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21편 (21/45)
"전능의 신이시여! 아수라의 율법을 받들겠나이다." "아수라의 율법에 따라 이교도를 처단하겠습니다." 안광을 희번뜩이며 꾸역꾸역 밀려드는 소년소녀들의 모습은 귀기스러울 정도였다. 한편, 십자혈교황은 입구 쪽으로 몸을 날리며 분노의 일성을 토했다. "바라대성람놈들, 두고 보자! 모두 퇴각하라!" 살아남은 이천여 명의 혈의인들은 모두 신형을 날렸다. 바라대성람의 회회교도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지를 망각한 소년소녀들… 악마를 치려다 죄 없는 중생들마저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천후, 그의 눈꼬리가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이럴 줄 알고 가루라성존께서 안배하신 것이 있지." 일순, 그의 두 손이 하늘과 대지를 가리키며 갈라졌다. 고오오오……! 휘황하고도 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광채가 태양이 폭발하듯 피어 올랐다. "가루라성령광!" 황홀한 서기(瑞氣)가 장내로 파도처럼 밀려나갔다. 그 빛에 쬐인 소년소녀들은 그 자리에서 털썩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 빛은 이 자리에 선 바라문도들에게 환희의 결정체나 다름 아니었다. "가루라지존(金翅鳥至尊)이시여." 삼천여 명의 바라문도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바라대성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정작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여천후의 황금빛 동공으로 십자혈교황을 비롯한 혈십자교의 추종자들이 도주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고, 그것을 보며 여천후는 입을 기이한 모양으로 벌렸다. 입김이 불어 나오듯, 여천후의 입에서 황금빛 안개(金霧)가 피어 올랐다. 안개는 자체로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점점 증폭되기 시작했다. 새(鳥)였다.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오 장여이고, 날카로운 부리끝에서 길게 드리워진 꼬리까지 거의 십 장여에 달하는 거대무비한 황금의 새는 한 차례 황금의 날개를 퍼덕이더니 그대로 비행(飛行)을 시작한다. 단 두 번의 날개짓에 황금의 새는 아수라성전의 입구까지 날아들었다. 구워억-! 대기를 떨어 울리는 울음을 토하며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는 혈십자교도들을 덮친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처절한 피보라가 일었다. 날개가 스치면 허리가 두 동강나고, 부리가 쪼아지면 머리가 으깨져 뇌수가 쏟아져 나온다. 저 날카로운 발톱에 할퀴어진 자들은 온몸이 다섯 토막으로 찢어발겨졌다. 꼬리가 휘저어질 때마다 튕겨 나가는 자들은 벽에 부딪치다 못해 아예 벽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가루라(金翅鳥)다!" "오오, 용(龍)을 잡아먹고 산다는 신조(神鳥) 가루라께서 현신하셨도다!" 바라문도들은 그대로 부복한 자세로 머리를 지면에 박았다. 지극한 경외감에 몸을 떠는 그들의 얼굴은 흥분이 극도로 고조되어 붉게 상기되어 있을 정도였다. 가루라의 성령(聖靈)이 나타나면 그것은 곧 가루라성존(金翅鳥聖尊)이 현신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루라성령광과 가루라성령무! 가루라성존이 남긴 성스런 항마쌍천기(降魔雙天氣) 앞에 혈십자교의 천년염원은 박살나 버릴 수밖에 없었다. "크윽!" 천년제국의 흑룡왕은 마의검왕 호극충의 반월천신검에 가슴이 꿰뚫리며 즉사하고 말았다. 이미 오백 묵령마마대도 전멸한 지 오래였다. 장내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은 한 사람의 아름다운 얼굴에 모아져 있었다. 여천후는 씁쓸히 웃으며 벽라공주를 안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생(殺生)을 해야 할지……." 아수라성전을 뒤로 하고 군웅들은 떠나갔다. 콰콰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혈십자교의 마전(魔殿)은 함몰되고 말았다. * * * * 파사국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혈십자교의 천년부활! 천 년 전에 사라졌던 혈십자교가 다시금 부활하고, 만 명의 소년소녀들을 납치해 간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한 인물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경외지감으로 바뀌었다. 황금충 여천후! 단신으로 혈십자교에 쳐들어가 벽라공주를 비롯, 납치된 아이들을 구해 냈고 바라대성람이 혈십자교의 잔당들을 쫓고 있다는 사실은 벅찬 기쁨을 안겨 주기에 족한 것들이었다. 황금의 벌레(黃金蟲). 이제 아무도 그에게 어리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제10장 중원무림(中原武林)의 신화(神話) 취옥성(翠玉城) 중화대륙(中華大陸). 중원한족(中原漢族)은 자신들의 대지를 그렇게 불렀다. 