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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9편 (19/45)

2026-09-24 08:59:34 조회 14
"허억!" 그런 중에도 여천후는 자신의 체내에서 폭발하는 열기를 분출시키고 있었다. 잔인한 날이었다. 한 송이의 청란화(靑蘭花)가 무참히 꺾여진 잔인한 날에 운명은 고통 속에서 두 남녀를 맺어 주고 있었다. 제9장 지옥(地獄)의 축제(祝祭) 밀실엔 검붉은 휘장이 사방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검은 흑오목(黑烏木)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는 일노일소(一老一少)가 보였다. 이십대 후반쯤 됐을까 한 미청년(美靑年)이었다. 추호도 흔들림이 없는 무심안(無心眼)을 가지고 있는 흑포미청년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탁음이었다. 흑포청년의 전신에는 무형중에 사람을 억누르는 패도적인 기운이 서려 있었다. 무저의 암흑공동(暗黑空洞)을 보는 듯한 심유한 동공 안에는 섬뜩한 마광(魔光)이 일렁인다. 칠순 가량 된 위맹한 모습의 황포노인이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칠 왕(王)께서 혈십자교의 아수라부할제전(阿修羅復活祭典)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좀 전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이미 지옥화강(地獄火 )을 지닌 혈십자교 비전의 화강시인 십자화령인이 만들어지고 있다 합니다." "그래?" 흑포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더욱더 침잠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황의노인에게 재차 말했다. "삼 년 전 모란왕부의 배신자인 계집이 실패한 후, 본제국은 막대한 경비를 들여 백 구의 음정염시(淫精艶屍)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옆으로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옥의 불길을 지녔고, 그로 인해 천 명의 사내가 지닌 양기(陽氣)를 소유한 천년화강시(千年火疆屍)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고금에 다시 없을 기재를 찾으려 했으나 그것은 요원한 일이고, 이젠 십자화령인이라는 혈십자교의 수호마령(守護魔靈)만이 남아 있다." 그의 무심한 눈길이 닿는 곳마다 조용한 살기가 잔잔하게 퍼져 갔다. "본좌가 이곳으로 직접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지옥독효(地獄毒梟)!" "옛! 하교를." 지옥독효라 불린 황의노인은 허리를 숙였다. "이 일은 천년제국의 천하통일 대망이 앞당겨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실패하면 네놈은 죽는다!" 싸늘한 냉기가 지옥독효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려갔다. 당연히 그의 신형이 미미하게 떨렸다. "존명! 소인의 목숨을 걸고 성사시키겠습니다!" "물러가라." 흑포청년이 손짓하자……. "예! 그럼……." 지옥독효는 공손히 목례를 취해 보이고는 천천히 휘장 밖으로 신형을 감추었다. 혼자 남은 흑포미청년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일곱째는 용력(勇力)은 있으나 지혜가 부족해. 잘해낼 수 있을지……." 약간의 염려가 담긴 무심한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마치 연기가 물러가듯 유려하기 그지없는 신법이었다. 음정염시, 천년화강시. 이 천고의 마물(魔物) 이름이 다시 거론됨은 웬 말인가? 삼 년 전, 여천후와 철려화 등을 잡아 가려고 했던 신비의 집단인 천년제국. 그들은 야망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사막에서 혈궁삼살천에 의해 몰살당한 음세흔과 그 수하들 정도는 사실 천년제국에서 무시되어도 좋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힘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거대한 권력(權力)을 원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성일 것이다. 천년제국에 속한 인물들은 그런 흑심(黑心)이 극대화되어 있는 인간들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로지 다른 사람을 짓밟고 그 위에서 군림(君臨)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야망의 무리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당하는 사람들은 괴로울 뿐이었다. 그렇기에 필사적인 반격을 가하려 한다.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동물들도 자신의 목숨과 생활영역을 위해선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데, 하물며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임에랴. 