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26편 (26/45)
세수(歲壽) 삼백오십여 성상(星霜). 살 만큼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만 후대가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본시 독공과 의술은 함부로 남용하면 천하를 그르칠지니, 고심하던 우리는 한 가지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노부들은 일 년의 각고 끝에 우주 간 가장 극강한 오행기를 모아 오행살극진을 설치했다. 동부(洞府)의 높이는 두 자, 성질이 급한 사람이나 성정(性情)이 사악(邪惡)한 위인이라면 오십 리에 걸쳐 있는 오행동부(五行洞府)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때를 기다려 인내할 줄도 알고, 대자연의 위엄 속에 고개를 숙이는 겸양함도 갖추고, 무사안일함에 젖지 않는 진취적 기상과 아울러 천혜를 지닌 자만이 이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연자(緣者)여! 그대에게 노부들의 모든 것과 아울러 신체가 부서져 가루가 되지 않는 한, 죽지 못하는 오행불사연기(五行不死煙氣)를 전하노라. 부디 인세(人世)에 악(惡)을 멸(滅)하고 광명(光明)의 찬란함을 꽃피우기 바란다. 천수약종 초사량, 살황대독후 나천우 유필(遺筆)> "원세쌍천종 노선배들이야말로 진정한 선인이셨구료." 여천후는 숙연한 자세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 개의 거북 등껍질은 천고의 보물이었다. 천하제일의 의술과 천하최강의 독공이 빽빽이 적혀 있는 비급이었던 것이다.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하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해독해 내려가는 여천후는 가히 경혼실색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런 의학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넋을 잃고 중얼거린다. 천의보갑(天醫寶甲). 좌측에 있는 구갑(龜甲)의 이름이었다. 이곳에는 천지를 바꿔 놓을 정도로 뛰어난 의술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인체비해(人體秘解). 소우주(小宇宙)라 불리워지는 인간의 몸에 대해서 이렇듯 자세히 서술해 놓은 의서는 고금에 다시 없었다.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킨 수천 개의 세혈(細穴)을 비롯하여, 시각과 계절과 한서(寒暑)의 변화에 의하여 바뀌는 인체의 생리 등… 그야말로 인간 자신이 인간을 알 수 있는 인체의 신비가 이 곳에 다 있었던 것이다. 회혼금침술(回魂金針術). 삼백육십오 개에 달하는 대소금침으로 펼치는 천외신의술(天外神醫術)이었다. 인체비해를 완전히 습득한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것으로,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는 역천지술(逆天之術)이기도 했다. 또한, 회혼금침술을 역으로 펼치면 가공할 암기술로 화한다. 멸폭쇄혼류(滅爆碎魂流)라는 것으로, 방원 십 장 이내에 공격대상이 있다면 그는 고슴도치가 되어 죽는다. 만초비령해(萬草秘靈解). 이것이야말로 천수약종의 최대 보물이었다. 들판이나 야산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수만 가지 잡초나 야화, 별 쓸모 없이 여겨지는 별 볼일 없는 약초들……. 그런 것들을 교묘히 배합하여 천하의 영약으로 만드는 신비지술이었다. 그것은 물론, 위의 두 가지를 완벽히 익힌 사람에게만 필요가 있었다. 똑같은 영물이라 할지라도 치료하려는 인간의 몸에 대한 평가에 따라서는 독(毒)도 약(藥)도 될 수 있기에……. 여천후의 뇌리에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천고의술의 비해(秘解)가 그대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천고의 기재라고 하는 여천후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깨달을 수는 없었다. 단지, 지금은 암기만을 했을 뿐이었다. 이어 그의 시선은 오른쪽의 거북갑으로 옮겨졌다. 살황천독경(薩荒天毒經). 살황대독후 나천우가 남긴 독공비경이었다. 독문의 인물이라면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는 무가지보였다. 제일해(第一解) 천하만독비해(天下萬毒秘解). 천하만종의 독물들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해 놓은 독초비경이었다. 제이해(第二解), 독령제인공(毒靈制人功). 만 가지의 독을 지닌 짐승을 수족과 같이 부릴 수 있는 독수제령술(毒獸制靈術)이 그것이었다. 제삼해(第三解), 천독신공(天毒神功). 고금최강의 독공! 그 앞에서 감히 독공을 논하지 말라! 설사 금강불괴공을 완벽하게 익힌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할지라도 한 줌의 핏물로 화한다. 그 끔찍할 위력은 그대로 전율(戰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井中之蛙)였다." 모든 것을 보고 난 후, 여천후가 최초로 던진 한 마디였다. 천외천(天外天)! 어느 누가 감히 고금제일(古今第一)이라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진정 무서운 의술과 독공이다. 