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8편 (18/45)
벽라공주는 머리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싸늘하게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본 공주를 이곳에서 구해 준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내심으로 온갖 욕을 다 퍼붓고 있었다. '흥! 너 같은 장사꾼이 날 구해 줘? 멍게, 말미잘, 뱀 같은… 아니, 황금의 벌레 같은 족속! 곧 부황께서 벽라를 구하러 오실 거다. 그 때 따끔하게 벌을 주어야지.' 그러면서도 한구석에서는 신뢰의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본인의 말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오. 차후……." 그로부터 일 각 후, 여천후는 다시금 벽 속으로 사라졌다. 한데, 묘한 것이 여심이라… 어느덧 벽라공주의 안색은 환하게 밝아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천후가 사라진 벽을 주시하는 그녀의 봉목에는 깊은 신뢰감과 경탄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저 사람을 부마로 맞게 될지도…….' 벽라공주의 옥용으로 홍운이 내리깔렸다. 일 각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그들 두 남녀만이 알리라. 족히 오천 평은 됨직한 대광장(大廣場)이었다. 광장의 입구엔 핏빛 혈서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수라성전>이라는 다섯 글자는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끓는다. 화르르르- 부글부글-! 엄청난 화염의 불꽃이 지옥의 겁화처럼 시뻘건 독아(毒牙)를 드러내고 있었다. 광장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계곡 사이로 타오르는 불꽃을 분기점으로 한쪽에는 수많은 사람이 부복해 있었다. 대략 만여 명 정도였는데, 모두가 십오륙 세 전후의 소년소녀들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 가야 할 청춘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은 달랐다. 광기(狂氣)! 시뻘겋게 충혈된 흰자위와 검은 동공에서는 새파란 광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理性)이 보이지 않는 맹목적인 본능의 광기였다. 좌중에는 고요와 정적만이 감돌았다. 뭇 소년소녀들의 광기 어린 시선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불의 벽(火壁) 건너편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수라마신상(阿修羅魔神像)! 높이 이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 속의 아수라상이 치솟아 있었다. 세 개의 귀두(鬼頭)와 여덟 개의 팔(八臂)이 공포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삼두팔비(三頭八臂)의 아수라상은 입에서 가공할 화기를 뿜어 내고 있었다. 부릅떠진 세 개의 마안(魔眼)에서는 시뻘건 핏물(血水)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덟 개의 뒤틀려진 손에 잡혀져 있는 것은 끔찍하게도 인간의 잘려진 수급이었다. 공포의 아수라마신상의 전면에 언뜻 혈인(血人)들의 모습이 엿보이고 있었다. 열세 명의 혈의인과 한 명의 검은 흑포인이었다. 혈의인 중 선두의 괴인은 옷차림이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바닥까지 끌릴 듯한 혈법의(血法衣)를 걸치고, 머리에는 주먹만한 해골로 이어 만든 인두관(人頭冠)을 썼다. 한데, 그의 오른손(右手)은 보통 사람의 손과는 달랐다. 핏물에 담그었다 지금 막 꺼낸 듯한 혈수(血手)는 섬뜩한 요기(妖氣)마저 흩뿌리고 있었다. 한 치가 더 긴 손톱 역시 시뻘건 혈조(血爪)였고, 그 끝에선 지금이라도 당장 핏줄기가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 혈조의 손등 부위엔 고대의 쐐기문양(楔形文樣)이 그려져 있었다. <아수라혈수(阿修羅血手)> 문자 자체에서도 섬뜩할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 피의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라혈수갑(修羅血手匣)이라 불리는 아수라의 마수(魔手)였다. 처음엔 시커먼 묵수(墨手)였으나, 천 명의 피(千人血)를 흡수한 이후 혈수(血手)로 바뀌어 버린 공포의 마물(魔物). 수라혈수갑을 끼면 제아무리 정인군자(正人君子)라 하더라도 인육(人肉)으로 공복을 채우고, 사람의 피(人血)로써 갈증을 해소하는 혈마인(血魔人)이 된다고 했다. 혈십자교의 최고영부이자 십자화령인을 만들 수 있는 아수라마법력(阿修羅魔法力)을 가지고 있는 저주의 마물이 바로 수라혈수갑이었다. 