이 세상의 중심(中心)이 자신이고, 자신이 사는 이 대지가 세상의 가장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물씬 풍겨 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에겐 꽤나 많은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중원의 밖에 사는 사람을 오랑캐(夷)라는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 동쪽에 사는 사람은 동이(東夷), 서쪽은 서이(西夷)이다. 북쪽은 융(戎)이라 하고, 남쪽은 만(蠻)이라는 표현으로 눈 아래로 깔아뭉갠다. 그렇지만 그것을 기분이 나쁘다고 우격다짐으로 어찌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화대륙은 우선 거대한 대지(大地)를 지니고 있었다. 세상 그 어느 나라도 그만큼 크지는 못했고, 그만큼 사람이 많지도 않았으며, 그만큼 비옥(肥沃)하기 이를 데 없는 토양(土壤)도 지니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화대륙의 역사는 또한 장구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그 문명(文明)은 찬란하기 이를 데 없다.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산재해 있는 신비의 대지이기도 한 곳. 수많은 신화(神話)와 헤아릴 수 없는 전설(傳說)이 잠들어 있는 꿈의 대지이기도 하다. 마도(魔道)와 사파(邪派), 녹림(綠林), 요문(妖門), 독류(毒流)의 수많은 흑도세력(黑道勢力)이 웅거하여 있지만 강력한 백도세력(白道勢力)에 견제되어 일방적인 독주를 허용하지 않는 균형을 이룬 채 수천 년을 내려온 무예(武藝)의 대지엔 수많은 무공(武功)이 명멸(明滅)되어 갔다. 무술(武術)의 총본산이라는 자부심을 충분히 지닐 만했다. 그만큼 중원무림계(中原武林界)의 무공은 다양했으며,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원무림에 속한 무인(武人)이라면 설사 삼류낭인(三流浪人)일지라도 그런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중원무림 이외의 곳, 변황무림계(邊荒武林界)를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로 여기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중원무림계는 막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원대륙(中原大陸)이 몽고대제국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며, 소위 북방오랑캐족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도 중원무림계는 꺽이지 않았다. 그 이백여 년의 세월이 중화대륙에게는 치욕의 역사였지만, 중원무림계에 있어서는 중원혼(中原魂)을 불사르는 가장 찬란한 시기였던 것이다. 수천 년간에 걸쳐 무림사에 점철된 피의 대립. 그것은 정(正)과 마(魔), 흑도백도(黑道白道)의 피튀기는 대혈전이 아니었던가? 대원제국이 일어나면서부터 사실상 중원무림의 흑도백도(黑道白道)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그들이 어디에 속해 있건, 그들의 뿌리는 한 줄기가 아니었던가? 중원무림은 흑백(黑白)을 떠나 하나의 중원혼으로 뭉치며 변황무림, 특히 북방의 초원무림(草原武林)에 대한 공통의 적대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거기엔 정도무림(正道武林)이건, 사파(邪派)건 간에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때는 대명제국(大明帝國)이 막 중원에 자리를 잡을 시기였다. 원제국(元帝國)을 물리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황실(皇室)도 매우 어수선했지만 무림(武林)의 상황도 그와 대동소이했다. 원제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양성된 북방무림의 세력들은 지난 이백여 년간 가히 폭발적으로 강성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 중 초원육패천(草原六覇天)이라 명명된 여섯 개의 세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열화창(烈火廠), 폭풍탑(暴風塔), 축융교(祝融敎), 열사마역(熱沙魔域), 군림마봉(君臨魔峯), 철혈마갑단(鐵血魔甲團). 이상이 초원육패천이었거니와, 그들에겐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죽을지언정 물러섬이 없는 불퇴전(不退戰)의 용맹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북방대초원의 세력이 중원을 장악하긴 했으나 단순히 인구비례(人口比例)의 숫자만으로 본다면 상대가 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강토(疆土)와 무림(武林)이 무너진 것은 북방대초원의 용자(勇者)들만이 지니는 그런 불굴의 강인한 전투력(戰鬪力)에 중원인들이 밀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중원무림이 힘을 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초원육패천 때문이 아니었다. 홍황전륜사(紅黃轉輪寺). 