원세쌍천종께서 우려하실 만한 가공할 위력이다." 여천후는 고개를 저으며 하단에 새겨져 있는 갑골문자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노부들은 말년에 이르러 하나의 역천지의(逆天之意)를 갖게 되었다. 팔과 다리가 끊기고 전신세혈이 가닥가닥 잘려져 나가고, 심장마저 제 기능을 못하거나 할 때 인간의 명(命)은 끊어진다. 그냥 고이 늙어서 죽기도 억울하거늘, 어찌 젊은 청춘에 죽어 가는 중생들을 가엾다 여기지 않겠는가? 해서, 노부들은 서로의 힘을 합쳐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 결과 노부들은 한 가지의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행불사연기(五行不死煙氣)! 오행동부를 거쳐 여기까지 이른 그대는 이미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거북의 등갑을 벗기면 그 안에 노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오행불사연(五行不死煙)이 있을지니, 그것을 모두 체내로 흡취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살아 생전엔 그대의 몸은 불사지체(不死之體)로 남으리라. 연자의 앞날에 무궁한 천복이 깃들기를 바라노라.> "도대체 이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팔과 다리가 끊어져도 재생하고, 전신사혈(全身死穴)이 끊어져도 살 수 있단 말인가? 꿈 같은 일이로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천후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여천후는 두 개의 구갑을 열어젖혔다. 순간, 우측의 거북갑에서 적(赤), 황(黃), 청(靑), 흑(黑)), 금(金)의 오색 연기가 폭죽이 터지듯 폭발해 올랐다. 휘류류류류류-! 반대편에 있는 거북갑에서는 섬뜩한 녹무(綠霧)가 뭉클뭉클 피어 올라 여천후의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우웃!" 의외의 사태에 놀라던 여천후는 곧 정신을 추스렸다. "이것이 오행불사연과 천독무(天毒霧)로군." 여천후는 일순, 전신이 대폭풍 속에 휘말린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황급히 그 자리에 좌정했다. 오행불사연기, 천독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활기(活氣)와 가장 극악한 독기(毒氣)였다. 두 가지의 상반된 기류는 서로 뒤얽히며 무섭게 여천후의 모공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쿠쿠쿠-! 가공(可恐)할 기세였다. 인간의 몸쯤은 간단히 찢어발길 듯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으으!" 전신이 파열될 것만 같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여천후는 절로 신음성을 발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픔이 필요하다. 더욱이 엄청난 기연(奇緣)을 얻기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까? 돌연, 폭출(爆出)하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링-! 금(金), 청(靑), 황(黃), 적(赤), 흑(黑), 녹색(綠色)의 육합기류(六合氣流)였다. 위로는 금색(金色)이고, 아래로는 황색(黃色)이었다. 동(東)으로는 청색(靑色)이고, 서(西)쪽은 적(赤). 남(南)은 녹색(綠色)이었으며, 북(北)쪽은 흑색(黑色)으로 나뉘어졌다.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여천후를 천원(天元)으로 하여 소용돌이치는 여섯 가지의 기류……. 그것은 점점 위로 치솟으며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장엄(莊嚴)했다!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고 좌정해 있는 여천후의 모습은 가히 천인(天人)이었다. 한없는 부드러움과 가이 없는 천궁(天穹)의 숨결이 알게 모르게 밀려든다. 여천후, 그의 꿈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은 단지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길을 열어 주리니……. 여천후의 새로운 탄생! 그것은 훗날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하는 서곡이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제14장 백학청송림(白鶴靑松林) 옥황노야 사파륭. 지금 그는 천하가 흔들려도 꿈쩍 않을 것 같던 백미(白眉)를 한껏 치켜올린 채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뭐, 뭣이! 그게 사실이냐?" 그는 크게 격동했다. 내심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차에 여천후가 무사히 나오고, 그에게 원세쌍천종의 모든 것을 얻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니, 아연하기까지 했다. 구주종횡가의 가주로 누구보다도 천하의 정세에 밝고, 고대로부터 당금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인물들의 신상은 모두 알고 있는 사파륭이 아니던가? "진정, 네가 천수약종과 살황대독후의 진전을 이었단 말이냐?"