문득 아수라마신상에 부복해 있던, 혈법의를 걸친 혈영인이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이어, 그는 두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좌중에 사이로운 주문을 던졌다. "지옥(地獄)의 주관자이시자 악마의 지존이신 아수라혈마신(阿修羅血魔神)이시여! 그대의 종복인 수라혈법왕(修羅血法王)이 다시금 지상에 당신의 힘을 보이고자 하옵니다." 우우웅-! 광장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광장을 가로지른 불의 계곡에서 뿜어지는 화염은 천장으로 치솟으며 광란의 춤사위를 추었다. 그와 아울러, 오체투지해 있던 만 명에 달하는 소년소녀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두 줄기 시퍼런 광기를 내뿜으며……. "아수라혈마신이여! 손을 펴서 당신의 구원을 청하옵니다." "전지전능하신 혈십자가의 주(主)이시여! 어둠의 지배자이시여!" 도저히 평범한 인간으로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광기에 찬 절규가 광장을 뒤흔들었다. 수라혈법왕이란 인물은 혈십자교의 대제사장을 일컬음이었다. 나이를 추측할 수도 없는 주름 잡힌 얼굴 사이로 아수라의 마안(魔眼)을 간직하고 있는 수라혈법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름진 눈 안으로 광란하는 건너편의 군중들이 들어오자, 흡족한 괴소를 머금었다. 그는 더욱더 광란을 부채질했다. "아수라혈마신께 영혼(靈魂)을 바치고 지상에 위대한 아수라의 진리를 파급시키리라! 이단배교자(異端背敎者)들은 죽음의 불로서 심판하리니, 오로지 아수라를 따르는 자만이 앞으로 올 천상지옥계(天上地獄界)에서 영원불사(永遠不死)의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 수라혈법왕의 말은 이지를 상실한 인간군(人間群)의 귓가에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음(聖靈音)이었다. "피로써 충성하나이다!" "오오, 전능의 아수라마신이시여!" 자신의 신체에 무차별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며 광란하는 무리들은 아픔도 모르는 듯했다. 피가 흘러 내(川)를 이루고, 살조각이 떨어져 나가며 허연 뼈(白骨)가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치치치치칙-! 흐르는 핏물은 불타 오르는 화염에 닿으며, 매캐한 향기를 뿌리며 뿌연 수증기로 화한다. 삽시간에 광장은 핏물이 타올라 피의 안개(血霧)가 퍼져 나갔다. "이 몸을 받아 주소서!" "아수라혈마신이여!" 광란의 도는 그칠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인간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까? 문득 수라혈법왕이 두 손을 치켜들며 외치자, 광란의 무리들은 그 순간 사고를 정지시켰다. "아수라의 법령으로 수호마령(守護魔靈)인 십자화령인(十字火靈人)을 만드는 의식을 거행하라!" 죽음과도 같은 고요가 좌중을 휩쓸었다. 그 때, 아수라성전의 천장 일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그 사이로 혈의를 걸친 장발괴인 하나가 날아 내렸다. 혈나찰이었다. 그녀는 양 손에 일남일녀를 나눠 쥐고는 혈안을 희번뜩이며 수라혈법왕의 앞으로 걸어갔다. 수라혈법왕이라는 이름을 지닌 대제사장은 혈십자교에서 최고의 수장이었다. "나찰여신(羅刹女神)께서 수고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지극히 공손하게 혈나찰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혈십자교의 수호마령인 십자화령인을 만들기 위해선 혈십자교의 법술과, 극강의 화기(火氣)를 체내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아수라마신상의 지옥겁화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화령인에게 주어야, 그로부터 천고의 화강시(大火疆屍)가 탄생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지 못했다. 혈십자교의 비전마법(秘傳魔法)을 끊임없이 연마하고, 일 갑자(甲子)의 세월을 불(火)과 함께 살면서 타오르는 목마름을 인간의 피(血)로써 삭이며 산 인물, 혈나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혈나찰의 나이는 불과 육십오 세였다. 나이 다섯 살에 선택되어 육십 년의 세월을 제물(祭物)로 바쳐진 사람의 피로 온몸을 칠하며 불 속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혈십자교의 대제사장일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혈십자교의 천년부활을 위해 소신공양할 여자가 아니겠는가? "뒷일을 부탁해요!" 혈나찰은 짤막하게 말을 던지며 신형을 돌렸다. 그녀는 벽라공주를 아수라마신상 앞에 마련된 백옥색 계단 위에 뉘이고는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아수라마신상 앞으로 다가갈수록 화염의 불꽃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혈나찰은 유람을 나온 묵객처럼 여유롭게 화염의 숲을 거닐었다. '우악! 