타인(他人)의 인권(人權)이라거나 생명(生命)을 파리 죽이듯 빼앗을 수 있는, 뱃속이 시커먼 야망인(野望人)일수록 자신의 목숨은 끔찍하게 챙기기 마련이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고 자유를 억압하여 그 대가로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그런 자들은 결코 위험한 일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위험에서 빠지고, 군림하려는 자신들에게 군림을 당해 반발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기 위해 야망인들은 자신들의 손을 대신할 도구를 찾게 되었다. 원래 손을 대신할 도구란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자들은 자신 이외엔 모든 사람을 불신(不信)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道具)로서 실혼인간(失魂人間)… 즉, 영혼(靈魂)을 상실한 채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그런 강시들이 매력적인 대상물이 되었고, 흑도(黑道)에선 그런 분야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부류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강시들은 자체적으로 약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런 것은 보통의 무림고수들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보호되어 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강시에겐 자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할 만한 사고(思考)가 없었기에 조종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했다. 만일 강시를 조종하는 사람이 죽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면 강시들은 더 이상 인간에게 아무런 해악(害惡)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흑도인들은 더욱 연구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놀라운 개가를 이룩했다. 음정염시(陰精艶屍)! 영혼(靈魂)을 상실했으나 결코 죽은 시체는 아니었다. 순음지체의 여인이 특별한 대법을 거쳐 열 명의 여자가 지닌 음기(陰氣)를 지니게 되는, 살아 있는 여강시(女疆屍)는 오로지 사내만 보면 달려들어 정사(情事)를 하며 양기(陽氣)를 흡취하는 끔찍한 마물이었다. 사실, 음정염시 자체는 무림에 큰 해악이 되지는 못했다. 사방 백 장(丈) 이내에 남자가 있다면 양기를 쫓아 달려가지만, 그 밖에 있다면 생명 없는 인형(人形)처럼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오로지 남자의 양기만을 쫓아다니는 괴물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의 경우만 충족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음정염시의 음욕(淫慾)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음정염시는 그와 교감(交感)되어 생각만으로도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한 번에 열 명의 여자와 열 번의 사정(射精)을 할 수 있는 철인(鐵人)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백 구에 달하는 음정염시를 부리기 위해선 그런 초인적인 정력을 지닌 사내가 백 명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설혹 그런 사내가 있다 손 쳐도, 그 남자를 죽여 버리면 역시 마찬가지로 음정염시는 부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흑도인들은 대안(代案)을 찾아 내었다. 막강한 내공력에 초인적인 의지력을 지닌 젊은 사내를 특별한 사법(邪法)으로 이지를 빼앗은 후, 엄청난 양기(陽氣)를 주입시킨 화강시(火疆屍)로 만드는 것이다. 일반 남자 백 명이 지닐 양기를 한몸에 지닌 천년화강시(千年火疆屍)라면 백 구의 음정염시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천년화강시를 제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한 조건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의 도전(挑戰)이나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적(奇蹟)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몸을 지닌 천년화강시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더러운 피의 야망을 지닌 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는 않겠지만……. 황량한 대지 위로 부서져 버린 기왓장과 석상(石像)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허였다. 휘이이잉-! 사방은 세찬 강풍이 불어 자욱한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천 년 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혈십자교의 터전엔 음울한 귀기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생명의 잔재라곤 부서져 버린 석전 속에 피어 있는 몇 포기의 잡초뿐이었다. 