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되묻는다. 싱글거리며 앉아 있던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니까요!" "……!" 사파륭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너는 과연 하늘의 복을 타고났구나! 원세쌍천종의 하나도 아닌 두 사람의 진전을 모두 취했다니!" "원, 할아버지두……." 여천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문득, 사파륭은 대소를 멈추며 여천후를 직시했다. "네가 그곳에 가 있는 사이, 아주 큰 거래가 들어왔다." "거래요?" "만유거사(萬儒居士)란 백학청송림의 글선생이 찾아왔는데, 몇 가지 물건을 구해 달란다." "백학청송림의 제이원주인 만유거사가 손수 와서 물건을 구했다?" 사파륭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천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구해 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 "세 가지를 원하더구나. 금령천화신구(金靈天火神龜)의 내단(內丹)과 천세만독금와(千世萬毒金蛙)의 독액(毒液), 그리고 내공이 십 갑자(甲子) 이상 되는 내가고수의 행방 내지는 성명을 알려 달라더구나!" "……!" 여천후는 사파륭의 말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금령천화신구! 일만 년(年)을 화산(火山)의 용암 속에서 사는 전설의 거북이였다. 그 놈의 내단은 가공할 하늘의 불길(天火)이 담겨 있는 불의 정화(精華)였다. 천세만독금와! 독물 중 가장 맹독을 품고 있는 독두꺼비였다. 입 속에 있는 독액 한 방울이면 황소 만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것만도 경악할 노릇이거늘, 내공 십 갑자에 이르는 내가고수라니? 아마 중원천하를 몽땅 뒤지더라도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파천무인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도저히 한 가지도 이루기 힘든…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천후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물음을 던졌다. "그걸 모두 마련한다면 얼마나 주겠다고 합니까?" "마찬가지로 세 가지다. 우선 황금 일백만 냥(兩)과 천고의 신검(神劒)인 천뢰환룡검(天雷幻龍劒), 그리고 가능한 한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 주겠다더구나. 대제학(大齊學)이나 대장군(大將軍) 등 종이품(從二品)의 벼슬이나 혹은 미녀(美女)라거나……." 사파륭은 말을 하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본 것이다. 별로 탐탁잖게 듣던 여천후가 미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눈빛을 빛내고 있음을……. 아니나다를까? "호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구해 주면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얻을 수 있단 말이죠?" 여천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옥황노야 사파륭은 아예 기가 꽉 막히고 말았다. '장차 저 놈이 뭐가 되려고… 내가 잘못 키웠지. 사해상진엘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사파륭이 이렇듯 한탄하고 있을 때, 여천후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백학청송림에서 영약과 독물, 경세고수를 필요로 할 리도 없고, 더구나 그들이 준다는 것도 도저히 그들 단독으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천후의 머리가 더욱 빠르게 회전하고, 그의 눈가로는 기광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극양의 내단과 독액, 내공 십 갑자에 달하는 고수가 필요하다?' 하나를 들으면 하늘을 아는(聞一之天) 여천후였다. '이런 경우라면 한 가지뿐이지. 극음지신(極陰之身)을 가진 사람이 극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얘긴데…….' 여천후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한 가지 영감(靈感)이 그의 뇌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황실(皇室)! 백학청송림의 위세가 아무리 막강해도 주겠다던 조건을 해 줄 능력은 없다. 황궁에서 누군가 주요 인물이 중독된 것이 틀림없다.' "……!" 사파륭은 여천후의 몸에서 이상기류가 뿜어져 나오자,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여천후의 사색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독액이 필요한 것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일 테고, 극양열단(極陽熱丹)은 독기를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태워 없애 버리려는 것일 터. 