아예 통구이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나?' 혈나찰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여천후는 실눈을 뜨며 목을 움츠렸다. 화르르르-! 활화산의 분화구 같은 열기가 사위를 익힐 듯이 타오르는 사이로 들어섰다. '우욱, 더 이상 못 참겠다. 팔열지옥(八熱地獄)도 이보단 낫겠다!' 여천후는 가공할 화기에 전신이 녹아 내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 때, 혈나찰의 눈에서 사이로운 혈광이 일렁였다. "눈을 떠라, 아수라의 수호마령이여!" 번쩍-! 여천후의 두 눈이 떠지며 흐릿한 광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연극은 철저하게 해야지.' 혈십자교의 사법(邪法)을 거친 자는 반드시 이지를 상실하고, 두 눈에는 특유의 광기가 어린다. 여천후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혈십자교의 화공(火功)은 고금제일화신(古今第一火神)인 태양천신 천륭극의 화륜천폭결(火輪天爆訣)에 버금가는 절대화공(絶代火功)이다. 이 기회에 얻는 것도 좋겠지.' 여천후는 혈십자교의 화공(火功)을 얻고자 이런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혈나찰은 여천후의 눈을 주시하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혈십자교의 수호마령이 되리라. 영원히 수라혈수갑의 법력(法力)에 의해 움직일지어다." 심혼을 바스러뜨릴 사악한 주문이 혈나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들으라. 아수라혈마신이 내리는 지옥마화(地獄魔火)를 얻을지니, 아수라의 뜻을 거역하고 혈십자교의 부름에 거부하는 자는 죽음의 불로서 심판하라!" 심령(心靈)을 제압하여 사고(思考)를 주입시키는 사술(邪術)을 혈나찰은 여천후의 심혼(心魂) 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뒤이어 혈나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혈십자교의 화공구결(火功口訣)이었다. "화화천리(火火千里)… 지옥멸화(地獄滅火)… 천지화정(天地火精)… 구유화령파(九幽火靈波)… 우주천화멸멸(宇宙天火滅滅)… 지옥대천하(地獄大天下)……." '후후, 이렇게 기연(奇緣) 얻기가 쉬울 줄이야.' 여천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기연 얻기가 그리 쉬울까?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면서 영원히 잃어 버리지 않는 귀재인 여천후였다. 그는 귓속을 파고드는 구절을 암송하며 진력을 끌어올렸다. 휘류류류-! 여천후의 피부색이 일변하며, 주위의 화염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나찰의 힘을 받으라. 법력을 바탕으로 지옥마화를 얻으라. 십자화령인이 될지니, 혈십자교와 함께 영세토록 영화를 누리리라. 받으라! 나찰의 피와 죽음으로 이루어진 지옥화강(地獄火 )을!" 치지직-! 타오른다. 아수라마신상의 입에서 뿜어지고 있는 화염은 일반적인 불꽃이 아니었다. 지옥화린정(地獄火燐精)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만 장(丈)의 지저화맥(地底火脈)에서 피어 오르는 불사화린(不死火燐)으로 한번 지펴지면 주위의 모든 것을 불사른 후, 대기(大氣)마저 진공(眞空)으로 변화시킨 후에야 사그러드는 악마의 불꽃이었다. 그렇기에 혈나찰이란 소신공양을 대신할 제물이 필요했다. 마치 잔치에 잡아먹기 위해 기름진 음식을 먹이는 돼지(豚)와도 같이……. 지옥의 불꽃 속에서 화인(火人)이 되어 있는 혈나찰과 여천후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혈나찰의 이마로는 구슬 같은 땀 방울이 흘러내리며 안색은 밀납같이 창백해지는데, 그에 반(反)하여 여천후를 뒤덮고 있는 화광은 점점 더 충천(沖天)하고 있었다. 이기심령술(移氣心靈術)이라는 것으로, 시술자가 본신의 정기와 법력을 타인에게 전하는 사법이었다. 그것을 전개하면 시술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렇지만 피시술자는 그야말로 무한대의 잠재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성(人性)를 상실한 화강시로 화(化)하여, 수라혈수갑의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따르며 혈십자교의 적대세력을 지옥마화의 불로서 사형(死刑)시키는 마물이 된다. '우욱, 지독하다! 온몸이 재가 되는 것 같아.' 여천후는 오장육부가 타 버릴 듯한 화기에 절로 몸을 뒤틀었다. 해일같이 밀려드는 지옥마화의 화정(火精)은 폭풍과 같은 기세로 여천후의 전신 혈맥을 지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가라! 아수라혈마신의 화정을 얻으라!" 혈나찰의 입에서 대갈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여천후의 신형이 둥실 허공으로 뜨며 날아갔다. 아수라마신상! 