그 이름은 북방대초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장(西藏)으로부터 진출한 밀종(密宗)의 총본산이었다. 원래 서장밀종(西藏密宗)은 홍교(紅敎)와 황교(黃敎)로 분열되어 수백 년을 내려오고 있었던 터였다. 그것이 하나로 통합된 세력이 홍황전륜사였다. 그 힘은 사실상 서장무림의 하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장무림에서조차 원제국(元帝國)의 발흥(勃興)과 더불어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포달랍궁(包達拉宮). 라마교(喇마敎)의 총본산(總本山)이었다. 사실, 서장무림(西藏武林)에서 라마교는 밀종에 밀려 그다지 세력이 크지는 못했다. 한데, 원제국에서 라마교를 국교(國敎)로 삼으면서 사태는 반전되었다. 원황실(元皇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세력이 급성장한 라마교는 포달랍궁을 정점(頂點)으로 무한대적인 힘의 증폭을 일으켰다. 서장무림에서 밀종의 힘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홍황전륜교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존립의 위기마저 맞이한 홍황전륜교는 포달랍궁의 휘하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령권자인 포달랍궁보다도 홍황전륜사의 혈승(血僧)들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원무림인들이 지나가면 무조건 시비를 걸었다. 눈살만 찌푸려도 떼거지로 몰려가 핍박을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혹시라도 자신들의 동료 중 한 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 반드시 가해자(加害者)를 색출하여 그가 속한 문파와 가문은 씨를 말려 버렸다. 살인(殺人), 약탈(掠奪), 방화(放火), 강간(强姦)……. 그들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행(惡行)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달랍궁에서는 홍황전륜사의 만행을 저지하지 않았다. 간혹가다가 만류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일 뿐이지, 강력하게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명백한 것이었다. 중원무림계의 모든 원성이 홍황전륜사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중원무림인들은 홍황전륜사의 밀종승과 숨바꼭질을 하며 격돌했고, 그로 인해 드러나는 중원무림의 힘은 포달랍궁의 거대한 힘이 덮어 버렸다. 포달랍궁에서는 중원의 한복판인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중악(中嶽) 숭산(崇山) 태실봉(太室峯)에 태양사원(太陽寺院)을 건립하였으며, 홍황전륜교의 밀종승(密宗僧)들로 하여금 전위세력(前衛勢力)을 삼아 중원무림을 핍박하였던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원제국의 낙조(落照)와 대명제국(大明帝國)의 건국(建國)으로 인해 태양사원은 중원무림인들의 포위를 받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태양사원의 기왓장 하나도 들어 내지 못했다. 태양대라마(太陽大喇摩)! 포달랍궁의 십이대궁주(十二代宮主)였다. 그는 단신(單身)으로 신화(神話)를 이룩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한 명의 인물은 중원무림에 있어 넘을 수 없는 벽(壁)이기도 했다.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무려 여덟 겹의 방어벽을 뚫어야만 했던 것이다. 설혹, 그의 옆에 접근한다 해도 태양대라마를 어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라천멸공(魔羅天滅功)이라는, 서장무림(西藏武林) 최강의 마공을 십이 성까지 익힌 그의 몸은 이미 마라불괴신(魔羅不壞身)이라는 금강불괴(金剛不壞) 이상 가는 불사신체(不死身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라불괴신도 약점은 있었다. 눈(目)이었다. 그렇지만 태양대라마는 싸울 때 이외에는 항상 눈을 감고 다녔다. 그 얇은 눈꺼풀은 어장검(漁腸劒) 같은 절대의 신병이기 이외로는 흠집도 내기 어려웠다. 버젓이 눈을 뜨고 싸우려는 사람의 눈을 찌를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이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에겐 어떤 기습도 통하지 않았다. 그 때, 천하무림을 강타한 한 줄기 뇌전이 있었으니……. 약관 이십에 불과한 홍안의 백의미청년의 출현! 돌풍의 핵으로 등장한 그는 바로 무신(武神)이었다. 그에겐 대정(大正)의 도리와, 마도(魔道)의 율법과, 혈사(血邪)의 기세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공할 무위를 앞세운 패도(覇道)가 전중원을 강타했다. 중원대륙의 최남단인 뇌주반도(雷州半島)에 홀연히 나타난 그는 남칠성(南七城)에 있는 일곱 군데의 태양사원 지부를 박살내 버렸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숭산으로 향했다. 