내가고수가 필요함은 환자가 무공이 없다는 증거다. 내공 십 갑자 이상의 한정을 둔 것은 그만큼 독이 독랄하고 시간이 없다는 증거이다.' 여천후의 미안이 찌푸려지고 그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황궁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론은 그렇게 내려지고 말았다. 단지 말 한 마디만 듣고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있을 손가? 황실(皇室)! 십팔만 리 중원대륙의 주인인 대명제국의 황제인 영락제가 기거하는 자금성에 변고가 발생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문득, 여천후는 정신을 추스리며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잠깐 다녀올께요!" 뚱딴지 같은 여천후의 말에 사파륭은 어이가 없었다. 기껏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더니만, 고작 한다는 소리가 도로 나가겠다니……. "오자마자 또 어딜 가겠다는 말이냐?" 사파륭의 노기 어린 말에도 여천후는 여유롭게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말(言). "아, 미녀를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파륭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네게 미녀를 준다던?" "백학청송림에서 준다면서요?" "금령천화신구의 내단과 천세만독금와의 독액, 그리고 내공 십 갑자의 고수가 있느냐?" "원, 할아버지도! 아, 미녀에게 그런 흉측한 괴물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저 나 같은 절세 미장부만 가면 그저 죽다가도 벌떡 일어날 텐데요." "……!" 사파륭은 머리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할아버지의 손자며느리가 얼마나 예쁜지 기대하십시오." 여천후는 대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날렸다. 스스슷! 안개가 바람에 밀려가듯 실내에서 사라진다. 옥황노야 사파륭은 홀로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어떻게 돼먹은 놈인지… 내가 키웠지만 정말 모를 놈이다. 언제 시간 나면 두개골(頭蓋骨)을 뜯어 보던지 해야지, 원……." 사파륭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놈은 데려온다면 데려오는 놈이니, 방 하나를 또 치장해야 되겠군. 괘씸한 놈!" 그도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인간, 여천후는 떠났다. 그러나 알까? 자신은 장난으로 한 말이 사파륭의 예언대로 실현됨을……. * * * * "이곳이 그 유명한 백학청송림이란 말이지!" 여천후는 뒷짐을 지고, 거대한 장원의 정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온통 백색의 일색으로만 칠해져 있는 높이 오 장 깊이 십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백룡문(白龍門)이었다. 좌우의 아름드리 기둥에는 곧 등천할 듯한 백룡이 휘감겨 있었다. 편액 또한 마찬가지로 새하얀 바탕 위에 웅혼한 필체의 금문(金文)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학청송림(白鶴靑松林)> 이곳이 바로 전중원의 기재들이 꿈에도 들고 싶어하는 천하유림(天下儒林)의 성역(聖域)이자, 문인(文人)들이 기거하는 백학청송림이었다. 만상천유(萬象天儒) 헌원문(軒轅文)! 중원천하의 모든 유생(儒生)이 우러러보는 천하제일문성(天下第一文聖)이 그였다. 또한 그는 즉위 십이 년(年)을 맞은 영락제의 글선생이기도 했다. 황제조차도 깎듯이 공경하는 만상천유 헌원문은 학문을 하는 유생들에게 있어서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사시(巳時:오전 9시부터 11시까지)가 채 못 된 시각이었다. 한데, 백학청송림의 정문에는 수많은 문사들이 들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천문육대관문을 뚫어 인세에 영명을 날리고자 모여든 유생들이었다. 문(門)은 오시(午時)에 열린다. 유생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한데, 유독 한 사람만이 유유자적했다. 그 인물은 바로 여천후였다. 그는 천천히 담장을 따라 돌며, 유유히 주위의 경관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열두 번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그그그긍-! 거대한 백룡문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아한 백의를 차려 입은 한 명의 중년문사가 나타났다. "……!" "……!" 좌중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중년문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본인은 사마우(司馬羽)라 하는 미거한 원생입니다. 육관문(六關門)을 통과하실 의향이 있으신 분은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좌중의 문사들은 일제히 백학청송림으로 밀려들었다. 