눈에서는 끊임없이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입에선 시뻘건 화염이 지옥의 귀화처럼 일렁였다. 여천후의 몸은 빨려들듯 아수라마신상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지옥화린정! 한 점만 있어도 북해의 빙산을 녹여 버릴 수 있다는 가공할 화력을 지닌,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악마의 불꽃이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이건, 금강석(金剛石)이건, 지옥화린정의 근처에만 가도 엿가락처럼 녹아 버린다. 아수라마신상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데, 여천후가 그 안으로 사라졌으니……. 화르르르-! 지옥의 불꽃이 미친 듯이 명멸하며 날아다닌다. 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공포가 치밀어오르면서 화광은 점점 더 미쳐 날뛰고 있었다. 광염 속에 파묻힌 아수라마신상의 앞, 하나의 제단(祭壇)이 있었다. 으스스하게 일렁이는 귀화 속에 서 있는 백옥빛 제단. 한데, 일렁이는 화염 아래 제단 위에 드러난 물체는 다름아닌 여인이었다. 간신히 소중한 부분만을 나의(裸衣)로 가리고 있는 절색의 미녀가 누워 있지 않은가? 푸른 폭포수같이 흘러내린 벽발(碧髮)에, 시리도록 푸른 창천을 연상시키는 벽안(碧眼)을 지닌 여인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풍염과 탄력성이 넘치는 가슴의 융기마저 드러나 있고, 그 위의 파르르 떠는 두 알의 포도송이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끊어질 듯 가는 허리는 갑자기 어둠 속을 부수며 풍만하게 벌어진다. 그리고 신비롭게 숨쉬는 빨간색의 삼각 헝겊은 아슬아슬 하기만 하다. 그 아래 늘씬하게 뻗어 내린 대리석빛 종아리와 알맞게 살이 오른 희멀건 허벅지라니……. 이것을 어찌 인간이라 말할 수 있으랴? 요정(妖精)이었다. 이슬을 먹고 사는 요정이리라. 요정은 제단의 사방에 박혀 있는 핏빛의 쇠사슬(血索)에 사지(四肢)가 묶여 있었다. 가녀린 팔목과 발목에 비끄러매여 있는 쇠사슬에서 벗어나려 꿈틀대고 있는 요정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요정의 자태는 더욱더 폭발적인 유혹의 몸짓과 다름이 없었다. 반나(半裸)의 몸이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비트는 여체는 땀에 젖어 번들거리며 불빛 아래 황홀하게 개방되어 있었으니……. '천후.' 벽라공주는 속으로 바짝바짝 애를 태우고 있었다. 여천후 덕에 이지를 잃지 않고 있는 벽라공주는 오히려 더욱 괴롭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혈십자교의 대제사장인 수라혈법왕은 수라혈수갑을 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제단 앞에 섰다. 그의 눈가로는 짙은 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아수라혈마신이시여!" 수라혈법왕의 눈빛이 광염(狂炎)으로 불타 올랐다. "이제 극음성녀신(極音聖女身)의 여인을 제물로 바치나니, 십자화령인과 아울러 영세토록 군림하소서!"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다. 벽라공주가 설마… 그 전설의 극음성녀신을 타고났단 말인가? 선천적으로 천선지기(天善之氣)를 타고나 만사(萬邪), 만악(萬惡)이 침범치 못하는 항마극성신체(降魔剋性身體)였다. 아울러, 보통 여인보다 수십 배에 달하는 순음지기를 가진 극음신체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극음성녀신을 타고난 여인은 어지간한 사내와는 결합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호숫물에 불타는 장작개비 하나를 던진들, 호수의 물이 끓어 수증기가 피어 오를 리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악마와는 상극인 이 여인을 왜 이곳에 놓은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자화령인이 탄생하면 엄청난 양기가 몸 안에 축척된다.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십자화령인은 그대로 폭사하고 만다. 그걸 방지하려면 백 명의 순음지기를 간직한 여인과 교합을 해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극음성녀신을 간직한 여인이 있다면 그녀로 인해 십자화령인을 더욱더 엄청나게 변모시킬 수 있다. 극음(極陰)과 지옥열화(地獄烈火)의 양립할 수 없는 힘이 합일(合一)되어 천고의 화신(火神)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우우!" 아수라성전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엄청난 울부짖음이 터져 올랐다. 그와 동시에 아수라마신상의 입에서 한 줄기 혈광이 폭사되었다. "십자화령인이여!" 수라혈법왕은 격동에 노구를 떨며 그 자리에서 수라혈수갑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우우웅-! 