태실봉(太室峯)에 오르기까지 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홍황전륜사의 밀종승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모조리 뺑소니쳐 버렸던 것이다. 태양사원의 육중한 산문(山門)은 백의미청년의 일 수(手)에 박살나 버렸다. 백팔 태양나한(太陽羅漢)은 그의 일 검(劒)에 목과 동체가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태양대라마의 호위(護衛)였던 사대마라천왕(四大魔羅天王)이 백의청년과의 내공 대결에서 오장육부가 완전히 으스러져 죽었다. 태양대라마와 신비의 백의청년은 드디어 마주섰다. "환희마라불(歡喜魔羅佛)… 시주 같은 인재가 중원무림에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려." 잔잔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불호를 되뇌이는 황금빛 가사를 걸친 노승의 안색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휘이이잉-! 중원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山脈) 다섯 군데 중 가장 중앙에 위치해, 중악(中嶽)이라 불리우는 숭산의 최고봉(最高峰)인 태실봉 정상엔 세찬 산풍(山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서로 오 장(丈)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마주보고 있는 노소(老少)의 나이 차이는 삼 갑자(甲子)가 넘는 세월의 격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서 있던 백의청년은 문득 입을 열었다. "태양대라마, 이제 열반(涅槃)에 들 때가 되신 듯하오." 그의 말투는 조용했으나 어조엔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글쎄, 그대의 기세가 나이답지 않게 엄청나긴 하지만 노납의 천수(天壽)는 아직 젊은 시주의 고희(古稀)를 볼 정도로 남아 있다오." 태양대라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후후, 눈을 감고 있다고 그대의 마라불괴신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시오?" 백의청년은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노납이 눈을 감고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중원인들은 모르는 듯하구료." "아니, 알고 있소. 무념마불수(無念魔佛手)는 눈을 감은 상태라야 그 극치를 보일 수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아오." 백의청년의 담담한 말에 태양대라마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렇지만 삼 갑자를 살아오면서 쌓인 수행불심(修行佛心)은 가까스로 그의 흔들림을 막아 주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의청년의 오른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지며 손바닥이 펴졌다. 그의 장심(掌心) 한가운데가 돌연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황금의 번개가 작렬했다. 쩌엉-! 그 빠름은 가히 뇌전(雷電)이었다. 백의청년의 손바닥에서 쏘아져 나온 금광(金光)은 삽시간에 검형(劒形)을 이루어 태양대라마의 미간(眉間)을 향해 쏘아져 갔다. "무념마불수!" 스스스스……! 태양대라마의 두 손(雙手)이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아무런 파공음(破空音)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무수한 손그림자(手影)가 가득히 피어 오를 뿐이었다. 수비와 공세를 겸하는 포달랍궁 최후의 비공이 펼쳐진 것이다. 무려 일천 개에 달하는 손그림자 하나하나엔 만 근의 바위를 모래가루로 으스러뜨릴 정도의 막강한 수압(手壓)이 내재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그 중 하나의 손그림자라도 스치기만 하면 피부는 물론이고, 뼈마디가 산산이 부서지는 무서운 수공(手功)이었다. 그런데……. 파스스슷-! 백의청년이 날린 금광검형기(金光劒形氣)에 닿는 손그림자는 모두 아지랑이처럼 흩날려 가는 것이 아닌가? 퍽-! 순식간의 일이었다. 금빛의 낙뢰(落雷)가 뻗어가 태양대라마의 미간(眉間)에 박혀 든 것은……. "컥!" 태양대라마는 짧은 신음을 토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는 상대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은……!" 경악(驚愕)과 불신(不信), 종내엔 회의감(懷疑感)이 담긴 동공이 서서히 풀어져 갔다. "금광검형수(金光劒形手)만이 무념마불수를 깰 수… 있지요. 빈승을 어이하여… 죽이시는지 모르지만… 큭!"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목도한 그의 눈은 죽음 속에서도 부릅떠진 채 감기지 못했다. 단지 백의청년의 놀라운 신위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을까? "태양대라마, 그대가 죽어야만 북방대초원(北方大草原)의 태양이 떨어지는 것이다." 