여천후는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후위(後位)에 처진 채 따라 들어갔다. '도대체 천문육대관문이 어떤 곳이기에… 백 년이 넘도록 천문제육관(天文第六關)을 통과한 사람이 없다니, 중원엔 그렇게 인재가 없는가?' 여천후는 정체를 숨기고 천문육대관문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과연, 신화는 깨질 것인가? * * * * 백 년 이래, 대명이 건국되고 백학청송림이 창건된 이후 이처럼 경악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천문육대관문! 당금의 천문육대관문은 원주인 만상천유 헌원문만이 겨우 오 관(五關)을 통과했을 정도로 험난한 관문이었다. 그 불문율이 깨어진 것이다. 도저히 인간의 한계로서 통과할 수 없는 천문육대관문의 신화는 깨졌다. 그것도 단 일 주야 만에 이루어진 충격이었다. 하늘을 부순(破天) 주인공은 일개 어린 청년유생(靑年儒生)이라 했다. 나이 불과 십구 세밖에 안 된 앳된 미청년이 하늘을 부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영광의 칭호가 붙는다. 고금제일대문성(古今第一大文聖)! 이 이름은 삽시간에 중원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아울러, 딸 가진 고관대작들은 그를 사위로 맞아들이려 서로 면담을 요청하는 기가 막힌 현상이 일어났다. 백학청송림의 천문육대관문 중 일관(一關)만 통과해도 천하기재 소리를 듣는데, 그 중 다섯 관문을 통과하고 초유로 제육관에 도전하는 인물이라면 그 앞날은 그야말로 영광의 길(榮光之路)이 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내(室內), 고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백색 일색의 방이었다. 하얀 벽면에 흰 주렴, 그리고 백향목(白香木)으로 만든 탁자(卓子)에 앉은 사람들은 일노일소(一老一少)였다. 구순 가량 됐음직한 백의노인은 탁자의 아래쪽에 조용히 정좌해 있었다. 구름같이 뭉실한 백염이 배꼽까지 드리워져 있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이었다. 그의 눈은 서글서글하면서도 호수와도 같이 잔잔하다. 심유한 무저의 지혜가 창공을 보는 듯도 했다. 신비로움마저 일으키는 이 인물은 누군가? 만상천유 헌원문! 이 시대 최고의 현자(賢者)요, 당금의 황제인 영락제의 황사(皇師)라는 신분을 지닌 인물. 천하유생들이 한 번이라도 그의 강론을 들으면 원이 없겠다는 위인이 바로 그였다. 아울러 백학청송림의 문주(門主)이기도 하다. 한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만상천유 헌원문이 하좌(下座)에 앉아 있다니? 그의 전면(前面), 상좌(上座)에 정좌해 있는 인물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화려한 곤룡포를 걸친 강인한 선을 가진 중년인의 전신에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한대의 기세가 뿜어지고 있었다. 온유한 듯하면서도 대해와 같은 제왕지기가 은연중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은 자연스런 풍도는 일견(一見)키에도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약간의 수심이 진 그늘이 중년인의 얼굴에 주름을 긋고 있었다. "……." "……."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곤룡포의 중년인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노사, 황금장원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소?" 헌원문은 송구한 듯 낯빛을 굳히며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송구하옵게도 아직……." 그의 말에 곤룡포의 중년인은 문득 허공을 시선에 담으며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짐(朕)의 나이 마흔다섯, 결코 긴 인생은 아닐진대 왜 이리 풍파가 심한지 모르겠구료. 공주도 평안하질 못하고 그 지경이 되었으니……." 헌원문은 곤룡포의 중년인 앞에서 그냥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폐하, 그 고충을 노신이 조금이라도 덮어 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헌원문의 눈가로 한 줄기 물방울이 반짝였다. 곤룡포의 중년인은 바로 십팔만 리 중화대륙(中華大陸)의 주인이었다. 대명제국(大明帝國) 제삼대황제(第三代皇帝)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바로 황제였다. 태조(太祖) 홍무제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나, 주체라는 이름을 지녔던 그는 외형상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영광의 길을 걸어온 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외면적으로만 그랬을 뿐이었다. 유난히 용맹(勇猛)하고 지략(智略)이 풍부했던 그는 대원제국(大元帝國)과의 전쟁에서 항상 선봉(先鋒)에 서서 싸워야만 했다. 황태자(皇太子)인 주표(朱標)는 유약(柔弱)하기 이를 데 없어, 홍무제는 전장(戰場)에 항상 넷째 아들인 주체를 대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