에서 왔습니다. 부탁하신 것을 가져오면 자금쌍벽려(紫禁雙壁麗) 중 하나라도 얻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영락제는 여천후의 말을 자르며 황급히 물었다. "부탁한 것은 찾았나? 원한다면 하나가 아니라, 그 애들을 몽땅 줄 수도 있네!" "예에?" 이번에는 여천후가 놀랐다. 자금쌍벽려. 자금성에서 황제보다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설사, 영락제라도 그녀들의 말이면 무엇이든 양보한다. 자혜공주(紫惠公主) 주자혜(朱紫慧), 백설공주(白雪公主) 주미려(朱美麗). 영락제의 두 명 공주이자, 역대의 공주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판이 내려져 있는 황녀(皇女)들이었다. 한데, 그들을 하나도 아니고 두 명을 아예 몽땅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 말 진정이십니까? 폐하!" 여천후는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재차 물었다. "두말 하면 잔소리. 그래, 구했나?" '예측대로 황궁에 일이 있긴 있었군. 황제가 저리 애타하는 걸 보니.' 그런 중에도 여천후는 철저한 상혼(商魂)을 잃지 않았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소생이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더 추가시켰으면 합니다만." 이번에는 영락제가 아연해 하고 말았다. "아니? 자금쌍벽려만으로도 안 된단 말인가?" 그가 애달파할수록 여천후는 여유로웠다. "그건 주시기로 한 것이니 당연히 받는 것이고, 조그마한 것으로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리려구요." "알았네. 들어 보도록 하지." 잠시 뜸을 들이던 여천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별것 아닙니다. 황궁에서 거래하는 모든 물품을 저희 황금장원을 통해서 해 주십사하는 것이지요." "……!" "……!" 두 사람은 아예 말을 못했다. 말은 간단하다. 하지만 황궁의 거래선을 모두 황금장원을 통해 한다는 것은 아예 전중원의 상권(商權)을 독식(獨食)하겠다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황궁의 물품 소비량은 엄청나다. 게다가 대외무역까지 전담한다면? 가공무비(可恐無比)! 그제서야 영락제는 여천후가 상인임을 자각했다. 그것도 천하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황금의 신(黃金神)임을……. '허허, 배포가 하늘을 뒤덮을 만하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요. 아무렴 귀하디귀한 공주의 생명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지요. 너무 적었나?" "으윽!" "허……!" 영락제와 헌원문은 아예 기가 꽉 막히고 말았다. '나중에는 황제자리마저 달라고 하겠군. 헛허!' 헌원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늘을 속여 구름까지 팔아먹을 황금충(黃金蟲) 여천후! 영락제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 갔다. "상인은 입으로만 장사하지는 않을 텐데, 우선 물건을 보아야만 하지 않겠나?" 물건을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한데, 여천후의 대답은 또다시 영락제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정말 고금에 그런 물건은 드물 겁니다. 바로 폐하의 앞에 있지 않습니까?" "……?" "극음지신(極陰之身)의 절세미녀가 독에 당한 것을 푸는 데는 저보다 더한 특효약은 없습지요." "알고 있었는가?" "아닙니다. 화구내단(火龜內丹)과 독액(毒液), 내가고수를 원하신다고 해서 소생이 추측해 본 것뿐입니다." "허어!" "그래서 알아본 결과 자혜공주께서 안 보이시더군요. 겸사겸사 좋은 일이 많은데, 제가 어찌 이런 호기를 놓칠 수 있읍니까? 돌도 안 던지고 수천 마리 새를 잡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무석만조(無石萬鳥)라… 정말 그렇구만. 한데……." 영락제는 웃음을 삭이며 약간 침중한 신색으로 말했다. "극빙독천사(極氷毒天蛇)란 뱀을 아는가?" "극빙… 독천사!" 여천후의 입에서 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극빙독천사! 일반적으로 뱀은 날씨가 추워지면 동면(冬眠)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적인 독사가 있었다. 북해(北海)의 만년빙굴(萬年氷窟) 속에서 천 년을 사는 영사(靈蛇)가 극빙독천사였다. 온기(溫氣)를 쏘이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마는 괴이한 뱀이었다. 그 극빙독천사를 햇빛을 쏘이게 하면 한 줌의 핏물로 화(化)한다. 그 남은 피(血)! 그야말로 천고의 독약(毒藥)이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황하(黃河)의 물고기를 전멸시킬 수 있는 극악한 독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손만 대도 죽으나, 기이하게도 극음지신의 여인은 금방 죽지 않았다. 다만 영원한 잠에 빠져든다. 그것도 사실상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삼 년 후에는 전신이 얼음조각처럼 부서져 내리고 말았기에……. "그럼 자혜공주가 당한 것이 그 극빙독천사의 혈액이란 말씀이십니까?" 여천후는 정신을 추스리며 황급히 물었다. 영락제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삼 년 전, 자혜가 갑자기 쓰러졌다네. 그 아이의 전신이 차츰 얼음 덩어리가 되어 버렸지. 영문을 몰라 어의(禦醫)를 시켜 진맥했으나 알지 못했다네. 그런 차에……." 영락제의 시선이 헌원문에게로 돌아갔다. "은퇴한 노사를 불러 진맥한 결과, 그것임이 판명되었다네. 그러나……." "……!" "방법은 있었네. 금령천화신구의 열양내단으로 극음지신을 깨뜨리고 천세만독금와의 독액을 복용하여 서로 상충되게 한 연후, 잠시 동안의 시간을 벌어 내공의 고수로 하여금 삼매진화로 독을 태워 버릴 생각이었네." 영락제의 눈가로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그것 중 한 가지도 구할 수 없었네. 황제의 권력으로도 말일세." 영락제는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여천후의 안색은 밝기만 했다. "그런 것 말고도 할 사람이 있습니다. 화공을(火功)을 일으켜 극음지신을 깨뜨리고 전신내공으로 독성(毒性)을 한 곳에 뭉쳐 상처를 내면 저절로 독혈(毒血)이 빠져 나오지요."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 "……!" 영락제와 헌원문은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영락제가 표정을 고치며 여천후에게 물었다. "내공 십 갑자 이상의 내가고수만이 극빙독천사의 독혈을 감당해낼 수 있다고 들었네만… 맞는가?" "그렇습니다." 여천후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의 내공은 얼마나 되는가?" 영락제가 영 못 미더운 듯이 물음을 던졌다. "에… 그러니까 나의 내공이 얼마나 되더라?" 막 대답하려던 여천후의 말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의 내공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천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다음 말은 장내의 두 사람을 완전히 아연실색케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에… 태어나자마자 금황칠대국로에게서 벌모세수를 받아서 삼 갑자(甲子)를 얻었고……." 돌도 되기 전에 삼 갑자의 내공을 가졌던 사람이 고금에 존재했을까? "천뢰대산에서 이 갑자(甲子)에, 바라대성람에서 이 갑자(甲子)에다, 혈십자교에서 마찬가지로 이 갑자를 얻었지." "……!" "오행동부에서 삼 갑자(甲子), 거기다가 천문제육관에서 이 갑자(甲子)니, 모두 합치면 에… 한 십사 갑자(甲子)쯤 되겠군요." 힘들었다는 듯이 여천후는 땀을 훔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