한데, 돌연 수많은 인영들의 모습이 한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두 부류였다. 푸른 벽안(碧眼)에 입고 있는 백색법의(白色法衣)엔 각종의 동물(動物) 문양(文樣)을 그려 넣고 있는 바라문도들이 삼천여 명이었고, 그와는 반대로 삼백여 명의 소수 인물들이 따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복색에 인종도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중원인이었다. 삼백삼십삼 인(人)의 손에는 제각기 다른 병기가 들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병(奇兵)들이었다. 그들이 다가서는데도 일진의 파공음도 들려 오지 않고 있었다. 엄청난 무위를 흩뿌리며 다가서는 일단의 무리들은 누구인가? 문득, 선두의 두 인영이 손을 치켜들며 앞으로 나섰다. 금의노인과 백발은염의 바라문법사는 다름아닌 옥황노야 사파륭과 바라대성존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파륭이었다. "허허, 대성존께서 천후… 그 아이 때문에 몸소 수고를 하시는구료." 바라대성존도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것이 어찌 수고라 할 수 있겠나. 의당 본람(本覽)이 할일을 아우가 도와 주는 것이거늘." "허, 이것 참." 일순, 옥황노야 사파륭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여천후는 사파륭의 의손자(義孫子)이자, 손주 사위였다. 한데, 나이로 보아도 사파륭 자신의 조부뻘은 되는 바라대성존이 여천후를 아우라 칭하니… 어찌 곤혹치 않겠는가? 그 낌새를 안 바라대성존은 너털웃음으로 가볍게 넘겼다. "헛허, 개의치 말게나. 그건 그렇고 아우가 뭔가를 남겼음직한데?" 바라대성존은 여천후가 남긴 표식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은 사파륭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사파륭의 앞으로 한 명의 마의거한(麻衣巨漢)이 날아 내리며 무릎을 꿇었다. "가주! 잠깐 이리로 와 보십시오." "마의검왕(麻衣劒王)! 무슨 일인가?" "예, 저곳에 웬 문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마의검왕이라 불린 거한이 나직이 말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허물어진 본전 건물의 중앙에 있는 요사스런 목 없는 나녀상(裸女像)이 중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휘익-! 사파륭과 바라대성존은 신형을 날려 그 앞으로 날아 내렸다. 문양은 쐐기 형상의 기이한 삼각도형(三角圖形)이었다. "설형문자로군." 환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대성존은 곧 설형문자를 해독했다. "헛허, 나 원." 바라대성존은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이유는 여천후가 남긴 문자에 있었다. <노형님, 그 나이 되시도록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 보셨을 테니,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습니까? 절세요부를 아우가 소개해 드릴 터이니, 그녀의 가슴을 마음껏 애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소제를 보실 수 있습니다. 늙은 노형님을 끔찍이 생각하고 있는 아우.> 내용을 전해 들은 사파륭도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녀석, 장난이 너무 심하단 말이야." "헛허, 아우를 조금 일찍 만났으면 백처천첩(百妻千妾)을 거느릴 뻔했구만." 바라대성존은 대소를 터뜨리며 목 없는 나녀상의 가슴에 공력을 주입시켰다. 쿠르르릉-! 신전의 바닥이 갈라지며 암동이 드러났다. "자, 가세!" 바라대성존을 선두로 사파륭을 위시한 군웅들은 암동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군웅들의 신분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항마바라환령대(降魔波羅幻靈隊)! 천병신기군단(天兵神奇軍團)! 바라대성람의 비밀정예세력인 삼천 항마바라환령대는 각기 독특한 기환술을 절정에 달하도록 익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무공은 혈십자교와 마공과는 극성(剋性)이었다. 언젠가 부활할지도 모를 혈십자교도를 가상적(假想敵)으로 삼아 천 년을 이어 내려온 항마법술(降魔法術)을 전문적으로 연성한 그들의 진가가 이제 발휘되려 하는 것이었다. 천병신기가에 속한 구백구십구 인의 천병신기군단 중 삼분지일(三分之一)에 달하는 삼백삼십삼 인의 천병신기군단은 그야말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무적군단(無敵軍團)이었다. 제각기 소유한 병기는 그 무엇이라도 절단하고 마는 천고기병(千古奇兵)이었으니,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우욱, 이… 이럴 수가!" 여천후는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옷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눈앞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는 순간, 여천후는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 듯 일그러진 벽라공주의 파랗게 질려 있는 얼굴엔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의 기색이 역력했다. 