태양대라마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백의청년의 눈빛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북방은 어두움으로 뒤덮이리라. 백 년(年)의 세월(歲月) 동안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백의청년은 몸을 돌렸다. "대세(大勢)는 이제 어느 한 명의 초인(超人)이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졌다." 태실봉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엔 힘이 실려 있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북방의 태양은 떨어졌다! * * * * 태양사원이 무너지자, 홍황전륜사의 밀종승들은 재빨리 세력을 규합하여 서장으로 도주해 버렸으며, 라마교의 총본산인 포달랍궁은 봉문을 선언한 후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힘의 공백기에 중원무림은 극도의 혼란기를 거쳐 여섯 세력으로 정립되었다. 그들을 일컬어 천중육패천(天中六覇天)이라 불렀다. 천불성련(千佛聖聯), 백사련(白邪聯), 천마성(天魔城), 화루(花樓), 신비혈(神秘穴), 사자철림(獅子鐵林). 천불성련. 말 그대로 천 개의 불사(佛寺)가 모여 이룩된 중원무림의 불문연합맹(佛門聯合盟)이었다. 그 중심은 물론 소림사(少林寺)였다. 중악 숭산의 웅장함을 빌어 천년중토의 수호천으로 자부해 온 중원불가의 성지. 한데, 오 척(尺)에 달하는 취옥제황검(翠玉帝皇劒)을 들고 나타난 백의미청년이 소림사에 든 지 삼 주야가 흐른 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천 년(年)!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내려지지 않았던 대소림의 현판이 거두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대원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중원무림에 들어섰던 포달랍궁의 중원 총본산인 태양사원이 득세할 때도 태실봉을 장악했지, 소림사가 있던 소실봉(少室峯)은 여전히 중원불문의 성역으로 남아 있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천 년의 신화가 막을 내린 것이었다. 그것은 중원의 불정(佛精)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백사련! 신강(新疆)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에 위치한 중원사도무림(中原邪道武林)의 천년종주(千年宗主)였다. 온갖 사이한 사술(邪術)과 인성(人性)을 망각한 사령혈강시(邪靈疆屍)들로 천하를 공포로 뒤덮은 백색(白色)의 공포지(恐怖地)……. 일천 구(軀)에 달하는 사령강시 대(對) 단 한 명의 검수(劒手)! 도저히 싸움도 되지 않을 일전(一戰)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알았으리오? 사령강시 일천 구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백의사신(白衣邪神) 사천우(邪天雨)! 백사련주이자 지상 최고의 사인(邪人)이었다. 그는 한쪽 팔을 잃고 허리를 꺾어야만 했다. 그 때부터 백의미청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취옥대검호(翠玉大劒豪) 나후장천(羅侯長天)! 한 자루 취옥제황검을 비껴 찬 채 천하를 향해 검을 빼 든 대검호(大劒豪)! 그의 다음 발걸음은 천마성으로 향했다. 사천(四川)과 감숙(甘肅)을 차지하고 있는 중원마도(中原魔道)의 총본산이 그곳이었다. 만마 위에 군림하던 초거마들이 이룬 마도의 성전이 실로 어이없게도 취옥대검호 나후장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화루. 천하의 요녀(妖女)들이 여인천하를 부르짖으며 이룩한 신비로운 누각(樓閣)이었다.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 중 최고인 동정호(洞庭湖)의 군산(君山)을 온통 환락지(歡樂地)로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천하영재들의 영기가 채 피지도 못하고 꺾여졌던가? 취옥대검호 나후장천. 마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그에겐 색(色)이란 별 볼일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이후, 화루는 취옥대검호 나후장천의 휴양소로 변모하고 천하의 요녀들은 한낱 시녀로 전락했다. 사자철림. 중원의 최북단 흑룡강(黑龍江)에 위치해 있는 철혈한(鐵血漢)들이 이룩한 사자의 숲이었다. 팔 척이라면 중원에선 엄청 큰 장신(長身)이었다. 그러나 사자철림에 가면 어린애 정도로 전락하고 마는 웃지 못할 사태가 일어났다. 엄청난 거구에 타고난 천력을 소유한 철골무인(鐵骨武人)들이 이룬 패도(覇道)의 추종자들. 일설에 의하면 고금십대무황 중 고금제일역사(古今第一力士)라는 철혈패황 나웅천의 진전을 이은 문파라고도 했다. 이곳에도 예외 없이 취옥대검호의 손길이 미쳤다. 신비혈. 이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비로움과 은밀함과 죽음(殺)! 중원 살수(殺手)들의 집합체가 바로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