기이한 귀성(鬼聲)이 수라혈수갑에서 흘러나왔다. "십자화령인이여, 제물을 취하라! 아수라혈마신의 이름으로 명(命)하노라!" 부르르! 뇌전이 작렬하는 듯, 혈인은 격하게 신형을 떨었다. 시뻘건 귀화 속에 충혈된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욕정이었다. 잠시,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 있던 혈영은 이윽고 신형을 돌렸다. 제단이 보였다. 교구를 떨고 있는 벽라공주의 고혹적인 자태가 보인다. "우우우!" 혈영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굶주린 야수(野獸)처럼 괴성을 발하며 신형을 날렸다. '천후, 당신이?' 벽라공주는 옥용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렸다. 혈인은 바로 여천후였던 것이다. 자신만만했던 여천후였지만 그에게도 예기치 못하던 현상이 일어났다. 지옥화강(地獄火 ). 혈십자교 비전의 극강화공이었다. 오직 십자화령인만이 대성할 수 있는 천고의 지옥화공이 그것이었다. 분명히 고금최강의 화공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인간으로선 익힐 수 없는 악마의 무공이었다. 지옥마화린(地獄魔火燐) 속에서 삼 주야만 지옥화강을 익히고 나면 엄청난 양기가 축적되어 그 자리에서 폭멸하고 만다. 여천후로서도 욕정이 치솟을 줄은 몰랐다. 한데, 지금의 그는 욕정에 굶주린 한 마리 야수와도 같았다. 부욱-! 여인의 알몸을 가리는 최후의 보루였던 헝겊 조각들이 무참히 뜯겨져 나갔다. 드러나는 이 환상적인 여체(女體)를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두 팔은 위로 들려져 쇠사슬에 옭아매여져 있었다. 다리는 죄우로 벌려진 채 역시 마찬가지로 꼼짝 못하게 쇠사슬에 결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벽라공주는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서역여인(西域女人) 특유의 풍만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이 여인의 몸을 누가 열여섯 살이라고 하겠는가? 안타까웠다. 벽라공주는 멀쩡한 정신이었지만 사지가 결박 지워져 있는 상태라, 그저 알몸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몸을 뒤틀수록 저 탐스런 젖가슴이 물결치듯 출렁거리고, 눈썹과 모발(毛髮)의 색과 같은 푸른 체모(體毛)가 일렁이면서 신비의 둔덕이 들썩거리는 자태는 그야말로 유혹의 폭발이나 다름없음을……. "크흐… 헉!" 거칠게 벽라공주의 나신을 탐하는 여천후. 욕정에 몸부림치는 야수로 화한 여천후의 눈에서 냉철한 이성(理性)의 빛은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벽라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질끈 두 눈을 내리감고 말았다. '이렇게 주기는 싫었는데.' 한 줄기 이슬 방울이 또르르 눈썹을 적셨다. 탐스런 유방이 사내의 잔인한 손길에 잡혀져 터질 듯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번갈아 가며 빨고 물어뜯음에도 벽라공주는 하릴없이 당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욕화(慾火)에 휩싸인 여천후의 공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점차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벽라공주의 새하얀 설봉(雪峯)에서 손을 떼자, 거칠게 깨물은 이빨자국(齒痕)이 뒤덮혀 있었다. 여천후는 눈(雪)처럼 새하얗고, 백옥(白玉)처럼 미끈하면서, 수정(水晶)과도 같이 투명한 벽라공주의 아랫배를 탐닉했다. 그리고 그는 코끝으로 뭔가 부드러우면서 까칠한 체모를 느꼈다. 그 밑으로 탄력 있는 신비의 둔덕이 꿈틀거렸다. 갈증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화해 여천후의 목줄기를 불타 오르게 만들었다. "크으-!" 여천후는 필사적으로 우물을 찾았다. 있었다. 신비의 동굴이 입을 벌리며 붉은 꽃잎의 저 아래 신비의 옹달샘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천후는 미친 듯이 샘물을 들이켰다. 그것은 달콤하고 향긋하기 이를 데 없는 감로수(甘露水)였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불길이 타오르는데 부어지는 기름(油)이었다. 난폭하게 벽라공주의 알몸 구석구석을 헤집던 여천후는 급기야 최후의 공세를 시작했다. 철렁-! 그는 벽라공주의 발목을 비끄러매고 있는 두 가닥 쇠사슬을 잡아 벌렸다. 당연히 쇠사슬에 이끌려 벽라공주의 다리가 벌어졌다. 희멀건 허벅지살이 푸들거리는 모습은 갓 물에서 끌어올린 한 마리 은어(銀魚)와도 같았다. "아악!" 벽라공주는 하복부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자,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픈 파과의 고통에 급기야 벽라공주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