귀하디귀하게 자라 온, 순진무구하고 성결스럽기만 한 그녀가 언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겠는가? 그녀의 하복부엔 혈화가 점점이 흐르고 있었다. "크으!" 사고를 망각한 듯, 여천후는 미동도 안 하고 연신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인간의 추악성을 발견하고 그것이 모든 인간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저지른 자아(自我)의 망각(妄覺)은 곧이어 극심한 분노로 화(化)한다. 이어, 그것은 가공할 살기(殺氣)로 뒤바뀌고 말았다. "우욱, 이놈들을 모두 죽이고 말리라!" 급기야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둥실! 허공으로 여천후의 신형이 떠올랐다 싶은 순간이었다. "죽이리라!" 우우우웅-! 가공할 살기가 동반된 폭갈이 여천후의 입에서 터져 나옴과 아울러……. 화르르르! 화염충천(火焰沖天)! 어느 새 여천후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화기(火氣)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억! 저, 저건!" 십자혈교황은 자지러질 듯이 놀라며 헛바람을 삼켰다. 완전히 이지가 상실된, 혈십자교의 충실한 종으로만 여기고 있었던 방심(放心)으로 인해 시산혈해(屍山血海)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죽어랏! 천신화강(天神火 )!" 여천후의 전신에서 엄청난 화염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화류류류! 화염천하. 주위 백 장 이내는 그야말로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화해 눈 녹듯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크아… 악!" "앗! 뜨거!" 주위에 늘어서 있던 혈십자교의 혈사인들은 새까맣게 타 한 줌의 재로 부서져 내렸다. 실로 가공할 화공(火功)의 위력이었다. "감히 본좌를 건드리다니,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 주마!" 악마의 화신! 죽음의 불길 같은 지옥겁화를 일으켜 허공을 가로지르는 여천후에게 이미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의 도리를 어긴 자신에 대한 자학(自虐)이 모든 이성을 망각의 늪으로 밀어넣어 버린 탓이었다. 그것은 혈십자교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작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미 수십 명의 여자를 품에 안았던 여천후였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들 스스로 치마끈을 풀어 헤친 채 안겨들었던 결과였을 뿐, 단 한 명도 강제로 범한 여인은 없었다. 힘없는 여인을 강제로 추행하는 자를 증오해 마지않았던 여천후였건만, 이 무슨 기가 막힌 경우란 말인가? "크아악-!" "으아아-!" 감히 대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우왕좌왕하다 타 죽는 혈십자교도들은 그야말로 불에 그을린 통나무처럼 새카맣게 변색되어 나뒹굴었다. "저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간신히 여천후의 손길에서 벗어난 십자혈교황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앞으로 검은 흑포인이 날아 내렸다. 이십사오 세 정도의 나이에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을 지닌 청년의 눈엔 시퍼런 안광(眼光)이 뇌전처럼 작렬하고 있었다. 은은한 분노마저 담고 있는 호목을 부릅뜨며, 흑의청년은 살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천년화강시를 만들어 본제국에 바치라고 했거늘, 이게 웬 난리냐?" 그의 가공할 살광에 십자혈교황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노부는 모르는 일이오. 분명 혈나찰의 지옥마겁화 속에서 천신화강을 얻어 십자화령인이 되었을 텐데… 흑룡왕(黑龍王)! 정말 노부는 모르는 일이오!" 흑룡왕이라 불린 흑의청년은 거의 발악에 가까운 십자혈교황의 변명에 어이가 없었으나 한편으론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런 망할 늙은이! 어서 저 귀신 같은 놈을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흑룡왕의 말에 십자혈교황은 황급히 정신을 추스리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저 육시랄 놈이!"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혈십자교의 교도들은 저 놈을 잡아라!" 분노의 폭갈을 터뜨렸다. 쿠르르릉! 아수라성전의 여기저기서 철문이 올라가고, 무수한 혈영인(血影人)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혈영인들은 피(血)의 해일(海溢)처럼 밀려와 여천후를 뒤덮었다. 십자혈교황은 그들의 앞으로 날아 내리며 외쳤다. "십자혈사진(十字血死陣)을 펼쳐라!" 스스스……! 혈영인들은 일사분란하게 진형을 만들며, 여천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천후를 가운데 두고 사방(四方)에서 일렬로 선 채 포진된 그들의 진형은 붉은 십자가(血十字架)를 연상시켰다. 콰우우웅-! 엄청난 혈강막(血 幕)이 형성되며, 그것은 곧 가공할 선풍(旋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피의 바람(血風)은 무서운 소용돌이로 화해 중앙(中央)으로 조여들었다. 여천후의 황금안(黃金眼)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광(火光)을 내뿜으며 전면을 응시했다. 분노하고 있다고는 하나, 여천후는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제단 위에 내려서서 아래로 몰려드는 혈영인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으음!" 죽은 듯이 혼절해 있던 벽라공주가 낮은 신음을 발하며 교구를 뒤척였다. 아울러, 그녀의 두 눈이 떠지며 창궁같이 푸른 벽안(碧眼)이 드러났다. "……!" "……!"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시 두 사람의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여천후였다. "공주, 미안하오." 낮은 회오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벽라공주의 눈엔 원망과 분노, 지극한 슬픔이 범벅이 된 이슬 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쇠사슬에 묶인 모습의 알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감지하지 못한 채 착잡한 시선으로 여천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휴!" 여천후는 한숨을 내쉬며 제단 위에 드리워져 있는 붉은 혈라비단(血羅緋緞)을 찢어 벽라공주의 알몸을 감싸 주었다. 우두둑-! 쇠사슬은 그의 손길이 닿자, 산산이 부서져 모래가루처럼 흩어져 갔다. 여천후는 벽라공주의 부드러운 교구를 안아 올렸다. "공주, 죄는 달게 받겠소. 그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벽라공주를 품에 안으며 여천후는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덧, 일천 혈영인들이 십자혈교황의 진두지휘 아래 거대한 병진(兵陣)을 구축한 채 천천히 다가들고 있었다. 그들뿐이 아니었다. 어디서들 몰려 왔는지 오천 명이 넘는 혈의인들이 꾸역꾸역 대광장을 메운 채 광기 어린 눈으로 여천후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수라성전의 한쪽,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호목청년의 뒤로 오백에 달하는 흑포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무심히 시선을 옮기던 여천후와 흑룡왕이라는 호목청년의 눈이 마주쳤다. '범상한 인물이 아니로군. 필시 천년제국의 주구이리라.' 여천후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놈을 잡아랏!" 십자혈교황이 괴소를 흘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오른손은 핏물에 담그었다 꺼낸 듯 붉었다. 갈퀴처럼 구부러진 날카로운 손톱의 혈조(血爪)엔 섬뜩한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수라혈수갑(修羅血手匣)! 아수라(阿修羅)의 마수(魔手)라는 공포스런 이름이 붙은 수갑(手匣)이 십자혈교황의 손에 착용되어 있었다. 촤아아-! 그 붉은 손톱(血爪)이 흔들리면서 뿌려지는 핏방울은 피안개(血霧)로 번져 가며 혈의인들을 뒤덮었다. "아수라의 종들이여! 적도를 잡아 피의 십자가(血十字架)에 묶어 처형하라!" "크아아아아!" "흐흐흐! 감히 본교의 부활대전을 망가뜨리다니!" "크크크! 죽여랏!" 벌 떼… 아니,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과도 같은 혈의인들이었다. "아수라경배(阿修羅敬拜)!" "이교도(異敎徒)를 피의 십자가에!" 절규와도 같은 광란의 합창(合唱)이 아수라성전을 뒤흔들었다. 우우우웅! 가공할 핏빛의 강기가 해일같이 제단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천 인의 연수합격은 가히 태산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엄청난 위력을 담은 채, 폭풍 같은 기세로 여천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한데, 여천후는 추호의 두려움이나 경계의식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더욱 싸늘하게 안색을 굳히며 냉갈을 토해냈다. "후후, 오너라! 네놈들이 심어 준 천신화강의 위력을 네놈들에게 보여 주리라." 오십 장… 사십 장… 삼십 장……. 여천후와 혈영인들의 사이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와 아울러 숨쉬기조차 곤란할 지경의 압력이 여천후를 짓눌렀다. 벽라공주는 두 눈을 꼭 감으며 교구를 파르르 떨었다. 지혜로운 여인인 그녀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리 없었다. '이분은 이제 벽라의 부군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십 장… 팔 장… 칠 장……. 드디어 여천후와 혈영인들의 격차는 오 장(丈)으로 줄어들었다. 쿠쿠쿠쿵-! 가공할 압력으로 인해 제단은 거미줄처럼 균열이 일어나며 급기야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